[1555 ~ 1613]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후궁이다. 추존왕 원종(정원군)의 생모이자 인조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본관은 수원. 1555년(명종 10년)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薄)를 지낸
김한우(金漢佑)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효성(李孝性)의 딸 전주 이씨이다. 그녀의 외조부인 이효성은 왕실의 일원으로,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증손자이다. 또 그녀의 언니가 신경과 결혼하여 낳은 딸은 광해군의 후궁으로 책봉된 숙원 신씨이다.
외사촌언니이자 명종의 후궁이었던 숙의 이씨가 김씨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했는데,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눈에 들어 그녀의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훗날 인순왕후가 선조에게 후궁으로 추천하여 1573년(선조 6년)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 이후 정3품 소용(昭容), 종2품 숙의(淑儀), 종1품 귀인(貴人)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 음력 11월 12일 정1품 인빈(仁嬪)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광해군의 생모이자 선조의 후궁이었던
공빈 김씨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자 선조의 총애가 모두 인빈에게 옮겨가게 되었으며, 또 이때를 틈타 그녀의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이산해 부자와 결탁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정철 등을 유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선조의 광해군에 대한 총애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세자이던 시절에는 선조의 미움을 받던 광해군을 변호하기도 하였고, 임해군의 옥사가 있을 때에는 그녀의 소생들이 정사 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광해군은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고 까지 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12월 10일(음력 10월 29일)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조회를 3일간 정지하라고 명하였으나 사헌부에서 "인빈은 후궁일 따름이니, 법에 조회를 중지하는 예가 없었고, 예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사사로운 은혜로 예법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반대하여 무마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장사지냈으며, 1755년(영조 31년), 앞서 영조가 격상한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와 격을 맞추어 경혜(敬惠)라는 두 글자 시호를 증시하고, 묘(墓)도 원(園)으로 격상하여 순강원(順康園)으로 올렸으며, 사당 역시 방(房)에서 궁(宮)으로 격상하여 저경궁(儲慶宮)으로 궁호를 올렸다. 동시, 그녀가 입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촌 언니 숙의 이씨도 경빈(慶嬪)에 추증되었다.
1908년에 왕의 사친이었던 여러 후궁들의 신주를 모두 육상궁으로 옮기며 그녀의 신주 역시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칠궁(七宮)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1991년 10월 25일, 그녀의 묘인 순강원이 사적 제356호로 지정되었다[8].
남편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낳았으며, 그 중
정원군(원종)의 장남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녀의 아버지 김한우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