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 ~ 1870]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원칠(元七), 호는 심암(心庵), 본관은 양주이다.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를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1835년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왔으며, 그 후 이조참판·황해도 관찰사·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1849년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헌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1862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가 계속되어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정청을 설치하여 총재관이 되어 삼정의 개혁에 전력하였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이명복(후의 고종)의 추대를 적극 주장하여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864년 《철종실록》의 편찬 총재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대전회통》을 편찬하였다.
삼군부를 부활시키고 경복궁 영건도감 도제조를 지냈다.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
저서로 《심암집》이 있다.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탐관오리로 유명한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그의 서조카이다. 즉, 조두순은 조병갑의 백부이다. 다만 조카와 달리 조두순 본인은 특별히 악행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생애를 보면 나름 유능하여 관직 생활을 순탄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