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년 ~ 256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작위는 난릉후. 자는 자옹(子雍). 본관은 동해군 담현이나, 회계(會稽:현재의 저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왕랑(王朗)의 아들이다. 그의 딸인 왕원희는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가서 진(晋)의 무제 사마염(武帝 司馬炎)을 낳았다.
아버지 왕랑이 회계태수를 지냈기에, 왕숙은 그 무렵에 아버지의 임지인 회계에서 태어났다.
왕숙은 관리로서 때때로 상소하여 시사(時事) · 제도(制度)에 대한 견해를 진술하고 정치활동을 행하였으며, 중령장군(中領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천자에 봉사하는 중요한 고문관)가 되었다. 황초 7년(226년), 조예가 즉위하면서 난릉후에 봉해졌다. 태화 4년(230년)에는 조진이 촉한을 치려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 학계의 일부에는
양웅(楊雄)의 반신비주의(反神秘主義)를 계승하는 경향이 있었거니와 왕숙도 그 영향을 받아 18세에
송충에게서 《
태현경(太玄經)》을 배우고 그 주석서를 지었다. 사상적으로는 가규(賈逵, 30-101), 마융(馬融, 79-166)의 현실주의적 해석을 좋아했고, 정현의 참위설에 의거한 논리주의적 통일해석을 피했다. 많은 경서에 주석하여 신비적인 색채를 실용적인 해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특히 정현의 예학체계(禮學體系)에 반대하여 《성증론》을 저술하였다. 다만 《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위작하여 자신의 비판의 근거로 삼은 것은 도리어 정현의 학설의 강력하고 확고함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이 정(鄭)·왕(王) 양 학의 논쟁은 6조(六朝)를 통하여 학술계에 있어 남북의 대립을 야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