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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김양(金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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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 (金陽)
[808 ~ 857] 신라의 왕족·공신으로, 자는 위흔(魏昕)이다. 무열왕의 셋째 아들 김문왕의 후손 김정여(金貞茹)의 아들이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김양 (金陽) 견당 매물사 청해진 837년 838년 신라 840년 836년 828년 신무왕 장보고 문성왕 원성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엔닌 염장 법화원 입당구법순례행기
▣ 백과사전
808년~857년)은 신라의 왕족·공신으로, 자는 위흔(魏昕)이다. 무열왕의 셋째 아들 김문왕의 후손 김정여(金貞茹)의 아들이다.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에 고성군태수(固城郡太守)가 되었고, 중원대윤(中原大尹)을 거쳐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 등을 지냈다.
 
흥덕왕이 죽고, 균정(均貞)과 제륭(悌隆)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균정 편에 가담하여 균정의 매서인 예징(禮徵)과 함께 자신의 족병(族兵)을 데리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지켰다. 제륭파의 김명(金明)·이홍(利弘) 등이 와서 적판궁을 에워싸자 활을 쏘며 저항했으나 다리에 화살을 맞아 달아나고, 균정이 이홍에게 살해된 뒤 산속에 피신하였다.
 
그 이듬해(837년)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淸海鎭)에서 장보고(張保皐)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아 민애왕 원년(838년) 2월에 청해진으로 들어가 김우징과 함께 거사 계획을 수립, 3월에 5천의 군사로 거병해 무진주를 점령하고, 나아가 남원(南原)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김우징의 명령으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한 뒤, 12월에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칭하며 왕경을 향해 출진하였다.
 
왕경(王京)을 향해 출병한 군사들은 무진주의 철야현(鐵冶縣) 북쪽 강에서 민애왕이 보낸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의 역습을 받지만,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 이들을 궤멸시키고, 이듬해인 민애왕 2년(839년) 정월 19일에는 달벌구(達伐丘)에서 민애왕이 친히 지휘하던 왕군(王軍)을 격파하였다. 이궁이었던 월유택(月遊宅)으로 달아난 왕은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고 거병은 김우징측의 승리로 끝났다. 4월에 김우징은 김양 등의 추대로 왕으로 즉위하였으나(신무왕神武王) 석 달만에 죽고 대신 아들 문성왕(文成王)이 즉위하였다. 문성왕이 즉위한 뒤 소판 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받았다가 곧 시중 겸 병부령(兵部令)으로 옮겨졌다.
 
생전에 당(唐)으로부터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이 제수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으며, 죽은 후 문성왕에 의해 서발한(舒發翰)이 추증되고, 부의(賻儀)와 장례를 모두 김유신(金庾信)의 구례(舊禮)에 따르게 하는 등 신라 조정은 그에게 특전을 베풀었다. 12월 8일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능렬(陵列)에 배장(陪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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