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7 ~ 1598] 조선 중기의 왕족 출신 무관이다. 효령대군의 6대손으로 음서로 출사하여 온양군수, 오위장 등을 지냈다.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간지(幹之)이다.
이간은 효령대군의 6대손으로 파성군 철동의 손자이자 풍덕군수로 증 형조판서에 추증된 이광윤(李光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안동권씨로 군수 권자선(權自善)의 딸이고, 생모는 경주이씨로 사옹원직장을 지낸 이하신(李夏臣)의 딸이다.
10세가 안되어 부모를 모두 잃고 할머니 손에서 양육되었으며 어려서부터 기쁘고 슬픈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1560년(명종 15) 음서로 관직에 올라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 가 되고, 1561년 가을에 북평관별제(北平館別提)를 거쳐 1563년(명종 18)에 금화시별제(禁火侍別提) 를 지냈다.
1565년(명종 20년)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1567년(명종 22년)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와 사헌부 감찰을 거쳐 포천현감으로 나갔다. 포천현감 재직 시 명나라 사신이 조선 방문 중 포천에 여러 번 왔는데도 접대하는 절차를 축소, 간단하게 하여 고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다시 김화현감으로 나갔다가 1570년(선조 3) 정읍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정읍현감 재직 시 만 5년 동안 선정을 쌓았다. 1575년(선조 8) 회덕현감으로 부임하여 6년 간 치적을 쌓아 명성을 얻었고, 1582년(선조 15) 경산현령으로 영전하였다.
1588년(선조 21년) 온양군수로 승직되었다. 온양군수로 부임 후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비축하였으므로 이때 백성들이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의병에게 병기와 군량을 나누어 주자 사람들이 그의 예지력에 감탄했다. 선조의 어가가 한성부를 떠나 의주까지 파천하고 관아의 관리들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한 관리가 울면서 말하기를 "지킬 군병이 없고 왜적은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무엇을 믿고 이 고을에 계십니까?" 하니, "나는 봉강(封疆)에서 주는 것만 알 뿐 다른 일은 알지 못한다."하며 의연히 고을을 지켰다. 그의 의연한 태도에 백성과 관리들 중에 도망가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이를 알고 가상히 여겨 표창을 내리고 내직으로 전임시켰다.
1594년(선조 27년)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고 1595년 전설사수(典設司守), 행통례원]상례(行通禮院相禮) 등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년) 특별히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여 오위장(五衛將)으로 제수되었다. 1598년 전란이 끝나자 황해도 봉산에서 죽었다. 지방관으로 재직 중 선정을 쌓아 포천, 정읍, 회덕, 경산에 혜정(惠政)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사후 손자
이서의 영귀로 증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송산리(현,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송산) 선영하에 있다. 묘비문은 월정 윤근수(月汀尹根壽)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