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6 ~ 1669]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峯).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1586년(선조19) 봉사(奉事) 익남(翼男)의 아들로,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살았다.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 주봉(柱峯)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출해서 주위에서 기재(奇才)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1612년(광해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지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의 폐모론까지 전개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영암 거창에 은둔하며 미수
허목(許穆, 1595~1682)과 친분을 맺으며 교유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면서 형조좌랑과 목천현감을 지냈다. 2년 뒤인 1626년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이후에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와 함께 전주에 머물렀다. 1628년 조정에 돌아온 후 언관직(言官職)을 맡아 언론 활동을 주로 담당하였다. 1629년에는 독서당에 선발되었고 이후에도 수찬, 교리, 이조정랑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조경은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한 강직한 신하로 제 역할을 하였다. 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승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외직으로 밀려나 복귀하였다. 또한, 갑작스러운 소현세자의 죽음에 슬퍼하며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를 강하게 반대하였고 제주도로 유배된 세 아들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청을 거듭 아뢰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마다 인조의 처사를 비판하고 직언을 거듭했지만, 임금의 신임은 잃지 않았다.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조경의 원칙과 소신은 국내외 정세 이곳저곳에 적용되었다. 조경은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척화파의 입장이었다. 효종 즉위 후인 1650년(효종1) 청나라가 척화신(斥和臣)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조경은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어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회녕부사를 지냈지만 이내 은퇴하고 고향 포천으로 내려갔다. 은퇴한 후에도 조경의 바른말은 멈추지 않았다. 김홍욱의 옥사를 문제 삼은 상소를 올린 것이 한 예이다.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은 1654년 민회빈 강씨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 아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직언을 했다가 효종의 분을 사 결국 장살(杖殺)로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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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효종7) 73세 되던 해에 조경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