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조경(趙絅)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조경 (趙絅)
[1586 ~ 1669]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峯).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비교
조경 (趙絅) 1627 정묘호란 (丁卯胡亂) 기로소 (耆老所) 1674 예송 논쟁 (禮訟論爭) 1627 정묘약조 1591 남인 (南人) 1575 서인 (西人) 포천시 (抱川市) 1658년 1627년 1616 후금 (後金) 1660년 1644년 1612 소현 세자 (昭顯世子) 1595 허목 (許穆) 1681 이익 (李瀷) 1646 이담명 (李聃命) 1623 인조 (仁祖) 1622 유형원 (柳馨遠) 1622 인평 대군 (麟坪大君) 1619 봉림 대군 (鳳林大君) 1608 광해군 (光海君) 1607 송시열 (宋時烈) 1591 요한 아담 샬 폰 벨 1577 이입 (李立) 1576 모문룡 (毛文龍) 1572 정봉수 (鄭鳳壽) 1543 정구 (鄭逑) 1501 이황 (李滉) 1636 병자호란 (丙子胡亂) 1661 척주 동해비 용골산성
▣ 백과사전
[1586 ~ 1669]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峯).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1586년(선조19) 봉사(奉事) 익남(翼男)의 아들로,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살았다.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 주봉(柱峯)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출해서 주위에서 기재(奇才)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1612년(광해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지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의 폐모론까지 전개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영암 거창에 은둔하며 미수 허목(許穆, 1595~1682)과 친분을 맺으며 교유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면서 형조좌랑과 목천현감을 지냈다. 2년 뒤인 1626년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이후에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와 함께 전주에 머물렀다. 1628년 조정에 돌아온 후 언관직(言官職)을 맡아 언론 활동을 주로 담당하였다. 1629년에는 독서당에 선발되었고 이후에도 수찬, 교리, 이조정랑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조경은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한 강직한 신하로 제 역할을 하였다. 인조의 생부(生父)인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승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외직으로 밀려나 복귀하였다. 또한, 갑작스러운 소현세자의 죽음에 슬퍼하며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를 강하게 반대하였고 제주도로 유배된 세 아들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청을 거듭 아뢰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마다 인조의 처사를 비판하고 직언을 거듭했지만, 임금의 신임은 잃지 않았다.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조경의 원칙과 소신은 국내외 정세 이곳저곳에 적용되었다. 조경은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척화파의 입장이었다. 효종 즉위 후인 1650년(효종1) 청나라가 척화신(斥和臣)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조경은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어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회녕부사를 지냈지만 이내 은퇴하고 고향 포천으로 내려갔다. 은퇴한 후에도 조경의 바른말은 멈추지 않았다. 김홍욱의 옥사를 문제 삼은 상소를 올린 것이 한 예이다.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은 1654년 민회빈 강씨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 아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직언을 했다가 효종의 분을 사 결국 장살(杖殺)로 죽게 된다.
 
【인용】역사문화유산
 

 
1658년(효종7) 73세 되던 해에 조경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다.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서인 (2) 백과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 동음이어
인공적으로 자연, 산수의 경치 같은 느낌이나도록 정원이나 공원 등을 꾸미는 일.
[1541 ~ 1609] 조선 중기의 무신. 1593년에는 도원수 권율과 함께 행주 산성 싸움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1727 ~ 178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이며, 목사 상기(尙紀)의 아들이다.
바다에서 서로 다른 수괴의 경계.
내서재 추천 : 0
▣ 카달로그 작업
관련 의견 모두 보기
자유 의견
▶ 지식지도
▷ 원문/전문 (없음)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 관련 동영상 (없음)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