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 ~ 1835] 조선후기 『낙하생전집』, 『인수옥집』 등을 저술한 문인.
개설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성수(醒叟, 惺叟), 호는 낙하생(洛下生) 또는 낙하(洛下).
서울 출생이며 세거지는 인천 근교의 소래산이다. 아버지는 이응훈(李應薰)이며, 어머니는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진사 이용휴(李用休)의 딸이다. 부인은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가문인 나주 정씨(羅州丁氏)이다. 아버지 이응훈은 이학규가 태어나기 5개월 전에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학규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고 외가에서 외할아버지 이용휴에게 교육을 받았다. 실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외삼촌
이가환(李家煥)을 비롯하여 이삼환(李森煥) 등이 있던 당시의 성호가문(星湖家門)의 실학적 학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이학규는 약관의 나이에 문학(文學)으로 명성을 얻어 정조의 인정을 받았다고 전한다.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사업에 참여했다. 다시 왕명에 의하여 원자궁(元子宮)에 내릴 책을 교감하고 수정·보완하여 바쳤다. 또 이만수(李晩秀)가 지은 「화성경리시말(華城經理始末)」을 한글로 번역해 바치기도 했으며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지어 올리기도 했다.
이학규는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삼종숙(三從叔)
이승훈(李承薰) 등과 함께 구금됐고 조사결과 천주교와는 무관함이 밝혀졌다. 그러나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된다. 이 해 10월 내종제(內從弟)인
황사영(黃嗣永)이 천주교 박해의 실상과 해결책을 비단에 적어 베이징(北京)에 있던 서양 신부에게 보내려다 발각돼 참형을 당하는 백서사건(帛書事件)이 발생한다. 이때에 내종제인 관계로 다시 국문을 받고 김해로 유배지를 옮기나 1824년(순조 24) 4월에 아들의 재청에 의하여 방면됐다.
이학규는 유배기간 중에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특히 당시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용과 문학을 통해 빈번히 교류한다. 이로 인해 정약용의 현실주의적 문학세계에 공감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유배지의 민중의 생활과 감정을 문학창작에 수용해 표현했다. 그리하여 그의 문학은 사실적 표현이 두드러지고 현실적 내용이 나타나 있다. 그밖에도 우리의 역사·지리·풍속과 자연과학 등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이에 대해 연구해 논술했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실학적 지성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학규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김해지방을 내왕하며 이곳의 문사들 및 중인층과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결과 김해 지역의 문화의식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만년에는 주로 신위(申緯) 및 정약용과 시와 글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전한다. 그러다 가세가 더욱 곤궁해져 충주지방으로 이주해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친필로 보이는 필사본 『낙하생고(洛下生藁)』와 각각 다른 여러 필체로 베껴놓은 수사본(手寫本) 등을 합한 20여 책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국내외로 흩어져 있던 그의 유고를 1985년에 수합하여 『낙하생전집』 3권으로 영인하고 발간했다. 한편, 문집으로 『인수옥집(因樹屋集)』이 전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