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姑蘇洞)에 있는 사적지.
개설
전라좌수영 성체의 치성(雉城) 위에 세운 포루의 일종으로서 장대(將臺)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 8경의 하나로, 옛날에는 고소정(姑蘇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형태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동문(東門) 좌포루(左鋪樓)가 5칸으로서 1773년에 절도사 김영수(金永綬)가 고소대(姑蘇薹) 구지(舊址)에 새로 지어 물거정(勿去亭)이라 개명하였다고 했으며, 「영성도(營城圖)」에는 안산(案山) 기슭의 성체 위에 3칸의 고소대를 그려 두었다.
고소대가 언제 훼철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영(營)이 혁파되면서 함께 훼철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곳에는 1947년에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와 여수 타루비(墮淚碑)를 안치하기 위한 비각이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리고, 원형기둥 위에 익공(翼工)을 가미한 다포식(多包式)의 공포를 짜 올렸다.
현황
『전라남도 여수군읍지』의 「고소대중수기(姑蘇臺重修記)」는 다음과 같다.
"여수 땅은 호수와 산이 옷깃처럼 둘러 있어, 예로부터 정자로서 올라 볼 만한 명승지가 많은데, 고소대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로 정자에 올라 보지 않아도 이름이 벌써 좋다. 또 한산사(寒山寺)라 부르는 절이 고소대의 서쪽에 떨어져 있으니 가까이서 바라보면 종소리가 은은하여 들을 만하다.
그 대(薹)를 ‘고소(姑蘇)’라고 이르는 것은 이 까닭일지어다. 내가 전에 고소대에 올라서 시험 삼아 바다를 바라보니, 산봉우리들이 은근히 연운(煙雲)이 아득히 아른거리는 속으로 잠겼다 나왔다 함이 보였으며 장사배와 고기잡이배들이 종청으로 푸른 나루, 푸른 파도 가운데 벌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소대의 아름다운 경치이다.
만약에 바위가 들린 곳에 조수가 일면 배를 매던 옛 풍진을 상상할 수 있는데, 경도(鯨島)엔 대나무가 늙어가는 칼을 씻던 옛 언덕이 여전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옛 전장을 조상하는 회포를 갖게 한다. 이것은 바로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이른바, ‘감상이 절정에 다달아 슬퍼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臺)의 터전에서 메워진 해자와 허물어진 초석을 굽어보면 눈에 가득 근심이 걸리니, 이것은 또 “능허대기(凌虛臺記)의 흥폐(興廢)가 서로 찾아오는 운수다.”라고 말하던 것이다. 조심하던 사람들이 오래도록 개축할 것을 도모했는데, 생각하니 군무(郡務)가 얽혀서 손 쓸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성황(城隍)과 제단(祭壇)을 세우는 일로 인한 그 나머지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여 대(臺)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수했다.
수서기(首書記) 김준혁(金俊赫)이 그 일을 맡아 열흘이 못 걸려 완공을 보았다. 이에 다함이 나타나니 운물(雲物)이 더욱 빛이 났다. 나는 공무가 끝나고 한가한 겨를이 있으면 두서너 사람들과 그 위에서 술을 마시며 바람을 맞으며 짐짓 이 기(記)를 쓰노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