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 ~1970년 경] 한국의 소설가이다. 아호는 상허(尙虛), 별명은 한국의 모파상이다.
생애
초기 생애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진명리에서 부친 이창하, 모친 순흥 안씨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금성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집안은 전주 이씨 용담파. 호는 상허, 상허당주인.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으나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던 중 함경북도 배기미에 정착, 서당에서 수학한다. 1912년 모친의 별세로 외조모 손에 이끌려 고향 철원 용담으로 귀향해 친척집에 탁신한다. 1915년 안협의 오촌집에 입양되었고, 그해 도로 용담으로 돌아와 오촌 이용하 댁에 부쳐 살았다. 같은 해 철원 사립봉명학교에 입학한다. 1918년 3월 동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 철원 읍내 간이농업학교에 입학했지만 한 달 후 가출하여 여러 곳 방랑하다 원산 등지에서 객줏집 사환 노릇하며 이태를 보냈다. 어차에 찾아온 외조모의 보살핌을 받고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이 뒤 인척 아저씨를 찾아 중국 안동현까지 갔지만 헛걸음하고 경성으로 온다.
1920년 4월 배재학당 보결생 모집에 응시, 합격하나 입학금 마련이 어려워 등록하지 못했다. 1921년 4월 휘문고등학교에 입학, 고학생으로 비교적 우수 성적을 받았다. 어차에 학우로 상급반에
정지용,
박종화, 하급반에
박노갑이 재적했고, 스승으로
이병기가 있었다. 1924년 《휘문》 학예부장으로 활동하고 동화 〈물고기 이약이〉 등 6편을 본지 제2호에 발표했다. 6월 13일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당해 5년제 과정 중 4학년 1학기에 퇴학된다. 동년 가을 휘문고보 친구 겸연만의 덕을 보아 유학길에 올랐다.
등단
1925년 일본에서 단편소설 〈오몽녀〉를 《조선문단》, 《시대일보》에 발표, 등단했다. 1926년 4월 동경 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신문, 우유 배달 등을 하는 빈곤 가운데서
나도향, 화가
김용중 및
김지원 등과 교유하고 동경에서 《반도산업》을 발행했다. 1927년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 뒤 신문사, 모교를 전전하여 구직 운동했지만, 취업난을 닥뜨린다. 1929년 《개벽》사에 기자로 입사, 《신생》 등의 잡지 편집에 참사하고 잡지 《어린이》에 소년물, 장편을 다수 발표했다. 9월 안희제의 사장 취임에 맞춰 《중외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사회부에서 3달간 근무 후 학예부로 전임했다.
작품의 경향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많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 하여 “한국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린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 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이다.
박태원과
조용만 등 비롯하여 절친한
구인회 동료들이 친일 작품을 창작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1943년에 안협(현재의 북철원군)에 낙향해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않아,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 하나이다.
광복 이후
광복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경에 월북하였기에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이나 세상을 떠난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 곳에서 이태준은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6년 숙청되어 함흥으로 추방, 함흥노동자신문 교정원으로 배치되었으며, 이후 다시 함흥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하였으나, 몇 년 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망 시기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 현재는 1970년경이 가장 유력한 사망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탈북 작가인 최진이가 이태준의 딸들이 쓴 일기를 보았다며, 이들의 가족사를 증언한 바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은 66살이던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생가는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생가는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에 밭으로 이용 중이나 생가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성북구의 자택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인용】위키백과
이태준(李泰俊) 연보
1904년 : 1월 7일, 강원도 철원 출생. 아버지는 개화파 지식인 이문교(李文敎). 어려서 부모를 여읜 것으로 알려짐. 호는 상허(尙虛).
1920년 : 배재학당에 합격하였으나 등록하지 못함.
1924년 :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당시 이 학교의 교원이던 이병기의 지도를 받아 고전문학의 교양을 쌓음.
1925년 : 7월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시대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함.
1926년 : 일본의 조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서 수학함.
1927년 : 8월 ‘도향 생각 몇 가지’를 ‘현대평론’에 발표. 11월에 조치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함.
1929년 : 개벽사 기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함. 9월 희곡 ‘어떤 날의 베토벤’을 ‘학생’에 발표.
1930년 : 5월에 평론 ‘조선의 문학이론은 어디로 귀결될까?―문제 막연’을 ‘대조’에 발표.
1931년 : 7월에 ‘아무 일도 없소’를 ‘동광’에 발표.
1932년 : 4월에 ‘불우 선생(不遇先生)’을 ‘삼천리’에 발표.
1933년 : 3월에 ‘꽃나무는 심어 놓고’를 ‘신동아’에 발표. 1933년 8월 25일부터 1934년 8월 23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제이의 운명’을 연재함. 구인회(九人會)를 이효석, 김기림, 정지용, 유치진 등과 힘께 결성함. 10월 14일에 평론 ‘예술의 동서’를 ‘조선일보’에 발표.
1934년 : ‘달밤’을 한성도서에서 간행. 1월 희곡 ‘어머니’를 ‘중앙’에 발표.
1935년 : 1935년 5월 26일부터 1936년 1월 1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성모(聖母)’를 연재함. 11월에 ‘손거부(孫巨富)’를 ‘신동아’에 발표. 11월 20일 ‘내가 본 톨스토이’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
1936년 : 1월에 ‘가마귀’를 ‘조광’에 발표함. 6월 2일부터 9월 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황진이(黃眞伊)’를 76회에 걸쳐 연재함. 2월 희곡 ‘산 사람들’을 ‘중앙’에 발표.
1937년 : 3월에 ‘복덕방(福德房)’을 ‘조광’에 발표. 7월 29일부터 12월 22일까지 ‘조선일보’에 ‘화관(花冠)’을 130회에 걸쳐 연재함. ‘가마귀’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 ‘구원(久遠)의 여상(女像)’을 영창서관에서 간행. 6월 27일 ‘평론태도에 대하여-평필의 초조성’을 ‘동아일보’에 발표.
1938년 : 1월에 ‘패강냉(浿江冷)’을 ‘삼천리문학’에 발표. ‘황진이’ 간행. ‘화관’ 간행. 4월 ‘김상용의 인간과 예술’을 ‘삼천리문학’에 발표.
1939년 : 2월 4일부터 7월 17일까지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딸 삼형제’를 133회에 걸쳐 연재함. 2월부터 10월까지 ‘문장강화’를 ‘문장’에 발표. 7월에 ‘농군(農軍)’을 ‘문장’에 발표. ‘딸 삼형제’를 문장사에서 간행. ‘이태준 단편선’을 박문서관에서 간행. 1939년 2월부터 1941년 4월까지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을 주재하여 문제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여 문단에 크게 기여함.
1940년 : ‘밤길’을 ‘문장’에 발표. 3월 12일부터 8월 10일까지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청춘무성(靑春茂盛)’을 127회에 걸쳐 연재함. ‘청춘무성’을 박문서관에서 간행. 2월 ‘작가지망생을 위하여’를 ‘문장’에 발표. 6월 ‘통속성 기타’를 ‘문장’에 발표. 12월 ‘기생과 시문’을 ‘문장’에 발표.
1941년 : 3월 4일부터 7월 5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사상(思想)의 월야(月夜)’를 97회에 걸쳐 연재함. ‘이태준 단편집’을 학예사에서 간행. ‘무서록(無序綠)’을 박문서관에서 간행.
1942년 : 6월에 ‘무연(無緣)’을 ‘춘추’에 발표. 1942년 12월 22일부터 1943년 6월 16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왕자호동’을 139회에 걸쳐 연재함.
1943년 : 1월에 ‘돌다리’를 ‘국민문학’에 발표. 11월 16일 단행본 ‘왕자호동’을 남창서관(南昌書館)에서 간행. ‘돌다리’를 박문출판사에서 간행.
1945년 : ‘별은 창마다’ 간행.
1946년 : 6월에 월북하였다. 8월에 ‘해방전후(解放前後)’를 ‘문학’에 발표. 장편소설 ‘사상의 월야’를 을유문화사에서 간행. ‘세동무’를 범문사에서 간행. 문장론 저서 ‘문장강화(文章講話)’를 박문출판사에서 간행. 8월 중순부터 소련을 방문한 뒤 ‘소련기행’을 출간. 1월 25일 ‘시대성과 예술성’을 ‘서울신문’에 발표. 7월 ‘국어에 대하여’를 ‘대조’에 발표.
1947년 : ‘복덕방’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 ‘해방전후’를 조선문학사에서 간행.
1948년 : ‘제이의 운명’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간행.
1956년 : 북한 노동당 평양시위원회 산하 문학예술출판부 열성자회의에서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다고 전해짐.
1988년 : 7월 19일에 해금 조치됨.
* 이태준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으로 작품을 썼는데,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은 독자들의 호응을 크게 받았다. 소외된 인물들의 현실적 고난과 그 인물의 내면세계의 순수무구함을 드러낸 인간애의 의식을 촉구하는 주옥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한국인물대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중앙일보, 199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