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동북면에 거주하던 동여진을 토벌한 전쟁.
만주에서 주로 유목생활을 하던 여진족(이전의 말갈족) 가운데 일부는 고려 천리장성 이북인 동북면(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들어와 농경이나 어업에 종사하며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처음에 고려에 조공을 바치면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갔는데, 점차 고려의 백성으로 편제되기를 희망하였다. 특히 거란 침입 때는 고려의 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문종 때 고려의 주(州)로 편입시켜 주기를 요청하는 여진인이 급증하자, 고려 조정은 여진 추장에게 관작을 주어 고려의 번병 역할을 하는 기미주(羈糜州)·귀순주(歸順州)로 삼아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여진 부락 간에 내분이 일어나 완안부(完顔部)가 남하하면서, 여진족은 동북면 지역을 잠식하고 변경에 머물러 고려의 위협이 되었다. 이에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길주(吉州) 북쪽 병목〔甁項〕지역에 요새를 설치할 목적으로 여진정벌을 단행하였다.
여진정벌은 고려 태조 때부터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여야 할 옛 영토로 인식하고 꾸준히 추진한 북진정책의 결과이다. 하지만 9성을 여진에게 되돌려 주면서 문벌귀족간의 분열이 일어났고, 이 지역을 장악한
완안부 세력은 금나라를 건국하고 만주와중원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고려에게 사대(事大)를 요구하였다.
고려시대 최초의 대규모 여진정벌은
1080년(문종 34) 12월 여진족의 소요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때 문정(文正)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10여 부락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1104년(숙종 9)까지 여진족은 소요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흑수(黑水) 일대에 있던 완안부 세력이 남하하여 가란전〔曷懶甸〕지역의 여진 부락을 통합하고, 1102∼1103년에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1104년에
완안부가 그들에게 항거하는 7성(城)의 부족을 추격하면서 정주(定州)에 이르자, 고려는 이를 공격하였다. 이 때
임간(林幹)은 여진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어
윤관(尹瓘)이 나아가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여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숙종과 윤관에게 큰 치욕으로 남았고, 정국운영에도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윤관은 패배의 원인이 기병(騎兵)의 열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국왕에게 건의하여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여 정예 군사를 양성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 1일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은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여 여진정벌에 나섰다. 그 결과 ‘그 지방이 300리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蓋馬山)에 닿았으며 남쪽은 장주(長州)·정주(定州)에 접한다’는 전과를 올렸다. 윤관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 등 9성을 쌓고 남쪽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면서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주변 지역이 매우 넓은 데다가,
완안부 세력이 산 속에 거주하면서 집요하게 약탈하며 9성의 반환을 애걸하였고, 여진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국력이 소모되었으며, 향후 거란과도 다툴 수 있다는 여론에 따라, 고려는 1년 7개월만에 이주한 백성을 본거지도 되돌려보내고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