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 ~ 1720]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국경(國卿). 할아버지는 증직 공조참의 오경춘(吳慶春)이고, 아버지는 증직 한성부 우윤 오만(吳晩)이다. 어머니는 청주 양씨 양수기(楊壽起)의 딸이고, 부인은 단양 우씨 우신달(禹信達)의 딸이다. 자식은 3남매를 두었고, 아들은 오상호(吳相虎)이다.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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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 ~ 1720]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국경(國卿). 할아버지는 증직 공조참의 오경춘(吳慶春)이고, 아버지는 증직 한성부 우윤 오만(吳晩)이다. 어머니는 청주 양씨 양수기(楊壽起)의 딸이고, 부인은 단양 우씨 우신달(禹信達)의 딸이다. 자식은 3남매를 두었고, 아들은 오상호(吳相虎)이다.
활동 사항
오백주(吳伯周)는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어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활을 잘 쏘아, 사냥하여 잡은 짐승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1659년(효종 10) 무과에 응시하여 두 곳에서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당시 시험관인 대장군 유혁연(柳赫然)이 뛰어난 활 솜씨 특히 기사(騎射) 능력에 감탄하여, 자기 막부에 두고 훈련시켰다.
어느 해 겨울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집에 돌아와 병간호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온갖 약을 구하여 정성으로 올렸으나 아버지의 병환은 차도가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병은 산삼과 석밀(石蜜)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다.”고 하였다. 눈이 쌓인 추운 겨울에 산삼이나 석밀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오백주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같이 깊은 산속을 헤매며 산삼과 석밀을 구하고 또 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신령이 나타나, 어느 곳을 지나 어느 산 고개에 가보면 큰 바위가 있을 것이고 그 바위 근처에 가서 찾아보면 산삼과 석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큰 바위 위에 사나운 호랑이가 지키고 앉아 있었다. 오백주는 침착하고 신중한 어조로 호랑이에게 “아무리 짐승이라 하지만 나의 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아버님 병환을 고치기 위하여 이곳에 약을 구하러 왔는데 방해 말라. 네가 나를 잡아먹고 싶으면 내가 약을 구하여 아버님 병환을 고치게 한 후 나를 잡아먹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호랑이가 사라졌다.
오백주가 산삼과 석밀을 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니 어디선가 벌 소리가 들려와 소리 나는 곳을 찾았다. 바위 틈 조그만 구멍으로 벌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석밀을 파냈다. 또 그 앞을 자세히 살펴보니 산삼의 마른 줄기가 보여 산삼을 캤다. 이것을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께 드렸더니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오백주는 1665년(현종 6) 마침내 무과에 합격하여 어영(御營) 군교에 임명되었다. 1667년 현종이 각 군영에 명하여 무예에 뛰어난 자들을 추천하여 시험을 보도록 하였는데, 기사와 승마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금품을 하사받고 별군직에 뽑혔다. 1670년 첨지가 되었고 품계가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1671년(숙종 1) 혜산 첨사로 나갔다. 1675년 할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왔다가 다시 이산 군수로 나갔다. 1681년부터 1705년까지 곽산 군수, 개천 군수, 상원 군수, 구성 도호부사, 고원 군수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12년 서북 첨사, 1716년 노강 첨사 등을 지냈고, 얼마 후 기로소에 들었다.
오백주가 서북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연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고생하는 연유를 묻자 오백주는, “내가 두터운 국록을 먹고 이러한 지위에 오르는 은혜를 입었는데, 나이 80에 이르도록 갚지 못하여 이를 보답할 길을 찾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1719년 자헌대부로 가자(加資)되었고, 그해 가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훗날 이 고장 사람들은 오백주가 찾아갔던 바위를 범 바위 또는 효자 바위라 불렀고, 오백주가 이 바위에서 빌어 산삼과 석밀을 얻었다 하여 축석(祝石)이라 하였으며, 축석이 있는 곳으로 의정부와 포천을 잇는 이 고개를 축석령(祝石嶺)이라 불렀다 한다.
【문화】포천읍 어룡리는 옛날 부사를 지낸 오백주라는 사람의 고향이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어느 해 벼슬로 고향을 떠나 있는데, 고향에 계시는 부친이 중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았다. 이 기별을 받고 그가 고향으로 달려오다가, 어느덧 해가 저물어 지금의 축석령을 밤중에 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큰 범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으며 으르렁댔다. 오백주는 범을 보자 큰 소리로 꾸짖었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문화】옛날 경기도 포천의 어링굴이라는 마을에 오백주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링굴은 서쪽으로 왕방산이 있어서 기암 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병풍을 두른 듯 넓고 장엄한 바위 틈에서는 맑고 찬 심산 옥수가 흘러서 한내로 흘러드는 경치 좋고 물 맑은 고장이기도 합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문화】포천에 효자로 유명한 오백주 선생님이 있었다. 그 분은 평소 지극한 효성으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었다. 하루는 선생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집으로 오는데, 거의 저녁 무렵에서야 축석고개에 닿았다. 날은 어두워졌으나 더는 머무를 수가 없어서 고개길을 넘어오는데, 커다란 바위에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선생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큰소리로 호령하였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문화】옛날 경기도 포천의 어링굴이라는 마을에 오백주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링굴은 서쪽으로 왕방산이 있어서 기암 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병풍을 두른 듯 넓고 장엄한 바위 틈에서는 맑고 찬 심산 옥수가 흘러서 한내로 흘러드는 경치 좋고 물 맑은 고장이기도 합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문화】포천에 효자로 유명한 오백주 선생님이 있었다. 그 분은 평소 지극한 효성으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었다. 하루는 선생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집으로 오는데, 거의 저녁 무렵에서야 축석고개에 닿았다. 날은 어두워졌으나 더는 머무를 수가 없어서 고개길을 넘어오는데, 커다란 바위에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막고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선생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큰소리로 호령하였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문화】포천읍 어룡리는 옛날 부사를 지낸 오백주라는 사람의 고향이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어느 해 벼슬로 고향을 떠나 있는데, 고향에 계시는 부친이 중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았다. 이 기별을 받고 그가 고향으로 달려오다가, 어느덧 해가 저물어 지금의 축석령을 밤중에 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큰 범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으며 으르렁댔다. 오백주는 범을 보자 큰 소리로 꾸짖었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