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5 ~ 1760] 조선 후기에, 사헌부지평, 동지돈녕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박필현(朴弼賢). 자는 정보(正甫). 박미(朴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박세교(朴世橋)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박태길(朴泰吉)이며, 어머니는 진사 윤선적(尹宣績)의 딸이다. 손자가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이다. 어려서부터 종숙부인
박세채(朴世采)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9년에 봉교(奉敎)가 되고, 1730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서는 양조(兩朝)의 변무(辨誣)와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촉구하는 소를 올렸다가 사당(私黨: 사사로운 정파적인 당)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간들의 비호에 힘입어 이듬해에는 다시 정언에 복관되었다. 그 뒤 1733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교리(校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거쳐, 이듬해부터 1739년까지 지평·교리·수찬·정언 등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740년에는 예방승지를 거쳐, 이듬해 동의금(同義禁)·경기감사 등을 역임한 뒤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호조·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연(書筵)을 중지한 잘못과 조정의 언로폐쇄, 과거제의 문란 및 백관들의 기강의 해이함을 경계하는 소를 올려 인정을 받았다.
1758년에 동지돈녕부사·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760년에 타계하였다. 벼슬에 있을 때 청백리로 알려져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