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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박필균(朴弼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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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균 (朴弼均)
[1685 ~ 1760] 조선 후기에, 사헌부지평, 동지돈녕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박필균 (朴弼均) 노론 서인 소론 박종채 박세채 김상헌 김집 박규수 박지원 송시열 윤증 정제두 박선수 회니 시비 임술삼고변
▣ 백과사전
[1685 ~ 1760] 조선 후기에, 사헌부지평, 동지돈녕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박필현(朴弼賢). 자는 정보(正甫). 박미(朴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박세교(朴世橋)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박태길(朴泰吉)이며, 어머니는 진사 윤선적(尹宣績)의 딸이다. 손자가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이다. 어려서부터 종숙부인 박세채(朴世采)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5년(영조 1)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9년에 봉교(奉敎)가 되고, 1730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서는 양조(兩朝)의 변무(辨誣)와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촉구하는 소를 올렸다가 사당(私黨: 사사로운 정파적인 당)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간들의 비호에 힘입어 이듬해에는 다시 정언에 복관되었다. 그 뒤 1733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교리(校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거쳐, 이듬해부터 1739년까지 지평·교리·수찬·정언 등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740년에는 예방승지를 거쳐, 이듬해 동의금(同義禁)·경기감사 등을 역임한 뒤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호조·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연(書筵)을 중지한 잘못과 조정의 언로폐쇄, 과거제의 문란 및 백관들의 기강의 해이함을 경계하는 소를 올려 인정을 받았다.
 
1758년에 동지돈녕부사·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760년에 타계하였다. 벼슬에 있을 때 청백리로 알려져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인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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