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4년(공민왕 13년)에
최유가 원나라의 병사 1만을 인솔하고 원나라에 의해 임의로 고려왕에 임명된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넘어와 일으킨 난이다.
최유(?-1364년)의 몽고명은 티무르부카이다. 그는 동지밀직 최안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군부판서의 직에 있던 그는 1339년(충숙왕 복위 8년)에 일어난
조적의 난 때 왕을 모시고 따라가는 직분을 잘 수행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1342년에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 후 부지런히 재물을 끌어모아 부호가 되었으며, 권세를 이용하여 온갖 불법을 자행하였다. 1349년에 그는 경창부원군(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나중에 충정왕(고려 30대왕)이 즉위하자 취성군에 봉해졌고, 성근익대협찬보정공신의 호를 받고 귀국, 그 이듬해에 참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왕의 옹립에 크게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마땅한 벼슬 자리를 주지 않음에 대해 심한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역시 왕을 원망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진 동생인 판도판서
최원과 함께 원나라로 도망을 쳤다. 얼마 후 그는 고려에 소란을 일으켜 그 복수를 하고자, 1352년(공민왕 1년)에 김원지티무르와 함께 정남의 군사 10만을 고려에서 징집하도록 해달라고 원의 황제인 순제(토곤 테무르 재위 1332-1370년)에게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승낙을 얻어낸 그는 고려에 파견되어 징병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때 원나라에 있던 모든 고려인들이 그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징집은 중지되었으며, 그는 원나라에 소환되고 말았다.
1354년에 그는 고우 장사성의 정벌을 위해 중상감승에 봉해져 다시 고려에 파견되었다. 그때 그는 징병을 독려했으며, 이때 본국에서 삼사사에 봉해졌다.
그 후 그는 원나라에 돌아가 승상 태스첸과 환관 박티무르부카에게 아첨하여, 특좌동지추밀원사 직에 올랐다.
이 무렵 그는, 당시 기씨 일파를 숙청한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서 그에 대해 복수를 꾀하는
기황후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대신
덕흥군 왕혜를 세울 것을 모의했다.
1364년(공민왕 13년)에 승상이 된 그는 그 해 1월에 원나라의 병사 1만여 명을 인솔하고, 원의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임명된
덕흥군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제일 먼저 의주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이어 선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이성계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강력한 저지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러다, 결국 반란군은 수주 달천에서 이성계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최유는 반란군의 잔여 병사 17명과 함께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원나라로 도망쳤다.
뒷날 그는 다시 대군으로 고려를 정벌하도록 해달라고 원의 황제에게 청원했다가 거절당했으며, 감찰어사 유련 등의 탄핵을 받아, 고려에 압송되어 참형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