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년 고려군과 거란군이 고려의 행정구역인 양계 중 서북면에 해당하는 북계(北界)에 설치한
안융진(鳳州, 현 평안남도
문덕군 신리)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고려는 973년에 이 곳에 성이 설치하기 시작해 974년에 완성했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는데, 이는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은
봉산군에서 고려군을 격파해 기세를 꺾어 항복을 요구한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몽전을 사신으로 보내 강화를 요청하지만, 소손녕이 거부한다. 이 상황에서 거란에게 서경 이북의 땅을 주자는 할지론이 논의된다.
성종이 할지론을 따르기로 하면서 서경의 쌀을 개방해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고 남은 곡식은 대동강에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서희가 넉넉한 식량으로 성을 지키자고 주장하며 반대론을 내놓았다.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적의 빈틈을 잘 살펴보자고 성종을 설득해 할지론을 중지시켰다.
이어서 서희가 거란의 의도는 여진이 살고 있는 가주, 송성 등을 빼앗으려는 것으로 저들에게 영토를 한 번 주면 끝없이 욕심을 부린다며 싸운 후에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지백 역시 영토를 주는 것을 반대하면서 사신을 보내 금은과 보물을 소손녕에게 뇌물을 주어 의중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덧붙여 군량을 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연등회, 팔관회, 선랑 등의 행사를 다시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소손녕은 고려 조정에서 오랫동안 답을 하지 않자 안융진을 공격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안융진에서 유방과 대도수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고 전선이 고착화된다.
이에 거란측에서는 협상을 요청하게된다. 고려 성종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모아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협상할 사람이 있냐고 물었으며, 서희가 직접 나서겠다고 한다.
이후, 서희가 소손녕을 상대로 외교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고 강동 6주까지 얻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