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 1995] 대한민국의 영문학자, 기자, 문학가 겸 수필가이다. 호는 아능(雅能)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1909년 서울 출생. 1918년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2년 졸업 후 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학부에서는 법문학부 문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1931년 본과 2학년 때 선배 유진오의 주선으로 『비판』에 「사랑과 행랑」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이광수의 추천으로 「방황」을 『코리아타임스』에 게재했다. 이 작품은 모든 것에 회의적인 ‘나’의 두서없는 정신적 방황과 이에 개입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다. 그 여자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친구의 누이로 오빠가 죽은 뒤 마르크스 걸로서 지하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형사에게 잡혀가면서도 태연하고 당당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방황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용만은 이 작품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두 청년의 모습을 대비시키며 자본주의 모순을 고발하는 「사랑과 행랑」 등과 같은 작품으로 당시 동반자 작가로 분류되었다. 1932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12월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2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으며, 4월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영어 강사를 겸직했다. 8월 문학동인
구인회 창립동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5월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2월 물러났으며, 그 뒤 4개월 만에 재입사했다. 1942년 11월 논설위원, 1943년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 1944년 논설부 차장(참사)을 지냈다. 그는 1940년부터 다시 작품 활동을 했고, 1941년 3월호 『신시대』에 발표한 「새학년부터 고쳐지는 국민학교」에서부터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노골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는 『국민문학』에 「배 안에서」와 「모리군 부처와 나」, 1944년에는 희곡 「광산의 밤」을 일본어로 발표하는 등 친일 국책문학에 앞장섰다. 『매일신보』 기자로 지낼 때 친일문학인들이 결성한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도 참가했다.
해방 후에는 코리아 타임스의 주필로서 영자신문과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1953년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영미의 작품 번역에 전념했다. 1974년 그의 최초의 단편집 「고향에 돌아와서」와 1982년 단편 「구인회를 만들 무렵」, 1986년 「영결식」을 발표하며 정년 후에도 의욕적인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희곡 「가보세」(1931)와 단편소설 「초종기(初終記)」(1940) 「북경의 기억」(1941), 「불국사의 여관」(1943) 등이 있고, 소설집은 『고향에 돌아와도』(1974), 수필집은 『밤의 숙명』(1962), 『청빈의 서』(1969), 『세월의 너울을 벗고』(1982), 연구저서로는『육당 최남선』(1964), 『일제하 한국신문화운동사』(1974) 등을 간행했다. 1995년 2월 16일 사망했다.
조용만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5∼4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