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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임선규(林仙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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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규 (林仙圭)
[1912 ~ 1970] 일제강점기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를 역임한 작가. 극작가 · 친일반민족행위자. 본명은 임승복(林勝福), 창씨개명 당시의 이름은 하야시 나카로(林中郞)이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비교
임선규 (林仙圭) 1912 1936년 1911 김영수 (金永壽) 1905 박진 (朴珍) 1903 송영 (宋影) 1899 이서구 (李瑞求) 동양극장 청춘좌 (靑春座) 1936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미정의) 강홍식 (미정의) 문수일 (미정의) 문예봉 (미정의) 조선연극문화협회
▣ 백과사전
[1912 ~ 1970] 일제강점기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를 역임한 작가. 극작가 · 친일반민족행위자. 본명은 임승복(林勝福), 창씨개명 당시의 이름은 하야시 나카로(林中郞)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당에 다니다가 논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1927년 공립 강경상업학교에 진학했으나 1931년 학비 조달이 어려워 중퇴했다. 강경상고 재학 시절 조선연극사의 순회공연을 보고, 강홍식의 연기에 빠져서 연극에 뜻을 품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 강홍식을 찾아갔고, 조선연극사의 연구생 배우가 되었다. 희곡 습작을 해왔던 그는 1932년, 번안극 「콘라-도야 잘 있거라」(3막)를 제일극장에서 공연함으로써 극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1932년 희극 「차용증서」, 서양극 「침묵」, 비극 「장탄야곡(長嘆夜曲)」, 「사의 승리」 등을 공연했다. 이 중 내용이 알려졌거나 텍스트가 남아 있는 작품은 「사의 승리」가 유일하다. 그해 8월 황철 등과 함께 조선연극사의 정단원이 되었다. 이후 극단에 거의 매월 한 작품 정도 극본을 제공했는데, 1933년 중국 작품 「양자강의 범선」을 끝으로, 극단 연극시장으로 소속을 옮겼다. 조선연극사의 핵심단원이었던 배우 문수일이 조직한 연극시장에 합류한 것은 문수일의 딸인 문예봉과의 연애와 결혼 때문이었다.
 
연극시장이 해체되자, 그는 협동신무대, 황금좌, 희락좌 등 2류 대중극단들에 극본을 제공했는데, 여전히 무명작가에 가까운 처지로 폐결핵까지 걸려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1935년 동양극장이 건립되고 연중무휴의 공연을 하게 되자 그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936년에 그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제출했는데 처음에는 지배인 최독견과 연출가 박진에 의해 폐기되었다가 사장 홍순언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황철과 차홍녀가 주연한 이 연극이 크게 히트함으로써 그는 일약 동양극장을 대표하는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동양극장의 전속 작가 시절 「추풍령(秋風嶺)」(1936), 「유정무정」(1936), 「유랑삼천리」(1938), 「북두칠성」(1939) 등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대부분 큰 인기를 끌었다. 「추풍령」의 경우 민족주의적 작품이라 하여 임석 경관에 의해 공연중지를 당하고 피검되는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1937년 6월 일본으로 연극 유학을 떠나 동보극장 연수실에서 몇 달간 극작법을 배우기도 했는데, 이 과정은 뚜렷한 갈등구조와 복선, 클라이막스가 있는 희곡 구성법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9년 9월 홍순언의 사망으로 동양극장의 사장이 바뀌자 황철, 차홍녀, 박진, 원우전 등과 극단 아랑을 창립했으며, 창립작으로 「청춘극장」(박진 연출)을 올렸는데, 이는 지원병을 소재로 한 극본이었다. 이후 「결혼조건」(1940), 「바람부는 시절」(1940) 등 멜로드라마, 또 송영과의 합작인 「김옥균」(1940), 최고의 인기작 「동학당」(1941) 같은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역사극을 발표했다. 1941년 지원병을 미화한 극본 「동백꽃 피는 마을」을 집필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를 맡았다. 「빙화」(1942), 「상아탑에서」(1944), 「새벽길」(1945) 등의 친일극을 공연했다.
 
해방이 되자, 한동안 친일작가로 몰려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12월에 극단 조선의 「그여자의 반생」(1945)으로 극작을 재개했다. 좌익 진영의 영화동맹 위원으로 활동한 아내 문예봉의 영향으로 그도 남로당 창당 때 「긴급동의」를 공연하면서 좌익 진영에 들어섰다. 1947년 백조악극단의 공연 「천국에서 맺은 사랑」을 마지막으로, 먼저 월북한 아내를 좇아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는 극작 활동을 못하고 폐결핵으로 요양 중 사망했다.
 
임승복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36∼15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인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이서구 (6) 백과 홍순언 (4) 백과 박진 (3) 백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3) 백과 이운방 (3) 1935년 (2) 백과 1936년 (2) 백과 1937년 (2) 백과 동양극장 (2) 백과 박영호 (2) 백과 배구자 (2) 백과 송영 (2) 백과 청춘좌 (2) 백과 최독견 (2) 백과 홍해성 (2)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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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