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7 ~ 1611] 조선 중기의 인물. 자는 언경(彦卿), 호는 원당(元堂),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생애
1579년(선조 12) 식년 무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했다.
1589년(선조 22)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가 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배속되어
옥포 해전,
사천 해전,
한산 대첩,
부산포 해전 등에서 중위장(中衛將)으로서 활약하며 조선 수군이 연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594년(선조 27) 사간원(司諫院)의 청으로 끌려가 추문(推問)을 받았으며, 박진(朴晉)이 그의 후임으로 순천도호부사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거쳐 1601년(선조 34)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가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가 되었으나, 1607년(선조 40) 해랑도(海浪島)에 출몰한 수적(水賊)을 체포하지 못한 책임으로 과죄(科罪)되었다.
1547년 아버지 권눌(權訥)과 어머니 하빈 이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권눌은 조선 개국공신 권근(權近)의 6대손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금갑도 만호(金甲島萬戶)를 지냈다. 권준이 현달하면서 사후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안천군(安川君)에 봉해졌다.
첫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 宋氏) 송달기(宋達器)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 曺氏) 조휘원(曺輝遠)의 딸로 도원수
권율의 첫 번째 부인의 여동생이다. 권율과 권준은 계급상으로는 상하 관계에 있었지만, 사적으로는 같은 안동 권씨 추밀공파(樞密公派) 문중으로, 족보상으로는 13촌 숙질(叔姪)지간이면서 동서지간이 되기도 하는 셈이다.
내금위에 소속되어 있다가 1579년(선조 12) 식년시 무과에 갑과 3위 (탐화랑)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종3품 순천도호부사로 재직하며
이순신 휘하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전라 좌수영의 5관 5포 중 가장 큰 고을인 순천 도호부의 부사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좌수영 내 2인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증명하듯 가장 최상급자인 전라 좌수사의 명을 직접 받아 전달하는 중위장의 역할을 권준이 맡았다.
당포 해전에서는 적장
도쿠이 미치유키를 화살로 쏘아 맞추고, 연이은 출전에서도 계속 공을 세워 1595년 원균의 뒤를 이어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정3품)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임명되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자 같이 충청도 수군 절도사(정3품)로 임명되어 이순신의 막하에서 다시 재직하였으나, 경기도 지역 방어가 주 임무였던지라 해전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전란이 끝난 이후에는 경기도 방어사(종2품), 충청도 병마 절도사(종2품) 등을 지냈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책록되었으며 안창군(安昌君)의 작호를 받았다.
다만 임진왜란이 끝난 뒤 명나라 해랑도라는 섬에서 활동한 해적 해랑적에게 병선과 물자를 약탈당해 큰 곤경을 겪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부터 이순신과 함께 했던 사람으로, 사적으로도 매우 친밀했던 사이였다. 난중일기엔 권준이 잠깐 한산도를 비우는 시기와, 이순신의 파직 이후를 제외하면 권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날을 찾기 힘들 정도. 같이 식사를 하며 여러 일을 논의하는가 하면 술도 자주 마시고, 바둑을 두거나 활을 같이 쏘았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찾아오지만 가끔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직접 권준을 초청해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또 권준의 생일에는 여러 장수들이 모여 같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