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4 ~ 1190] 남송 임강군(臨江軍) 사람. 자는 자징(子澄)이고, 호는 정춘선생(靜春先生)이다.
고종(高宗) 소흥(紹興) 27년(1157) 진사(進士)가 되었다. 의황지현(宜黃知縣)으로 나갔다가 천거를 받아 소대(召對)하여 “고금에 변할 수 없는 풍속은 없고, 개혁할 수 없는 폐단은 없다.(古今未有俗不可變 弊不可革者)”는 주제로 논했다. 태상시주부(太常寺主簿)를 거쳐 상주(常州)와 형주(衡州)로 파견되었다가 무고를 당해 파직되어 귀향했다.
괴음정사(槐陰精舍)를 지어 강학(講學)했는데, 처음에는 형인 유정지(劉靖之)에게 배웠다. 진사가 된 뒤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려다가
주희(朱熹)를 만나 얘기를 나눠본 뒤 의리지학(義理之學)에 뜻을 두게 되었다.
여조겸(呂祖謙),
장식(張栻)과 교유했고,
왕응전(汪應展)과
이도(李燾)의 존경을 받았다. 광종(光宗)이 즉위하자 원주지주(袁州知州)로 재기했지만 병으로 죽었다.
저서에 『증자내외잡편(曾子內外雜篇)』과 『제의(祭儀)』, 『시령서(時令書)』, 『속설원(續說苑)』, 『훈몽신서(訓蒙新書)』, 『계자통록(戒子通錄)』, 『묵장총록(墨莊總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