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임진왜란에 참전하기 위해 조선에 입국한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계금(季金)이 건립한 것으로,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국내
관왕묘들 가운데 하나이다. 고금도가 속한 강진현(康津縣)의 이름을 따 강진관왕묘라고도 불렸으며, 현대의 소재지 주소 기준으로는 완도에 속한다.
일반적인 관왕묘가 관우를 주존으로 하고 아들과 심복으로 전해지는 관평, 주창, 왕보를 함께 모시거나 혹은 같은 촉한 정권의 동지들인 장비, 조운, 제갈량 등을 함께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데 반해 이곳에는 중국의 민간에서 숭배한 해상신 마조(媽祖)를 관우와 함께 모신 것이 독특한 점이다. 고금도관왕묘 건립의 주역인 진린과 계금 등이 바다에 인접한 광둥성 지역 출신이고, 또 그가 지휘한 군대가 해군이었기 때문에 해상에서의 무운과 복덕을 빈다는 목적에서 마조를 모신 듯하다.
종전 이후 진린 등이 귀국하고 나자 관왕묘에 대한 관심은 소홀해졌지만, 이후 현종 7년(1666) 현지에 부임한 유비연(柳斐然)이 건물을 보수하고 진린과 이순신을 새로이 배향했다. 숙종 대에 각 지방 관왕묘가 대대적인 정비를 받는 과정에서 고금도관왕묘 또한 여러 변화를 맞았다. 숙종 36년(1709)에는 앞서 유비연에 의해 모셔진 진린과 이순신의 향사 또한 관우와 더불어 국가 의례로 인정받고 정기적인 제례를 거행하도록 결정되었다. 이후
이이명(李頤命)이 관왕묘비의 비문을 짓고
이우항(李宇恒)이 글자를 썼으며, 이는 현재 완도 고금도 관왕묘비라는 이름으로 현존하여 문화재에 지정되었다.
영조 또한 성주, 안동 등지의 관왕묘와 더불어 고금도관왕묘의 보수와 정비를 지시했으며 정조는 고금도관왕묘에 '탄보묘(誕報廟)'라 사액하고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을 배향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관왕묘 관련 의례가 통폐합되는 과정 속에 고금도관왕묘의 국가 의례 및 관리는 모두 중단되었고, 건물은 폐쇄되었다. 일제 강점기 기간 동안 고금도관왕묘는 상당 부분 훼철되었으나 해방 이후인 1960년대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다시 국가 문화재의 반열에 올랐다. 헌데 이때부터는 관왕묘가 아닌 '충무사(忠武祠)'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어 이순신을 위한 유적이 되었다. 일제를 거치며 고금도관왕묘의 기존 의미가 상당히 희석되고, 또 중국이 아닌 조선의 국가적 영웅인 이순신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는 과정에서 묘우의 주인까지 변화한 것이다. 이처럼 고금도관왕묘, 현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창건 이래 한, 중, 일 삼국이 얽힌 역사적 흐름에 따라 그 의미와 의의가 끊임없는 변천을 겪었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고금도관왕묘는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이라는 명칭으로 사적에 지정되어 관리받고 있다. 관우의 의미가 퇴색한 대신 이순신을 모신다는 상징적 의미가 강화된 덕분인지 지방 관왕묘들 가운데는 가장 상태가 좋은 편에 속하며, 일반 관람객에게도 공개되고 있다. 권역 내부 한켠에는 완도 고금도 관왕묘비가 따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6호에 지정된 상태로 보존되어 한때 이곳이 관왕묘였음을 어렴풋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