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당시 이웃에 거주하던 남인계 선비들과 조직한 친목모임으로 이 모임의 참가자는 이유수ㆍ홍시제ㆍ이석하ㆍ이치훈ㆍ이주석ㆍ한치응ㆍ유원명ㆍ심규로ㆍ윤지눌ㆍ신성모ㆍ한백원ㆍ이중련ㆍ채흥원ㆍ정약전 등 15인이다. 회원끼리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면 서로 대하기 거북하다는 이유로 회원 연배를 다산의 위아래 네 살 이내로 제한했다.
이 모임은 정약용이 정조 13년인 27세 때 대과에 급제하여 1792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수원화성 건설을 주도하는 등 잘 나가다 1795년 을묘박해 당시 모함을 받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는 등 한직으로 밀려나 있던
1796년부터 시작되어 1797년 윤 6월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나갈 때까지 15개월 동안은 활발히 활동하였고, 그 뒤로도 가끔씩 모였다고 한다.
정약용은 고향이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나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는 명동 근처인
명례방이라는 데서 살았는데 한직으로 밀려나 있을 당시에는 정원을 가꾸면서 지냈고 당시 살았던 집의 당호를 죽란사(竹欄舍)라 했다고 한다. 죽란시사는 모임을 주로 정약용의 집(죽란사)에서 열었다고 해서 지은 거라고 한다.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나면 서지(西池)에 연꽃 놀이 삼아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 큰 눈이 왔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세밑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마시며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한다.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준비하여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하되, 혹 아들을 본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승진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