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0 ~ 1392]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이조년(李兆年)의 손자이자
이직(李稷)의 아버지이다.
1360년(공민왕 9) 상의봉어(尙衣奉御)로 재직 중 문과에 급제했는데, 당시 나이가 31세였다.
1370년(공민왕 19)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갔으며, 1383년(우왕 9)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김한로(金漢老) 등 33명을 급제시켰다.
이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승진했으나,
1388년(우왕 14)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해 형인
이인임(李仁任)의 일파가 몰락하면서 계림부(雞林府)의 봉졸(烽卒)로 전락했으며,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탈옥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淸州)의 감옥으로 옮겨졌다.
이듬해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생일에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경외종편(京外從便)을 허락받았으며, 1392년(공양왕 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복직되었으나, 동년에 졸했다. 향년 6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