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 ~ 1909] 1896년
이인영 의병부대 종사로 활동, 1907년부터 이인영의
관동창의대에서 총독장으로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활동 전개.
1869년 3월 29일 강원도 횡성군(橫城郡)에서 태어났다. 1896년과 1907년~1909년 두 차례나 이인영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강원도·경기도·경상도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하였다.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되고, 같은 해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됨에 따라 전국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배일감정이 고조되었다. 이에 화서학파(華西學派), 정재학파(定齋學派), 남당학파(南塘學派), 노사학파(蘆沙學派)를 중심으로 한 위정척사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를 배경으로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났다. 1896년 2월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종사(從事)로 활동하였다.
한편 1907년 6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압력으로 인해, 광무황제(고종)는 7월 19일 순종에게 황제의 직을 양위하였다. 또한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행정권을 일제에 빼앗겼고, 내정의 감독을 일본인 통감이 담당하게 되었다. 일제는 이어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조치를 자행하였다. 이로 인해 궐기한 의병을 가리켜 정미의병, 혹은 후기의병이라 부른다. 이전의 의병이 주로 비전투원의 결집에 의한 비정규군의 성격을 가졌다면, 이 시기의 의병은 군인, 포수의 참여로 인해 군사기술이 전문화되는 경향을 띠었고, 지휘체계 또한 대한제국 군제와 유사한 형태로 운용되었다. 또한 의병부대 간의 연합작전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장기항전을 위한 거점과 군자금 및 군량미를 수급할 수 있는 기반 마련에 힘썼다.
1907년 8월 다시 의병부대룰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12일 여주경무분파소(驪州警務分派所)를 습격하였다. 경기도 여주군(驪州郡)·지평군(砥平郡, 현 양평군)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해 9월 9일 경북 상주군(尙州郡)의 송면장(松面場, 현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화령장(化寧場, 현 상주시 화서면) 등지에서 의병장 이언용(李彦用)·이완채(李完蔡) 등과 함께 의병 8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이후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서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이은찬(李殷瓚)의 의병부대와 만났고 이인영을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모태가 되는 관동창의대(關東倡義隊)의 의병장으로 추대하면서 그때 총독장(摠督將)에 선임되었다. 이후 강원도 평창군(平昌郡)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9년 1월 1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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