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 ~ 1935] 조선 말기 서예가. 자는 장일(章日)이고, 호는 벽하(碧下)이며, 본관은 김제(金堤)이다. 벽성군(碧城君) 조연벽(趙連壁)의 후손이며, 부친은 조하섭(趙夏燮)이다.
어려서부터 서예를 즐겨 하여, 진(晉), 당(唐), 송(宋)의 여러 대가들의 글을 보며 정진하여 왕대령(王大令)의 「낙신부(洛神賦)」와 안노공(顔魯公)의 가묘비(家廟碑) 서체의 진수를 터득하였다.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 들어가 10여 년간 시문(詩文)과 난죽(蘭竹)을 배워, 글씨는 부드러운 운치가 스승인 이정직 보다 낫고, 죽(대나무)은 자하(紫霞) 신위(申緯)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음률(音律)에도 뛰어나 ‘사절(四節)’이라는 세평을 얻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그의 글과 난을 보고 '창난벽죽(倉蘭碧竹)'이라고 칭탄할 정도로 학계에 이름이 높았다.
일찍이 중국 북경(北京)과 남경(南京)에서 3년간 지내면서 당대의 학자와 서예가들과 교유하며, 귀중한 서화를 수집하여 왔으나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 때에 병화로 소실되었다.
몽인 정각교는 그의 글씨를 구양순(歐陽詢)에 비겼고,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송재(松齋) 송일중(宋日中),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조주승을 손꼽아 정족(鼎足)이라고 칭송하였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일주문(一柱門)의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현액과 금강산 유점사(楡店寺)의 대웅전(大雄殿) 대액, 전주 남고산성(南固山城) 관성묘(關聖廟) 현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