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88] 고려 후기, 좌대언 · 밀직부사 · 도병마사 · 삼사좌사 등을 역임하며 2등 공신에 책록된 공신이자 문신.
본관은 서원(瑞原). 자(字)는 중창(仲昌), 호는 동정(東亭). 아버지는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이다. 생모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한공(權漢功)의 딸이며, 계모는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배씨(裵氏)이다. 염국보(廉國寶)와 염정수(廉廷秀)가 형제이다. 이색의 처(妻) 이종사촌이 된다. 평양조씨(平壤趙氏) 조문경(趙文慶)의 딸과 혼인하고, 다시 청주한씨(淸州韓氏) 한공의(韓公義)의 3녀와 혼인하였는데, 한수(韓脩)가 처남이 된다. 조선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장인이다.
1353년(공민왕 2)에 송천봉(宋天鳳) 문하에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1357년(공민왕 6)에 이인복(李仁復)과 김희조(金希祖) 문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 지신사(知申事)로서
홍건적(紅巾賊)을 격파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워, 이듬해 위위윤(衛尉尹)으로 2등 공신이 되었다. 이해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공거(知貢擧) 이무방(李茂芳)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김자수(金子粹)·이백지(李百之)· 조문발(趙文拔)· 정이오(鄭以吾) 등을 선발하였다.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67년(공민왕 16)에는 밀직지신사(密直知申事)가 되었다. 또한 문신들에게 품계에 따라 베를 내게 하는 등 경비를 마련하여 성균관 중영의 일을 주관하였다.
1374년(공민왕 23)에 탐라(耽羅) 목호의 난(牧胡의 亂)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어 최영(崔塋) 등과 함께 출전해 이를 진압하였다. 1375년(우왕 1)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려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80년(우왕 6)에 지공거로 동지공거 박형(朴形)과 함게 과거를 주관하여 이문화(李文和)·이지직(李之直)· 한상질(韓尙質)·성수항(成守恒) 등을, 1386년(우왕 12)에 동지공거로 지공거 이색(李穡)과 함께 맹사성(孟思誠)· 길재(吉再)· 심온(沈溫)· 조연(趙涓)·정곤(鄭坤)· 신원필(申元弼) 등을 각각 선발하였다.
이인임의 심복
임견미(林堅味) 등과 함께 많은 문신을 모함해 축출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하였다. 또한 백성의 토지와 노비는 물론 국유지까지 강점하는 등 비행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연락(宴樂)에 빠져 있던 우왕을 충동해 음행을 일삼도록 부추겨 국정이 더욱 문란해지게 하였다.
1387년(우왕 13)에는 염흥방의 종 이광(李光)을 시켜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의 토지를 강탈하자 이에 분개한 조반이 이광을 잡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염흥방은 조반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해 조반과 그 가족을 잡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상만호(上萬戶)의 지위를 이용해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이에 1388년(우왕 14) 그들의 행패를 미워하던 우왕 및 최영·이성계 등에 의해 그 일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학문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가 되었으나 시험관으로 공정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저서로는 『동정집(東亭集)』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