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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학학회 2011, vol.19, no.1, 통권 20호 pp. 169-222 (54 pages)
제국의 음악가 현제명 연구 노 동은 * 1. 글을 시작하며: 정치 음악가 현제명 2. ‘한국의 로디 히버’를 꿈꾼 ‘로디 현’ 3. 일본 시국논리의 정치적 모색 4. 1937년 전향성명서 이후의 정치 활동 5. 최고 · 최대의 음악계 대부로서 정치 활동 (1) 경성음악협회 간사로서 내선일체화 활동 (2) 조선음악협회 이사로서 일본정신 구현과 일본국민음악 수립 활동 (3)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으로서 일본국민음악 정신대 활동 (4) 경성음악연구원 주재자로서 황국신민 음악교육 활동 6. 해방 이후의 활동 7. 글을 맺으며
* 이 논문은 연구조교 한윤정 · 김문성이 공동연구자로 참여하였다.
이 글은 현제명이 1903년에 태어나 1945년 8월 해방이 될 때까지 42년간, 곧 일제 강점기의 현제명의 음악 활동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활동했는지를 살핀 글이다. 단적으로 현제명은 한국 근대 양악계의 최정상에서 활동한 정치적 음악인이다. 그는 테너로서 당대에 명성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로, 음악교수로, 음악대학 학장으로, 조선음악가협회 이사장으로서 최정상의 대표로서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그는 명실 공히 양악계 악단의 대부였다. 그가 살아온 시대마다 그가 조직하거나 관여한 조직체가 악단을 대표하는 산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 정치가로서 음악사회를 주도했다. 순수한 악단 조직체이든, 정치적 조직체이든, 친일 조직체이든 그는 항상 정상에서 악단을 주도하며 일본제국과 손잡고 음악정책을 주도한 음악인이다. 본격적인 조직체인 ‘조선음악가협회’가 1931년에 창립될 때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악단을 대표하였으며, 1938년 조선 총독부와 일본음악인들이 중심적으로 조직한 ‘경성음악협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어 조선의 음악인을 대표하였으며, 1942년 조선 총독부의 일본국민음악 정신대(挺身隊)로서 중심적인 연주단체로 재출발한 ‘경성후생악단’의 이사장이었으며, 1944년에 조선 최대의 악단 조직체로 일본인들이 주요 부서를 장악한 조선 총독부 조직체 ‘조선음악협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미군정 음악정책전개의 정상급 음악인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쿠로야마 사이아키’(玄山濟明)로 창씨를 개명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들어서자마자 그는 ‘로디 현’(Rody Hyun)이라는 이름으로 곧바로 변신하기도 한다. 누가 보기에도 일본인 행세에서 곧바로 미국인 행세로 변신하는 그의 현실적 수완에 감탄한다. 결국, 1945년 12월에 미군정청 장관으로 취임하는 러치(Archer L. Lerch)를 그가 조직한 고려교향악협회 명예회장으로 재빨리 선임하여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다. 그만큼 그의 현실적인 음악 정치력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실제로 한국민주당 당원으로서, 한국민주당 중앙집행위원회 문교위원으로 활동한 정당 정치가이었다.
정치가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적용되는 규칙이자 지배이고, 통치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또한 수정하고 파괴하는 활동이라면, 음악가 현제명을 통하여 정치적 활동을 본다. 한 음악가로서 현제명은 촉망받은 테너이었지만, 성악가로 활동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적 활동으로 근대 양악계 대부가 되었다. 현제명 자신이 권력을 활용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모두 정치적 활동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그의 열정과 헌신과 노력은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1937년 그의 사상적인 전향성명서 발표 이후 대동민우회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 대화숙 · 조선임전보국단 ·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조선 총독부가 공인하는 준국가기관에서 사상계 대부로 활동한다. 그리고 탈민족적인 입장에서 일본정신과 그 문화와 대화하는 정치 이념으로 활동한다.
일본제국이 서양제국주의자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하고 팔굉일우로 결합하는 일본주의로 조선과 아시아를 구하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이야말로 세계 인류를 지도할 원리로 깨닫고 이제부터 일본정신 사도로서 매진한다는 그 정치적 활동이 현제명의 활동이었다. 이 활동은 경성음악협회 · 조선음악협회 · 경성후 생실내악단 · 경성음악학교 등의 음악계 정상임을 상승시켜 한국 최대 최고의 음악 정치가로 하였다.
주제어: 정치 활동(政治活動), 조선음악가협회(朝鮮音樂家協會), 경성음악협회(京城音樂協會), 조선 총독부(朝鮮總督府),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 總動員 朝鮮聯盟),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 全鮮思想報國聯盟), 대화숙(大和塾),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이 글은 한국 근대 양악계의 최정상에서 활동했던 현제명이 1903년에 태어나 1945년 8월 해방이 될 때까지의 기간 중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그의 음악 활동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전개되었는지를 살핀 글이다. 현제명은 성악가, 작곡가, 음악대학 교수, 조선음악가협회 이사장 등 다방면에 걸쳐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치며 영향력을 끼친 명실 공히 한국양악계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음악가로서의 정체성만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지향성과 그에 따른 활동을 펼쳤던 ‘정치 음악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일제시기에 그는 여러 음악 단체와 기관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통치 시기라는 정치적, 역사적 특수성 아래에서 조선 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예를 들어 ‘조선음악가협회’가 1931년에 창립될 때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악단을 대표하였고, 1938년 조선 총독부와 일본음악인들이 중심적으로 조직한 ‘경성음악협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어 조선의 음악인을 대표하였다. 또 1942년 조선총독부의 일본국민음악 정신대(挺身隊)로서 중심적인 연주 단체로 재출발한 ‘경성후생악단’의 이사장이었으며, 1944년에 조선 최대의 악단 조직체로 일본인들이 주요 부서를 장악한 조선 총독부 조직체인 ‘조선음악협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미군정이 음악 정책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도 주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고려교향악협회 초대 이사장으로, 국립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의 초대 음악부장(1946), 한국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1949),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초대 학장(1953),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1955)으로 음악예술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1945년 12월에 미군정청 장관으로 취임하는 러치(Archer L. Lerch)를 그가 조직한 고려교향악협회 명예회장으로 재빨리 선임할 만큼 매우 정치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한국민주당 당원으로서 한국민주당 중앙집행위원회 문교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현제명 연구는 음악을 통한 그의 정치적인 활동 내용과는 관계가 없는 대개 평전 관련 연대기와 작가론 연구가 중심을 이루었다. 연보와 함께 작가론 연구에 초점을 맞춘 김성태(金聖泰)1), 작품 중심으로 접근한 지철민 · 심상곤2), 작품목록과 생애와 활동을 사전적으로 접근한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의 출판물3), 사적(史的)인 평가나 짧은 서술로 접근한 글4), 연대기적 서술과 작가론으로 접근한 한상우5) 등이 그동안 현제명에 대한 연구 성과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김성태,6) 이유선,7) 나운영,8) 손태룡9) 등이 연대기와 작가론 측면에서 현제명을 조명하였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현제명 연구는 현제명의 생애를 체계화시키려는 연대기와 작가론 중심으로 연구한 글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글은 1945년까지 현제명의 근대 시기의 음악적 활동을 ‘정치 음악인’으로 규정하면서 연구해 보고자 한다.
1) 김성태, “현제명선생의 생애와 업적,” 『예술원보』 5 (1960), 10-20. 이 글은 “현제명 박사의 생애와 업적”이란 제목으로 『연세음악55년사』 (연세음악55년사편찬위원회편-연세대학교 ‘현제명박사기념관건립기성회, 1974), 38-53에 재게재되었다. 2) 지철민 · 심상곤, “현제명의 오페라 ‘춘향전’,” 『봉선화에서 무덤까지: 한국 명가곡을 찾아서』 (도서출판 무궁화사, 1973), 34-38; 이향숙, “산들바람,” 『가곡의 고향』(한국일보사, 1988), 36-42. 3) “현제명,” 『한국작곡가사전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5), 408-411; 이상만, “현제명,” 『한국음악사전 Ⅲ』(대한민국예술원, 1985), 437. 4) 이상만, “음악개관,” 『문예총감: 개화기-1975』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 329-352; 이강숙 · 김춘미 · 민경찬, 『우리양악 100년』(현암사, 2001). 5) 한상우, “현제명: 한국음악계의 진취적인 견인차,”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Ⅲ, 공로 음악가의 예술세계와 삶』 (대한민국예술원, 1998), 17-24. 이 글은 “정열의 음악가: 현제명”이란 제목으로 바뀌어 『한국양악인물사 1: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 (지식산업사, 2003), 228-235에 재게재되었다. 6) 김성태, “현제명박사의 생애와 업적,” 『연세음악55년사』 (연세음악55년사 편찬위원회편-연세대학교 ‘현제명박사기념관건립기성회, 1974), 38-53. 7) 이유선, “자라난 대연세의 음악의 발자취,” 『연세음악55년사』 (연세음악55년사 편찬위원회편-연세대학교 ‘현제명박사기념관건립기성회, 1974), 71-99. 8) 라운영, “현제명박사론,” 『연세음악55년사』 (연세음악55년사 편찬위원회편-연세대학교 ‘현제명박사기념관건립기성회, 1974), 134-142. 그 외에 “현제명 박사의 약력”은 같은 책, 69-70 참조. 9) 손태룡, “한국양악사의 큰 별 현제명의 발자취,” 『대구음악사』 (남구대덕문화원, 2000), 116-128.
현제명은 1903년 1월 6일 경북 대구 남산동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까지 아명(兒名)은 소돌(小乭) 아니면 수석(水石)이었다. 그는 부모가 기독교인으로 대구제일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으므로 제일교회를 출석하며 성장하였다. 1909년에 대구 대남학교를 입학할 때부터 줄곧 기독교학교만 다녔다. 1913년에 계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제일교회 성가대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워갔다.10) 그러다가 1918년 11월에 그는 학교를 자퇴하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베어드(W. M. Baird)가 설립하고 1906년 대학부가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인 숭실전문학교가 있는 평양으로 진출했다.
그곳에서 현제명은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음악적 경험을 하게 되는데 하나는 숭실전문학교에서의 음악 경험이다. 음악부원으로서 그는 박태준(朴泰俊), 차재일(車在鎰), 박경호(朴慶浩, 피아노), 이인선(李寅善, 테너), 김세형(金世炯, 작곡) 등과 지도교수급인 선교사들과 그 부인들과 교류하였고, 또 학교 밖에서는 장대현교회를 비롯한 평양의 각 교회에서 활동을 통해 음악 체험을 하면서 음악가로서 꿈을 키워나갔다.
또 하나는 이곳에서 그는 미국 복음전도자인 로디히버(Homer Alvan Rodeheaver; Rody)11)에게 발탁되어 미국 유학을 가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4학년이 되던 1923년 9월 로디히버는 다른 복음전도자들과 함께 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 집회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시아권 젊은이들을 발탁하여 미국에서 음악선교사들로 양육시키려는 목적12)을 가지고 있었는데 로디히버 일행은 숭실전문학교에서 채플 시간에 복음을 전하면서 현제명을 만났다. 그 시간에 현제명이 복음 성가를 독창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초청이 몇 년 후에 이루어진다.
1926년에 로디히버의 초청으로 미국에 간 현제명은 시카고에 도착하여 무디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을 다녔고, 다음 해인 1927년에 건 음악학교(The Gunn School of Music)로 이적하여 성악을 전공하고 이어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같은 학교의 연구과에 진학하여 1929년 2월에 음악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 기간 중 1928년 8월에는 전 미국현상독창대회에서 1등으로 입상하기도 하였다. 1929년 8월에 귀국한 현제명은 이때부터 “금의환향 음악인”으로 언론과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13)
귀국한 현제명은 복음전도자 · 연희전문교수 · 조선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의 직함을 가지고 작곡 발표와 작품집 출간, 경성방송국 방송 해설 등 전 분야에 걸쳐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먼저 복음전도자 로디히버처럼 전국 각 기독교 단체로 진출하여 독창회를 갖고 창작과 그 보급에 주력하였다. 경성을 비롯하여 신의주 · 선천 · 평양 · 진남포 · 해주 · 사리원 · 함흥 · 라진 · 원산 · 수원 · 청주 · 예산 · 공주 · 전주 · 광주 · 목포 · 대구 · 밀양 · 부산 등의 각 교회들과 기독청년면려회나 엡윗청년회 등에서 독창회를 열거나 행사에 출연하여 독창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 또 서울 수표동예배당에서는 정규 낮 예배 시간에 ‘종교와 음악’이라는 제목으로 강화(講話)를 하였고,14) 기독교 복음송을 작곡 또는 편곡하여 보급하는 일도 하였다.
현제명은 귀국 후 193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개인 독창회를 가졌다.15) 그의 독창회는 기존 음악회의 창가류 독창에서 가곡과 오페라 등 전문 독창으로의 전환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의 이러한 전문 성악가로서 활동은 동시대 테너 안기영(安基永)과 양대 산맥을 형성하며 30년대 중반까지 성악계를 주도하였다. 그의 독창회나 음악회 출연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계기는 자신의 교회음악 선교 목적과 성악가로서 발표 말고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면서부터였다. 1929년 8월 미국에서 귀국한 현제명은 가을학기부터 연희전문학교(연전, 延專) 음악 전임 강사로 출발하여 1943년 7월까지 13년간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각종 대회에 성악가로 출연하거나 연주단을 조직하여 지휘하거나 감독하는 한편 전국적 규모의 음악 행사를 조직하여 열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5인 정도의 음악대나 더 많은 규모의 관현악단 · 취주악단 · 합창단과 그 밖에 4중창단과 솔리스트 등을 조직하여 전국순회음악회(1930~36) · 춘기음악대회와 추기음악대회(1931~36) · 시민위안음악회 등을 개최하였고 하기음악강습회(1931~35)와 전선(全鮮)남녀중학교 음악경연대회(1932~37)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기도 하였다.
현제명이 성악가로서 부각이 되자 음반 회사의 취입이 뒤따랐다. 일본축음기상회의 콜럼비아(Columbia) 음반과 리갈(Regal) 음반 그리고 빅타(Victor)와 폴리도르(Polydor) 음반사에서 제작 발매되었는데,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주로 콜럼비아 음반에서 정규반과 청반집으로 음반을 취입하였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한국양악계 최초의 악단을 조직한 장본인이었다. 이미 1880년대 일본 유학파 출신인 이은석(李殷石, 殷乭) 등과 1900년대 이후 국내에서 육성된 정사인(鄭士仁) · 백우용(白禹鏞) 그리고 이상준(李尙俊) · 김인식(金仁植) · 김형준(金亨俊) 등과 일본 유학파인 김영환(金永煥) 등의 양악 그룹이 있었지만, 1930년대는 일본과 미국, 그리고 유럽의 유학파 그리고 연전과 숭실 및 이화여전 출신들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직후이었다. 자연히 이들 30대 전후 음악인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협회 조직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1931년에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되었으며 현제명은 이 협회의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조선음악가협회는 1931년 2월에 조직되어 1938년 7월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해산될 때까지 8년여 동안 두 번의 음악회를 제외하면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1938년 조선 총독부와 협의 하에 7월 6일에 해산하였고, 대신 현제명은 일본인들과 함께 내선일체의 음악 조직체인 ‘경성음악협회’의 발기인이 되어 동 협회를 창립시키는 장본인이 되었다.16)
한편, 그는 1933년 9월에 콜럼비아 문예기자 안익조(安益祚)와 함께 동경음악신문 경성지부 설립을 설립하는가 하면, 같은 해 11월에는 조선아동예술연구회 발기동인이 되어 활동하였고 또 두 편의 작곡집과 한편의 명작가곡집을 편집하여 발행할 정도로 작곡가로서도 활동을 하였다. 특히 현제명의 모든 작품에서 「조선의 놀애」가 주목되는 것은 “조선 땅과 사람과 그의 힘과 아름다움과 그의 빛난 장래에 약속과 희망”으로 동아일보가 현상 모집한 시에 창작한 작품으로 그에게서 민족현실과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조선을 전시체제로 구축한 조선 총독부는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우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동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예사는 우리 2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조선이로세”라는 가사 내용은 조선 총독부가 볼 때 반국가적인 내용이어서 그 발표자 이은상조차 신문지상에 익명생(匿名生)으로 발표할 정도였다.
<사진 1> 현제명 작곡집 제1집과 제2집 표지
<악보 1> 현제명 작곡의 「조선의 놀애」(1932)
그러나 그는 이후 「조선의 놀애」창작에서 보여준 민족 문화와 대화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1937년 중일 전쟁 직후 ‘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조선의 민족 문화와의 대화 대신 일본 문화와 대화하는 탈민족적 성향의 태도를 표명하였고 해방 직후부터는 미국 문화와의 대화를 본격화시켰다.17)
10) 손태룡, “한국양악사의 큰 별 현제명의 발자취,” 118. 11) 로디히버(Homer Alvan Rodeheaver)는 복음전도자로서 시카고를 중심으로 음악감독과 음악출판업, 트럼본 연주가이자 복음송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레인보우 음반사 사장, 로디히버 출판사 대표로 있으면서 ‘로디히버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Bert H. Wihot, Rody:Memories of Homer Rodeheaver (Greenville: Bob Jones University, 2000), xi-xiii 참조. 12) Homer Rodeheaver, Singing Black: Twenty Thousand Miles with a Music Missionary(Chicago: The Rodeheaver Company, 1936), 11, 96. 로디히버는 ‘음악선교사’(Music missionaries) 7인이 현재 그들 모국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1923-1924년간의 유럽과 동양권에 이어 30년대에 아프리카 선교 여행도 아프리카인을 선발하여 현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음악선교사를 육성할 뜻을 밝히고 있다. 13) 『동아일보』, 1929년 8월 11일자 5면과 8월 19일자 4면. 그리고 『조선일보』, 1929년 8월 18일자 석간 2면에서 음악 학사 학위를 1929년 2월에 취득하고 8월에 귀국하였음을 밝혔다. 14) 『동아일보』, 1933년 5월 21일자 2면, 1935년 12월 9일자, 2면. 15) 첫 번째 독창회는 1929년 9월 27일 경성공회당(長谷川町) 하오 8시에 연희전문학교 주최와 동아일보사 학예부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이 독창회에 이어 10월 5일 평양에서 현제명 독창회가 개최되었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25일 5면, 9월 27일 5면. 두 번째 독창회는 1934년 10월 19일 경성공회당에서 벡커부인의 반주로, 연희전문학교 주최와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밤 8시에 개최하였다. 『동아일보』, 1934년 10월 3일, 10월 17일자; 『조선일보』, 1934년 10월 19-20일자. 16) “총후국민의 적성,” 『동아일보』, 1938년 7월 11일 석간 2면. 17) 현제명의 작품 《춘향전》(1950)이나 《왕자 호동》(1954)은 오페라 창작 운동에 영향을 준 작품이지만, 이 작품들은 서양의 기능화성법으로 처리한 작품이어서 단계(‘만남-단계-수정’)로 보면 첫 번째 ‘만남’ 단계의 작품이다.
조선 악단을 대표하던 현제명은 1937년 7월 ‘동우회’(同友會) 사건을 계기로 이전과는 구별된 행보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동우회’는 흥사단(興士團)의 정신과 방침으로 1922년 국내에서 조직한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로 이름을 바꾸고, 1929년에 또다시 회명(會名)을 ‘동우회’(同友會)로 고친 이름으로 무실(務實) · 역행(力行) · 신의(信義) · 용기에 뜻을 두고 지 · 덕 · 체로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도야시키려는 목적으로 조직된 합법적인 단체였다. 경성과 평양 그리고 선천 등 3개소의 지회가 있는 동우회는 경성지회 단우(團友)로 홍난파와 현제명 그리고 평양지회에 김세형이 활동하였다. 일제는 동우회가 실력 양성에 전념하는 수양 단체임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1937년 중일전쟁 직전부터 전시 체제를 확립하려고 동우회 등 민족 단체를 사상 통제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현제명은 미국에서 1937년 2월말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4월 신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 뒤인 5월 1일에 현제명은 조선총독부의 친일 단체인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에 음악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18)
<사진 2> 수양동우회 입단 시 현제명
이 단체는 일본이 중일 전쟁을 계기로 성전(聖戰)을 수행하는 국가적 시국 차원에서 조선을 통제하고 황민화와 병참기지화 정책 수행을 애국적인 문예물로 창작 보급하겠다는 바의 교화선도운동 단체이다. 조선문예회는 ‘일본 황민의 정신작흥과 국체관념의 명증’을 구현하려고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 주도와 조선 총독부 사회교육과 후원 하에 민간인들로 조직된 조선 총독부의 외곽 단체이다.19) 회장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인 타카기(高木市之助), 간사에 최남선(崔南善)과 카마타(鎌田 澤一郞)였으며, 조선인 14인과 일본인 17인의 회원이 선임되었다. 조선인은 김억 · 이광수 · 최남선 등의 문인들과 김영환 · 박경호 · 윤성덕 · 이종태 · 하규일 · 함화진 · 현제명 · 홍난파 등의 음악인들이었다.
현제명은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회원들이 1937년 5월 17일부터 6월 11일에 걸쳐 검거될 때 홍난파와 함께 체포되었다.20) 그리고 1937년 8월 7일에 종로경찰서에서 동우회 경성관계자들에 대한 취조와 관할 검사국의 절차가 끝나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신병구속 기소가 15명, 기소유예자 23명, 기소중지 17명 등 모두 55명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檢事正)에게 송치되었는데 현제명은 홍난파와 함께 구속기소된 15명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은 검사 심사에 따라 기소유예로 처분되어 8월 21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21)되었지만 대신 그는 모든 공적 직책을 사직하여야 했으므로 8월 31일자로 연희전문학교장 앞으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22)
하지만 현제명은 구속 기간 중인 7월 11일 조선문예회 첫 번째 발표회(부민관대강당, 오후 8시)인 ‘신작가요발표회’에서 작품 발표를 하였다. 다른 동우회 단우들이 구속되어 고문을 받는 그 기간에 그는 조선문예회 발표에 출연하는 등 공적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최남선 작사의 두 작품인 「가는 비」, 「서울」을 각각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한편 7월 11일 조선문예회의 첫 번째 발표회가 있는 그 시각에 조선 총독부는 긴급 회의를 개최하여 중일 전쟁을 통하여 모든 체제를 전시 체제로 전환시키는 ‘시국인식’을 공식화하였다. 이로써 조선문예회의 목적도 전시 체제의 시국 상황으로 바뀌고, 현제명은 조선 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주창하는 “시국인식 철저는 노래로부터”라는 슬로건에 동조하며 일본애국가요와 그 시국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문예회가 8월 24일 총독부 제2회의실에서 문예보국을 토의하자 현제명은 더 적극적으로 앞장 서 나갔는데 이 회의에서 「총후풍경가」(銃後風景歌) · 「황군격려가」(皇軍激勵歌) 등의 작사 · 작곡 및 보급을 실행하기로 결의하였고, 9월4일에 수편의 가사를 지었으며, 또 9월 15일 오후 7시 ‘이왕직아악부’에 조선 총독부 관계자들이 참석한 ‘시국가요발표’ 시연회(試演會)에서 일본어와 조선어 가사로 된 현제명과 홍난파 등의 창작물 31편의 발표가 있었다.23) “황군용사를 격려하고 후방의 진심을 모으려는 가요와 창가와 동요의 시국가이자 애국가”를 사전에 검증하고 조율했던 이 시연회에서 안도오(安藤芳亮)의 「신고쿠 닛폰」(神國日本, 신국일본, 테라모토 작사) 등 31편의 작품이 시연되었다. 이 작품들은 시연회가 있던 날로부터 보름후인 9월30일에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
조선문예회는 1937년 중일 전쟁을 통해 텐진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침략한 그 시기에 바오딩(保定) 함락을 축하하고 황군에게 감사하며 황군위문금 조성 목적으로 ‘애국가요대회’를 1937년 9월 30일 경성부민관대강당에서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의 주최로 개최하였다.24) 조선문예회가 제1회 신작가요발표회(7. 11)에서 명분으로 내걸었던 ‘가요정화운동’은 7월 이후 중일 전쟁으로 급격하게 변하는 전시 체제라는 시국 현실에 따라 ‘일본 황민의 정신 작흥과 국체관념의 명증’을 드러내는 ‘애국가요대회’로서 발표회였다. 현제명은 이날 하부 요네사쿠(土生よねさく)의 일어 작시 「오미오쿠리」(お見送り, 전송)에 곡을 부쳐서 소프라노 야마나카 사찌코(山中幸子)의 독창(4중주 반주), 또 최남선의 조선어 작시에 곡을 붙인 「장성의 파수」(長城의 把守)를 자신의 독창(박경호의 관현악 지휘)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이 밖에도 제1부 출연자 전원이 제창한 「신고쿠 닛폰」(神國日本, 신국일본, 安藤芳亮 작곡 · 寺本喜一 작시), 「스스메 코오군」(進め皇軍, 진격하는 황군, 大場勇之助 작곡 · 衫本長夫 작시), 「테키젠 죠오리쿠」(敵前上陸, 적전상륙, 吉澤實 작곡 · 寺本喜一 작시), 「정의의 개가」(正義의 凱歌, 홍난파 작곡 · 최남선 작시), 「총후의남」(銃後義男, 이면상 작곡 · 최남선 작시), 「방호단가」(防護團歌, 이종태 작곡 · 최남선 작시) 그리고 제2부에서 남성 출연자 전원이 제창한 「호테이 라쿠죠오노 우타」(保定落城の歌, 보정 낙성의 노래, 大場勇之助 작곡 · 田中初夫 작시), 「코오시노 우타」(皇師の歌, 황군의 노래, 大場勇之助 작곡 · 上田忠男 작시), 「후루헤 보오고단」(奮へ防護團, 떨치는 방호단, 大場勇之助 작곡 · 上田忠男 작시)과 그리고 마지막 작품으로 출연자 전원이 홍난파 지휘의 관현악 반주로 제창하는 작품 「쿠우군노 우타」(空軍の歌, 공군의 노래, 홍난파 작곡 · 衫本長夫 작시)와 「세이토오 오쿠루 우타」(征途を送る歌, 장도를 배웅하는 노래, 大場勇之助 작곡 · 衫本長夫 작시)에 각각 출연하여 애국가요대회를 장식하였다.
<사진 3> 조선문예회의 애국가요대회(1937. 9. 30, 경성부민관)
이로써 현제명은 단순히 군가프로그램에 출연만 하는 성악가가 아니라 ‘일본 황민의 정신 작흥과 국체관념의 명증’으로 군가를 작곡하고 지휘하며 노래하며 지도하는 음악인으로 변모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테너 현제명이 조선인들 앞에서 일본 애국가요를 불러주거나 앞장서서 지도하거나 또는 작곡하여 발표하는 것은 내선일체가 된 황민으로서 본분을 다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문예회 애국대회 발표는 물론 1937년 10월 3일의 ‘음악보국 대연주회’에서도 출연하여 애국가요 「센찌헤」(戰地へ, 전지에)를 김원복 반주로 발표하였다. 부민관에서 경기도군사후원연맹 · 경성군사후원연맹 공동후원과 경성고등음악학원 주최로 개최된 이 보국연주회에서 그는 전 출연자 중 일본군가를 곡목으로 선택하고 부른 유일한 음악가였다.
당시 동우회 사건의 기소유예자들은 8월말부터 11월 초순경까지 ‘사상전향서’(思想轉向書)를 제출하였다. 조선의 민족주의를 포기하는 대신 일본천황의 신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내선일체와 일본의 대동아공영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맹세를 만인에게 공개하는 이 전향서는 김여제(金輿濟)와 최봉칙(崔鳳則)이 8월말에, 이묘묵(李卯黙)과 오현준(吳鉉埈)이 9월에, 이인혁(李明爀) · 차상달(車相達) · 홍난파(洪蘭坡)가 11월 초에 각각 당국에 제출하였으며 현제명 역시 다른 7인들과 함께 ‘전향성명’을 냈다.25) 이에 앞서 8월 말에 연희전문학교를 사직한 현제명은 당국에 의하여 사상검증과 대동아공영 건설에 매진하는 활동이 확인되고 학교당국의 노력으로 1년 뒤인 1938년 가을 학기에 갈홍기 · 하경덕 · 이묘묵 등과 함께 복직되어 다시 교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8) 『매일신보』, 1937년 5월 2일 석간 3면. 19) 『매일신보』, 1937년 7월 12일 석간 2면. 한편, 조선문예회 사무소는 당분간 조선총독부 도서관내에 두기로 하였다. 『대판매일신문』, 소화12년 4월 27일. 20) “同友會京城關係者ノ送局ニ關スル件-對七月二十三日付京高特秘第一三七三號ノ九,” (京高特秘 第一三七三號ノ十), 소화 12년 6월 12일자에 의하면 홍영후(난파)는 6월 11일자로 체포되었으나, 현제명은 일자 미상일에 체포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21) 상게서에 의하면 관할 종로경찰서 감독하에 취조를 속행한 결과 경성관계자 전부를 취조 완료 후 관할 검사국과 타합(打合)하여 치안유지법위반자 55명의 의견을 붙여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검사정으로 송치하기로 하고 평양 및 선천관계에 대한 건은 계속 엄밀 취조를 밝히고 있다. 본 건에 의해서 홍영후와 현제명은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가 되었다. 22) 玄濟明, “證明書,” 『同友會關係起訴猶豫者ニ關スル件』 (京種高秘第八二七二號ノ六)에 첨부된“辭職證明書” 중 玄濟明의 證明書. 23) 『매일신보』, 1937년 9월 17일 석간 2면. 24) 『경성일보』, 1937년 9월 30일 석간 4면. 25) 『삼천리』, 11/1 (삼천리사, 1939), 14.
현제명은 전향성명서를 발표한 이후 대동민우회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 대화숙 · 조선임전보국단 ·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조선 총독부가 공인하는 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경성음악협회 · 조선음악협회 · 경성후생실내악단 · 경성음악학교 등을 통해 음악계를 대표하는 한국 최고의 ‘음악 정치인’으로 부각되었다. 그는 제1차 전향성명서를 발표한 지 일곱 달 후인 1938년 6월 18일에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면서 제2차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수만 장이 인쇄된 이 전향성명서를 1차와 같이 국내외 지인들에게 발송하여 자신이 다시 한번 전향하였음을 천명하였다.26)
다음은 1938년 6월 18일 대동민우회에 가입할 때 제2차 전향성명서의 일부이다.27)
성명(聲明) 불초(不肖) 등이 일찍 흥사단=수양동우회 일원이던 바 현하(現下) 내외정세에 변전(變轉)에 감(鑑)하여 종래 포회(抱懷) 하여오던 주의주장(主義主張)에 근본적 결함과 오류에 있음을 오(悟)하고, 단연 차(此)를 청산하고 금회 신국민적 자각하에 대동민우회에 입회함에 당(當)하여 불초 등의 거취와 동향을 명백히 하는 동시에 오인(吾人)의 신(新)히 파악한 견해와 주장을 피력하여 구지제형(舊知諸兄)에게 소(訴)하고 광(廣)히 강호제현의 일고(一考)에 공(供)하는 바이다. [···] 이에 오인(吾人)은 황도(皇道) 일본의 명일의 모습을 생각하여 오인(吾人)의 종래의 그릇된 민족관․국가관․세계관은 결(潔)히 청산함을 득(得)하였다. [···] 금차(今次)의 지나사변은 이미 주지하는 바와같이 일본의 대 국가적 사명의 수행, 즉 아세아 제 민족을 백인 제압의 질곡에서 해방하려는 목적의 성전(聖戰)이니 오등(吾等)은 금후 여하한 희생도 불압(不厭)하고 견인지구(堅忍持久) 거국일체가 되어 목적의 관철을 기(期)하여야 될 것이다. [···] 팔굉일우(八紘一宇) 도의적 결합으로 하는 동양정신 일본주의야말로 진(眞)히 동아(東亞)를 구하고 세계인류를 지도할 원리이다. 고로 우리는 광휘 있는 일본정신 사도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감(感)한다. 인(因)하여 오인(吾人)은 이제부터 이금여상(爾今如上) 신념의 주장 하에 스스로 자분(自奮) 노력하기를 기(期)하는 바이다.(밑줄은 필자)
1938년 6월 18일자로 작성된 이 성명서는 현제명(玄濟明)을 비롯하여 갈홍기(葛弘基) · 김려식(金麗植) · 김흥제(金興濟) · 김로겸(金魯謙) · 김기승(金基昇) · 전영택(田榮澤) · 정남수(鄭南水,英道) · 노진설(盧鎭卨) · 유형기(柳瀅基) · 이기윤(李基潤) · 이명혁(李明赫) · 이묘묵(李卯黙) · 박태화(朴泰華) · 차상달(車相達) · 최봉칙(崔鳳則) · 하경덕(河敬德) 그리고 홍난파(洪蘭坡) 등 총 18명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이 전향성명서에서 현제명은 다른 17명과 함께 “일본의 대 국가적 사명의 수행, 즉 아세아 제 민족을 백인제압의 질곡에서 해방하려는 목적”을 관철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본정신으로 세계 인류를 지도할 원리로 삼아 “일본정신 사도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가지고 이와 같은 새로운 신념으로 활동하겠다”는 논리를 확고히 한다.
이 성명서는 이후 1938년 6월 25일과 7월 1일 종로경찰서 · 경기도경찰부 · 경성지방법원 · 경성부내 각 경찰서 앞으로 보고되었으며, ‘만주사변 1주년 기념’(7월 7일) 직후 일본과 조선의 각 지역과 미국 · 중국 · 만주 등지의 동우회 관계자와 친지 그리고 국내 단체를 비롯하여 신문 · 잡지 등에 일제천황에 대한 충성의 종교보국논리의 전향성명 사실을 인쇄물로 통보하기 시작했다.28) 1938년 8월의 『삼천리』와 『기독신문』에도 그 전문이 발표되었다.29)
대동민우회에 1938년 6월 18일 가입한 현제명은 동회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이후 ‘정동연맹’)에 가입(7월 7일)되자 그 가맹 단체에서 활동하였는데, ‘정동연맹’은 일본이 중일 전쟁 직후 모든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총망라하여 전시 동원 체제로 전환하면서 조직한 전시 통제 기구이다. 동 연맹은 일본에 이어 거국일치(擧國一致) · 진충보국(盡忠報國) · 견인지구(牽引持久) 등 3대 목표를 내걸고 전국적으로 조직하였으며, 그 하부 실천 기구가 애국반이었다.30)
그리고 7월 3일부터 조선의 사상전향자 8천여 명이 대일본제국의 애국운동에 매진하려는 새로운 조직체로 부각되자 그 ‘시국대응조선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현제명이 선임되었고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保國聯盟, 이후 ‘보국연맹’) 경성지부가 결성되자 현제명은 다시 간사로 선임되었다.31)
보국연맹은 조선사상범 보호관찰소의 외곽 단체로 친일 전향자단체로서 그 연맹원들은 과거 민족 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전향자들이다.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정신앙양과 내선일체강화, 반(反)국가적 사상 파쇄, 국책수행 철저, 애국적 총후(後方) 활동 강화를 목표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사상보국』 발행, 취직 알선 운동, 군인 원호 행사, 신사 참배, 헌금 갹출, 시국강연회와 좌담회 개최, 일본정신연구회 등 ‘사상보국’에 진력하였다. 임원은 박영철(朴榮喆) · 이승우(李升雨) · 고경흠(高景欽) · 박영희(朴英熙) · 한상건(韓相健) · 현제명(玄濟明) 등이었다.
‘보국연맹’의 경성지부 간사인 현제명은 중일 전쟁의 전시 체제라는 시국의 중대성에 “이론보다 먼저 실행을”이라는 모토로 지부원 55명과 함께 8월 6일 조선군사령부 협조 속에 용산 육군묘지 청소, 38식 보병총기 탄약분 360개의 손작업 등 근로 봉사를 하였다.32)
현제명은 1938년 같은 해 10월 5일부터 일주일 간 전국적으로 거행할 ‘총후 후원 강화주간’에 1만 6천의 사상전향자를 총동원하여 각 친일사상단체와 협력하여 사상보국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9월 29일 보호관찰소에서 박영희(朴英熙) · 권충일(權忠一) 등 경성지부 간사들과 함께 임시 상임 간사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동 주간 행사로 지부 회원을 총동원하여 출정군인 집을 방문하여 위문과 위문대 발송, 전몰자 위령과 기원제 거행, 포스터 · 입간판 · 삐라(전단, 시트) 등으로 사상보국선전, 전적(戰績) 전람회 개최키고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리고 동 연맹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정동연맹)에 가맹하면서 현제명 역시 조선연맹원이 되었다.
정동연맹은 1940년 10월 조선 총독부가 더 강화시킬 목적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이후 총력연맹)으로 재편하였다. 총력연맹은 정동연맹과 달리 조선 총독부 총독이 총재이었으며, 정무총감이 부총재였다. 일본은 정당을 해산하고 대정익찬회(大正翼贊會)를 조직했으나, 정당조직이 없는 조선은 대신 황국신민화와 봉사적 실천의 총력 발휘에 취지를 두고 총력연맹을 조직한 것이다. 그 특징은 황국신민화, 신도실천(神道實踐), 직역봉공(職域奉公), 일원적 운동체제, 지방행정기구와 표리일체를 이루는 조선 총독부의 보조기관이었다. 일본은 중일 전쟁부터 장기적인 전시체제 지속 속에 지하자원과 원료부족에 봉착되고 미국 등 국제사회가 아시아에서 일본군대의 완전철수와 석유 · 철광 등 지하자원 봉쇄로 치닫자 인도차이나를 침략하고 1941년 12월에는 군부내각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 총독부는 이러한 전시 체제와 소위 고도국방국가를 완수하여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한다는 명분 아래 사상보국운동의 합리화와 사상범 보호사업의 능률화를 기하는 한편 내선일체의 철저한 구현에 기여한다는 방침 하에 ‘보국연맹’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1940년 같은 해 12월 28일에 서울 · 청진 · 평양 · 신의주 · 대구 · 광주 등 각 지부를 독립하고 통일적인 조직체 ‘재단법인 대화숙’(財團法人 大和塾)으로 재조직하였다. 대화숙의 목적은 “황도정신의 진작과 내선일체의 심화”, 그리고 “사상사건 관계자를 선도하고 보호”에 두었다. 그 사업으로 일본어 강습회 · 시국 강습회 · 강연회 · 좌담회 개최와 출판물 간행으로 일본정신을 선전하고 황민화의 철저화를 획책했다. 조직으로 대화숙 회장은 각 지역 보호 관찰소 소장이 임명되었으며, 회원은 보호 관찰 대상자 및 대화숙의 취지에 찬동하고 그 사업을 협조하는 자이다. 대화숙은 1943년 91개 지부에 조직되었다.
이 대화숙은 황국신민 연성기관으로서 강습회 등 교육사업 일환으로 경성(서울)에 ‘음악연구원’과 평양에 음악단과 극단(청명극단, 淸明劇團)을 신설하였다. 1943년 4월에 개원한 경성음악연구원은 현제명이 주재자가 되어 해방 직후까지 운영하였으며 후에 국립서울대학교 음악학부의 모체가 되었다.
평양대화숙은 문화부 부속기구로서 ‘대화음악단’(大和音樂團, 설립당시 이름은 대화악단)을 1944년 10월에 조직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안남도연맹 후원으로 조직한 대화악단은 “반(反) 국가적 음악을 구축(驅逐)하고 웅위(雄偉)한 일본음악을 수립”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33) 구성원은 단장에 이토오 젠타로오(伊藤善太郞, 尹斗善, 테너), 지휘 이흥렬(李興烈), 기획 이아마노 미노루(天野 稔), 소프라노 유은경(柳恩卿) · 코노우라 테루(金浦テル) · 오오오카 세이코(大岡聖子), 테너 황학근(黃學根), 바리톤 오오야마 히데오(大山英雄), 베이스 김완우(金完羽), 바이올린 유광덕(劉光德) · 이인호(李仁昊), 피아노 모오리 모토모리(毛利基盛), 첼로 우달형(禹達亨), 피아노 송경신(宋敬信) · 박영화(朴永華) 등과 합창단이 구성되었다. 후에 악사들과 여자 무용수 등을 보완하였다. 이들은 평양과 경성을 비롯하여 개성 · 인천 · 원산 · 고원 · 마산 · 안변 · 전주 · 이리 · 광주 · 부산 · 대구 등지로 순회공연한다. 모든 음악회의 주최는 평양대화숙 문화부이고, 그 후원은 조선 총독부 법무국이었다.
한편 현제명은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保國團,이후 ‘보국단’) 발기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조선인의 전쟁협력 조직체인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이 통합한 보국단은 황국신민으로 황도정신 선양, 전시체제기의 국민생활 쇄신, 국민개로의 결실, 국채소화 · 저축이행 · 물자공출 · 생산확충의 매진, 의용방위의 결실을 행동강령으로 활동한다.34) 전체 1,163명의 발기인 중 음악인은 현제명뿐만 아니라 경성보육학교장 독고선(獨孤璇), 김영환(金永煥), 그리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계정식(桂貞植)과 경성음악전문학원 원장 김재훈(金載勳)이 참여하였다. 현제명은 발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총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되어 158인의 임원진(단장 최린, 부단장 고원훈, 이사장 한규복, 상무이사 신흥우 등)의 한 사람이었다.35) 조선임전보국단은 1942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흡수되었다.
그는 또한 일본 황군이 1942년 싱가포르를 함락(2월 15일)시키자 그 감상문을 발표하여 황군의 승리를 희열과 감격 속에 찬양하였는데 감상문은 “싱가포르 함락감상”이란 이름으로 1942년 3월에 일문(日文)으로 발표하였다.
싱가포르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앵글로 색슨의 동양 침략의 최대 아성(牙城)인 싱가포르는 황군의 수중으로 돌아와. 찬란한 일장기는 적도(赤道)의 일광에 빛나며, 밀림 지대로부터 남쪽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무엇이겠는가? 우리 전승(戰勝) 용사들의 환호인 나팔 소리는 싱가포르의 푸른 하늘에 높이높이 울려퍼지고 있다. 이것보다 즐거운 일이 무엇이겠는가? 싱가포르의 푸른 하늘에는 찬란한 일장기, 싱가포르의 푸른 하늘에는 높이 올리는 승전의 나팔 소리, 그건 내 눈과 귀에 똑똑히 보이고 들린다. 희열의 가슴과 감격의 가슴은 약동한다.
그들 미 · 영이 비인도적인 온갖 수단을 농하여 동양을 침략하고 동양인을 멸시하고, 착취한 죄는 우리 황군의 신검(神劍)에 의해 벌을 받았다. 이보다 장쾌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어릉위(御稜威) 아래 동양인을 지도하고 동양인의 행복을 짊어진 우리 황국은 새로운 대동아를 건설하고 세계의 질서를 확립하고,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는 것이다. 무적 황군의 정의의 전진 앞에서는 1백년의 세월을 들여서 만들어 올린 싱가포르도 아침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아아 마침내 함락. 싱가포르 함락. 감격, 희열, 장쾌가 내 가슴에 가득 찬다.36)
<사진 4> 조선임전보국단 결단식(1941년 10월 22일 경성부민관대강당)의 평의원 현제명
26) 『삼천리』, 10/8 (삼천리사, 1938), 25-28. 27) “同友會事件關係者ノ轉向聲明書發表ニ關スル件,” (京鐘警高秘 第五二00號ノ四), 소화 13년 7월 1일자; 『기독신문』, 1938년 8월 16일자. 28) “同友會事件關係者ノ轉向聲明書發表ニ關スル件,” 소화 13년 7월 1일자. 29) 『삼천리』, 10/8, 25-28. 30) 온 조선인이 일본정신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뭉친다는 거국일치(擧國一致), 천황과 국가에 충성을 다하여 그 은혜를 보답한다는 진충보국(盡忠報國), 그리고 대동아건설을 위하여 굳게 참고 오래 인내한다는 견인지구(牽引持久)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3개 목표이었다. 31) 『매일신보』, 1938년 8월 6일 석간2면. 보호관찰소가 있는 전 조선 7개소 중 경성 · 평양 · 신의주에 시국대응전조선보국연맹 지부가 설치되었다. 나머지 4곳은 9월 중에 설치되었다. 32) 네 개의 근로 봉사반 중 제1반(반장 이기영)에 속한 현제명 등은 근로 봉사 직후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남겼다. “우리들은 사상운동 특히 민족 운동의 오류와 결함을 자각하여 결연히 이를 청산하고 이후 미력하나마 황국신민의 일원으로서 국민운동에 매진하기로 하여 조직키로한 사상보국연맹에 참가하여 이번 실천적 근로 일단으로서 지부원 일동과 함께 육군묘지 청소 등에 종사하였으며, [···] 금후 한층 총후 보국에 매진하려 한다.” 33) “대화악단의 창설,”『매일신보』 소화19년(1944) 10월 4일 4면. 34) ‘조선임전보국단’ 강령. 35) ‘조선임전보국단’ 역원명부. 36) 현제명, “싱가포르 함락감상,” 『동양지광』 3월호 (동양지광사, 1942).
5. 최고 · 최대의 음악계 대부로서 정치 활동
현제명은 이처럼 조선 총독부가 황국신민으로 일본정신을 선양하고 전쟁 동원 협력을 위해 설립한 대동민우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기관에서 음악인으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활동을 하였다. 조선 총독부가 신뢰하는 현제명은 그가 맡은 음악기관을 통해 총동원조선연맹, 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정치 · 사회적 국가협력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음악단체나 문화예술단체 중 가장 정치적 비중이 있는 음악가로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수이었지만 경성음악협회 간사, 조선음악협회 이사(1944),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1944), 경성음악연구원 주재 등을 통해 많은 음악인들이 그의 권력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음악계의 대부가 되었다.
(1) 경성음악협회 간사로서 내선일체화 활동
경성음악협회(京城音樂協會)는 1938년 10월 30일 조선 총독부가 내선일체의 확고한 지도로 일본인과 한국인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최초의 조선 총독부 관제 음악 조직체이다.37) 이에 앞서 조선 총독부는 1932년부터 7년 5개월간 운영해 온 현제명의 ‘조선음악가협회’를 1938년 7월에 해산 종용 끝에 ‘자발적으로 해산’하도록 했다.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사상 통제로 전시 체제를 강화시키면서 ‘조선음악가협회’를 동우회 사건에 연루된 현제명과 홍난파, 그리고 민족주의 노선의 독고선(獨孤旋)을 문제 삼은 데다 조선 총독이 제창한 ‘내선일체’의 조직체로 재조직하기 위해서도 해산을 종용하고 있었다. 수뇌급 간부인 현제명 · 이종태 · 이승학 · 최희남 등이 협의 끝에 “본 회가 유명무실한데다 내선일체 방침에 반함으로써 이를 해산하고 각급 학교 음악교사 혹은 각 연주가를 망라한 참된 내선인 일체의 음악가 단체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이종태가 종로경찰서를 방문하여 ‘조선음악가협회 해산계’를 제출하였다.38)
현제명은 조선 총독부가 표방하는 내선일체의 새로운 음악 조직체를 위하여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산시켰다. 이어 1938년 7월 17일 조선호텔에서 최희남, 김종태 등 조선인 7인과 오오바 유우노스케(大場勇之助), 요시자와 미노루(吉澤實) 등 일본음악인 9인의 이름으로 ‘악단다화회’(樂壇茶話會)를 개최하였다.39) 안도오 요시아키(安藤芳亮), 우에노 히사코(上野久子), 우찌다 토라(內田 虎), 오오바 유우노스케(大場勇之助), 김영환(金永煥), 김메리(金メリ-), 연희전문학교 교수 현제명(玄濟明), 이화여전 교수 계정식(桂貞植), 최희남(崔熙南), 알토 시오하라 야에코(鹽原八重子, 시오하라 토키사부로오鹽原時三郞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 부인), 피아니스트 타케이 하루코(竹井春子, 경성제국대학교수 竹井廉 부인), 이왕직 아악부 촉탁 이종태(李鍾泰), 이승학(李升學), 요시자와 미노루(吉澤實, 경성 제1고녀 음악교유) 등 16인이 발기인이었다. 이로써 1938년 10월 30일 한국음악 사상 일본과 한국의 전문 음악인들이 최초로 결성하여 탄생한 단체가 바로 ‘경성음악협회’이다. 이 협회는 조선 총독부의 간부가 회장으로 관장하는 최초의 음악협회가 되었다.
경성음악협회는 1941년 1월 조선음악협회에 흡수 통합될 때까지 2년 2개월간 “음악문화의 향상발달을 도모하고 음악을 통하여 내선일체를 공고히 한다”는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회원이 60명이었던 경성음악협회는 음악전문가로 구성한 정회원, 입회비 100원을 납부하여 동 협회 고문이 되는 특별회원, 그리고 일반음악애호자로서 연 2원의 회비를 납부하고 동 협회 연주회의 입장료를 반액을 내는 일반회원으로 구성되었다. 임원으로 회장은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 시오하라 토키사부로오(鹽原 時三郞), 고문은 경성여자사범학교장인 타카하시 하마키찌(高橋濱吉) 등과 각 학교 교장, 간사장은 일본인 바이올린연주가 오오바 유우노스케(大場勇之助), 그리고 간사는 현제명을 비롯하여 이종태와 김영환, 일본음악인 간사로는 타케이 하루코(竹井春子), 안도오 요시아키(安藤芳亮), 요시자와 미노루(吉澤實) 등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전문 음악인들로 조직한 경성음악협회는 “내선일체를 시도한 경성의 첫 조직체”이었지만, 처음부터 활발하게 그 활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체제의 시국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규모가 큰 통일적인 운동체의 필요성을 조선 총독부는 추진하고 있었다. 1941년 1월 조선 총독부가 신체제운동을 목표로 전국적인 강력한 악단조직체인 ‘조선음악협회’로 흡수되어 전시 체제 조직체로 발전한다. 현제명은 1932년부터 7년 넘게 조선음악인들의 유일한 협회이었던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전국적인 준 국가 운영체로 발전시키기 위한 과도기적인 조직으로 ‘경성음악협회’를 1938년에 창설하였고 이를 1941년에 신체제운동으로 꽃피는 ‘조선음악협회’로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2) 조선음악협회 이사로서 일본정신 구현과 일본국민음악 수립 활동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는 1941년 1월 25일 “악단을 통하여 직역봉공(職域奉公)을 하고, 조선음악계의 신체제 운동을 목표”로 발회식을 가진 조선 총독부 최대의 전국적 친일음악 단체이다. 그리고 3월 25일자로 공식적인 결성 창립대회를 가졌다.40) 동 협회는 조선 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축으로 삼은 조직체이다. 그리고 횡적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총력연맹) 문화부 소속의 조선문인협회를 비롯한 종적으로 각종 음악관련단체와 관련되어 있었다.
동 협회 조직은 회장 1인, 고문3인, 전무이사 1인, 이사 14인, 간사 10인, 평의원 23명에 호오가쿠부(邦樂部) · 조선음악부 · 교육음악부 · 양악부 · 경음악부 등 5개 부서에 걸쳐 전국적으로 조선과 일본인 523명이 회원이었다. 회장은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이자 경성음악협회장이었던 시오하라 토키사부로오(鹽原 時三郞)이었다. 고문 3인은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장인 야나베(失鎬永三郞),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인 미하시(三橋孝一郞), 조선문인협회고문이자 경성방송협회장인 칸쟈 오시쿠니(甘蔗義邦)이었다. 또 전무이사는 조선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桂珖淳)이었고, 이사는 14인 중 조선인 5인과 일본인 9인이었다. 그 5인의 조선인 이사는 계정식 · 김관 · 김원복 · 김재훈 · 함화진이었으며, 대표적인 일본인 이사는 총력연맹 문화부위원으로 유일하게 음악 연락계를 담당한 히라마 분쥬(平間文壽)와 역시 총력연맹 문화부위원인 오오바 유우노스케(大場勇之助), 그 밖의 조선 총독부 경무국 경무과장인 야키 신유우(八木信雄) 등이었다.41)
출범 당시 현제명은 비록 임원진은 아니었지만 임원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임원으로서 부각은 시간문제였다. 마침내 1944년 7월 11일 지금까지 조선 총독부 학무국 주관의 조선음악협회가 조선 총독부 정보과로 이관되어 더 강력한 전시 체제의 조직 개편이 새롭게 이루어지자 그는 조선의 음악인으로 유일하게 ‘이사’로 선임되어 악단 전면에 나섰다.42) 그는 이미 조선음악협회 창립 직후부터 주요 활동을 전개했다. 친일가요 발표와 음악보국대회나 전의앙양 등의 음악회 출연 ‘미영격멸’(米英擊滅)에 따라 3국 동맹국가의 음악과 일본국민가요(또는 일본의 애국가) 중심으로 개최된 경연대회의 심사위원, 역시 일본국민가요와 애국가로서 전개한 ‘국민개창운동위원회 위원’으로 음악 보급, ‘일본국민가창운동 정신대(挺身隊)’의 가창지도대 지휘와 지도 등이 그것이다.
1941년 6월 3일부터 3일간 조선음악협회가 주최하여 “시국하의 일본 국민생활에 정신적 영양을 담뿍 주는 국책적 행사”로서 “일본국민음악수립운동의 제1보의 의의”가 있는 ‘음악보국주간 양악부 대연주회’(6월 5일, 부민관) 야간 작곡제에서 현제명이 작곡한 「후지산오노조메요」(富士山を望めよ, 후지산을 바라보며)와 「하루」(春, 봄)를 소프라노 김자경의 노래로 발표한다.43) 그리고 현제명을 비롯한 조선음악협회원인 성악가들은 이날 주간과 야간 마지막 작품에 합창단으로 출연한다.
현제명은 또한 1943년 8월 1일 징병령 실시를 찬양하려고 자신의 창작 작품 「시오오쿠루우타」(子を送る歌, 자식을 보내는 노래, 김안서 작시)를 경성방송국 군국가요 시간(8월 3일, 오후9시)에 방송하였다.44) 이 작품은 작곡가 김성태가 ‘킨죠오 세이야스’(金城聖泰)란 이름으로 경성방송혼성합창단(반주 김명자)을 지휘하며 방송하였다. 현제명 뿐 만 아니라 이 날 임동혁(任東爀)의 「유우시니나루히」(勇士になる日, 용사가 되는 날, 林學洙 작시)와 김성태의 작품 「하하노코이네가히」(母の希ひ, 어머니의 바램, 毛允淑 작시)를 같은 지휘자가 지휘하는 경성방송혼성합창단 공연으로 방송하였다.
또 그는 음악보국대회나 전의앙양음악회, 징병제실시 축하의 야외음악회(1943년 8월 3일) 등에 출연하여 일본애국가요를 독창이나 중창으로 노래하였다. 「코오쿠우니혼노우타」(航空日本の歌, 항공일 제정기념 아사히신문사선정), 「다이닛폰노우타」(大日本の歌, 일본문화중앙연맹 선정), 「한토오세이넨노우타」(半島靑年の歌, 조선 총독부정보과 선정), 「와타시타찌와요부코토오우케테키타」(私たちは呼ぶことを受けて来た, 우리들은 부르심을 밧자왓다), 「센찌헤」(戰地へ, 전지로) 등이 그 노래이다.45)
현제명은 조선음악협회가 조선 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 그리고 매일신보사 후원으로 “대동아 성전완수에 매진”코자 개최한 제1회 음악경연대회(1942년 11월10일~12일, 부민관)의 성악부 전문위원으로 심사한다.46) 제금(바이올린) · 성악 · 양금(피아노) 외에 음감부(音感部)가 경연 종목으로 부각된 이 경연대회에서 조선 총독부 학무국장 · 사회과장 · 정보과장 등이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계정식 등이 심사 전문위원으로 활동한다. 일본국민음악 수립을 위하여 일본애국가요가 경연종목으로 선정되고 적기 소리를 식별하려는 방공교육으로 음감부가 부각된 음악경연대회였다. 곧, 독일과 이탈리아 가곡 작품 중 1곡과 일본애국가요(국민가요)인 「코오아코오신쿄쿠」(興亞行進曲, 흥아행진곡, 福井文彦 곡), 「아이코쿠노하나」(愛國の花, 애국의 꽃, 古關裕而 곡), 「모유루오오조라」(燃ゆる大空, 불타는 대공, 山田耕筰 곡), 「타이헤이요오신쿄쿠」(太平洋行進曲, 태평양행진곡, 일본해군성 선정) 중 1곡이 포함된 예선과 본선에서 독이(獨伊)가곡 1곡과 일본가곡 1곡 그리고 오페라 아리아와 함께 역시 일본애국가요인 「우미유카바」(海ゆかば, 바다로 가면, 信時潔 곡), 「다이닛폰노우타」(大日本の歌, 대일본의 노래, 일본문화중앙연맹 선정), 「우미노신군」(海の進軍, 바다의 진군, 古關裕而 곡), 「아이바신군우타」(愛馬進軍歌, 애마진군가, 일본육군성 선정) 중에서 1곡을 선택하도록 했다. 특히, 노부토기 키요시(信時 潔)가 작곡한 「우미유카바」가 성악부 지정곡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지만, 모든 기관들의 일반 행사를 할 때에도 필수 제창 곡이 되었다.
<사진 5> 총력앙양 야외음악대회서 지도하고 지휘하는 현제명
일본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는 1942년 12월 15일에 「우미유카바」 가곡을 일본국가인 「키미가요」(君が代) 다음가는 ‘일본국민의 노래’로 정하고 각 지부에 실행을 통달하면서부터 ‘제2국가’(第二 國歌)로 부른다. 이 노래 가사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까지 만든 일본 최고의 가집(歌集)이라는 『만요오슈우』(萬葉集)에 나오는 가사이다. 작가 오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가 “바다로 가면 물에 잠기는 시신/산으로 가면 초원에 묻히는 시신/대군의 곁에서 죽겠노라/ 뒤돌아보지 않겠도다”(海行かば 水漬くかばね‘ / 山行かば 草むすかばね / 大君の へにこそ死なめ / かえりみはせじ)라고 읊은 장가(長歌)가 그 가사이다. 곧, “바다의 싸움터에 나가 물에 잠기는 시신이 되고, 또 육지의 싸움터에서는 초원에 묻힌 시신이 될지라도 천황페하의 곁에서만 죽겠노라 후회하지 않겠노라”라는 이 가사에다 노부토키(信時 潔)가 1937년에 일본 정부의 ‘국민정신강조주간’ 제정시 일본방송협회(NHK)가 위촉하여 작곡한 가곡이다. 그러나 장중하게 작곡된 이 노래가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한 장송곡으로 불린다.47) 승전일 경우는 행진곡 「군칸」(軍艦, 군함)이나 군가 「테키와이쿠만」(敵は幾萬, 적은 수만) 등이 연주되거나 불렸다. 「우미유카바」 곡을 1942년 대정익찬회가 “결전(決戰)하 1억 봉공의 진심을 나타내며 옹혼고아한 순 일본적 음률로서 민족적 열정을 끌어 오르는 노래”로서 제2국가로 지정하여 각종 회합에서 국민의례를 마친 직후나, 산회하기 직전에 제창하고 학교 · 공장 · 기타 음악회나 노래 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창토록 지시하였다.
「우미유카바」가 제2국가로 정해지자 현제명 등은 개창운동을 펼쳤다. 그는 쿠로야마(玄山濟明)이란 이름으로 1943년 2월 24일 부민관에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원과 후생실내악단이 개최한 ‘일본국민음악연주회’에서 공개적으로 개창지도하였다. 동시에 그는 「우미유카바」 외에 일본대정익찬회가 작사한 「코노 케쯔이」(この決意, 이 결의)를 개창 지도하였다.
한편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3년부터 “전쟁에서 싸워 이겨나갈 힘을 기르기 위하여 결전의 새봄과 함께 국민 누구나 노래를 부르자”는 ‘국민개창운동’(國民皆唱運動) 전개하였다.48) 총력연맹은 1943년 4월부터 두 달간을 제1기 국민가창운동기간, 같은 해 9월부터 2달간을 제2기 국민가창운동기간으로설정하고 ‘국민개창운동위원회’로서 쿠로야마(玄山濟明,玄濟明)를 비롯하여 오오바(大場勇之助), 미야모토(宮本吉雄,崔熙南), 박태현, 경성방송국 기획부장, 조선레코드제작 협회장, 조선연구문화협회 이사, 총력연맹 문화 · 선전 · 진흥 등 3과장, 조선 총독부 학무과원, 경성일보사회부장, 매일신보사 학예부장 등이 운동방책 등을 협의하며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동 위원회는 쿠로야마 등 조선음악협회 내 ‘음악지도자회의’를 구성하여 전개방침을 협의하여 추진했다.
이에 앞서 총력연맹은 1943년 3월 26일(부민관) 조선음악협회와 공동 주최의 ‘전의앙양국민대합창음악회’(戰意昻揚國民大合唱音樂會)도 ‘국민개창운동대회’로 진행시켰다. 일본의 대정익찬회가 지시하고 조선연맹이 정한대로 먼저 국민의례, 궁성요배, 일본국가 봉창, 묵도, 황국신민서사제송, 일본 · 독일 · 이태리 동맹국 국가 연주가 끝난 뒤에 음악회 제1부와 제2부가 진행되었으며, 산회 직전 마지막 순서로 「우미유카바」와 천황페하만세를 부르는 성수만세봉창이 순서대로 정형화되어 끝났다. 바로 이 음악회에서 현제명은 「아사다 겐키데」(朝だ元氣で, 아침이다 활기 있게), 「이찌오쿠노소오료쿠오다소오」(1億の総力を出そう, 1억의 총력을 내세)를 독창하였다.
이 음악회에 힘입어 조선음악협회는 1943년 4월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과 함께 경성의 명치좌 · 동보약초극장 등 영화관의 영화 상영 막간을 이용하여 ‘국민개창의 시간’ 순서를 갖는 것은 물론49) 공장과 야외 그리고 농산어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총력운동측이 선정하여 발행한 51곡의 애국가요집 『우리들의 노래』(조선도서출판주식회사)를 보급하거나50) 가창지도대를 조직하는 등 전국적인 개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같은 해 5월말까지 펼친 제1기 국민가창운동기간에서 74곡의 국민가요를 선정 발표한 조선연맹은 그 중에서 지도곡목으로 10곡을 집중적으로 지도하였다.51) 「바다로 가면」, 「軍國行進曲」(군국행진곡), 「國民進軍歌」(국민진군가), 「愛馬進軍歌」(애마진군가), 「亞細亞의 力」(아세아의 힘), 「荒城의 歌」(황성의 노래), 「十億의 進軍」(10억의 진군), 「아츰이다 氣運잇께」(아침이다 기운있게), 「愛國의 花」(애국의 꽃), 「半島靑年의 歌」(반도청년의 노래)가 그 곡들이었다. 조선연맹은 전국적으로 악기점 · 다방 · 카페 · 빠 등에서 애국가요집 『우리들의 노래』를 보급하고, 영화관 · 백화점 · 공장 · 회사 등의 조회 시간에 부르도록 하였으며, 국민학교와 중학교에서 노래를 익혀 가정에 보급할 수 있도록 힘썼다.
현제명이 음악계의 최정상에 서서 활동한 시기는 1944년 5월부터였는데 이 시기에 그가 부각된 것은 경성후생악단의 이사장직 때문이었다. 경성후생악단 단원 일부가 같은 해 5월 조선 총독부와 만주국간 협력체제로 신경시의 신경교향악단으로 이동됨에 따라 후생악단이 조직 개편되었으며, 이때 그는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52) 또 그는 1944년 7월 조선음악협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 이사 선임은 일본 대정익찬회 총재이자 일본육군대장인 아베 노부유키(小機國昭)가 조선 총독부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하기 바로 직전에 조선음악협회 소속을 기존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정보과로 변경시켜 체제 정비를 단행한 데서 비롯되었다.53) 그가 동 협회 이사로 선임되었다는 것은 현제명이 조선의 악단 전면에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정치적 대부가 되었음을 의미하였는데 선임된 조선음악협회의 임원진 중에서도 현제명의 위상은 뚜렷했다. 왜냐하면 조선 총독부 관계(官階)에 따른 정치적 위상 때문이었다. 조선음악협회 회장은 아베(阿部) 조선 총독부 관방 정보과장이었다. 그리고 이사 6인에 모로토메(諸留) 조선 총독부 관방 정보과 조사관, 이와모토 마사조오(岩本政藏) 동 정보과 촉탁, 오오바(大場勇之助), 아베 후미오(阿部文雄), 겐 사이아키(玄濟明) 등이 선임되었다. 이것은 전시하의 언론 출판문화의 통제 및 국민에 대한 프로파간다가 강화되었음을 말한다. 또 감사 2인에 조선 총독부 학무국 연성과장과 국민총력조선연맹 홍보부장이, 또 고문 6인에 조선 총독부학무국장, 동 경무국장, 조선군보도부장, 경성재근해군무관,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차장, 조선방송협회장 등이었다. 그리고 동 협회의 목적도 “음악의 국가적 사명에 비추어 일본정신을 구현하는 국민음악의 창조발전과 음악가의 자격 연마를 달성하여 일본문화의 향상에 기여하는 것”으로 개정하여 협회 방책을 강화시켰다.54)
1944년 조선음악협회는 악단 통제와 정비 일환으로 음악기예자격 인정시험 실시, 국가봉납대회와 항공기 헌납음악회 등 국민음악대연주회, 음악경연대회 개최, 국민음악보급철저 일환의 가창지도를 주요 사업으로 전개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현제명 이사가 있었다. 조선 총독부의 조선흥행취체규칙 공포(1943년 부령) 결과로 조선음악협회는 1944년 8월 16일부터 2일간 전체 무대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음악기예 자격인정시험’을 실시하였다. 이 시험은 결승음악과 일본국민예술 발전을 꾀한다는 명분으로 양악 · 국악 · 방악(邦樂) 등 응시자 남녀 8백 명이 대상이었지만 실제 의도한 것은 악단 숙정 사업이었다. 자격증이 있어야만 이후 공연 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이 자격시험의 심사위원은 쿠로야마(玄山濟明)를 비롯한 조선음악협회 이사장과 이사들이 위원장과 위원을 맡았다.
현제명은 동 협회 이사로서 첫 사업인 ‘국가봉납대회’(國歌奉納大會)를 주관하였는데 1944년 7월 26일 조선신궁에서 조선음악협회 회원과 동 협회 소속 단체 음악가 등 총 500명이 천황의 신민으로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총궐기를 다짐하는 음악보국을 맹세하려고 일본국가 「키미가요」(君が代)를 부르며 국가를 봉납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우미유카바」(海ゆかば, 바다로 가면)를 불렀다. 그리고 2개 반으로 나누어 조선총독부 앞까지 취주악대를 앞세워 「애국행진곡」을 부르며 가두행진을 하였다.
조선음악협회 이사 현제명은 1945년 주요사업으로 조선음악대연주회(1월 13일~14일, 부민관)와 양악추진전문위원회를 조직하여 독창과 독주회 개최에 관한 시연희를 열어 자격심사 시행, 음악심사와 연구(시국하 작사 · 작곡의 엄정심사, 적성국가음악의 철저한 박멸, 음악기예자 자격 수시개최로 국책적 음악수립 등), 음악가의 지도와 연마(음악의 국책적 활용을 통감하는 관계자 초빙강습회와 좌담회 개최 등), 일본국민음악 보급철저(음악연주회와 경연대회 개최, 우수회원의 가창지도자로 파견, 이동음악대 파견과 알선, 방송 · 영화 · 음반 시설 활용 등), 음악단체 신규가입 인정(5월), 결전하 민중의 사기앙양을 시키고자 조선음악협회 소속 방악(邦樂) · 국악 · 양악 단체 대연주회 개최(5월 27일~6월 10일), 증산일선에 동원된 ‘학도위안음악회’ 순회공연(7월 상순부터, 각 학교 강당), ‘본토결전부민대회’에서 후생악단의 취주악과 일본정보국 제정의 「코쿠민규우타이노우타」(國民義勇隊の歌, 국민의용대의 노래)의 가창 지도(7월 4일, 덕수궁), 조선음악부 소속 조선가무단 연주대회(7월 14일~17일)를 각각 지원하거나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3)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으로서 일본국민음악 정신대 활동
조선 총독부는 “전시하의 국민들에게 건전한 음악과 음악 자체의 예술성을 국민음악 정신대(挺身隊)로서 활동하고 보급”하기 위하여 1942년 5월 1일 생산지역 위문공연 전문단체로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 대표 金生麗)을 조직하였다.55) 일본이 사상통일과 총동원 그리고 생산 확충을 위한 전시 체제 구축이 ‘후생음악’을 나오게 하였으며, 음악을 국가목적에 맞게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대적 요구가 ‘일본후생협회’, ‘후생음악체육연구회’, ‘후생음악연구회’, ‘일본후행음악협회’, ‘대일본산업보국회’ 등이 일본현지에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56) 즉, 후생음악은 관청 · 회사 · 공장 · 광산 등의 근로자들이 연주하는 취주악 · 나팔고악 · 제창 · 합창 · 하모니카합주 등과 학교생도 및 아동이 연주하는 취주악 · 나팔고악 · 고적악 · 합창 · 하모니카 합주 등과 그리고 공장 · 광산 등의 근로자들을 위하여 행해지는 레코드 연주나 실연(實演)음악을 총칭한다.57) 일본의 현지 회사나 광산 및 농어촌의 청년들 사이엔 스스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을 즐기는 자들이 격증하여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나 각종 합창단과 합주단이 속속 결성되는 시대적 상황이었다.58) 조선에서도 ‘조선상공회의소’가 동 소내에 ‘후생음악계’를 신설하고, 일본후생음악협회 소속의 소프라노 이노우에(井上けい子)와 테너 오쿠다(男田良三) 등을 초청하여 ‘후생음악회’를 개최한 바 있다.59)
경성후생실내악단은 후자 곧 공장이나 광산 등의 근로자를 위하여 조직된 실내악단이며, 이 악단을 통하여 생산 확충을 도모하고 집단적인 근로정신을 앙양하며 건전한 위안 오락 즐기기 등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소비적 · 향락적인 음악 연주와는 다른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찾은 곳은 공장과 광산 뿐 만이 아니다. 도시와 교화 단체는 물론 농산어촌 등 모든 생산지역을 찾아 공연하였다.
동 악단이 창립되던 1942년 5월부터 12월 말까지 8개월 동안 전국에 걸쳐 공연했던 회수는 총 112회이었으며, 동원된 청중 수는 7만8천7백50명이었다.60) 그 112회는 일반야간발표공연이 36회, 학교학생 음악감상회가 46회, 산업전사 위안연주회가 19회, 육군병원위문연주가 4회, 기타 7회이었다. 곧, 경성후생실내악단은 공장이나 광산의 산업기지 근로자나 학교 생도와 아동, 상이용사들을 찾아 위안연주회를 개최하며 생산 확충 도모와 근로정신 앙양, 그리고 육군병원 상이용사 위문 연주 등으로 그 후생음악을 위하여 열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제명은 1943년 2월 동 악단의 제3회 연주회 때부터 결전음악가로서 독창 활동이나, 결전결의로 다지려는 국민개창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43년 8월 3일 국민총력조선연맹과 동 경기도연맹과 경성부연맹 공동주최로 개최한 ‘야외음악 · 영화의 밤’에서 현제명은 일본국가를 부르고 경성후생실내악단의 반주로 「航空日本の歌」(항공일본의 노래)와 「大日本の歌」(대일본의 노래)와 함께 김천애 · 이인범과 함께 「半島靑年の歌」 등을 부르고 마지막으로 「우미유카바」를 제창하였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대로 후생실내악단 주최와 총력연맹 후원의 ‘국민음악연주회’(1943년 2월 24일, 부민관)에서 쿠로야마(玄山濟明)는 「海行ゆかば」(우미유카바, 바다로 가면)과 「この決意」(이 결의)를 국민개창으로 지도하였다. 이어서 조선음악협회의 ‘국민개창운동위원회’로서 그는 1943년 연간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제명에게 전환점은 1944년 5월의 악단 개편이었다.61) 이 개편으로 악단명칭도 ‘경성후생악단’으로 바뀐다.62) 이 개편에서 그는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전시 하 국민정신음악대(國民挺身音樂隊) 대부로서 활동하였다. 현제명은 동 악단 이사장으로 선임된 두 달 후인 7월에 조선음악협회 이사로서 선임되어 조선 총독부 양대 조직체의 최고 음악가가 되었다. 1944년 5월 경성후생실내악단에서 이사장으로 취임된 직후 그는 한 달 동안 청진대화숙 초청을 비롯하여 함북 일대 생산지대 광산과 공장을 찾아가 산업전사들을 위로하는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서울에 귀경한 후생악단은 진용을 강화하고, 6월 11일 부민관에서 매일신보 주최로 ‘경성후생실내악단 피로공연’을 개최하였다. 「키미가요」 등 국민의례로 막을 연 동 공연에서 오펜바흐의 서곡 「천국과 지옥」을 비롯한 브람스의 「헝가리무곡 제5번」 등의 연주와 함께 악단 반주로 독창자들이 테너 이인범의 「南進男兒の歌」(남진남아의 노래)와 김천애의 「愛國の花」(애국의 꽃)를 비롯한 「봉선화」(홍난파 곡), 그리고 경성혼성합창단의 「大日本の歌」(대일본의 노래) 등의 공연이 있었고, 폐회에 앞서 「海行ゆかば」(우미유카바, 바다로 가면)를 불렀다.63)
<사진 6> 경성후생악단 단원들64)
또한 1944년 8월 12일부터 일주일 간 강원도 삼척 지방의 어촌과 광산 지역을 위문 연주하였으며, 8월 22일부터 일주일 간 이리 · 군산 · 김제 · 정읍 · 신태인 · 남원 · 광주 · 전주 등지의 산업 전사를 위문공연하였다. 동 악단이 쉴 틀 없이 농산어촌과 공장 등 전국의 산업 전사를 찾아 위문 공연하는 그 공로가 인정되어 마침내 1945년 5월에 일본 신태양사의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그 수상 공적 내용은 ‘일본의 결전음악(決戰音樂)의 수립과 활발한 공연 활동’이었다.
조선예술상을 받은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현제명을 비롯하여 단원 전원은 1945년 5월 10일부터 총력연맹 병사부 후원으로 중국 황허와 양쯔강 경계지역으로 베이징 · 텐진 · 산동성 등을 형성하고 있는 화북지방으로 파견되어 순회공연 활동을 펼쳤다. 중국 화북지방에서 귀국한 동 악단은 바로 7월 6일부터 13일까지 제1회 약초예능제에 참여하여 실내악을 비롯한 공연 활동을 하였다. 동 악단은 또 1945년 8월 1일 조선문인보국회와 공동으로 ‘문예와 음악의 밤’을 개최하여 출연하였다. 이 음악회는 일본이 1945년 7월 총력연맹을 해산하고 조선국민의용대로 결성되었을 때 이를 축하하고 본토 결전을 다짐하는 행사였다.
동 악단이 해방 직전까지 전개한 음악회는 1945년 8월 11일 경성방송국 제2방송을 통한 방송음악회였다. 밤 8시에 경성후생실내악단의 현악합주와 카토오 가쿠스케(加藤學相, 김학상), 타카야마 테루요시(高山英善, 고영선), 요시모토 진노리(義本仁範, 이인범), 류우구우 텐요시(龍宮天愛, 김천애) 등의 독창을 비롯, 쿠로야마(玄山濟明, 현제명)가 일본국민가요연곡을 악단 전원들과 함께 부르면서 독창하였다.
일본정부가 관청 · 회사 · 공장 · 광산 등의 근로자들과 농산어촌의 생산 지역, 그리고 학교 생도와 아동을 위하여 이들에게 근로정신을 앙양하고 건전한 오락문화를 권장함으로서 생산 확충을 도모하려는 국가 정책에 부응하여 쿠로야마(현제명)는 후생음악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이 악단만치 강고하게 결합하여 진지감투해온 단체는 반도에 있은 일이 없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이 단체의 활동을 신뢰하고 있었다.65) 일본 현지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대부분 일본 유학 세대로서 신진 단원이라는 점에서 그 기량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는데다, 이들이 찾는 농산어촌과 만주 일대에 이르는 생산 기지와 학교 연주야말로 일본정부가 바랬던 예술지상주의에서서 국가지상주의로, 연주자 본위에서 대중 본위로, 개인중심주의에서 전체공영주의로, 영리(營利)주의에서 공영(公營)주의로 전환하여 활동하는 내선일체의 태도이기도 했다.
조선 총독부는 1944년 10월 전력(戰力)을 증강하는 것이 공장 · 광산 · 농어촌의 산업 전사들의 증산의욕을 북돋는 길에 있으므로 음악 · 연예 · 연극 · 창극 등의 효능성을 조직적으로 제공하려 정보과내에 ‘조선예능본부’(朝鮮藝能本部)를 신설하여 운영하고 있을 때라서 ‘경성후생악단’의 활동은 더 빛나고 있었다.66) 이러한 후생음악은 모두 경제 상황에 따라 필요한 산업부흥지원 및 금융을 지원하는 정책이 아니라 생산 확충조차 음악을 이용하는 정치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국가 정책을 쿠로야마와 경성후생악단은 일찍이 “반도에 있은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4) 경성음악연구원 주재자로서 황국신민 음악교육 활동
1943년 4월 1일 경성 죽첨정(竹添町) 3정목 8번지의 ‘경성대화숙’ 내에 음악교육기관을 조직 · 개원하였는데 바로 ‘경성음악연구원‘(京城音樂硏究院)이다.67) 이미 경성대화숙은 1940년 12월 “황도정신의 진작과 내선일체의 심화 그리고 사상사건 관계자를 선도하고 보호”를 목적으로 ‘재단법인 대화숙’(財團法人 大和塾)이 재조직되었을 때, 그 대화숙의 중심 지부였다. 대화숙은 일본어강습회 · 시국강습회 · 강연회 · 좌담회 개최와 출판물 간행으로 일본정신을 선전하고 황민화의 철저화를 획책하는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1943년 서울 · 청진 · 평양 · 신의주 · 대구 · 광주 등 91개 지부가 조직되었다. “황도정신의 진작과 내선일체의 심화, 그리고 사상사건 관계자를 선도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도, 대화숙의 목적과 규칙을 관장하기 위해서도 수많은 강습회와 좌담회로 그 정치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현제명으로 하여금 일본어강습학원과 더불어 음악연구원 개설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경성대화숙 활동은 물론 지금까지 대동민우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준 국가 정치기관과 또 경성음악협회,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악단 등 음악 기관에서 활동한 그의 적극적인 활동과 정치력이 ‘경성음악연구원’을 설립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경성음악연구원의 개원은 1938년 김재훈의 경성음악전문학원이 개원하여 5년뒤 운영 끝인 1942년 9월에 조선 총독부가 폐교시킨 직후라서 누가보아도 현제명의 정치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재훈이 경성음악전문학원을 조선 총독부의 국가정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민간음악전문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던 데 반해 현제명은 조선 총독부의 산하 기관에서 활동하며 총독부를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이 대화숙은 황국신민 연성기관으로서 강습회 등 교육사업 일환으로 경성(서울)에 ‘경성음악연구원’과 평양에 ‘대화음악단’을 신설하였다. 앞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이었던 현제명은 이 연맹이 대화숙으로 전환하면서 오랜 바램이었던 ‘경성음악연구원’을 1943년 3월에 개원 허가를 받아 4월 1일자로 개원할 수 있었다. ‘경성음악연구원’은 신학기부터 음악 초보자 대상과 개인 교수를 겸하여 교육하였다. 동 연구원은 연습실과 연습용 악기들까지 구비하였으며, 종목은 성악 · 양금(피아노) · 제금(바이올린) · 작곡과 이론 등 네 종목이었다.
그리고 현제명 주재의 동 음악원 강사진은 성악에 현제명(玄濟明)과 김천애(金天愛), 피아노 김영의(金永羲), 바이올린 김생려(金生麗), 작곡과 이론은 김성태(金聖泰) 등이 각각 지도하였다.68) 동 음악원은 안내 유인물을 제작하여 홍보하거나 해마다 『매일신보』를 통하여 모집 광고를 내보내며 운영하였다. 해방 이후 로디 현(Rody Hyun)으로 개명한 현제명은 ‘경성음악연구원’을 ‘경성음악학교’(1946)로 개칭하고 미군정을 통하여 경성음악학교를 국가기관에 기증하였고 1946년 8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편입시킨 다음 초대 학부장이 되었다.69)
37) 노동은, “일제하 음악인들의 친일논리와 단체,” 『음악과 민족』 24 (2003), 79. 38) “朝鮮音樂家協會解散ニ關スル件,” (京鍾警高秘 第 六三四六號, 昭和 十三年七月七日). 39) 필자가 소장한 ‘악단다화회’(소화 13년 7월 17일 오후 2시)의 팜플렛 참조. 40) 노동은, “일제하 음악인들의 친일논리와 단체,” 93. 이곳에 1940년 12월초부터 조선 총독부와 음악계가 좌담회를 가져 그 다음 해에 조선음악협회를 조직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41) 평간문수(1900. 12. 20-1986. 6. 24)는 일본 현지처럼 ‘히라마 후미토시’(ひらま ふみとし)나 ‘히라마 후미히사’(ひらま ふみひさ)로 읽을 수 있으나, 『경성일보』 같은 경우 이름을 ‘ぶんじゆ’(분쥬)로 밝히고 있고, 당대 조선음악인들에게 ‘히라마 분쥬’로 불리고 있었다. “평간문수,” 『예능인물사전』 (명치 · 대정 · 소화 · 동경: 일외 アソシエーツ주식회사, 1998), 493; 『경성일보』, 1942년 5월 5일자 석간 3면. 42) 『예능인물사전』, 116. 43) 필자가 소장한 팜플렛, “음악보국주간 양악부대연주회곡목” (소화 16년 6월5일 오후2시 · 오후7시, 장소: 부민관대강당, 주최: 조선음악협회, 후원: 경성일보사 · 매일신보사) 참조. 44) “오늘: 8. 3 라디오,” 『매일신보』, 소화 18년 8월 13일 조간 3면. 45) 『매일신보』, 소화 17년(1942) 4월 19일 석간 2면 참고. 46) 『매일신보』, 소화 17년 11월 11일 석간 2면. 47) 이를 옥쇄(玉砕)라 하였다. 곧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군수비대가 전멸이나 전원사망이 있을 경우, 이를 미화시키기 위해 대본영의 라디오 전과 발표 시 《우미유카바》 곡을 먼저 들려주고 전과를 알렸다. 48) 일본현지정책과 함께 전개한 대표적인 음악 정책이 ‘국민개창운동’이었다. 일본은 대정익찬회가 기획하고 일본음악문화협회 · 연구가협회 · 일본방송협회가 협력하여 조선에 두 달 앞선 1943년 2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가창지도반’을 전국에 파견하였으며, 이때가 제1차 국민개창운동기이었다. 『音楽之友』 第3巻 第7号 (東京: 音樂之友社, 1943. 7.), 14-15面 참고. 49) 『매일신보』, 소화 18년 3월 28일 석간 2면. 50) 『매일신보』, 소화 18년 4월 3일 조간 2면. 51) 『매일신보』, 소화 18년 4월 15일 조간 4면. 52) 노동은, “일제하 음악인들의 친일논리와 단체,” 125. 53) ‘고도국방국가’를 건설하려는 일본은 사상통일과 국민총훈련 그리고 생산력 확충을 위한 전시기구를 정비한다. 1942년 내외지(內外地) 일원화 방침으로 총독부가 일본 내무성 관할로 이관되고, 이때의 관방정보과는 보도 · 통제 · 선전 등을 도맡아 정보사무를 강화하였다. 일본은 이미 1940년 12월 6일에 내각 직속기관으로 정보국을 발족하고 전쟁을 위한 여론 형성, 선전과 사상 단속 강화를 목적으로 내각 내 모든 정보 사무를 통합한 바 있다. 조선에서 조선음악협회 주관기관인 조선 총독부 학무국에서 정보과로 이관되었지만, 그만큼 일본과 같은 언론 ·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설치된 내각 직속기관인 ‘내각정보국’ 역할과 같았다. 54) “朝鮮音樂協會定款,” 第三條: 本會ハ音樂ノ國家的使命ニ鑑ミ日本精神ヲ具現シタル國民音樂ノ創造發展ト音樂家ノ資質硏磨ヲ促シ日本文化ノ向上ニ寄與スルヲ以テ目的トス. 55) 동 실내악단은 처음 조직 당시는 현악 4중주 편성 정도에 성악가 1-2인이 편성되는 인원이었지만, 점차 보강되었다. 1944년 5월 조직 개편 시까지 1기의 실내악단 명단은 소프라노 龍宮天愛(김천애), 테너 義本仁範(이인범), 바이올린 金山生麗(김생려, 지휘겸) · 廣田哲三(이용철) · 東川枰洙(박평수) · 安泉敎聖(안성교), 첼로 이강열 · 김태연, 트롬본 이유성, 피아노 義本仁亨(이인형), 지휘 金城聖泰(김성태) 등이었다. 56) 堀內敬三, 『音樂五十年史』 (東京: 鱒書房, 1943), 446. 57) 堀內敬三, 『音樂五十年史』, 444. 58) 宮澤縱一, “厚生音樂全集’に奇せ,” 『厚生音樂全集』 第二卷 (東京: 新興音樂出版社, 1942), 1. 59) 1943년 9월 6-7일 양일 간 오후 7시 부민관에서 개최되었다. 조선상공회의소는 후생음악계를 통하여 후생음악의 보급, 회사와 공장의 후생음악 사업 후원, 가창 지도, 후생음악회 개최 등을 사업으로 삼고 있었다. 『매일신보』, 1943년 9월 2일, 9월 7일. 60) 계정식, “후생실내악단 제2회 공연평,” 『매일신보』, 1942년 12월 31일. 61) 만주국 신경교향악단과 제휴로 단원 일부가 신경으로 이동하였으나, 국내 중진 중에서 새롭게 단원들을 영입하여 개편할 수 있었다. 피아노에 김원복과 윤기선, 편곡에 이흥렬, 바이올린에 정희석과 이영세와 이규용, 소프라노 고영선 등이 그들이다. “경성후생악단 신발족,” 『매일신보』, 1944년 5월 15일 조간 2면. 62) “경성후생악단 신발족,” 『매일신보』, 1944년 5월 15일 조간 2면. 63)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연주곡목은 일본군가에서부터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연주 대상에 따라 종합적인 편성으로 공연하였다. 맨 처음은 의례히 ‘국민의례’로서 ‘日本國歌’를 비롯한 일본국민가요를 먼저 했으며, 이어서 음악회 제1부와 2부가 진행되었다. 폐회하면서 제2국가라는 《우미유카바》(海ゆかば, 바다로 가면)를 제창으로 끝냈다. 서곡 《천국과 지옥》(오펜바흐), 《무도회의 권유》(베버), 《두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라단조》(바흐), 《헝가리무곡 제5번》(브람스), 《발라드》(쇼팽), 가극 《라보엠》 중 「그대의 찬손」, 가극 《아를르의 여인》 중 「신의 어린양」(비제), 가극 《라트라비아타》 중 「도시를 떠나서」와 「축배의 노래」(푸치니), 가극 《일트로바토레》 중 「미제레레」, 가극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푸치니), 가극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푸치니), 가극《마탄의 사수》 중 「카바티나」, 「아가케의 아아」, 「말라게」(베버), 《봉선화》(홍난파), 《탱자나무》(からたちの花, 山田耕筰), 《출선》(出船, 衫山長谷夫), 《대일본의 노래》(大日本の歌), 《애국의 꽃》(愛國の花), 《황성의 달》(荒城の月) 등이 이들의 공연 종목이었다. 64) 앞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현제명, 한 사람 건너 소프라노 김천애. 65) 히라마 분쥬(平間文壽), “후생실내악단의 공연에 기대,” 『매일신보』, 1942년 12월 23일 조간 2면. 66) “싸우는 예능부대: 본부에 동원본부본부신설,” 『매일신보』, 1944년 10월 20일 2면. 67) “음악연구원신설-현제명씨 등이 지도,” 『매일신보』, 소화 18년(1943) 3월 13일 석간 2면. 68) “음악연구원신설-현제명씨 등이 지도,” 『매일신보』, 소화 18년(1943) 3월 13일 석간 2면. 69) “경성음악연구원,”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 748-749.
현제명은 해방이 되자 누구보다 가장 발 빠르게 변신하였다. 미군이 남한의 점령군으로 미군정을 시행하게 되자 그는 미국 유학생 출신인데다 미국계 개신교계와의 관계로 인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선의 문화예술계 인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현제명은 한민당(한국민주당)에서 정치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1945년 9월 4일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이후 ‘준비회’, 위원장 권동진, 부위원장 김성수 · 허헌 · 이인)의 실행위원(설비부)으로서 활동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조병옥(사무장) · 구자옥(사무차장) · 이병두 등이 참여한 동 준비회에서 현제명은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피아니스트인 박경호와 국악계의 함화진과 함께 참여하였는데 이 준비회의 위원이 구성된 지 4일 후인 9월 8일에 그는 동 준비회가 참여한 한민당 발기인이 되었고 9월 16일에 한민당 창당대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는 창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문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현제명은 한민당 창당대회가 열리던 하루 전날에 ‘고려고향악협회’를 창설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고려교향악협회는 2관 편성정도의 관현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산하 악단으로 조직하였다. 그는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한 직후인 10월 20일 경성시민주최의 연합군환영회에 출연하여 미군군악대와 합동연주로 미국 · 영국 · 소련 · 중국 국가를 지휘하며 미군정에 적극적인 협력을 강화하였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그는 1945년 12월에 제2대 미군정장관으로 취임한 러치(Archer L. Lerch)를 고려교향악협회 명예회장으로 취임시키면서 미국에서 즐겨 사용한 로디 현(Rody Hyun)이라는 이름을 공식화함으로써 친미적 인사로 변신하게 되었다.
현제명은 이후 임시 정부와 연합군환영준비위 실행위원으로서 설비부원(위원장 權東鎭, 부위원장 김성수 · 허헌 · 이인, 1945년 9월 4일),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 준비위원회(명예회장 이승만 · 김구) 연예부원(1946년 2월 4일), 전조선문필가협회 추천회원(1946년 3월 13일),70) 8.15 평화 및 해방준비위원회 음악부(1946년 8월 9일), 러치발인식에서 현제명과 왓츠의 찬미가 독창으로 첫 순서 시작(1947년 9월 16일),71)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환영준비위원회 위원(1947년 12월 13일 오후2시, 중앙청 제1회의실),72) 유엔조선임위환영 전국대회에서 현제명의 대학생과 중학생 연합합창단지휘로 「환영가」 합창(1948년 1월 14일), 국회위원 선거위원회가 각 선거위원장 및 위원 발표 시 서울시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1948년 3월 24일),73) 음악가 61명이 포함한 문화예술인 500여 인이 초청된 시공관에서 1948년 12월 27일부터 28일까지 2일간 개최된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 대회의 초청인사’로 활동하였다.74)
국립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초대 음악학부장에 임명된 현제명은 이후 재단법인 한국음악원 이사장(1948), 문교부 예술위원회 음악분과 위원회 위원(1949), 한국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1949), 『세계명작 가곡집』 제2집 발행(世界名作 歌曲集, 1948)과 작품 오페라 《춘향전》(春香傳, 전 5막) 발표(1950), 서울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1952),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초대학장(1953),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1954),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1954), 가극 《왕자 호동》 발표(王者好童, 1954),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1955), 유네스코 제9차 총회한국대표(1956),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부위원장(1960) 등 거목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10월 16일 숙환으로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5년 후인 1965년 10월 26일에 정부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1945-1947년 사이 강대국의 한국 신탁 통치 구상과 군정 실시, 통일 국가 수립의 성격, 친일 청산과 민족 문화 건설 등 시대적 과제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이념 및 방향성의 차이는 음악계에도 분열을 가져왔는데 당시 음악계는 우파의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위원장 현제명)과 좌파의 조선음악가동맹(위원장 김재훈), 중도의 고려음악협회(위원장 채동선, 1947년 2월)로 나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현제명의 미군정과의 친밀한 관계는 그에 대한 음악인들의 비판을 불러왔는데 특히 채동선(蔡東鮮)은 “악계의 대표적인 무절조 사대주의자인 현제명과 그를 지지하는 일파들이 자본주의와 사대주의 하에 농성 중“이라고까지 비판하였다.75) 하지만 그의 음악계에서의 위상으로 인해 그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도 많았는데 나운영은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하였다.
선생은 성격이 명랑 · 쾌활하고 활동적이어서 演奏활동이나 作曲 활동 외에도 학교를 설립하고, [···] 국제적 인물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수완이 좋고 포용력이 강해 휘하에 이유선 · 김성태 · 문학준 · 이인범 · 김생려 · 정희석 등등 綺羅星과 같은 愛弟子를 항상 거느리고 있었으며, 反對派까지도 포섭하는 비상한 능력이 있어 그야말로 음악계의 總司令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줄로 생각된다. [···] 선생은 많은 사업을 남기었으니 音樂事業家라 해도 좋을 듯하나, 뭐니 뭐니 해도 선생은 사업가이기 전에 作曲家요, 작곡가이기 전에 聲樂家였다고 나는 생각한다.76) (밑줄은 필자)
70) 『동아일보』, 1946년 3월 9일, 11일, 14일자. 71)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7년 9월 14일-17일자. 72) 『경향신문』, 1947년 12월 13일자. 73)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8년 3월 25일자. 74) 『서울신문』, 1948년 2월 26일자. 75) 채동선, “조선악단의 운명은 어디로 가는고”(미발표 원고), 이상만, “채동선, 그 생애와 작품과 사상-채동선 30주기를 맞이해서” 『공간』 18/2 (1983), 41. 76) 라운영, “현제명박사론,” 137-138.
정치가 인간의 생활을 적용하는 규칙이자 지배이고 또한 통치를 정당화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는 활동이라면, 음악보다 정치적 감각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던 현제명을 통해 그의 선택이 후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비판적으로 평가해 보았다.
한 음악가로서 현제명은 촉망받은 테너였지만, 성악가로 활동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적 활동을 통해 근대 양악계의 대부가 되었다. 현제명은 한국 근대 양악계의 최정상에서 활동한 음악인이다. 그가 살아온 시대마다 그가 조직하거나 관여한 조직체가 악단을 대표하는 산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 정치가로서 음악사회를 주도했다. 순수한 악단 조직체이든, 정치적 조직체이든, 친일 조직체이든 그는 항상 정상에서 악단을 주도하며 일본제국과 손잡고 일본이 국가적으로 추구한 음악정책을 주도한 음악인이다.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되면서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악단을 대표하였으며, 1938년 조선 총독부와 일본음악인들이 중심적으로 조직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경성음악협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어 조선의 음악인을 대표하였으며, 1942년 조선 총독부의 일본국민음악 정신대(挺身隊)로서 중심적인 연주단체로 재출발한 ‘경성후생악단’의 이사장이었으며, 1944년에 조선 최대의 악단 조직체로 일본인들이 주요 부서를 장악한 조선 총독부 조직체 ‘조선음악협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현제명 자신이 권력을 활용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모두 정치적 활동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그의 열정과 헌신과 노력은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1937년 그의 사상적인 전향성명서 발표이후 대동민우회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 대화숙 · 조선임전보국단 ·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조선 총독부가 공인하는 준국가기관에서 사상계 대부로 활동한다. 그리고 탈민족적인 입장에서 일본정신과 그 문화와 대화하는 정치 이념으로 활동한다.
모두, 일본제국이 서양제국주의자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하고 팔굉일우로 결합하는 일본주의로 조선과 아시아를 구하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이야말로 세계 인류를 지도할 원리로 깨닫고 이제부터 일본정신 사도로서 매진한다는 그 정치적 활동이 현제명의 활동이었다. 이 활동은 경성음악협회 · 조선음악협회 · 경성후생실내악단 · 경성음악학교 등에서 음악계 정상임을 상승시키는 활동이어서 한국 최대 최고의 음악 정치가로 부각시킴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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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usician of The Empire, Je-Myoung Hyun Noh, Dong-Eun
If politics is a rule and dominance which is applied to people’s life and to carry out an activity to create, maintain, modify and destruct governance, we can see these political activities in musician Je-Myoung Hyun. As a musician, he was a promising tenor, but his activities were not limited in the area of a vocalist. Rather, he carried out political activities and became the leader in the area of modern Western music.
Je-Myoung Hyun was a musician who was carrying out his activities in the summit of Korean modern Western music. In his day, organizations he established or was involved in played the pivotal role of musical bands and he took the lead musical society as a musician and politician. Regardless of pure musical bands, political organizations or pro-Japanese entities, he was always at the summit of those organizations and took the lead in musical bands, thus cooperating with Japanese imperialists and taking the lead in the musical policy Japanese pursued in a national level.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Association of Cho-sun Musician(朝鮮音樂 家協會) in 1931, he was elected as the first chief director, thus representing Korean musical bands. He was elected as an assistant administrator for the Federation of Association of Keijo(京城音樂協會) established in 1938 by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朝鮮總督府) and Japanese musicians claiming to advocate the assimilation policy of Korea into Japan, thus representing Korean musicians. In 1942, he was the chief director for the Band of Keijo Chamber Music(京城厚生室內樂團), a restarted central performance organization as a group of comfort women for Japanese national music for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in 1944, he carried out activities as a director for the Association of Cho-sun Music(朝 鮮音樂協會), a biggest musical band organization in Korea and organization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of which important positions were occupied by Japanese people.
If his political activities could make him achieve his goals with his power, his devotion and endeavor deserve to be rightly evaluated. However, from just before announcing his statement of conversion of ideology in 1937, he had carried out political activities as a Japanese who was more than pro-Japanese musician in such quasi-state agencies, officially approved by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s the Society of Cho-sun Liberal Art(朝鮮文藝會), the Society of Fellowship(大同民友會), the Federation of Cho-sun’s Total National Spirit(國民精神 總動員 朝鮮聯盟), the Federation of Cho-sun Idealogical Movement(時局對應 全鮮思想報國聯盟), the Lodgings of Yamato(大和塾), the Cho-sun Loyal’s Corps(朝鮮臨戰報國團) and the Federation of Cho-sun’s Total Strength (國民總力朝鮮聯盟).
All those organizations advocated Japanism of which principles were Japan-oriented protection of Asia from Western imperialists and the integration of all the countries in the world into Japan like a family. In this vein, as a disciple of Japanese ideology, Je-Myoung Hyun carried out his political activities focusing on the construction of the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which would supposedly rescue Korea and Asia and become the guiding principle of people in the world.
Those activities sublimated him into the summit of musical world in the Federation of Association of Keijo, the Association of Cho-sun Music, the Band of Keijo Chamber Music, the School of Keijo Music and so on. Therefore, he was highlighted as a best and greatest Korean musician and politician in his day.
Keywords: Political Activities, Association of Cho-sun Musician, Federation of Association of Keijo, Government-General of Korea, Band of Keijo Chamber Music, Association of Cho-sun Music, Society of Cho-sun Liberal Art, Society of Fellowship, Federation of Cho-sun’s Total National Spirit, Federation of Cho-sun Idealogical Movement, Lodgings of Yamato, Cho-sun Loyal’s Corps, Federation of Cho-sun’s Total Strength
투고일 : 2011년 4월 25일 심사일 : 2011년 4월 28일~5월 6일 게재확정일 : 2011년 5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