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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 만호 노인(魯認)과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
《朝鮮王朝實錄》《선조실록》 188권, 1605년(선조 38년) 6월 23일 전문 내용을 살펴볼 때 여도 만호(呂島萬戶) 노인(魯認)은 재능과 공적은 온 도내에서 최고이지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온 이후 47세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고과 반영에서 항상 다른 사람보다 늦었다.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제목: 전라도 안문 어사(安問御史) 민여임(閔汝任), 수령 평가에 대한 비판으로 사직을 청하다.
민여임(閔汝任)이 수령의 현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하여, 자신의 파척을 아뢰다.
사헌부 지평(持平) 민여임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전라도 안문 어사(安問御史)의 임무를 띠고 본도에 도착하여 도내 수령의 현부(賢否)를 알아볼 때에, 듣기를 ‘관찰사 장만(張晩)이 마음을 다해 직무를 수행, 군량을 거의 만여 석이나 마련하였고 정용(精勇)한 기병(騎兵) 5백여 명을 선발하여 항상 더욱 무휼하여 양성하고 있으며 무학(武學)에 있어서 더욱 열심히 훈련시켜 이미 실재(實材) 1천여 명을 길러 뒷날 유사시에 사용하려 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온 도내의 사민(士民)들이 모두들 추켜세워 추대하면서 위로 성상께 보고했으면 하고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방백의 현부에 대해서는 신이 거론할 사항이 아니었고 사체로 살펴보아도 보고하기가 참으로 곤란하였는데, 사안이 민간의 청원과 관련된 이상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장계(狀啓)를 올릴 때에, 방백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사체상 온당하지 못하나 백성의 하소연을 진달해야 하겠기에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계문한다는 뜻을 갖추어 아뢰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변경을 순력(巡歷)하면서 진장(鎭將)의 직무 수행 여부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여도 만호(呂島萬戶) 노인(魯認)이 청간(淸簡)하게 처신하고 진정으로 부하들을 대하며 군사에 대한 대비 등 여러 일에 대해서도 일일이 수치(修治)하지 않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군졸들이 마치 부모처럼 그를 사랑하여, 지난해에 각각 포폄(褒貶)하여 등제(等第)를 매길 때에 그가 하등(下等)으로 매겨졌다는 소문이 떠돌자 관하(管下)의 대오(隊伍) 전원이 상언(上言)하여 잉임(仍任)시켜 주기를 청하려 하였었습니다. 그의 재능과 공적은 온 도내에서 최고로, 이것은 도내의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알고 있는 사실로서 신만이 그렇게 들은 것이 아니었기에 신이 들은 대로 모두 갖추어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좌수사(左水使) 이정표(李廷彪)가 무슨 이유로 춘하등(春夏等)의 포폄 등제를 매길 때에 노인(魯認)을 하등 가운데에 집어넣어 고과(考課)하였는지, 신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전일 간원의 차자를 보니 ‘포폄하여 아뢸 때에 간혹 실제를 벗어나 방백과 곤수(閫帥: 수군절도사)들을 뒤섞어 칭찬하기까지 했다.’는 말로 드러나게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과연 무슨 면목으로 풍헌(風憲)의 중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책을 파척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조 御眞 전립(戰笠)본 추정(사진:위키백과)
우수(禹壽, 1557~ ?)는 1557년(丁巳) 거제(巨濟)에서 출생하였다. 자(字)는 인수(仁叟),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아버지는 종6품 무관인 사과(司果)를 지낸 우참급(禹斬級)이며, 형(兄)은 우지(禹枝)이고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다. 참급(斬級)은 전쟁에서 적을 사살하고 적의 목을 베어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하층민(천민 等)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기 위해 선조는 국가 경사(國家大慶)로 1598년 12월 19일 특별 과거 시험 참급과거(斬級科擧)를 명했다. 하층민은 이 과거를 통해 신분제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양인이 되거나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우수 水使는 안골포 만호로 판옥선을 타고 웅포, 당항포, 장문포, 영등포, 다대포, 칠천량, 명량, 노량해전에 모두 참여하며 큰 공을 세웠다.
진해 안골포(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97년 부산포 앞바다에서 이순신 통제사가 탄 배가 일본 적진(賊陣) 가까이 갔는데, 조수(潮水)가 물러나면서 물이 갑자기 얕아져 배 밑창이 땅에 닿아 배 위의 전졸(戰卒)들이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해 용맹한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가 탁월한 기동력으로 재빨리 노를 저어 가서 이순신(李舜臣)의 판옥선을 구하고 배는 선미(船尾)에 연결하여 배를 빼냈다.
우수는 1603년(선조 36) 47세 때,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4명 선발 인원 중에 17위로 급제했다. 그는 1604년 전라좌수영 5개 진영 중 하나인, 사도진 수군절제사(蛇渡鎭水軍節制使)로 근무하다 통제영에서 6월에 실시한 수군훈련에 대비하고자 파견 나왔다가 당포(唐浦) 해역에 출몰한 무장상선과 해전에 임하였다. 장군은 1607년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1617년(광해 9)에 금성(錦城, 羅州) 수령(錦城縣監)을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사진:미국 보스턴미술관)
《朝鮮王朝實錄》 《고종실록》 20권, 1883년 고종 20년 5월 8일 기사 내용을 보면
고종이 총리대신(總理大臣)인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을 인견(引見)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고(故) 수사(水使) 노인(魯認)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참획(參劃: 참모)으로서 여러 번 특출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결국 포로가 되었고, 의리를 내세우면서 굴복하지 않았으며 몰래 바다로 도망쳐 명(明)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신종(神宗) 황제는 이르기를, ‘너의 충성은 문천상(文天祥)과 같고 너의 절개는 소무(蘇武)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본국에 돌아오자 선조(宣祖)께서 하교하기를, '평소의 절개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밝은 본심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옛날의 사직신(社稷臣)에 가깝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우뚝한 충성과 뛰어난 절개로 중국에서 총애를 받고 동방에 떨치고 빛난 것이 이와 같은데 국가에서 보답하여 베푸는 은전은 오늘까지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으니 만세의 공론이 억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순위를 뛰어넘어 정경(正卿)의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기풍과 명성을 세워나가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아뢰니, 윤허하였다. 이에 따라 병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다.
노인이 작성한 《금계일기(錦溪日記)》는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 일본 정세 등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일본의 산천과 호구, 풍속 등은 물론 일본에서 탈출한 경위와 중국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곳의 학자들과 나눈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1823년 나주 금계원에서 활자로 문집을 간행했으며, 보물 제311호로 지정(1963. 1. 21)되었다. 1955년 그의 후손인 노민표(魯玟杓)가 6권 2책으로 재편찬해 나주 거평사에서 석인본(石印本)으로 간행하고, 2008년에 전남문화유산해설사회 노기욱 회장이 한글로 국역하였다.
《금계일기(錦溪日記)》 필사본(사진:이돈삼)
우수(禹壽) 장군은 거제도 섬 출신 장수이다. 임진왜란 해전 중 칠천량 전투에서도 불사조처럼 살아나고, 40전 해전을 한 우수 장군은 우리나라 해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장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평생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누볐으며 정유재란 당시 1597년 부산포에서 이순신 수군통제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 이순신 장군을 구했다.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선조에게 이 내용을 상소해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선조실록》 86권, 1597년(선조 30년) 3월 20일 경술/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8일의 통제사 원균의 장계문은 3월 20일 임금에게 도착했다.
2월 28일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이 장계(狀啓)하기를,
“부산포(釜山浦) 앞바다에서 진퇴(進退)하며 병위(兵威)를 과시하고, 가덕도(加德島) 등처에서 접전(接戰)한 절차는 전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 탐문하였더니, 본영(本營) 도훈도(都訓導) 김안세(金安世)의 공초(供招)에 ‘전 통제사가 부산포 앞바다로 가서 진퇴하며 병위를 과시할 때, 통제사가 탄 배가 적진(賊陣) 가까이 갔는데 조수(潮水)가 물러가 물이 얕아지면서 배 밑창이 땅에 닿아 적에게 배를 빼앗기게 되었을 적에 배 위의 전졸(戰卒)들이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하니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가 노를 빨리 저어 달려가서 이순신(李舜臣)을 등에 업어 어렵게 우수의 배로 옮겼고 이순신이 탔던 배는 선미(船尾)에 연결하여 간신히 안골포로 끌어왔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대개 이번 부산의 거사(擧事)에서 우리나라 군졸들이 바다 가득히 죽어 왜적의 비웃음만 샀을 뿐, 별로 이익이 없었으니 매우 통분할 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제장(諸將)들을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나주 판관(羅州判官) 어운급(魚雲級)은 대루(對壘)한 날에 불조심을 하지 않아 기계(器械)와 군량을 일시에 다 불타게 하여 적진(賊陣)의 코앞에서 참담한 화를 자초하여 도리어 저 적이 밤새도록 구경하며 좋아라 깔깔대게 하였으니 더욱 통분스럽습니다. 어운급의 죄상을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전일 부산 앞바다에서 병위를 과시한 일은 유해무익(有害無益)했을 뿐만 아니라 주사(舟師)의 허실(虛實)을 적으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였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안골포·가덕도 두 곳에서 접전할 때 수령·변장(邊將) 등이 패전(敗戰)한 곡절(曲折)을 추핵(推覈), 계문(啓聞)하여 죄를 주게 하고, 나주 판관 어운급은 잡아온 뒤에 빙문(憑問)하여 처치할 것으로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원전】 ○ 二月二十八日統制使元均狀啓: 釜山浦前洋進退揚兵, 加德等處接戰節次, 前統制使李舜臣, 已爲馳啓。 其時之事, 詳細探問, 則本營都訓導金安世招內, 前統制使往釜山前洋, 進退揚兵時, 所騎戰船, 賊陣至近之處, 潮水退淺時, 掛本蹲蹜, 將爲彼賊所奪之際, 船上戰卒, 高聲呼唱, 安骨浦萬戶禹壽促櫓馳入, 李舜臣負背, 艱難移置禹壽船後, 李舜臣所騎船, 安骨浦船尾引結, 纔得出來。 大槪今此釜山擧事, 我國軍卒, 滿海致死, 笑侮於彼賊, 而別無所益, 事甚痛惋。 同諸將朝廷處置。 羅州判官魚雲級, 當此對壘之日, 不謹愼火, 器械、兵糧, 一時燒火。 與賊陣纔一布場之地, 自取慘怛之患, 反爲彼賊終夜觀瞻, 揚揚笑侮, 尤極痛憤。 向前魚雲級罪狀朝廷處置事。 啓下備邊司, 回 啓: "前日釜山前洋揚兵之擧, 非但有害無益, 至於舟師虛實, 使賊無不知之, 極爲寒心。 安骨、加德兩處接戰時, 守令、邊將等致敗曲折, 推覈啓聞科罪。 羅州判官魚雲級拿來後, 憑問處置事, 行移何如?" 啓依允。 【태백산사고본】 54책 8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182면
조선 수군 조련도(사진:세종대학교)
1597년( 선조 30년)의 이순신 통제사의 행적을 조사했다. 선조가 2월 6일 이순신의 파직을 명했다. 이순신 통제사는 파직을 전달받지 못한 채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정해 왜군에게 무력 시위를 벌이고 본영으로 귀환하다 군선 한 척이 물을 구하러 웅포에 정박하자 왜군 19명이 기습하여 1명이 전사하고 수군 5명이 안골포로 잡혀갔다.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붓고 상륙 공성전을 감행하였다. 이 소식이 부산포에 알려져 고니시(小西行長)가 급히 요시라를 보내 사과하고 포로들을 교환했다. 당시는 명나라와 일본이 휴전 협상 중이라 해상 전투가 금지되었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사진:위키백과)
1957년 음력 2월 25일 가덕도에 왕이 보낸 선전관이 원균과 함께 나타나 이순신에게 통제사직 해임을 통보했다. 2월 26일 이순신은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지휘권을 인계했다. 선전관은 이순신을 압송했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많이 온다고 조선에 통보해왔다. 원균은 수군 본영을 한산도 통제영으로 후퇴하였다. 통제사 원균은 2월 28일의 왕에게 장계를 올려 3월 20일 임금에게 도착했다. 원균은 3월 9일 기문포로 출정했다가 왜군을 18명 죽이고 이들을 몰아냈으나 우리 수군 140명이 죽고 판옥선 1척을 빼앗겼다. 이순신은 압송당해 3월 4일 감옥에 갇혔다가 4월 1일 옥에서 나왔다. 선조의 백의종군하라는 지시를 받고 아산으로 내려가던 중 4월 13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렀다, 19일 아산을 서둘러 출발해 4월 27일 순천에 이르렀다. 5월 28일 하동 현감이 이순신을 찾아와 원균의 하는 짓이 미쳤다고 토로했다. 6월 10일 우이정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 등이 종사관 남이공을 보내어 견내량을 지키면서 부산포를 강습하라고 원균 통제사에게 명했다. 6월 18일 권율이 도체찰사에게 3차례, 원균에게 1차례 출전을 독려하여 원균을 수군 단독 출전하게 독촉했다. 원균이 한산도에서 함대 100척을 이끌고 2차 출정에 나서 거제 장문포에서 숙박했다. 7월 4일 원균이 3차 출정에 나섰다. 7월 11일 4차 출정하여 가덕도까지 가서 무력시위를 하였다. 왜선은 일부로 조선 수군과 교전을 피하고 계속 달아나는 전술을 구사했다. 조선 수군은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오기 위해 중간에 칠천량에서 정박했다.
〈東輿圖〉 거제부 칠천도(사진;김정호)
7월 16일 새벽 3시경 조선 수군은 거제도 칠천도 해상에서 일본 수군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1630)가 보낸 선발대 50척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여 정오경 몰려든 1,000척의 함대 기습을 받아 조선 수군 14,000명 중 8,000명이 전사하고 거북선 3척이 수장되었다. 판옥선 160척 중에서 148척이 침몰 및 실종되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투 중에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탈출했다. 이 해상 전투는 조선 수군의 완전한 궤멸이었다. 7월 18일 권율이 이순신을 찾아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쩌겠소”라고 말을 아꼈다. 이에 이순신은 송대립, 이희남 등 군관 9명과 병사 6명을 데리고 피해 상항을 확인하러 떠났다. 왜군은 칠천량에서 승리한 후 영호남 내륙으로 진격하며 양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7월 22일 선전관 김식이 원균의 패전 소식을 왕에게 보고했다. 선조는 충청도에 판옥선이 남아 있는가? 물어본다, 그러나 남은 배가 없다는 신하의 말에 놀라 명나라에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선조는 원균 통제사의 죽음과 조선 수군의 궤멸을 수습하기 위해 7월 23일 이조판서 이항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순신을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교서를 내렸다. 8월 3일 이순신은 선전관 양호가 가져온 敎書와 유서(諭書)를 진양(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의 사랑채에서 숙배(肅拜)한 뒤 삼가 받들었다. 8월 13일 왜군 6만 명이 남원성에 총집결해 전투가 16일까지 벌어져 3일 만에 조선군 7,000명, 전라병마군 1,000명, 명나라 군사 3,000명, 숫자를 알 길 없는 많은 의병(義兵), 의승군(義僧軍)이 전사했다. 함양 함석산성(해발 1,190m)이 함락되었다. 남원성 전투에서 힘든 전투를 한 일본군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병사가 많이 죽고, 부상당해 할 수 없이 부대를 남쪽으로 후퇴시겼다. 국가유산청은 사적 ‘남원 만인의총’을 관리하며 2024년 9월 ‘남원의총역사문학관’을 개관했다.
남원성 전투(사진;남원시)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군 열선루(列仙樓)에 선전관 박천봉이 선조의 유지(有旨)를 들고 나타나 이순신에게 전달했다. “주사(舟師·전선)가 너무 적어 왜적과 맞설 수 없으니 경은 육전(陸戰)에 의탁하라.” 임금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지시를 받았지만, 이를 따를 수 없어 선조의 수군 철폐령에 대해 “비록 전선은 적으나 신이 오히려 살아있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수군 철폐령 반대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은 8월 18일 경상우수사 배설을 찾아가 전선 12척을 인계받았다. 8월 19일 일본군이 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한 이순신은 배흥립(裴興立, 1546~1608), 김억추(金億秋, 1548~1618) 거제현량 안위(安衛,1563~1644), 유형(柳珩, 1566~1615) 등과 함께 조선 수군 복원을 빠르게 착수해 나갔다. 유형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적탄을 맞았지만, 이순신을 대신해 함대를 지휘하여 승리했다. 그는 1602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1607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제수받고,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재임 중에 죽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유형(柳珩)(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타 가즈요시(太田一吉)의 醫僧(주치의)였던 62세의 승려 게이넨(경념, 慶念, 1536~1611)은 원래 규슈 오이타현 우수키시(臼杵市) 淨土眞宗 安養寺 주지였다. 그는 처음에 조선에 가기를 꺼렸으나 성주의 거듭되는 설득으로 1597년 7월 7일 대마도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그의 임무는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선 일본 무장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동태를 감시해 도요토미에게 보고하는 군감이 되었다. 게이넨은 7월 29일 일기에 “지나가던 해로(海路)의 처음부터 끝까지 적선이 있었던 모든 섬에서는 적선이 파괴되어 불타고 있었고, 마을마다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어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썼다. 8월 3일 일기에는 “고성 당항포를 거쳐 섬진강 입구에 들어가 보니 끝도 보이지 않는 큰 강이다. 소문으로 듣던 섬진강 하구가 여기런가.”라고 기록돼 있다. 8월 5일부터 일본군의 잔혹한 살인이 시작됐다.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고, 강도 마을도 다 불태웠다. “산 사람은 쇠줄과 대나무로 목을 엮어 끌고, 부모는 자식 걱정에 울부짖고, 자식이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은 난생처음이다. 들도 산도 모두 불 지르라고 소리치는 일본 무사의 소리, 마치 피범벅이 된 지옥 같은 광경이다.”라고 일기에 적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개탄했다. 울산성전투에서 왜군이 식량과 물이 부족해지자, 오줌을 받아 마시고 말을 잡아먹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상황을 상세히 남겼다. 그는 9개월간 조일전쟁을 직접 겪으며 참혹한 현장을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일본 전통 시 형식으로 남겨 실상을 증명하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를 제공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자료 국역사업’으로 일본의 종군 기록을 번역하여 《일본의 임진 · 정유전쟁》 책을 2025년 12월 8일 출간했다.
향토사학자 고영화(사진;高永和)
거제시 향토사학자 고영화(高永和)는 거제신문 2016년 3월 8일 신문에 ‘이순신과 함께한 거제인 우수 장군’ 기사에 <호국(護國) 단심(丹心) 거제인 우수(禹壽)장군> 시를 발표했다.
桓桓禹公將 굳세고도 날래었던 우수(禹壽)장군은 仡仡萬戶臣 용감하고 씩씩한 신하 만호였었다. 挺身抵倭賊 앞장서서 왜적들을 막아서니 傍若蹈無人 마치 곁에 무인지경을 밟듯 했다. 鼎重東邦業 중대한 직임은 동방의 업적이며 碧海一片心 깊고 푸른 바다의 일편단심일세. 日映臨海水 태양은 바닷물을 밝게 비추고 百年臣節深 신하의 절조는 한평생 깊었어라. 英風洒夷夏 고상한 절조에 오랑캐도 감동하니 始終如一般 시종일관 매양 한가지였다네. 偉哉佳氣公 위대하도다! 아름다운 공이시여! 稟精巨濟山 거제 해산(海山)의 정기 받았어라.
이순신 장군과 우수(禹壽)(사진:영화 명량)
필자는 범선 코리아나(선장 정채호)를 비롯해 다양한 선박을 타고 거친 바다를 항해했다. 그럴 때마다 늘 가슴 한구석에 지울 수 없는 의구심이 남았다. 우리 역사에는 해군 영웅 수사(水使, 사령관)들이 많은데, 위대한 명성을 지닌 장군들의 이름이 있는 함정이 없어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한민국 해군은 새로운 함정을 진수하기 전에 ‘함정 명칭 제정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함정 이름을 심의하고 결정한다. 이 기구는 민관 합동 심의 기구로 위원회에서 확정된 함정 명칭은 해군참모총장의 승인을 거쳐 진수식 때 공식 선포된다. 대한민국 해군 최신예 호위함 함정에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와 사도진수군절제사(蛇渡鎭水軍節制使)를 지낸 우수(禹壽) 장군과 《朝鮮王朝實錄》 실록과 《고종실록》에 여러 번 등장하는 수사(水使) 노인(魯認)의 이름을 딴 함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 정조대왕함(사진:현대중공업)
남해안 일대의 복잡한 바닷길과 해안 지리를 모두 꿰뚫은 조선왕조 최고의 수사(水使, 해군 사령관)를 우리 후손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 해군의 기틀을 다지고 나라를 지킨 고결한 선조들을 잊지 말고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한다. 특히 조선 해군에서 공헌이 지대하고 존경받았던 사도진 수군절제사 우수(禹壽) 장군과 병조 판서에 증직된 수사(水使) 노인(魯認)의 이름을 구축함(驅逐艦) 함명으로 부활하여 대한민국의 대양해군을 이끌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