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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이일걸의 지식창고 2021.02.17. 12:44 (2021.02.17. 12:44)

홍산유적지 청동기 명문(銘文)의 실체를 분명히 밝힐 때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고사부정론자’ 학설을 맹신하는 중국학자들 주장의 허점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가장 논쟁이 많은 부분이 고조선의 역사이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기사는 분명 우리 민족의 최초 국가를 건국했다는 사실을 내포하는 신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는 학자들과 인정하는 학자들 간의 논쟁은 오래 되었다. 더구나 일부 학자들이 우리 민족 건국 역사를 축소하기 위해, 단군의 역사를 전적으로 신화화하여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더욱 왜곡시키고 조작하였다.
 
요녕성 객좌현 일대에서 1970년대 홍산유적지에서 발견된 청동기 명문(銘文)의 해석을 두고, 일부 학계는 시기적으로 전혀 상관없는 ‘기자동래설’을 연관시켜 거짓된 논문과 저서를 양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부 학계의 파행은 1세기 전 중국학계를 장악한 ‘고사부정론’자들의 학설을 맹신하고 있는 중국학자들의 주장을 비판 없이 쉽게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와 같은 일부 학자들이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논문과 저서의 주장들이 ‘고사부정론’을 맹신한 중국학자들의 거짓 이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힌다.
 
1973년 봄인 3월과 5월에 지하 저장갱인 교장(窖藏)에서 12기가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1977년까지 중국학자들에 의해 청동기 유물이 대량 발굴되었음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1979년 1월 5일이었다. 경향신문을 통해 발굴기사를 전해준 이는 당시 대만대학에서 수학한 A씨가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밝혀졌다. 당시 기자조선(箕子朝鮮) 때의 청동기 유물의 출현으로 중국학자들도 기자조선의 위치가 요녕성 대릉하(大淩河) 연안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하였다.
 
대릉하 연안의 객좌현 일대에서 발굴된 수십 건의 청동기 중 기후방정(㠱候方鼎), 언후우(匽候盂), 칭부신정(稱父辛鼎) 등의 명문(銘文)에 종족의 특징을 의미하는 독특한 부호 형태의 도상문자(圖像文字)인 족휘(族徽)가 새겨져 있다. 이들 족휘(族徽)가 기자(箕子)나 고죽국(孤竹國)을 의미한다는 이론을 주장하면서 기자동래(箕子東來)설을 제기하였다. 또한 3000년 전의 기자조선의 위치가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 아니고 요녕성 객좌현 대릉하 지역임이 입증되고, 기후방정(㠱候方鼎)의 바닥에 새겨진 기후아오(㠱候亞鼎吳)의 기후(㠱候)가 기자(箕子)이며 고죽국(孤竹國)이 기자조선의 봉지(封地)라고 A씨는 단정하였다.
 
이와 같은 기자조선의 대동강설을 부정하는 A씨의 논문은 당시 사학계의 중진들에게 ‘기자조선’의 실존 문제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기자(箕子)가 대동강의 평양까지 건너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중국학계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실제로 대만의 양가빈(梁嘉彬)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A씨의 기자동래(箕子東來)설과 객좌현에서 출토된 청동기 명문(銘文)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학자들도 있었다. 또한 대릉하 중·상류 유역에 연(燕)의 세력과 기후(箕侯) 및 고죽국(孤竹國)의 실존했음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본래 고죽국(孤竹國)은 은(殷)의 제후국으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의 아들이었다. 주(周) 무왕이 부친인 문왕의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은(殷)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하자, 백이(伯夷) 형제는 이를 말렸지만 무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이에 두 형제는 주(周)의 백성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굶어 죽었다. 고죽군(孤竹君)은 상(商)의 탕(湯)왕이 봉하였으며, 고죽씨족(孤竹氏族)의 수령이 유융씨(有娀氏) 중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고죽족(孤竹族)은 은상(殷商)의 시조인 설(契)의 모친인 간적(簡狄)에게서 배출된 씨족으로 성(姓)은 묵태(墨胎)이다.
 
객좌현 북동촌 1호 교장에서 발견된 ‘수이함한뢰(首耳銜環罍)’라는 술독에 새겨진 금문은 중국학계는 서주시기 또는 상대 후기로 비정하였다. 사학자 B씨 역시 상대 만기(晩期), 즉 상대 후기로 단정하였으며, 금문 6자의 명문(銘文)은 “부정(父丁), 고죽(孤竹), 아미(亞微)”로 해독하였다. 그는 송(宋) 이래 저록(著錄)된 청동기 명문(銘文)인 「박고도(博古圖)」와 비슷한 ‘아(亞)’형과 ‘고죽(孤竹)’ 및 ‘죽(竹)’의 문자가 들어간 5건의 명문(銘文)을 참고하고 비교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다른 논문에서는 『설문(說文)』 등의 문헌에 기록된 문자를 예를 들어 ‘고죽(孤竹)’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박고도(博古圖)』 명문의 해석문은 ‘아헌(亞憲), 고죽(孤竹), 내(迺)’이다.
 
그리고 B씨는 ‘고죽(孤竹)’이 들어간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라는 술독의 명문이 고죽국의 1차적으로 중요한 발견이라고 하였다. 그는 문헌과 금문(金文) 및 갑골문까지 비교 분석하면서 ‘고죽(孤竹)’의 의미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죽(孤竹)’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라는 명칭은 술독의 형태에 따라 지어진 명칭이다. 이 청동기의 명문(銘文) 내용은 B씨가 올바르게 추론한 내용이 아니다. A씨, B씨는 객좌현의 출토된 청동기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기후(㠱候)와 언후(匽候) 및 아오(亞吳)의 숨겨진 의미를 모른 채, 기후(㠱候)가 기자(箕子)라고 단정하였다. 따라서 상말주초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왜곡된 추론에 의거해 ‘고죽(孤竹)’이라는 문자가 고죽국(孤竹國)으로 추측하였던 것이다. A씨와 B씨의 해석에 의거하면, 결국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건국하여 통치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가 “삼국유사-기본사료인 체계”인 ‘고조선-열국시대’ 체계는 검증된 ‘강호사학계’의 역사체계이며, 반면 “제왕운기-고려사 체계”는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열국시대’ 체계는 일부 학계의 역사체계이다. 전자는 단군조선의 강역과 낙랑군의 위치를 만주로 비정한 반면, 후자는 단군조선의 강역을 평양 중심의 강역으로 비정하였다.
 
먼저 일부 학계가 착오를 범한 기후(㠱侯)와 언후(匽候) 및 ‘고죽(孤竹)’으로 해석한 도상(圖像) 문자를 풀어보자.
 
기후(㠱候)는 기후방정에 새겨진 “기후아오(㠱候亞吳)”의 의미를 분석하면, 큰 아(亞)자 형태 안에는 기후(㠱候)의 고금문 형태가 아래로 그려져 있다. 기후(㠱候)는 고신(高辛)과 차비(次妃)인 간적(簡狄) 사이에 태어난 딸인 아황(蛾皇)이다. 간적(簡狄)은 고양의 3자인 곤(鯀)의 양딸이며 요(堯)와는 남매간이다. 반면에 언후(匽候)는 요(堯)의 딸인 여영(女英)이며 언후(匽候)는 아오(亞吳)의 관직명이기도 하다. 아오(亞吳)는 오회(吳回)이며, 요(堯)의 두 번째 공공(公工)이 되어 정치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오회(吳回)가 실각하여 유주로 쫓겨 가면서 큰 새(鳳·鵬)가 기러기(雁)로 변하고, 또한 제비 연(燕)으로 격하된다. 따라서 오회(吳回)가 귀양 간 북경 부근의 유주(幽州)가 연(燕)으로 바뀐다.
 
 
▲ 그림 1 기후아오(㠱候亞吳)
 
▲ 그림 2 기(㠱)자의 고금문 형태에서 변화과정
 
그림 1의 큰 아(亞)자 형태는 혼인제도의 ‘동실형제(同室兄弟)’임을 나타내는 양급제(兩級制)인 푸날루아(Punalua) 체제임을 의미한다. 특히 아(亞)자가 있으면 저(貯)로 표시하여 기재한다. 아(亞)자 형태의 족휘(族徽)는 신농의 현손이며 고양의 손자인 오회(吳回)와 순(舜) 계열의 명씨예기(命氏禮器)로 사용한다.
 
저기후(貯㠱侯) 오·우(吳·虞)는 제곡의 자서(子壻)이며, 고양(高陽)의 손자 중의 한 사람이며, 제순(帝舜)과 ‘동실형제(同室兄弟)’가 된다. 큰 아(亞)자 밑의 ‘오(吳)’자는 ‘오(吳)’(우‧虞)의 자체자(子體字)로, 변음 ‘우(虞)’ 소리(聲)로 읽는다. ‘기(㠱)’는 바로 ‘아황(娥皇)’이다. ‘사기(巳其)’라는 호칭에서 ‘사(巳)’는 자성(子姓)이 되는데, 이는 ‘기(其)’가 자일급여성의 소생임을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제요(帝堯)의 모일급처속 소생의 ‘언·안(匽·雁)’보다 위에 위치하는데, 그러면 이 ‘기(㠱)’는 제곡(帝嚳) 고신의 자일급처속 소생의 여아(女兒)가 된다.
 
부계(父系)에 따르면 그녀는 제요(帝堯)의 자매가 되고, 여영(女英·鷹)의 고모가 된다. 여영(女英)은 고모를 따라 시집간 자일급처속인 ‘잉첩(媵妾)’이다. 순(舜)과 저오(貯吳)는 동실(同室)의 형제이다. 족휘(族徽)인 아(亞)를 나타내는 족칭은 『저(주)씨족‧貯(鑄)氏族을 호위한다』는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림 2의 기(㠱)자의 고금문 형태의 변화과정을 보면, 머리에 해바라기(葵)를 이고 있다. 이 해바라기는 고신과 간적의 혼인관계를 의미하며, 몸통은 외증조모인 칭(稱)의 금문자를 합친 도상(圖像) 문자이다. 기(其)위의 ㄹ자는 자일급소생이 쓰는 글자로 사(厶) · 기(己)이다. 여성을 이것을 뒤집어 표시한다. 기후(㠱候) 아황은 고신과 차비인 간적 사이에 태어난 자일급소생이다. 따라서 기후(㠱候)는 기자(箕子)가 아니다. 기후(㠱候)인 아황은 서기전 25세기 초에 고신(高辛)의 딸이며, 기자(箕子)는 상말주초(商末周初)인 서기전 12세기에 활동한 사람이다. 무려 13세기의 시간적 차이가 있는데도 일부 학자들은 기후방정(㠱候方鼎)의 명문(銘文)을 보고 기자동래설의 대한 확실한 증거로 삼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A씨 석사논문은 북경대학 출신 원로 고고학자 등이 논문지도와 심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심대한 착오를 범한 것은 100년전 고힐강(顧頡剛) 등이 중심이 된 ‘고사부정론’에 중국학계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림 3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
 
그림 3의 수이함환뢰(首耳銜環罍)의 명문 해석을 일부 학자들은 ‘고죽(孤竹)’이라고 해독하였지만 이것 역시 올바른 고금문의 해석이 아니다. 이 명문의 올바른 해독은 “부주진계제‧父珠晉(進)系(繼)諸(鏵)”라고 해야 옳다. 이 명문의 해석은 “부주(父珠)인 내가 화(鏵)족(신농‧神農과 순‧舜계열)을 이어 왕이 되었다”. 이 명문의 3구와 4구는 나아갈 진(進)과 이을 계(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3,4구는 ‘고죽(孤竹)’이 될 수 없다. 또한 1,2구의 부주(父珠)는 신농계의 왕이었던 고양(高陽), 순(舜), 백익(伯益) 중의 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청동기의 제작 연대는 적어도 신농계의 가장 후대 왕인 백익(伯益)의 즉위 연대는 서기전 2303년이다. 기자가 조선에 봉지를 받았던 시기는 서기전 12세기이다. 백익이 왕으로 즉위한 해는 서기전 24세기 초이다. 시기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사건이다.
 
일부 학자가 이 명문을 ‘고죽’으로 읽은 이유는 그의 스승이 대만인이었으며, 고사부정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00년 전 중국학계는 ‘고사부정론’으로 인해 학문 분야에 있어서 큰 변혁을 겪었다. 중국학계의 청동기 비정은 가장 오래된 청동기라도 상대(商代)를 넘지 않는다. 이는 중국학계가 ‘고사부정론’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중국의 청동기 비정은 믿을 수 없는 가짜라고 단언할 수 있다.
 
중국 학계의 고고학적 수준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이와 같은 진실을 모르고 왜곡된 중국학자들의 이론에 추종하기 바쁘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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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