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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필아저씨의 지식창고 2021.08.04. 09:47 (2021.08.03. 11:00)

비류국(沸流國) - 2

 
김동인의 역사소설. (1947년작) 이리하여 고구려는 비류나라를 힘 안 들이고 집어삼키었다. 나라를 들어 바치기 때문에 송양은, 제 고장에 무사히 그냥 주저 앉아서, 고구려나라의 다물(多勿) 태수가 되었다.
비류국(沸流國) - 2
 
 
이리하여 고구려는 비류나라를 힘 안 들이고 집어삼키었다. 나라를 들어 바치기 때문에 송양은, 제 고장에 무사히 그냥 주저 앉아서, 고구려나라의 다물(多勿) 태수가 되었다.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방언에 ‘다물’이라 한다. 부조(父祖)의 옛터를 다시 품안에 넣었다고 ‘다물’이라 한 것이다.
 
왕후를 맞고, 비류국을 합병하고 한 그때는, 고구려의 궁궐(졸본)도 정전과 내전은 되어서, 고구려 국가의, 국가로서의 체재도 좀 정비가 되었다.
 
이 임금을 사모하여 모여든 백성이 벌써 한 도시를 이룩하기에 넉넉하므로, 주몽왕은 장신(將臣)들에게 분부하여, 거기서 젊은 장정을 추려내어서, 군대를 조직하여 무술을 훈련하게 하였다. 나라를 크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구획을 그어 서울의 도시계획을 진척시키며, 온갖 장인바치를 불러들여 서울을 장식하며, 의(醫)와 무(巫)와 농(農)의 능한 자를 불러 들여 민생을 편케 하며, 각가지의 제도를 세우며 ― 단지 요 졸본 일대가 아니라, 장차 온 동방을 지배할 대고구려나라를 목표로 꾸려 나갔다. 극씨, 중실씨, 소실씨 등의 세 ‘행정 기술자’는 그들의 슬기로운 머리를 들어 나라에 기울였다.
 
고구려나라는, 북쪽으로는 강을 건너서 저편에 동부여며 북부여 나라가 있다. 부여는 성조 ‘단군’의 법통을 이은 나라라, 이웃의 군소 국가들(지나인의 세력 범위에 들지 않은)은 부여에 조헌(朝獻)하고, 부여는 은연히 ‘큰집’ 같은 지위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지나인의 영토인 낙랑 현토 등 지방이 있다. 그밖에는 그 새 왕권이 쇠약할 동안에, 근처의 토호(土豪)들이 세운 조그마큼씩 한 나라이 부지기수였다. 이 부락국가들에게 대하여, 연해 고구려나라의 사신이 갔다. 즉 너희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치고, 너희는 각각 제 고장에 다물(多勿) 태수가 되라고 권하는 권유사였다. 이 권유에 따라서 많은 국가군이 싸우지 않고 고구려의 날개 아래 들어왔다.
 
말로 권유하여 날개 아래 들지 않는 국가는 장차 힘 길러 정복할 것이었다. 이 불손 국가들을 복멸하고 겸해서 조선땅 안에 들어와 있는 지나 세력을 복멸하기를 목표로 하는 고구려의 양병은 규모도 크거니와 또한 실력을 위주 하였다.
 
신흥 국가의 기백― 게다가 해모수의 아들의 나라라는 자긍과 포부가 있는지라, 온 백성의 열성도 그만치 컸다.
 
고구려 서울에 들어서서 보면, 무슨 큰 공사장 같았다. 모두 씩씩한 사람들이 쌓고 깎고 다듬고, 노래와 춤추기를 즐겨하는 민족이라, 사면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열심히 일을 한다.
 

 
성(城)도 드높이 쌓기 시작하였다.
 
상서로운 징조가 연하여 나타나서, 새 나라의 건국을 축복하는 듯 ― 골령(鶻嶺)에는 황룡(黃龍)이 나타나고, 그 앞에는 서운(瑞雲)이 서리고, 대궐 뜰에는 신작(神雀)과 두루미가 와서 춤추고, 만물이 이 새 나라를 축복하는 듯 하였다.
 
그 시월 초사흘 (이 날은 단군이 업을 일으키신 날로, 과거 천여 년 간 동방 민족이 섬기는 ― 고구려나라의 가장 큰 절일이다) ― 이 민족의 습관대로 임금과 온 백성이 함께 모여, 크게 하늘에 제사하였다. 그 천제(天祭) 날에는 멀리 비류(沸流) 송양 태수까지 와서 함께 즐겁게 제사드렸다.
 
고구려나라는 활발하고 순조롭게 자랐다. 젊고 용감하고 슬기로운 임금과, 날쎄고 굳세고 충성된 백성으로 조직되어, 그 국토는 저절로 넓어가고, 백성은 늘어 가고, 국본은 튼튼해 갔다.
 
주몽왕이 왕후 (본시 비류왕이었던 송양의 따님)를 맞은 이듬해, 왕후는 왕자를 탄생하였다. 여러가지의 인연을 따져서, 왕자의 이름을 비류(沸流)라 하였다.
 
비류 왕자가 탄생된 다음다음 해에 또 왕자가 탄생되었다. 이름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주몽왕은 이 나라 백성에게는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였다. 온 동방에 퍼진, 주몽왕의 출생 전설과 생장 전설이 모두 신비하였더니만치, 고구려 백성들은 자기네의 임금을 거룩한 검으로 섬기었다. 두고두고 대대손손이 ‘천제(天帝)의 아들 하백(河伯)의 외손(外孫) 고주몽님의 나라, 고구려 백성이노라’고 자랑하고 뽐낸 고구려사람의 민족적 자랑은 주몽왕 초년 때부터 고구려 백성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었다.
 
신하들은 진실로 잘 협좌하였다. 모신(謀臣)은 지혜로, 무신(武臣)은 국토 확장과 국방에.
 
본시 이 나라 백성의 체력(體力)은 놀랍게 세다. 제사에 쓰려고 잡아온 멧도야지 같은 것이 어쩌다가 도망치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 빈 손으로 그 도야지를 쫓아가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몇 십 리 내지 백여리까지라도 따라가서 도로 잡아 오고야 마느니만치 날래고 힘세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다. 열다섯 살부터 마흔 살까지의 사내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한번 병역(兵役)을 치러야 하는 제도를 세웠는지라, 병졸이 벌써 몇 만 명을 넘었다.
 
장차 대고구려를 목표로 한 양병이라, 얼마 많을지라도 과하달 수 없지만, 지금의 병졸만으로도 움직이기만 하면 넉넉히 동방 천지를 긁어 안을만 한강하고 날랜 병졸이었다.
 
말〔馬〕도 여러 만 마리가 장만되었다.
 
짐승의 가죽과 구리〔銅〕를 사용하여, 방패며 투구며 갑옷도 많이 장만하였다. 경험에 의지하여 생겨난 지식의 산물이었다.
 
이 나라 백성이 즐기는 춤〔舞〕에 흥을 돕기 위하여, 여러가지의 악기(樂器)도 발명되었다. 그 악기는 또한 제사드릴 때며, 짐승 사냥할 때에도 울리었다.
 
왕검님 시대부터 문화 방면에 머리가 트인 민족이라, 온갖 방면으로 편리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방법을 안출하여서 이용하였다.
 
이 나라의 근처를 통과하는 지나인을, 포로로 잡아다가, 지나인이 먼저 개척한 분도 흡수하여, 이 나라 국민성에 맞도록 고치어서 이용하는 것도 퍽이난 많았다. 그런 필요상, 지나 계통의 인종으로 이 나라에 포로로 되어 종〔奴僕〕 살이 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무기(武器)제작과 양병(養兵)은 매우 급급히 하였다.
 
이 나라 장수들과 이 나라 병졸들과 이 나라 말을 가지고, 조상의 옛 터를 회복하여, 그 백성들과 함께 즐기려는 주몽왕의 큰 이상(理想)은 차차 진행되어, 지금 바야흐로 포화 상태가 되었다. 벋는 힘을 어디로든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스스로 폭발이라도 할만치, 고구려는 국가적으로 팽팽 긴장되었다. 부르쥔 주먹 내려칠 곳이 없어서 안달아 하는 긴장한 국가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고구려는 행인국(荇人國) 원정을 하였다.
 
행인국이라는 나라는 태백산 동남쪽 기슭에 있었다. 고구려에서 좀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온 나라이 통 험한 산에 둘러 싸이어 있어, 국방이 튼튼하고, 백성이 또한 산골 사람이라 효용하기 때문에 스스로 믿는 바이 있어서, 고구려나라에서 그 새 누차 달래 보았지만, 굴하지 안하고 자기네의 독립을 고집하고 있었다.
 
옛 터를 전부 다시 품안에 넣으려는 고구려의 대방침에는 배치되는 바이었지만, 좀 멀리 있고 게다가 고구려는 아직 양병 도중이므로, 괘씸하다 보기만 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괘씸한 도는 차차 더해 가서, 고구려 영토와 연접한 지역 (지금은, 서울에서는 꽤 먼 데까지가 고구려의 영토였다)까지 행인국 사람이 간간 들어오는 일이 있고, ‘하늘의 아들 하백의 외손 고주몽님의 나라’라는 것을 자랑하면, 행인국인은 그것을 코웃음쳐 버리고 한다.
 

 
주몽왕의 무장들은 연해 행인국 정벌을 임금께 진언했지만, 주몽왕으로서는 그 치중(輜重) 문제 등으로 아직 버려 두었던 것이었다.
 
고구려나라이 선지 제육 년째 되는 해에, 드디어 행인국을 복멸할 원정군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건국 이래 첫번 원정에 주몽왕이 베푼 꾀는 단순한 것이었다.
 
행인국은 본시 하도 벽지의 험준한 곳에 있으니, 산간 벽지라 그 국민이 죄 사냥을 업으로 하므로 날래고 활쏘기에는 능할지 모르나, 정식으로 군사 훈련을 받은 병대는 없는 나라이니까, 전쟁에는 아주 무능할 것이다. 군대라는 것은 없고, 사냥꾼이 즉, 국방군이니까….
 
그런 나라를 상대로 하는 바이라, 전쟁 잘할 필요는 없고, 이 고구려의 북과 쟁과 소라를 몇 백 틀 가지고 그 나라 국경까지 가서, 고각을 소란하게 울리면, 그 나라 임금 백성을 막론하고, 이 평생 처음 듣는 소란에 혼비백산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야단일 터이니, 그 틈을 타서 날랜 군사를 뛰쳐 들게 하여, 그 나라 임금을 사로잡고, 성과 궁궐(그런 것이 있다 하면)을 점령하면 힘 안 들이고 그 나라를 둘러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나라를 점령하고는 그 나라 백성을 사로잡아 이곳(졸본 서울)으로 옮겨서, 고구려 혼을 길러 주고, 이 나라(고구려) 백성을 얼마 그 땅에 옮겨, 그 땅을 고구려화(化)하고― 이렇게 하도록 하라는 것이 주몽왕의 지휘였다.
 
서로 경쟁하여 이 전쟁에 나가겠다는 장수들 가운데서, 오이와 부분노를 뽑아서 보냈다. 고각을 울리기에 능한 군졸 일천 명과 고각 일천 틀을 함께 보냈다.
 
나라 선 이래 첫번의 원정이라, 주몽왕도 십리 밖까지 이 장졸을 배웅하였다. 연변의 백성들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길가까지 나와서, 이 용감한 원정군을 보냈다.
 
이기고 돌아올 것을 서로 굳게 믿는 바이라,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한결같이 웃음으로 보내고 떠났다.
 
원정군이 떠난 며칠 뒤에, 임금은 정무관(政務官)으로 극(克)씨를 뒤따라 보냈다. 그 나라(행인국)를 둘러엎은 뒤에, 행인국의 전 임금을 주몽왕의 이름으로 그곳 태수로 봉하고, 그곳 토민들을 교환할 책무를 띤 것이었다.
 
한 달쯤 뒤에, 행인국 원정군의 첩보와 함께 행인 토민 삼천 명이 서울에 이민되었다.
 
행인 땅은 고구려의 한 현(縣)으로 편입되었다.
 
나날이 팽창하고 커가는 고구려나라의 임금으로 앉아 있으면서도, 주몽왕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동부여 땅에 남기고 온 어머님 유화부인의 안부와 안해 예씨 및 예씨의 몸에서 났다는 아들의 안부였다.
 
소식만은 간간 듣는다. 그 소식에 의지하건대, 부여의 금와왕은 주몽왕의 어머님 유화부인을 부여에 붙들어 두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대접에 있어서는, 이웃 나라 임금의 어머니답게 융숭하고 후하게 하지만, 아들의 나라 고구려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는 단단히 한다는 것이다.
 
아마 볼미〔人質〕 셈으로, 신흥 고구려가 연해 연방 이웃나라를 집어 삼킨다니까, 여기 대한 보장으로 왕모를 전당잡아 두는 모양이었다.
 
유화부인으로도 금와왕에 대한 은의에 보답하기 위하여, 몰래 탈출한다든가 하지는 않고, 멀리 부여 땅에서 아드님의 나라의 활발한 생장에 대한 소식만으로 위안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해 예씨 또한 마찬가지로써, 예씨는 금와왕께는 아무 의리며 의무도 없지만, 시어머님이 그냥 있는 나라를 등지고, 남편의 나라로 뛰쳐오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예씨가 아들을 낳았다 한다. 들리는 소문에는 매우 영특하며, 더구나 할머님 유화부인이며 어머님 예씨가 왕자로서의 훈육을 게을리지 않은 덕으로, 아주 훌륭한 인물로 길러나고 있다 한다.
 
주몽왕도 금와왕께 대해서는 은의와 정의가 있다. 금와왕의 태자 대소(帶素)가 등극만 하였으면 무슨 수단을 써서든 어머님과 처자를 뽑아 오고, 부여 정벌의 쾌거를 도모할 것이지만, 금와왕께 대한 은의 때문에, 그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몽왕은 일찌기 아버지는 보지도 못하였다. 아버지가 해모수님이라는 것을 전설로만 들었지, 모습도 풍모도 모르는지라, 따라서, 신성하고 거룩한 분으로 존경하고 섬겼지, 육친으로서의 정애는 안 느껴졌다. 새 나라의 임금이 되기 이전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머님 유화부인이었다.
 
강보에서 떨어지면서부터 스물두 살때까지, 오직 어머님의 품 밖에는 모르고 자랐다. 사랑과 보호와 훈도에 오직 어머님이 있을 뿐이었다.
 
그 뒤에 안해 예씨를 만났다. 아들까지 생겼다.
 
이들이 주몽왕의 잠룡(潛龍)시절의 가까운 이의 전부였다.
 
그들이 다 동부여에 있다. 그들인들, 아들 되고 남편 되고 아버지 되는 이가 남방으로 가서 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어, 부조(父祖)의 업을 잇는다면, 얼마나 달려오고 싶으랴. 이곳으로 달려오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애타고 조급하랴. 아드님의 ― 혹은 지아버님의 일국 군주로서의 씩씩하고 영화로운 모양을 얼마나 보고 싶으랴.
 
주몽왕께는 두번째로 맞은 왕후 소서노(召西奴)가 있고,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가 있어, 주몽왕의 가정적의 낙은 부족함이 없지만, 애모하는 어머님 유화부인과 사랑하는 안해 예씨와 아직 보지도 못한 아드님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儒留)라 하였다]에 대한 정애 또한 극진하여, 주몽왕으로 하여금 늘 한숨짓게 하였다.
 
주몽왕의 ― 즉 고구려의 세력 범위는 급속히 커져서, 남쪽으로는 지나인의 식민지인 낙랑 등지는 적지 않게 압축되어 국경선이 밀려갔고, 근린의 군소(群小) 국가는 차례로 흡수되었고, 문화 정도가 좀 뒤떨어진 읍루(挹婁) 종족 [이도 본시는 단군의 품안엣 백성이었지만, 일천여 년간을 풍습 다른 생활을 하는 동안에, 문화 정도가 부여 종족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소위 말갈(靺鞨)이다]의 부락들도 거진 예하에 들고, 지금은 동으로는 옥저(沃沮)가 아직 고구려의 왕권 권외요, 북으로는 ‘동부여’가 역시 그런 ― 그 이외에는 대개가 고구려의 품안에 들었다.
 
은의 깊은 금와왕만 없어지면, 동부여도 복멸할 것이요, 그러고는 지나인의 영토인 낙랑도 단군 백성의 철퇴 아래 부숴 버려야 할 것이다.
 
그 지나인의 영토를 건너서 더 남쪽에, 역시 단군 족속의 땅이 ‘한(韓)’이라는 칭호로 남아 있다. 고구려가 장차는 벋어서 그 한(韓) 땅까지 도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한(韓)의 일부분인 마한(馬韓)에는 역시 지나인인 기(箕)씨의 마수(魔手)가 뻗쳐 기씨가 마한왕이 되어 있다 한다. 단군 백성과 단군 땅을 이렇듯 침략하는 지나인을 이 동방에서 아주 송두리째 내쫓아야 할 것이다.
 
신우(神祐)와 천조(天助)를 깊이 믿는 주몽왕으로서는, 이 모든 위업을 당신의 손으로 넉넉히 하리라는 굳은 자신을 가지고 매진하였다. 만약 불행 당신께 수(壽)가 부족하면, 아드님께 계승시켜서라도, 단군의 끼치신 터는 단군 후손의 품안에 품어야 할 것이다.
 
이 큰 사업을 당신께 계승하여야 할 아드님은 지금 부여땅에서 예씨의 품 아래서 자라고 있다. 소문으로 듣자면 영특하고 슬기롭다 한다. 아버님인 당신(주몽왕)을 닮고, 어머님인 예씨를 닮았다 하면, 훌륭한 소년일 것이다. 보지도 못한 아드님(유리)께 대한 주몽왕의 기대도 컸다.
 
부여 땅에 있는 맏아드님 유리께 대한 기대도 컸거니와, 여기에 당신의 품 아래서 자라는 두 왕자(비류와 온조)께 대한 기대도 컸다.
 
지금 왕후 소서노(召西奴)는 현명한 부인이었다. 그는 지아버님의 전 부인 예씨의 탄생한 바 유리 왕자의 지위에 대하여 이해성이 있었다.
 
소서노 당신도 떳떳한 왕후요, 당신 탄생한 바의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도 떳떳한 왕자이지만, 예씨 탄생의 유리 왕자에게는 아랫동생이 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만약 그 왕자[태자가 될 것이다]가 이곳에 오면 고구려나라는 마땅히 그 태자(유리)가 계승할 것이요, 당신 탄생의 두 왕자는 왕자에 그칠 것을 이해하고, 어린 아드님들을 늘 그 정신으로 가르쳤다.
 
여자의 마음이라 가만히 생각하면 얼마간 섭섭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도리로 생각하여 역시 웃동생은 웃동생이요, 아랫동생은 아랫동생이라는 순위의 관념은 어려서부터 길러 주었다.
 
아버님인 주몽왕은 현명한 소서노 왕후의 왕자 훈육 정신을 어여삐 보아서, 아무 용훼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였다.
 
예씨와 그 아드님이 아버님의 나라를 찾아올 것을 크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불행 그 일이 달성 못 된다 할지라도, 소서노 왕후 탄생의 왕자도 넉넉히 임금의 그릇이 되겠다 보아서, 주몽왕은 아무 근심도 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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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