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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고재완의 지식창고 2017.12.07. 00:03 (2017.12.07. 00:03)

남원 '만복사지' (2016. 2. 21)

 
세조때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만복사저포기"가 나온다. 이미 저포에 대하여는 포스팅을 하였고 오늘은 온갖 복을 다 내려준다는 뜻의 만복사((萬福寺)에 대하여 알아본다.
세조때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만복사저포기"가 나온다. 이미 저포에 대하여는 포스팅을 하였고 오늘은 온갖 복을 다 내려준다는 뜻의 만복사((萬福寺)에 대하여 알아본다. 전북 남원에 있던 만복사는 임진왜란때(1597년)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터와 관련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 있어 사적 제 349호로 지정되었다.
 
남원은 사랑의 고장이다. 광한루에서 만난 춘향과 이도령의 "춘향전"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면 "만복사 저포기"의 사랑은 이승과 저승 간의 사랑이고, 춘향전은 여자가 절개를 지켰다면 만복사 저포기는 남자가 사랑을 지킨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만복사(萬福寺)에 대하여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王亭洞) 기린산(麒麟山)에 있었던 절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창건하였다고 하나, 세전(世傳)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이 당나라 군사를 묘한 언변으로 제압한 뒤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탑을 건립하였다.
 
또 철우(鐵牛)와 철환(鐵環)을 설치하고 호산(虎山)과 용담(龍潭)에도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 뒤 이 절은 남원 일대의 대찰(大刹)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수백 명의 승려가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은 예로부터 남원 8경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또 조선 세조 때의 김시습(金時習)은 이 사찰을 배경으로 불교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지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왜적이 남원 서문을 통과하여 이 절에 와서 방화를 하였으므로 이 절은 2칸의 불전과 석불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 버렸다.
 
당시에 불탄 건물로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장륙전(丈六殿)·영산전(靈山殿)·보응전(普應殿)·종각(鐘閣)·천불전(千佛殿)·나한전(羅漢殿)·명부전(冥府殿) 등이었다고 한다.
 
그 뒤 1678년(숙종 4) 남원부사 정동설(鄭東卨)이 중창을 꾀하였으나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예전처럼 꾸미지는 못하고 승방(僧房) 1동을 지어 불전에 올리는 향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현재의 절터에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보물 제30호인 만복사지오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31호인 만복사지석좌(萬福寺址石座), 보물 제32호인 만복사지당간지주(萬福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3호인 만복사지석불입상 등이 있다.
 
 
▶ 만복사지(萬福寺址)
 
만복사지는 전북 남원시 왕정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절터이다. 총 3,200평 규모의 대지위에 오층석탑(보물 제30호)과 석좌(石座, 보물 제31호)·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석인상(石人像) 등의 유물과 초석(礎石)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에서 중요건물터로는 중문지(中門址)·목탑지(木塔址)·동서금당지(東西金堂址)·북금당지(北金堂址)·강당지(講堂址)·회랑지(廻廊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고, 규모가 제일 큰 서금당이 동불(銅佛)을 모셨던 주불전(主佛殿)이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발굴조사 때 토기를 비롯한 청자·백자 등의 기편(器片)과 금동불입상, 수막새 583점, 암막새 853점 등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만복사 배치도
 
▼ 만복사지 당간지주(萬福寺址 幢竿支柱)
 
① 고려시대 절터의 당간지주로 높이 3m. 보물 제 32호다. 당간지주란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말한다.
 
②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의 왼쪽 언덕 아래 세워져 있는데, 원 위치로 추정되며 원래 상태대로 두 지주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표면에는 조각이 없으며, 정상부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사선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지다가 외면과 접하는 모를 죽여 그 부분만을 둥글게 하였다.
 
③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상·중·하 세 군데에 장치하였는데,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형의 간구(杆溝)를 마련하여 간을 시설하도록 하였다. 중·하부는 모두 원공(圓孔)으로, 중부는 상부의 간구에서 1m쯤 내려와 있는데 서쪽 지주는 외면까지 관통되었으며, 하부는 하단 가까이에 구멍을 뚫어서 중간부와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④ 현재 아래부분이 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고, 간대(竿臺)나 기단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며 전체적으로 정제된 인상은 주지 않는다. 이 곳 절터에 남아 있는 여러 점의 석조물들이 모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인데, 이 당간지주 역시 각 부의 양식이나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만복사지 오층석탑(萬福寺址 五層石塔)
 
①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물 제30호다.
 
② 높이 5.5m. 현재 4층 지붕돌까지 남아 있으며, 받침 부분의 구조는 명확하지 않지만 2층 받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③ 1층 받침의 덮개돌로 추정되는 석재가 길 위에 드러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땅에 묻힌 부분은 별석(別石)의 바닥돌과 받침 면석(面石)이며, 각 면석의 가운데에는 가운데 기둥 하나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드러난 받침돌은 4변의 길이가 같은 네모난 돌인데, 각 면에는 넓은 모서리 기둥을 새겼고, 1장의 널돌을 덮개돌을 삼았으며, 덮개돌 아랫면에 두른 쇠시리인 부연(副椽)과 몸돌 굄은 표현되지 않았다.
 
④ 1층 몸돌은 네모난 기둥 모양으로 비교적 높이가 높은 편인데, 각 면의 좌우에는 모서리 기둥이 얕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뚜렷이 구별되는데, 처마와 처마가 맞닿는 전각(轉角)에 이르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마치 목조 건물의 지붕 곡선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지붕돌의 윗면에는 1단, 아랫면에는 2단의 받침이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모두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안정감을 주며, 지붕돌 역시 1층 지붕돌과 같이 낮고 넓으며 체감률도 매우 적은 편이다.
 
⑤ 특히 이 석탑에는 2층∼4층 몸돌과 지붕돌 사이에 별석의 몸돌 받침이 들어가 있다. 몸돌 받침은 네모난 널돌로 아랫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윗면에는 1단의 몸돌 굄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보물 제166호),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 등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탑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에 세워진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등으로 계승되었다. 몸돌 받침은 목탑에서 몸돌 주변에 난간을 두른 것과 같이 난간 부분이 퇴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주로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만복사지 석조대좌(萬福寺址 石造臺座)
 
① 고려시대 대좌로 높이 1.4m. 보물 제31호다. 석좌란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을 말한다.
 
② 1석으로 조성된 6각형의 연화대좌(蓮華臺座)로서, 원위치에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대(下臺) 위에 상대(上臺)를 마련하고 그 사이의 간주(竿柱)는 낮게 표현되었다. 하대 측면에는 각 면마다 2개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새기고 중앙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로 2분하였는데, 우주와 탱주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1단 낮은 선조(線條)를 새겼다. 각 면의 2분된 구간에는 안상(眼象)을 오목새김하고, 안상 안에는 귀꽃 모양의 화형문(花形文)을 새기고 하부에는 1단의 받침을 새겨 측면받침으로 삼았다. 상부는 갑석(甲石) 모양으로 테를 마련하고 그 위의 경사진 상면에 복엽(複葉)의 복련(覆蓮)을 조각하였는데, 윗면에 중대받침을 조각하였다.
 
③ 중대(中臺)는 양쪽에 우주,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두 부분으로 구획되었는데, 안상 등의 장식은 없고 마멸이 심하여 각 주형(柱形)의 조각이 뚜렷하지 않다. 중대 상단에는 하부와 상대하여 1단의 상대굄을 마련하였으나, 상대의 앙련(仰蓮)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어 어떠한 형태인지 잘 알 수 없다. 상면은 평평할 뿐 별다른 장치는 없으며, 중앙에 1변 길이 30㎝의 방형 구멍이 있어서 여기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④ 일반적으로 좌대(座臺)는 방형 혹은 8각, 원형 등이나 이 석좌는 6각형으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다. 하대 각 면의 우주와 탱주 가장자리에 선조를 장식한 것이라든지 안상의 안쪽에 귀꽃형 화문을 장식한 수법 등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서, 이 석조대좌의 조성연대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① 화강석으로 만든 고려시대 불상으로 높이 2m, 보물 제 43호다.
 
② 규모가 비교적 클 뿐 아니라 제작 시기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불신(佛身)과 광배(光背)는 하나의 석재로 만들었다. 움츠린 듯한 양어깨는 좁고 하체가 다소 빈약한 편이다.
 
③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친 대의(大衣)는 불신에 달라붙어서 몸의 굴곡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옷주름이 다리에서 둘로 갈라지는 이른바 우다야나식(Udyana式) 착의법의 표현은 인도 굽타기(Gupta期)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의 불상들과 서로 비교된다.
 
④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육계(肉髻)가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공(白毫孔)이 새겨졌다. 눈과 코는 손상되었다. 인상에서 주는 부드러운 느낌과 얼굴의 풍만감은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江陵 神福寺址 石造菩薩坐像, 보물 제84호)과도 친연성이 있다.
 
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양손은 결실되었다. 원래는 손을 따로 만들어 손목에 끼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시무외인(施無畏印)·여원인(與願印)의 통인(通印)을 짓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⑥ 광배는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윗부분이 깨졌지만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안에 새겨진 연꽃 줄기가 선명하고, 외연부는 화염문과 화불(化佛)이 조각되었다.
 
⑦ 이 조각은 형식화된 옷주름이나 대칭적인 불의의 양 깃, 넓게 열린 편평한 가슴과 신체 등의 어색한 표현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 규모나 기법 면에서 당시의 조각으로는 뛰어난 작품이다. 현재 절터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 및 석조대좌와 함께 만복사 창건 당시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뒷면
 
▶석인상(石人像)
 
본래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4m 떨어진 곳에 제 짝과 함께 있었단다. 만복사지 보호철책 바로 옆의 국도변에 머리 부분만 지상에 노출된 채 묻혀 있다가 2009년 8월 발굴되어 만복사지 안으로 옮겨졌다.
 
전체 높이는 5.5m이지만 지상에 드러나는 부분은 3.7m이고, 나머지 1.8m는 지하에 묻히게 되어 있다. 길쭉한 직사각형 돌기둥을 조각하여 조성하였는데 절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 즉 깃발을 매다는 길쭉한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기둥)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상으로, 인왕상(금강역사상)으로 보이는데 머리 부분에 큼직한 육계(상투처럼 불룩 솟은 부분)가 표현되어 있으며, 귀가 길고 안구가 돌출되어 있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문 화재청,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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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