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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수의 세상이야기오문수의 지식창고 2018.06.08. 14:16 (2018.06.08. 14:16)

"안용복과 독도수호 나선 뇌헌 스님에 관해 3가지 오류 있다"

 
안동립 대표·진옥 스님 등 주장... 호국 스님이었을 것으로 추정
흥국사 대웅전 왼쪽에서 세번째 포와 포 사이에는 '시주뇌헌비구(施主雷軒比丘)'라는 글귀와 함께 뇌헌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뇌헌 비구스님이 흥국사를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오문수
 
울릉도·독도에 들어와 무단으로 고기잡이하던 일본측에 맞서 안용복과 함께 두 섬이 우리 땅임을 주장한 뇌헌스님에 관한 사료 3가지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한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뇌헌은 순천의 승려로 동래 사람 안용복, 흥해 사람 유일부, 영해사람 유봉석, 평산포사람 이인성, 낙안사람 김성길, 연안사람 김순립과 순천의 승려 승담, 연습, 영률, 단책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가서 일본국 호키주에 들어가 왜인과 송사하였다.
 
그 후 양양현 지경으로 돌아왔으나 나라의 허락없이 외국을 출입했다는 이유로 강원감사 심평이 잡아가뒀다.
 
"뇌헌스님 관련 3가지 오류가 있다"
 
 
뇌헌스님은 안용복의 2차 도일(1696년-숙종22)당시 안용복 일행과 함께 일본 백기주 태수에게 울릉도 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했던 스님이다. 오래전부터 뇌헌에 관한 사료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 동아지도 안동립 대표와 함께 석천사 주지인 진옥스님을 찾았다. 그가 지적한 오류는 다음과 같다.
 
▲ 출신지 오류 (순천 송광사 → 여수 흥국사)
▲ 이름 오류 [뇌헌(雷憲) → 뇌헌(雷軒)]
▲ 사찰명 오류 [흥왕사(興旺寺) → 흥국사(興國寺)]
 
진옥스님은 흥국사 절을 소개한 <흥국사> 책을 발간했다. 뿐만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흥국사 의승수군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안용복과 동행했던 뇌헌스님을 연구했다.
 
 
비보사찰인 흥국사 모습. '절이 흥하면 나라와 민족이 잘 되고 나라가 잘 되면 절도 잘 될 것'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오문수
 
 
흥국사 정문 왼쪽 부도전에는 응운과 응암 두 명의 팔도도총섭을 모신 부도가 있다. 의승수군의 본거지 임을 알 수 있다 ⓒ오문수
 
1195년 보조국사가 창건한 흥국사는 몇 차례의 전란을 겪으며 소실과 재건을 거듭했다. 흥국사는 '절이 부흥하면 나라와 민족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면 절도 잘 될 것'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비보사찰(裨補寺刹)'은 '돕고 보호한다'라는 뜻이 있다.
 
즉,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세워진 사찰이라는 뜻이다.
 
호국 정신으로 일어선 8천여 명의 의승병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의승병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특히 서산대사를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하여 경상도에서는 사명대사, 충청도에서는 영규스님, 황해도 의엄스님, 전라도 처영스님 등이 민족을 구하고 나라를 살리고자 정진을 중지하고 창검을 잡았다.
 
'팔도도총섭'은 조선시대 승직의 하나로 전국의 승군을 통솔했다. 흥국사 부도전에는 응운과 응암 두 명의 팔도도총섭을 모신 부도가 있다. 석천사 주지 진옥스님의 얘기다.
 
"여러 기록에 뇌헌스님이 송광사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은 당시 여수가 순천부였기 때문이다"고 말한 진옥스님은 "일부 기록에 '흥왕사'라고 적힌 것은 '흥국사'를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즉, 흥국사(興國寺)를 흥왕사(興旺寺)로 잘못 보았다는 것.
 
 
<숙종실록>.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번째 칸에 뇌헌(雷憲)이란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어 흥국사 현장에 와보지 않고 인용만 한 많은 자료들이 오류를 낳고 있다. ⓒ오문수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전한 <숙종실록>에 기록된 한문 이름을 보면 "뇌헌(雷憲)"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때문일까 많은 출판물과 뉴스 및 백과사전에도 "뇌헌(雷軒)을 뇌헌(雷憲)"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류의 원인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 고문서를 그대로 인용한 건 아닐까? 2005년 2월 일본 시마네현 무라카미 가문의 고택 창고에서 발견된 고문서 <원록구병자년조선주착안일주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舟之覺書)>(이하 원록각서)에는 "뇌헌(雷憲)"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록각서'는 1696년(숙종 22년) 5월 일본어선의 독도 출어에 항의하기 위해 두 번째 일본을 방문한 안용복 일행을 일본지방 관리가 취조해 막부에 보고한 기록이다.
 
 
흥국사중수사적비 뒷면에 나온 뇌헌스님의 기록들을 설명하는 진옥스님(오른쪽) ⓒ 오문수
 
 
'영취산흥국사중수사적비' 뒷면 모습으로 아랫줄 왼쪽으로부터 4번째 칸에 '판사뇌헌(判事雷軒)'이란 이름이 정확히 적혀있다. ⓒ오문수
 
그러나 진옥스님이 안내한 흥국사중수사적비 뒷면과 흥국사 대웅전 건립에 기여한 공로자들을 기록한 뇌헌스님 초상화 옆에는 명백하게 '뇌헌(雷軒)'이라고 적혀 있었다.
 
 
"의승수군에 관한 자료를 알아야 뇌헌스님을 알 수 있어요. 1593년 1월에 쓴 이충무공 장계에 의하면 '승군 400여 명이 때로는 육지에서 때로는 해전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승군에게 무기와 배를 주었어요. 뇌헌은 승려지만 군인입니다.
 
흥국사에는 1800년대말까지 3백여년 동안 300여 명의 승군이 있었습니다. 30년전에도 의승수군이 타던 배를 본적이 있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흥국사에는 의승대장이 타던 마방이 있었습니다. 뇌헌과 안용복이 만나게 된 것은 일본이 울릉도 나무를 썼고 일본인들을 쫒아내기 위해 출정한거죠"
 
 
수군으로서의 승군은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과 흥국사가 처음이다. 좌수영 승군은 1592년에 처음 400명이 조직되어 스스로 군량을 조달하고 관군의 군량을 확보해 주기도 했다. 직접 전투에 참가한 것은 1593년 2월 1일 웅천전투다. 좌수영 의승수군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해체되지 않고 전후복구에 힘을 기울여 성을 정비하고 군수물자를 댔다.
 
승려직책 중 '판사'였던 뇌헌 스님... 흥국사 중창에 공덕 쌓기도
 
사찰 정문인 영성문 건너편에는 '영취산흥국사중수사적비'가 있다. 1703년에 세워진 비석 뒷면에는 뇌헌스님의 직책과 이름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판사뇌헌(判事雷軒)' 비문에 기록된 글들을 자세히 연구하고 기록한 진옥스님의 얘기다.
 
 
"관군과 승군간에는 알력이 있어 판사가 있었어요. 승군의 판사관직은 지금 같으면 대법관에 해당합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이름을 기록했는데 현장에 와보지도 않고 그대로 써서 너도나도 잘못된 이름 뇌헌(雷憲)이라고 쓴 겁니다"
 
 
진옥스님은 뇌헌스님이 흥국사에 계셨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겠다며 일행을 흥국사 대웅전으로 안내했다.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포와 포 사이 24칸에는 흥국사를 건립하는 데 공이 많은 이들의 그림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 왼쪽 3번째 포와 포 사이에는 뇌헌스님의 초상화와 함께 '시주뇌헌비구(施主雷軒比丘)'라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진옥스님이 뇌헌스님의 직책에 대해 보충 설명했다.
 
 
흥국사 대웅전에서 뇌헌스님에 대한 기록을 설명해주는 진옥스님(왼쪽) ⓒ 오문수
 
"1690년 대웅전을 지을 때까지는 판사가 아니고, 1703년 건립된 중수비에 판사라는 기록이 나온걸 보면 13년 사이에 판사 직책을 받은거에요"
 
안용복 일행의 배는 13척에 선원이 70여명에 달한다. 그 중 한척이 일본 오키섬에 갔다. 오키섬 돗토리항에 입항할 때 '"조울양도 감세장신 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라는 깃발을 달고 입항했다. '조울양도'란 조선의 울릉도 해역에 있는 무릉도와 우산도를 말한다. 글자 그대로라면 안용복은 그 해역을 감독하고 세를 징수하는 사람이다.
 
금오승장 뇌헌...전라좌수영 의승수군 지휘관
 
일본 고문서인 <죽도고>에는 뇌헌을 '금오승장석씨헌판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뇌헌의 성은 석씨이다. 뇌헌은 <원록각서>에서 흥국사 주지라는 것을 밝혔다. 전라좌수영에는 의승수군이 있었고 뇌헌은 승병승군의 지휘관이었다.
 
<안용복과 원록각서>를 쓴 일본의 오오니시 토시테루는 안용복이 진술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의심하고 있다.
 
"13척의 선단과 많은 인원, 몇 개월에 걸리는 장기간의 항해, 어로활동 준비물은 안용복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키에 도해한 11인 중 5명이 승려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볼것인가? 일행이 단순한 어로활동만 했다면 어업과 관계없는 5인의 승려는 설명할 수 없다.
 
5인의 승려가 '죽도관광을 원해 동행했다'고 한 안용복의 말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하다. 뇌헌스님은 관과 같은 검은 모자를 쓰고 목면의 끈을 매고 있다. 고운 상의를 입고 있는 이 승려의 참가는 유통업의 발전에 참여한 사원자본의 진출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안용복과 뇌헌스님 일행이 일본에 오키섬 돗토리항에 입항할 때 달았던 깃발로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라는 글귀가 보인다. 조선의 울릉도 해역에 있는 무릉도와 우산도 해역을 감독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문수
 
일부 자료에 뇌헌스님을 장사하는 스님인 "상승(商僧)"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걸 지적하자 진옥스님이 정리했다.
 
"뇌헌스님을 장사하는 스님인 상승(商僧)이라고 썼는데 일본쪽 기록을 보고 쓴 겁니다. 일본에 끌려갔는데 군인이라고 하겠어요. 장사한다고 했겠지요. '출가자'라는 뜻을 가진 '비구'는 장사를 못하게 돼있어요"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에는 일본에 항의하러 간 일행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맨 앞이 안용복이고 뒷줄 중앙에 점잖게 서있는 분이 뇌헌스님상이다. ⓒ오문수
 
진옥스님이 안용복과 뇌헌스님의 관계에 대한 최종결론을 밝혔다.
 
"앞으로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안용복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뇌헌스님(55세)이 지휘관이고 통역을 맡은 안용복(43세)이 수하였을 걸로 추정합니다. 다만 뇌헌스님을 보호하기 위해 안용복이 앞에 나섰을 걸로 추정합니다"
【작성】 오문수 oms114kr@daum.net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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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