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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면 향토사 (2018)null 2018.07.11. 10:17 (2018.07.11. 02:38)

제5장 다도면 마을소개

 

1. 1. 판촌리

판촌리는 다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거리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도리곱봉(150.9m) 남동쪽에 펼쳐진 다섯째 골 아래에 있었으나, 1975년 나주호 건설로 마을이 수몰하게 되어서 북쪽 위편에 있는 궁원골로 이주하여 새롭게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동쪽으로는 마봉(150.9m) 아래에 동판마을이 있었고, 나주댐 남쪽 물 건너편에는 남판마을 있었고, 북쪽으로는 방구동재를 넘어 송학리로 넘어다녔다. 나주호 수몰 전에 판촌리 삼거리에는 고인돌 14기가 있어 예전부터 큰 부락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상판마을 (板村1리)
 
판촌리는 후백제군과 고려군이 싸우다가 후백제군이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패몰’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에 왜병이 쳐들어오면 의병들이 판을 치고 매복하면서 승리하였다 하여 ‘판촌리’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도천면,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판촌리, 1985년에는 남평군 도천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동판리, 상판리, 남판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평군은 나주군에 속하게 되었고, 도천면 동판리, 상판리, 남판리와 저포면의 고마리를 통합하여 나주군 다도면 판촌리로 개편되었다. 195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1998년 「나주시 이·통·반설치조례규칙」에 의해 상판마을과 동판마을, 남판마을은 판촌리 1구 1반, 고마마을은 판촌리 2구 1반이 되었다.
 
상판마을은 약 500여 년 전에 고성 김씨가 ‘삼바레기’란 곳에 처음 터를 잡아 생활하였으며, 1975년 나주호 건설로 판촌리가 수몰됨에 따라 판촌리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상판마을이라 함.
 
▲ 고마(叩馬)마을 (판촌2리)
 
판촌리 고마마을은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저포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저포면 고마리, 1985년에는 남평군 저포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저포면 고마리로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는 중국의 백의 숙제가 화순 운주사를 거쳐 남평읍을 정하기 위하여 행차하는 도중 마을에 잠시들려서 쉬면서 지형을 살펴보니 말 형세의 산과 말 형국의 바위가 있어 머물다가 목이 말라 지석강으로 말을 몰아 채찍질해 갔다 하여 마을이름을 고마라 하였다 한다.
 
고마마을은 두드리고 고(叩)와 말 마(馬)자를 쓰는데 말을 두드리면서 몰고 나오다가 멈춘 형국으로 중원리가 말머리가 되고, 고마는 말 엉덩이가 된다고 한다. 말의 엉덩이라 말이 싼 대소변이 거름이 되기 때문에 이 마을의 토질이 매우 좋다고 동네 어른들은 말한다.
 
고마마을에는 무안박씨, 밀약박씨, 고성김씨, 김해김씨, 하동정씨 등이 거주 하고 있다. 1975년 나주호 건설로 일부 농경지와 다도초등학교 고마분교가 수몰되었고, 이후 주민들은 남평장까지 장을 보러 다녔다.
 
주민들은 다도댐 수몰 보상비로 받은 돈으로 대지 천평을 구입 희사하여 새롭게 고마분교를 설립하였으나 다시 폐교되었다. 그 자리에 기독교청소년수련원이 생겼으나 고마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당산제를 지낸다.
 

2. 2. 송학리

송학리는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5km 거리에 위치한 자연마을로 사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동쪽은 추생이골과 다학골이 흘러내리는 철마봉(139.8m)이 있고, 북쪽으로는 건넌골, 조박골 너머로 신각산(新角山, 200m)이 자리잡고 있으며, 철마봉과 신각산 사이로 연화봉(135.5m)너머로는 멀리 투시산(投矢山, 180.1m)과 군행봉(軍行峰, 219.6m)이 자리하고 있다, 투시산 아래로 사시등(102.8m)과 무정등(132.6m), 중마봉(中馬峰, 136.4m)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서북쪽으로는 염실골이 흐르는 칡산(143.8m)이 위치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소다실골과 음실골 너머로 덕동리 효막마을과 입석마을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조리봉(106m)이 다학마을과 연이어 있다.
 
▲ 다학(多鶴)마을(송학1리)
 
다학동에서 유래된 다학마을은 ‘다악골’, ‘닭굴’이라고도 불리는데 1960년대에는 인근 소나무숲에 수 백 마리의 학(鶴)이 무리를 지어 살았으며 이러한 연유로 다학마을로 이름이 붙여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도천면,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다학동, 1885년에는 남평군 도천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다학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천면 취송리, 다학리, 유촌과 저포면 상촌(上村) 일부가 병합되어 취송(翠松)과 다학(多鶴)의 이름을 따서 나주군 다도면 송학리로 개편되었다. 마을 부근에 ‘칼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장군이 말을 타고 가다 바위에서 쉬고 일어서면서 칼이 칼집에서 빠졌는데 그 자리에 칼 모양의 바위가 우뚝 솟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칼바위에는 말 발자국 3개와 칼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8백년 전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처음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며 현재는 경주최씨, 김해김씨, 해남윤씨, 밀양박씨로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다학마을의 경운기는 1975년 조연만이 사용한 이래 1978년 박종만씨가 트렉터를 구입하는 등 많은 장비가 들어와 농사를 크게 지었다. 1999년 8월 태풍 ‘올가’로 4농가에서 3천3백평의 비닐하우스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미을에 초상이 있으면 강정구의 지휘아래 한마음으로 협조하였고, 마을에 풍물이 있어 김화용이 상쇠를 잘 쳤었다고 전해온다. 마을에 농기(農旗)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고, 마을에 큰 선돌이 있다.
 
▲ 유천(柳川)마을 (송학2리)
 
본래 마을이름은 법고촌(法古村)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다고 유천, 버드내, 버그내라고 불리었다.
 
유천마을은 신각산 남쪽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마을 동쪽에는 무정등(132.6m)이 위치해 있다. 북동쪽으로는 투시산과 군행봉, 막바지봉(221.9m)이 보이고 남동쪽에는 중마봉이 자리를 잡았으며, 남쪽에는 철마봉(鐵馬峰, 139.8m)이 위치해 있다. 남서쪽에는 다학마을과 뒷산인 조리봉(105.8m)이 보이고, 서쪽 정면에는 건넌골을 지나 칡산이 위치하였으며, 북서쪽에는 감태봉(142.8m)과 주산봉(130.1m)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알랑재고개를 넘어 남평읍 상곡리 상촌마을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진밭들을 지나 다학마을과 이웃해 있다.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법고촌,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유촌(柳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7년 송학리 다학마을을 송학리 1구, 유천마을과 취송마을은 송학리 2구로 편제되었다. 유천마을은 옛 문헌에는 7백여 전에 나주 최씨, 나주오씨, 강화최씨 등으로 입향하여 터를 잡았다고 전하나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현재 풍산홍씨, 상산김씨(商山金氏), 강화최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 경운기는 홍인석이 1975년에 처음 도입하였고, 콤바인은 윤근환이 최초로 사용했다. 당산제, 기우제를 지냈으며 풍물도 있었지만 맥이 끊어졌다.
 
마을 인근에 절터가 있는데 바로 옆에 ‘샘바위’가 있어 바위구멍에서 매일같이 쌀이 나오는데 하루는 절에 손님이 들어서 식량이 부족하여 살이 더 나오도록 구멍을 마구 쑤시니 그 뒤로는 쌀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욕심이 복(福)을 차버린 결과이다.
 
유천마을에도 선돌이 있으며, 마을 앞 느티나무는 수령이 300살이나 되어 마을 지켜주고 있다.
 
 
 

3. 3. 풍산리

풍산리는 면소재에서 북쪽으로 약 6km 거리에 위치하며, 인근에 골프장이 들어서있다. 마을의 맥이 세갈래로 되어 내천자 형국으로 도천(道川)이라 불리었다. 풍산리의 마을 안쪽은 안골(內村), 동쪽은 동력(東歷), 뒤쪽은 뒷골(後谷), 도래방죽 안마을은 방죽안(防案), 남쪽은 소막골(孝幕) 북쪽은 샛터 등 작은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도래마을은 뒤로 노령산맥의 줄기인 식산(食山)이 멀리 영암 월출산을 바라보며 노적봉을 이루고 있고, 옆으로 뻗어나간 감투봉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을 감추고 있다. 마을 서쪽의 박실재는 용이 감싸주는 형태를 이루며 길게 뻗어 동다리 저수지 호수에 꼬리를 담그고 물을 풍기는 게세를 하고 있다. 이처럼 뒤로는 호랑이와 앞으로는 용이 기세를 펴고 있는 자연 경관이 무척 아름답고 역사가 있는 마을이다.
 
도래마을은 풍산리 1구 행정, 후곡, 동녘, 내촌마을과 2구 은사, 3구 방축. 효막 등 7개 마을로 이뤄져 18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 가운데 풍산 홍씨가 100여호에 달하며 그 다음으로 최씨(15호)들이 많이 살고 있다.
 
▲ 도천마을 (풍산1리)
 
풍산리는 고려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남평군은 나주군에 속하고, 남평군 다소면(多所面)과 도천면은 다도면으로 통합되었으며, 도천면 효막리, 내축리, 은사리, 후곡리, 동녘리, 내촌리와 등포면 당촌(唐村) 일부를 병합하여 풍산리(楓産里)로 명명하여 나주군 다도면 풍산리로 개편되었다. 1987년 풍산리 도천, 내촌, 후곡, 행정마을은 풍산 1구, 은사, 방축, 효막마을은 풍산 2구로 편제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가 되었고 1998년 10월1일 「나주시 이·통·반설치조례규칙」에 의해 내촌은 풍산리 1구 1반, 동녘은 풍산리 1구 2반, 후곡은 풍산리 1구 3반, 행정은 풍산리 1구 4반, 은사는 풍산리 2구 1반, 후곡은 풍산리 1구 3반, 행정은 풍산리 1구 4반, 은사는 풍산리 2구 1반, 방축은 풍산리 2구 2반, 효막은 풍산리 2구 3반이 되었다. 현재 풍산리 1구에는 내촌,동녘, 후곡, 행정 등 4개 자연마을이 속해 있으며 풍산홍씨, 강화최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도래마을은 고려시대 남평문씨(南平文氏), 진주형씨(晋州形氏), 금성나씨가 들어와 일군 마을이었는데 조선 초에는 강화최씨(江華崔氏)가 살다가, 그 뒤 풍산홍씨(豊山洪氏)가 입향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종3품 성천부사를 역임했던 홍수(洪修)는 아버지 홍주(洪注)가 나주 남평에서 현령을 역임했던 인연으로 나주 노안 금안동으로 피신 와서 정착했다. 나주 금안동은 영암 구림마을과 정읍 신태인과 더불어 ‘호남의 3대 명촌’으로 불린다.
 
조선 중종 때 풍산홍씨(豊山洪氏) 홍한의(洪漢義)가 기묘사화를 피해 도래마을에 정착하면서 온전하게 풍산홍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도래마을에는 역사가 깊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이조참판․대사헌․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로 뽑혔던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이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인 중종 36년(1541)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영호정(永護亭)이라 불렀다. 영호정은 학문을 닦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으로 많은 학사와 인재가 배출되었다.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휴암(休庵)은 이때의 공적으로 남평인들이 그의 사후에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서산리 16 서원마을에 봉산서원(蓬山書院)에 1590년(선조 23)에 지었으며 1667년(현종 8) 사액되어 지금도 제향하고 있다.
 
도래마을에는 송강 정철을 위시로 한 옛 문인들의 글이 걸린 계은정(磎隱亭)이 있고, 풍산홍씨 홍징(洪澄)의 업적을 숭배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약병정(兩碧亭,1587), 모남정(慕南亭). 귀래정(歸來亭) 등과 함께 많은 정자군을 형성하고 있다.
 
"상방에서 종 울리니 여룡은 춤을 추고
만 구멍에 바람 우니 철봉이 나래 치네
 
上方鍾動驪龍舞 萬竅風生鐵鳳翔..." 하며
 
점필재 김종직이 전라도관찰사 재임 중 어디를 가다 읊은 시에서 5분의 여유를 갖는다.
 
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은석은 목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쌍쌍의 가마우지 여울돌을 잃고
물고기 물면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桃花浪高幾尺許 銀石沒頂不知處 兩兩鸕鶿失舊磯 銜魚却入菰蒲去
 
효막(풍산3리)마을은 지금부터 약 300여전 초막을 짓고 시묘한 효자가 있었다하여 마을명을 효막이라 칭하고 있다.
 
일대에는 풍산 홍씨 남한재(南寒齋) 홍환주(洪환周)의 장유지소 석곡정사(石谷精舍)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1929년에 편찬한 남평군읍지에 전하고 있어 이 이전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벽정은 조선 중기에 선공감역(繕工監役)·성균사업(成均司業) 등의 관직을 지낸 홍징(洪澄)이 1587년(선조 25) 건립하여 양산보, 정철, 조중봉 등과 교유를 나눴던 곳이다. 영호정은 서당으로서 인재를 길렀고 현재는 마을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도천학당으로 사용된 영호정을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많은 의병들이 궐기하였다. 1918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였을 때는 마을사람들이 영호정에 모여 “3년간 상복을 입자”고 결의하고 실천했던 우국과 애국충절의 마을이기도 하다.
 
양벽정은 입구에 대문이 있고, 대문 앞에는 연못이 있는 전통양식의 정원이 꾸며져 있다. 길 맞은편에 서 있는 큼지막한 ‘영호정(永護亭)’과 함께 외부 인사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정자로, 가운데 3칸에는 방을 만들었고, 좌·우 각 1칸과 전면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에는 홍징의 후손들인 홍안식(洪安植), 홍준희(洪俊憙) 등 15명의 시가 걸려 있다. ‘漾碧亭’이란 현판은 신안인(新安人) 주준엽(朱浚曄)이 썼다.
 
양벽정기(樣碧亭記)
 
엣 문헌을 보면, 조선세조때 한성우윤을 지낸 최거가 탐진현감으로 가던 중 이곳 풍광에 반해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이후 풍산 홍씨의 입향조 홍한의가 정암 조광조와 같은 해에 사마시에 급제한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다가 최윤형의 딸과 혼인하여 터를 잡고 살면서 풍산홍씨 동족마을이 되었다고 전한다.
 
도래마을에서는 100여년 전부터 대동계를 결성하여 공동체의식을 함양하고 매년 정월 초이튿날 합동세배를 드린다. 약벽정은 1948년 후손 홍찬희(洪纘憙) 등이 중건하였다.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정자로, 가운데 3칸에는 방을 드렸고, 좌·우 각 1칸과 전면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에 홍징의 후손들이 지은 시문 등이 적힌 현판 19개가 걸려 있다. 1978년부터는 매년 봄 주민과 전국의 향우들이 모이는 ‘도래의 날’ 행사를 하고 있다.
 
도래마을 주변에는 충신이 많이 배출된 강화최씨 가문과 관련된 4기의 충철과 절의비가 있고, 효자와 효열부를 많이 배출한 풍산홍씨 가문과 관련된 7깅의 효행비가 있다. 또 강학에 탁월한 지역임을 드러내는 〈대한일민시헌홍선생강학비 大韓逸民時洪先生講學碑〉와 〈성남선생홍공경모비 城南先生洪公景募碑〉도 있다.
 
도래마을이 낳은 역사적 인물로는 조선왕조 세조조에 한성부윤을 지낸 최공거, 이지량(李之良), 성종조에 관찰사를 지낸 최공망(崔公望), 인조조에 좌랑을 지낸 최신헌(崔身獻), 효종조에 현감을 지낸 홍종문(洪鐘聞), 정조 때 승지 홍봉주(洪鳳周), 철종 때 승지 정종악(鄭鐘岳), 고종조 판서를 지낸 홍승목(洪承穆)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충신으로는 홍심(洪深),홍민언(洪民彦), 홍민성, 최시망(崔時望), 최희립, 홍시정(洪時挺)이 있다. 병자호란 충신으로는 홍남갑, 홍남주, 홍종문, 최경지 등이 도래마을서 나왔다.
 
 
 
 
특이하게 도래마을은 마을마당을 조성하여 어린이 놀이터 역할을 하며, 농작물을 건조하는 건조장으로도 사용된다. 또한 상당한 거리에 있는 마을과 시제를 함께 지내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인근의 추송마을과 은사마을 등은 모두 풍산 홍씨 집성촌으로 이들은 합동시제를 통해 여전히 씨족중심의 마을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들은 대부분의 건물이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지어졌는데, 안채는 一자형으로 놓여있고 사랑채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ㄱ자형 구조이다. 사랑마루에서 바깥의 동향을 살필 수 있도록 사랑마당으로 들어가는 토석담에 수키와를 마주 엎어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곳의 고택은 개인 건물의 중요성보다 자연 지형을 우선시하여 절반 이상이 북향과 서향으로 지어졌다. 또한 각 가옥은 대문과 담장으로 구분되어 독립된 영역을 형성하면서도 거주자들이 서로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작은 샛문을 두고 있다.
 
도래마을은 1967년과 1968년에 도래저수지 보수로 미쳐 물을 저수하지 못하여 농사에 큰 혼란을 겪었다. 마을 청년 15명이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경기도 하남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 교육을 다녀온 후 마을을 많이 일신했다.
 
마을지(誌)인 도천동지(道川洞誌)를 만들 만큼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간직한 마을에로 인정되어 2006년 전남도 전통한옥마을로 지정되었고 많은 예산을 배정받아 명가 전통한옥마을로 자리를 굳게 잡았다.
 
 
▲ 은사(銀沙)마을(풍산2리)
 
면소재지에서 약 6km거리에 위치한 마을은 마을 동쪽으로는 풍악산(식산) 감태봉 준령의 남북으로 연한 기슭에 행정, 후곡, 동역, 내촌마을이 형성되고, 남쪽은 뫼봉 박령의 연한 기슭에 방축, 효막마을이 위치하며, 서쪽으로 수려한 박령산하 산포면 신도리, 봉황면 유곡리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산포면 송림재, 산재리 원악동이 위치한다. 옛 지명은 거의 사라졌지만 옛날 사람들이 불렀던 대로 표기하면 평야지대의 중앙의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들은 원골, 이망개, 독바위, 새보, 한다리, 당사등, 윙골 들로 이어지고, 서편들은 동다리, 동애, 촌전, 새밭, 가리시암, 방축, 효막 들로 이어지며, 마을뒤엔 박령산하 산태미, 아성들이 산재되어 있다.
 
마을이름은 1510년 이전에는 재천부(在川府)라는 마을로 불려지다가 1510년 풍산홍씨 입향조 홍한의가 벼슬을 사양하고 거주하면서 은사(隱士)마을로 불리우게 되었다. 또한, “하천과 논에 우물을 파는데 통야에 배조각과 은빛 모래가 나왔다 하여 ‘銀沙’마을이라고도 한다.”고 전해온다.
 
은사마을은 1945년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마을의 농기구는 홍석만이 경운기를 처음 구입하여 사용했고. 홍광석, 홍기성은 감나무 과수원을 조성했다. 성씨 구성은 풍산홍씨, 진주정씨, 함풍이씨가 살고 있으며. 풍산리 은사마을에는 마을 앞에 학당, 홍효열비, 귀래당 동서로 풍암(홍기면)효행비, 석남(홍석희)효행비, 묵헌(홍기향)효행비, 풍천임씨효열비가 있다. 충의 7명, 문과 3명, 무과 5명, 문행 6명 등 충효문무가 배출됨으로써 도래홍씨라는 칭찬을 받은 명문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 효막마을 (풍산3리)
 
지금부터 약 300여전 초막을 짓고 시묘한 효자가 있었다하여 마을 이름을 효막마을이라 부르는데, 마을의 입향조는 풍천임씨 7대조 임상호(任相豪)로 기울어지는 가세로 말미암아 이 마을로 이주하였다.
 
효막마을은 취나물을 많이 재배한다.
 
 

4. 4. 덕동리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km 거리에 위치한 마을은 조리봉(105.8m)과 철마봉(139.8m)의 서쪽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마을 북동쪽에는 무정등(132.6m)이 위치해 있다. 무정등 너머로 투시산과 군행봉, 막바지봉(221.9m)이 보이고, 무정등 아래 중마봉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석마을 남동쪽에는 메산봉(141m)과 성정봉(208m)이 보이고, 남쪽에는 평사촌 너머 배공산(87.2m)이 바라보인다. 마을 서쪽에 선돌이 서있다.
 
 
▲ 입석마을
 
입석마을은 예전에는 덕산(德山)이라 하였으나, 마을 앞 길가에 큰 돌 입석이 있어 ‘선돌’, ‘입석’이라 불리었다. 덕동리 마을터는 4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도천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입석리, 내동리, 평산리, 1895년에는 남평군 도천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입석리, 덕산리, 내동리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평군은 나주군에 속하게 되었고, 도천면 입석리, 덕산리, 내동리를 병합하여 덕산의 덕(德)자와 내동의 동(洞)를 취합하여 덕동리가 되었다. 마을의 성씨 구성은 풍산홍씨, 전주최씨, 전주이씨, 밀양박씨, 진주강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입석마을은 400여 년 전 남원양씨와 풍산홍씨가 처음 입향하여 터를 닦기 시작했다고 전해오는데, 마을의 300년 된 팽나무가 있다.
 
입석마을의 건너편 산인 붉은독거리가 황폐해지면 마을이 어둡고 피폐해진다 하여 마을 주민들이 조림사방사업으로 마을 숲을 조성하였다. 주민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덕산 뒤 매봉제에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해온다. 또 마을에 안영근, 이동화 당골이 있어 마을 사람들의 고충 해결에 앞장을 섰고, 이종진 옹은 풍수에 능하였으며, 이복민은 마을 장례에 앞장서서 지휘하였다.
 
마을의 경운기는 신금식이 처음 구입하였고, 트렉터는 오시근, 이양기는 임동연, 양수기는 박동섭이 최초 구입했다.
 
마을 안에는 2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있었지만 20여 년 전에 말라죽었다.
 
덕동리 입석마을 청년회와 부녀회는 매년 초복에는 전복과 인삼 등 건강 보양식 재료를 듬뿍 넣어 만든 삼계탕으로 마을 어르신들을 대접하며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당에서 복달임잔치를 벌인다.
 
입석마을은 벼농사와 시설하우스 농사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특히 한라봉 농가들이 많은데 최근 들어서 도시에서 귀농한 가정이 마을 사람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입석마을은 인심 좋고 활기 넘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내동마을 (덕동2리)
 
내동마을은 덕동리 다섯마을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도리곱봉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배공산 서쪽 아래에 입지하였다. 마을 남쪽 비난봉에서 왕박골이 마을 쪽으로 흘러내리고, 배공산 아래 독족골에는 바람제 저수지가 내동마을과 봉황면 송현리 양지동 사이의 넓은 들을 관할하고 있다.
 
내동마을은 4백년 전에 함씨 성을 가진 이가 터를 잡은 이후 솔안마을이라 불러오다 그 이후에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커지자 마을이름을 내동(內洞)이라고 이름하였다. 현재 밀양박씨, 전주이씨, 광산이씨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1백년 전에 마을 주민의 친목과 상례를 위해 상포계(喪布契)를 조직하여 마을 전체 가구가 참여하여 운영하고 있다.
 
 
▲ 삼정마을 (덕동3리)
 
삼정마을은 삼정승니 날만한 명당이 있다고 하여 삼정(三政)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삼정마을에는 고인돌이 10여기가 남아 있어 고대로부터 벼농사를 하는 대형부락이 정착했음을 알 수가 있다.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도천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입석리, 내동리, 평산리, 1895년에는 남평군 도천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입석리, 덕산리, 내동리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평군은 나주면 덕동리로 개편되었다.
 
현재 김해김씨, 하동정씨, 진주강씨, 전주이씨, 밀양박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1975년 나주호 건설로 판촌리와 궁월리가 수몰되고 나서 다도면 수몰지역 주민들이 삼정마을로 많이 이주하였다.
 

5. 5. 궁원리

 
▲ 활원마을
 
활원마을은 다도면 나주호 건설로 마을 일부가 수몰된 지역으로 댐의 서쪽에 있다. 마을이 옛부터 활터라하여 궁원(弓院), ‘활원’ 등으로 불리거나 마을이 활처럼 생긴 곳에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다고 하여서 ‘활안’으로 불리어졌다고 전해온다.
 
마을은 700여 년 전부터 형성되었는데 궁원리는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도천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방원리(方圓里), 1895년에는 남평군 도천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방원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천면 궁원리와 국동(國洞)일부를 병합하여 나주군 다도면 궁원리로 개편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1998년 나주시 다도면 궁원리로 다시 바뀌었다.
 
마을의 성씨 구성은 김해김씨, 밀양박씨, 하동정씨, 전주이씨가 거주하고 있다. 본래 활원마을은 720년 전 학사 김정구(金鼎九)가 터를 잡고 살다가, 그 뒤 후손이 판촌리로 이사하여 거주하였다.
 
300년 전에는 정태일(鄭泰日)이 숙종 말기에 정쟁을 피해 산수가 좋은 활원마을에 입거하여 후손들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이 수몰되기 이전에는 마을공동체 신앙으로 매년 정월대보름에 풍물을 치며 당산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전통이 사라져버렸다.
 
수몰 전에 주민들은 마을 남쪽에 위치한 범바위가 마을에 보이면 마을이 해(害)를 입게 된다고 하여 범바위를 가리기위해 소나무와 팽나무로 구성된 마을숲을 조성하였으며, 숲 안에는 당산할머니 묘가 있었고, 묘 안에는 빈항아리를 묻어 당산제가 끝나면 제물들을 항아리에 넣고 뚜껑을 꼭 덮었었다고 한다.
 
마을이 수몰된 뒤 당산할머니 묘는 다도초등학교 옆으로 이전하였고 이제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다도면 도로변에 당산할머니 묘소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보인다.
 
 
 

6. 6. 신동리

 
▲규동(閨洞)마을
 
규동(閨洞)마을은 본래 도장동(都莊洞)이라 불리었다.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도천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도장촌, 1895년에는 남평군 도천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규동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천면 신촌과 국동(國洞)일부를 병합하여 나주군 다도면 신동리(新洞里)로 개편되었다. 1976년 나주호 건설로 신동리 규동마을은 다도면 소재지가 되었으며 이후 농협, 우체국 등 많은 관공서가 자리를 잡았다. 마을의 성씨 구성은 김해김씨, 진주강씨, 전주이씨, 이천서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규동마을에는 남북 1열로 10기의 지석묘가 있다.
 
규동마을의 민속을 찾아보니 가뭄이 들면 마을사람들은 일봉암에 올라 기우제를 올렸고, 농사가 끝나면 남자와 여자팀이 각기 한 편씩을 구성하여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한다.
 
▲신촌마을 (신동2리)
 
신촌마을은 관공서가 있는 규동마을과 도장교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신동2리에 속하며 남평농협과 하나로마트가 있다. 약 400여전에 영광에 거주하던 진주강씨 강익주가 마을터를 잡고 정착한 이래 마을이 크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강익주는 조선왕조에서 관직에 머물다가 광해군 때 난을 피해 들어왔다. 마을은 밀양박씨, 김해김씨가 많다.
 
 
 
신동리 신천마을은 맑은 물과 공기가 깨끗해 ‘다도참주가’ 전통말걸리는 나주시의 막걸리 점유율을 80% 차지하고 있다. 맛있는 막걸리를 만들기 위한 장씨 일가의 70년 장인정신이 신동리를 빛내고 있다. ‘다도참주가’는 호주가를 위해 ‘생막걸리’와 애주가를 위한 ‘솔잎 막걸리’를 주력 상품으로 하고 있다.
 
 
신동리 마을전경(사진:두산백과)
 
 
 
 

7. 7. 암정리

 
▲ 장암마을 (암정1리)
 
마을 뒷산이 담과 같이 생겼다하여 마을이름을 담바우마을이라고 불렀다. 또한 장암(檣岩)마을이라고도 부른다. 5백여 년 전에 마을터가 형성되었다.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도천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장암리, 도천방리, 번만리, 암치리로 되어있고, 1895년에는 남평군 도천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장암리, 강정리, 운흥리, 벽동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천면 장암의 암과 강정의 정을 취합하여 암정리(岩亭里)라 명명하여 다도면 암정리가 되었다.
 
1971년 군조례 제385호에 의하여 다도출장소를 두고 방산리, 마산리, 덕림리, 도동리 등 4개리를 관할하게 하였다. 마을 성씨는 전주이씨, 김해김씨, 경주정씨, 진주강씨, 밀양박씨, 은진송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최초 입향은 은진송씨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장암마을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위해 공동체 신앙인 당산제를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에 올리고 있다.
 
2008.2.25. 장암마을 당산제 풍물놀이
 
장암마을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방식대로 전통을 살려 농악놀이를 하면서 제사를 지낸다. 제의는 대부분 유교식 절차로 행해지며, 풍물을 울리는 매굿(메굿 또는 매구굿)과 병행하여 진행한다. 풍물패가 치는 매굿은 마을제사의 시작을 알리거나 신을 맞아들이는 의미로 치는 들당산굿이 있고, 잡귀잡신의 제당(祭堂) 침입을 막고 쫓는 의미의 매구(埋鬼)굿, 제의가 끝나고 신을 보내기 위한 날당산굿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다도면 장암마을 주민 이만석씨는 “당산제는 지역의 민속 전통행사로 보전가치가 높다”면서 마을 당산제를 이렇게 소개했다.
 
장암마을 한가운데 당산이 있고 한쪽에 신목(神木)당이 있다. 정월 대보름 당산제를 모시기 위해 설을 세고 곧바로 주민들은 매굿(농악) 놀이를 위한 꼬갈등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정월 열나흘 날 저녁, 당산한가운데 모닥불을 밤새 피우기 위해 많은 나무를 준비한다.
 
당산제를 모시기 위한 첫 번째 준비는 주민 중에서 제관을 선정한다. 제관의 선정은 생기, 복덕,을 먼저보고 천의, 절체, 유혼순서로 택일 전서를 보고 선정하며 제관은 개고기 등 궂은 음식을 피하고, 언행을 삼가며, 목욕재계를 하는 등 매사에 근신한다. 마을 사람들도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며 무엇보다 ‘피’를 부정하게 여겨 부인의 달거리가 있거나 출산을 앞둔 임산부는 외부출입을 금한다.
 
 
제관은 며칠 전부터 제방주변을 청소하고 출입을 막기 위해 황토 흙으로 경계를 표시한다. 제는 초저녁부터 당산가운데 불을 피워놓고 매굿을 시작으로 마을 우물샘터 지신밟기를 한 다음 흥겨운 농악놀이로 신을 불러들이고 자정이 가까워지면 목신(당산할매)에게 제를 올린다. 이후 신을 보내주는 절차로 장만한 음식을 횃불을 켜들고 마을 입구로가 신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식을 마친다. 이후는 밤새 쇳소리가 빠진 장구와 북을 가지고 주민들은 흥겹게 즐긴다.
이어서 다음날인 정월대보름 15일부터는 흥겨운 농악팀이 마을을 돌며 가정의 잡귀를 몰아낸다는 판 굿을 치며 세시행사를 마감한다.
 
장암마을 이장 이명수씨는 당산제는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위한 제의인 한편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여 즐기는 축제 성격도 지니고 있고,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 단합된 모습으로 유대를 강화하며, 농번기 힘든 농촌생활에 활력을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다도면은 정월대보름날을 전후하여 많은 동네가 당산제를 지냈으나 70년대 새마을 사업을 전후로 단절된 곳이 많아 지금은 3곳만 전례를 이어오고 있다.
(2014.2.12. 나주신문)
 
▲ 강정마을 (암정2리)
 
암정리 강정마을은 일봉암과 깃대봉 사이에 위치를 잡은 마을이다. 강정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아주 경치가 좋다, 암정저수지 가기 직전에 있는 큰 마을로
 
옛날 이곳에 종이를 만드는 곳이 있어 마을이름을 지소(紙所)라 부르다가 서편에 청소(淸所)가 있었고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강정(江亭)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약 450여 년 전에 기계유씨(杞溪兪氏)가 입항하여 마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온다. 마을 뒷동산에는 오갈바위가 있는데 상촌(上村)마을이 보이면 안 좋다고 하여 마을이 보이지 않게 언제나 마을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마을의 성씨 구성은 달성배씨, 경주정씨, 기게유씨, 이천서씨, 파평윤씨, 광산김씨, 경주최씨등이 거주하고 있다.
 
강정마을 주변에는 질이 좋은 닥나무가 많고 주변에 문성암, 운흥사, 불회사 등 큰 절이 많아서 질좋은 종이를 많이 생산 공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도면 불회사의 불상이 강정마을에서 생산된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인다.
 
▲ 운흥마을 (암정3리)
 
운흥마을은 구름이 산봉우리에서 일어나는 형태와 많이 유사하다고 하여 운흥(雲興)이라 불린다. 본관을 자세히 알 수 없는 조씨가 천 년 전에 입향하였고, 백 년 전에 전주 최씨 최윤삼이 광산군으로부터 입항한 이래 여러 성씨가 운흥마을에 들어왔다.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도천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도개면 장암리, 도천방리, 번만리, 암치리로 되어있고, 1895년에는 남평군 도천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천면 장암리, 강정리, 운흥리, 벽동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천면 장암의 암과 강정의 정을 취합하여 암정리(岩亭里)라 명명하여 다도면 암정리가 되었다.
 
마을에는 ‘범많이골이 있는데 예전에 이곳에 산적들이 거주하다 범이 들어와 쫒겨나서 범많이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현재 운흥마을에는 김해김씨, 밀양박씨, 수원백씨, 탐진최씨, 전주최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 조직체는 없고 가뭄이 들면 일봉암 상봉에서 무제를 올렸었고, 마을에 풍물과 농기가 있었으나 한국전쟁이후 맥이 끊겼다.
 

8. 8. 방산리

 
▲ 방촌마을 (방산1리)
 
방촌은 나주호 남단에 위한 마을로 국사봉 북쪽 산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방촌은 마을 입구 좌편과 우편에 큰 바위가 마주보고 있어 맛바위마을, 쌍암리(雙岩里)라 부르다가 1736년 진주정씨가 입향한 이래 방촌(芳村)이라고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방산리는 약 4백년 전에 마을터가 형성되었고,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다소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다소면 신다웅리, 구다웅리, 1895년에는 남평군 다소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다소면 방촌리, 동산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방촌의 방(芳)과 동산의 산을 따서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로 개편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1998년 나주시 다도면 방산리로 바뀌었다.
 
방촌은 1625년 강화최씨와 무송윤씨(茂松尹氏)가 처음 입향하면서 마을터가 형성되었고, 1736년에 진주정시가 입향했으며, 1851년 경주이씨와 다른 성씨들이 마을에 들어왔다. 방촌이 현재의 마을 모양을 갖추기 전에는 윗골, 아랬골, 서당골 등도 이었었으나 방촌마을이 잘 살게 되면서 주민들이 모두 내랴와 함께 살게 되면서 마을터만 남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악귀를 쫓기 위한 선돌이 4개가 이었는데 현재는 2개만 남았다. 마을역사를 알리는 연혁비가 1989년 1월에 건립하였다. 다도방산보건진료소가 방촌교 앞에 있다.
 
마을에 총 35가구 88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구역면적은 총 1,215ha이고 산림면적이 980hafh 81%가 산으로 이루어 졌으며 농지는 전.답을 합쳐 103ha, 기타 132ha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의 주 소득원은 벼농사이며 특용작물로 산채(취나물)와 과수(감나무)를 재배하여 가구당 소득이 약 1,800만원 정도이다.
 
마을은 국사봉(해발 440m)아래에 있어 해발고는 최저 60m에서 최고 440m 이며 나주호의 건설로 해발 60m까지는 수몰된 상태이며 경지는 다른 산촌에 비해 넓고 평탄한 편이며 주변에는 산으로 둘러 쌓여 있여 오염원이 없는 청정지역이고 나주호의 영향으로 겨울철 기온이 온화하여 취나물과 단감나무 재배로 주변마을 보다 소득이 높으며 ‘범죄없는 마을’로 3년간 선정되었으며 마을의 인심이 정말 훈훈한 곳이다.
 
 
 
▲ 방산마을 (방산2리)
 
방산마을은 한적골이라 불리어져오다 마을 형태가 주위에 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산이 꽃봉우리처럼 생겨 방산(芳山)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사백년 전에 천안전씨, 강릉유씨가 처음 터를 잡아 살았고 그 후 강화유씨, 김해김씨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산마을은 국사봉 기슭에 위치하여 한국전쟁 당시 마을의 피해가 더욱 많았고 마을 호구수도 대폭 줄었다.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정월 14일 밤에 귀목나무인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올렸는데 태풍에 당산나무가 넘어져서 지금은 당산할머니에게만 과일을 올린다. 마을입구에 방산교회가 있다.
 
 
▲ 닭금마을/유금마을 (방산3리)
 
닭금마을은 에전에는 칠성동(七星洞)이라는 마을로 마을터가 진터 형국이었는데 마을 한가운데로 도랑이 나서 징이 깨지는 바람에 폐촌이 되었다 한다. 현재의 마을은 1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는데, 마을 뒷산에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마을이름을 닭금마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약 3천여 개 정도의 '닭' 관련 지명이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닭은 알을 많이 낳는 날짐승으로 자손 번성과 농작물의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우리 조상들은 닭 지명을 선호한듯하다.
 
'닭' 관련 지명은 전남에 가장 많고(24%), 그 다음으로 전북, 경남, 경북의 순이다. 선조들은 산마루 모양이 둥글면 '달걀봉', '닭알봉' 등의 이름을 붙여 다산(多産)을 기원했고, 닭이 울면 새벽이 오니 '밝음(光明)'이 찾아온다고 보았다. 또한 닭 지명 중 많은 것은 '닭재(닥재), 닭실'인데 대개 닭 모양으로 생긴 산이나 고개에 많이 붙는 땅이름이다.
 
현대풍수학에서 길지는 병사들이 장군을 감싸고 있는 형세인 ‘장군대좌형’과 용이 흐르는 물을 마시는 ‘회룡음수형’, 선비가 책을 보는 형상인 ‘선인독서형’, 재벌총수 집터 같은 ‘금계포란형’ 등을 꼽는다. 금계포란형이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의미한다. 개인의 주거지도 양택을 정해서 정하지만 마을공동체 운명도 양택의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알고 있다.
 
풍수란 쉽게 풀이하면 만물의 형상과 자연에서 발산하는 기를 활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길지(吉地)를 잘 활용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통상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부와 명예를 얻고 화목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 풍수학의 기본은 자연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 길흉이 결정된다는 점을 볼 때 풍수의 중요성은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닭금마을은 약 3백 년 전에 손씨들이 처음으로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면서 칠성동이라 전해지고 있다. 유금마을은 경주김씨, 청주한씨, 김해김씨, 평택임씨, 의령남씨, 창녕조씨, 전주최씨 등으로 마을이 구성되어져 있는데 임두만(林斗挽)씨의 추진으로 마을의 휴식처인 망호정(望湖亭)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나주시의 예산지원과 다도우체국장을 지낸 임동욱씨가 회관 부지를 희사하고 주민들이 800만원의 성금을 모아 유금회관 2007년 9월21일 낙성하였다. 마을의 규약은 덕업상권, 근검절약, 상부상조이다. 아침마다 주민들이 모여 차(茶)를 나누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9. 9. 마산리

 
▲ 신월마을 (마산1리)
 
신월마을은 에전 마을 앞에 매우 찬 우물이 있어 수한동(水寒洞)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개편시 신월(新月)마을로 바꾸었다.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다소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다소면 노가리, 수한동, 갈마동,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다소면 오산리, 산월리, 노가리, 갈마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주군 다도면 마산리(馬山里)로 개편되었다.
 
나주호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기 전에 철기시대 3세기경인 백제고분 3기가 발굴되어 이 지역이 아주 풍요롭고 마을이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신월마을은 삼백년 전 경주이씨가 입향하여 살다가 대부분 나주호 수몰로 떠나가고 몇 가구만이 구시랭재로 올라가 주거하면서 신원마을이 형성되었다.
 
▲조리촌마을 (마산2리)
 
조리촌마을은 당초 마을이름을 학동(鶴洞)이라 부르다가 마을 뒷산의 형태가 조리처럼 생겼다하여 조리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산리는 수몰지구를 포함해서 약 백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마을 성씨는 밀양박씨, 김해김씨, 경주 정씨, 평택임씨, 진주강씨 등이다. 백년 전에 안동권씨가 처음 마을터를 닦았으나 바로 마을을 떠나고, 전주이씨가 입향한 후 다양한 성씨가 마을에 들어왔다.
 
 

10. 10. 덕림리

 
▲만세동마을(덕림1리)
 
만세동마을은 약 2백여 년 전에 국사봉(國師峰, 440m)아래 방하동(防下洞)이란 마을을 형성하여 2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였으나 마을에 우환이 깃들고 점차 쇠퇴해져서 천추만세를 누릴 명당을 찾아서 마을을 옮기고 마을이 번창하라는 뜻으로 만세동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림리는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다소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다소면 준적리, 연봉동이라 기록되어 있다.
 
1895년에는 남평군 다소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다소면 연봉리, 봉석리, 준적리, 봉창리, 서동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주군 다도면 덕림리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987년 만세동은 덕림리 1구로 편제되었다. 성씨 구성은 밀양박씨, 창원황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연안차씨, 능성고씨 등이다.
 
 
▲준적마을 (덕림2리)
 
마을 산의 형상이 연꽃이 높게 솟아 오른 것 같다하여 준적(準的)마을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의 위치는 연봉산(462.2m) 연꽃 아래 연잎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한다.
 
덕림리는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다소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다소면 준적리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주군 다도면 덕림리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987년 준적마을은 덕림리 2구로 편제되었다. 성씨 구성은 만세동과 비슷하게 밀양박씨, 창원황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연안차씨, 능성고씨 등이다.
 
준적마을은 750연전에 신씨(申氏)가 입향하여 살았고, 백 년 전에는 100호 정도가 되는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마을은 인심이 아주 좋아서 12성씨가 아주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있는 묘비를 보면 고려시대 나씨(羅氏)의 기록이 있어 마을 형성을 눈여겨 볼 수가 있다. 이후 김해김씨, 전주이씨가 마을에 입향하여 현재에 이른다.
 
동학농민 당시 김씨 등 일부 성씨가 산당고초로 인해 견디기 힘들어 본관까지 바꾼 일이 있다고 전해오며, 일제강점기에도 경찰이 주민을 혹독하게 내몰아쳐 도망을 가는 일이 잦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마을이 폭격을 당하여 하나도 남지 않았으며 모두 전소되었다. 전쟁 전에는 각 성씨마다 사당과 재실을 꾸미고 조상을 잘 모셨으나 폭격과 방화로 모두 소실되고, 마을 사람들은 잡혀가서 고문과 구타, 생매장까지 당하는 등 마을 피해가 아주 막심하였다. 1970년대에 있었던 물난리로 산사태를 일으켜 마을 전답 대부분이 매몰되기도 하였다.
 
준적마을은 전형적인 평화로운 산촌마을이다.
 
나주소방서에서 실시하는 2016년도 화재가 없는 마을로 다도면 덕림2구 준적마을이 선정 되었다. 준적마을은 37세대 55명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로 나주소방서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화재없는 마을 20개 읍면동을 심사하였고 이중 화재가 없는 준적마을를 선정하여 마을회관 입구에 현판을 달았다.
 
나주소방서는 소화기 작동법과 심폐소생술을 시연하고 준적마을 37가구에게는 소화기와 화재감지기를 무료로 달아줬다.
 
 
연봉산 자락 일대에는 따뜻한 겨울날씨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열흘정도 일찍 고로쇠 수액 채취가 시작돼 정천 지역의 고로쇠 수액 채취에 분주하다. 낮 기온이 10도 이상으로 따뜻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13도 이상 오르면서 수액이 많이 나오고 있다. 윤현농장 윤현상씨는 3월이면 농한기가 아니라 농번기나 다름없다. 14년생 고로쇠나무 300여 그루에서 수액을 채취하느라 바쁘다.
 
윤현농장에서는 철저한 위생관리를 위해 채취 기구와 용기를 무독, 무취와 저온창고에 보관 하며 현장에서만 판매한다고 했다. 고로쇠수액에는 뼈 구성에 중요한 물질인 칼슘이 함유되어 있어 혈중 칼슘농도를 증가시키는 것은 물론 뼈의 밀도 및 길이, 두께를 동시에 증가시켜준다.
 
 
글, 사진 나주신문
 
선돌<입석(立石)>은 길쭉한 자연석이나 커다란 돌을 일부만 다듬어 똑바로 세운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을 말한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이곳에서 풍요와 복을 비는 마을 공동의 제사를 지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사라지고 지금은 개인적으로만 제사를 지내고 있다.선돌은 전라남도 지방에 많이 퍼져 있으며, 대부분이 널돌 형태거나, 돌과 돌이 자연적으로 끼워져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에 비해, 이곳의 선돌은 인공적으로 다듬어 놓아 특이한 예를 보여준다. 동네에 준석입석과 연봉입석이 마을에 있다.
 
▲ 곰작골 자연마을
 
원주민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1990년 도회지에서 찾아든 1가구가 시작하여 19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이다.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산속이라 많이 불편하지만 여러 사람이 건강을 되찾고 웃음을 되찾은 마을이다.
 
 

11. 11. 도동리

 
▲ 척동마을(도동1리)
 
도동리는 면소재지에서 약 8km 거리에 위치한 마을로 주변에 광덕산(376.9m), 산석골산(362.4m), 큰봉산(353.1m)에 둘러싸여 있다.
 
연대는 미상이나 전래된 설에 의하면 조선왕조 전라관찰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장군이 될 수 있는 산 명당을 발견하고 마을과 명당까지의 거리를 측량했다하여 척동이라 불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배바위가 있는데 물건을 가득 싣고 들어오는 형상이라 먼 옛날 척동마을에 부자가 많았다고 한다.
 
도동리는 1759년 《여지도서》에 남평현 다소면, 1789년 《호구총서》에는 남평현 다소면 오평지촌, 1912년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남평군 도소면 도룡리, 진동리, 척동리로 기록되어 있다. 도롱리는 도롱(都弄)과 척동(尺洞)의 이름을 따서 도동리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주군 다도면 도동리가 되었다. 1948년에 홍수가 나 농경지가 침수되고 논이 깎여서 지목변경이 되었다가 경지정리사업으로 논을 다시 되찾았다. 1951년 3월 19일에는 나주군 다도면 도동리 척동마을과 신기마을 주민들이 군의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죄없이 학살되었다. 그밖에도 여러 곳에서 경찰에 의해 토벌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척동은 약 200여 년 전에 장흥고씨, 김해김씨, 진주강씨가 처음 이주해 마을 형성했다고 전해온다. 진동은 백제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여 진동(陣)이라고 하며 진동마을선돌이 남아 있다.
 
1591년에 고경명 장군이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싸움에서 싸우다 전사한 이래, 인척간에 자리가 잡히지 않아 이곳에 옮겨와 살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평지마을
 
평지마을은 백제군이 기마병을 조련시킬 대 땅이 평평하여 말을 매기가 좋다고 하여 평지(平地)마을이라고 불렀다 한다. 마을에는 제주양씨, 홍성장씨, 김해김씨가 살고 있다. 1500년에 제주양씨가 처음으로 입향하였고, 1600년에 반남박씨 박성동(朴成童)이 영암에서 살다가 왔다.
 
1610년에 김해김씨가 마을에 들어오고 1670년 경에 흥덕장씨 장상수(1647~1692)가 장흥 유치에서 이곳으로 입향하였다. 1860년에 제주 사람 양청묵(1832~1890)이 쌍봉리에서 거주하다가 마을에 들어왔고, 선산임씨 임백현(1837~1896)이 영암에서 살다가 이향하였다.
 
1940년에 보성 사람 오사동(1919~1989)이 보성에서 살다가 마을에 들어왔다. 평지마을은 1948년 무자년 대홍수 때 농경지의 피해가 아주 극심했고, 1975년 다도댐 건설로 대초장이 수몰된 이후 마을 사람들은 20km 떨어진 영산포장터를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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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