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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면 향토사 (2018)null 2018.07.11. 13:39 (2018.07.11. 02:38)

제9장 다도면의 자랑

 

1. 1. 나주호 (羅州湖)

위치: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판촌리에 있는 호수.
내용: 나주호(羅州湖)의 길이는 496m이고, 높이는 31m이며, 체적은 112만 8000㎥이다. 이 호수의 유역면적은 1만 470㏊이고, 만수면적은 780㏊이며, 저수량 9058만㎥, 몽리면적 1만 1200㏊이다. 이 호수는 나주댐(일명 대초댐)에 의해 조성되었다.
 
 
나주댐은 높이 200∼300m의 야산으로 둘러싸인 대초천(大草川)을 가로막아 농업용수 개발, 농지기반 조성, 농가 소득 증대 등의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이 댐은 1973년 4월에 착공하여 1976년 9월에 완공되기까지 시멘트 1만 3746t, 철근 1,014t 등 총사업비 26억 2천만 원이 소요되었고, 이 댐의 완성으로 다도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60만 평과 가옥 650호가 수몰되었다.
 
이 댐은 작물 성장에 알맞은 온도의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수면에서 3m 이내의 표면수만을 취수할 수 있는 특수 취수탑과 물의 효율적 관리와 손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량조절장치로 설치되어 있는 국내 최대의 농업용 저수지이다. 이 호수에는 붕어·잉어·뱀장어·날치 등 담수 어족이 많아 낚시터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나주호 관광지 조성사업지구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1. 조 사 명 : 나주호 관광지 조성사업지구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2. 조사지역 :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우산리 안심마을 일원(4,031㎡)
3. 조사기간 : 2002년 10월 28일 ~ 2002년 11월 18일
2003년 4월 14일 ~ 2003년 5월 24일
4. 조사기관 : 재단법인 호남문화재연구원
 
5. 조사사유
이번 조사는 나주관광개발(주)에서 실시하는 나주호 관광지 조성사업에 일환으로 공사로 인하여 파괴가 불가피한 나주시 남평읍 우산리 안심골 분청사기가마터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모든 자료는 기록으로 보존하고 학술 및 교육자료로 활용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6. 조사경과
나주호 관광지 조성사업지구는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본 연구원에 의해 2002년 4월 3일부터 6월 1일까지 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시굴조사 결과 나주시 남평읍 우산리 안심마을에서 4기의 가마가 확인되었다. 유구가 확인된 지역은 나주호 관광지로 조성되기 때문에 이들 유구에 대한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본 연구원은 2002년 10월 22일 나주관광개발(주)과 발굴조사 계약을 체결하고 10월 28일 조사를 착수하였다. 하지만 조사구역 제토과정에서 유구가 민묘 묘역으로 확장되는 것이 확인되어 조사진행이 어려워져 11월 18일 조사를 중지하였다. 2003년 4월 민묘 소유주, 나주관광개발(주) 관계자, 나주시청과 협의하여 4월 14일 조사를 재개하였다.
 
7. 조사내용
⑴ 유구-이번 조사를 통하여 4기의 가마가 확인되었다.
 
① 1호가마
조사된 가마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현재 가마의 소성실로 추정되는 바닥면 일부만 조사되었다. 바닥면은 회흑색으로 경질화 되어 있으며 가마 아래 도기편이 소량 섞여있는 재층이 형성되어 있어 도기가마로 추정된다.
 
② 2호가마
1호가마에서 서편으로 6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아궁이와 굴뚝부는 모두 파괴되고 소성실만 남아 있다. 가마는 반지하식의 등요로 종단면 조사결과 가마의 바닥면은 최소 4차례 이상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가마벽에서는 보수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가마의 현존 길이는 8.2m, 너비는 140~150㎝ 정도이다.
 
③ 3호가마
2호가마에서 서편으로 4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아궁이와 소성실의 일부만 남아 있다. 가마의 현존길이는 10.8m로 아궁이는 크게 2차례에 걸쳐 개․보수 되었다. 1차 아궁이는 2차 아궁이의 바로 하단에 위치하며 머릿돌을 놓는 시설은 파손되었다. 아궁이의 내벽을 한차례정도 보수하여 덧붙인 흔적이 보이며 불턱부분은 2차 아궁이 축조시 파괴된 것으로 판단된다. 1차에서 2차 아궁이까지의 거리는 160㎝이며, 너비는 170㎝, 현존높이는 80㎝ 정도이다.
 
2차 아궁이는 1차 아궁이의 바닥에 다량의 사질토를 채우고 1차의 불턱을 파괴한 후 자갈이 섞인 점토를 사용해 축조하였다. 아궁이의 현존길이는 160㎝이며, 너비는 160㎝, 높이는 70㎝이다. 불턱의 높이는 75㎝로 거의 수직에 가까우며 불길이 넘어 가는 부분에 2단으로 단이 형성되어 있고 불창기둥은 확인되지 않았다. 소성실은 현재 7m 정도 남아있으며 일부는 민묘의 조성으로 인해 유실되었다. 불턱으로부터 230㎝ 정도의 등간격으로 완만한 단이 형성되어 있고 단이 있는 부분은 검게 그을려 회흑색을 띠고 있어 일정한 간격으로 출입구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④ 4호가마
3호가마에서 서쪽으로 5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능선의 단애면에서 굴뚝부와 연결되는 소성실의 일부만 확인되었다. 석재와 점토를 이용하여 가마 벽을 축조하였으며, 현존길이는 110㎝이며 너비는 120㎝ 정도이다.
 
⑵ 유물
안심골 가마터는 농로조성과 개간으로 인해 유물퇴적층이 거의 유실되어 유물의 양상은 지표에서 수습된 유물과 가마 내부 함몰층에서 수습된 유물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분청사기는 무문과 인화분청 그리고 소량의 상감분청 등이 출토되었고 분청사기와 함께 도침이 출토되었다. 무문의 분청사기는 대접과 접시류가 주를 이루고 있다. 대접은 내저원각이 없이 외반된 구연을 가진 형태와 내저원각이 있고 내만된 구연을 이룬 형태가 출토되었으며 모래나 태토비짐을 받쳐 번조하였다. 접시는 여러 종류의 기형이 발견되며 역시 모래나 태토비짐을 사용하여 번조하였다.
인화 분청사기는 대접과 접시, 발, 병 등이 출토되었다. 내면이나 외면에 수조의 선문과 함께 국화문․연주문․삼원문 등의 문양을 간략하게 시문하였고, 모래나 태토비짐을 받쳐 번조하였다.
상감 분청은 지표와 가마 함몰층에서 극히 소량만이 수습되었는데 흑백의 상감기법을 이용해 초문 등을 간략하게 시문하였다.
 
② 도기류는 주로 재유가 시유된 경질의 호가 1호가마의 재층과 2호가마 내부 함몰층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2호가마에서는 3차 바닥면(추정) 아래 가마 함몰층에서 시유도기와 분청사기 편이 같이 출토되어 자기와 도기의 겸용가마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8. 조사성과
1) 조사유구중 2호가마는 바닥면을 수차례에 걸쳐 개․보수 하였으며 3호가마는 아궁이를 크게 2차례에 걸쳐 재축조하였음이 확인되었다.
2) 출토유물은 분청사기, 도침, 시유도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중 분청사기는 접시와 대접이 주를 이루며 유물 내외면에 국화문이나 삼원문 등을 1조 혹은 2조대로 시문하였다. 또 간략한 백상감의 초문이나 화문을 시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분청사기에서 상감문이 점차 퇴화하고 분청사기로서의 특징인 인화기법이 점차 완성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15세기 초반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3) 분청사기는 광주 충효동 가마의 최하층에서 출토되는 상감․인화분청사기, 나주 운흥사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인근지역인 다도면 마산리와 다시면 신광리에서 수습된 유물과도 거의 동일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나주지역의 분청사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된다. (2003년 05월 21일 수요일, 한국고고학회 )
 
출토유물(도기류)
 
출토유물(분청사기류)
 
 

2. 2. 나주호 망향탑

 
나주시 다도면 판촌리 산 197-1번지 일원에 조성한 파노라마공원(망향의동산)
 
나주시는 다도댐 건설로 39년 동안 물속에 마을을 묻고 살아온 주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고향사랑을 북돋우기 위한 망향의 동산과 탑 준공식 행사를 2011년 11월 5일 다도면 판촌리 산 197-1번지에서 재경·재광 향우 등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망향탑 건립 준공식을 가졌다.
 
나주호 파노라마 공원(망향의 동산)은 망향의 동산 추진위윈회(위원장 최병남)와 주민의 의견 수렴을 거쳐 2010년 1월 착공했다.
 
지난 1973년 국가사업으로 추진된 다도댐 건설로 8개리 15개 마을의 700여호와 7.06㎢가 물에 잠겨 4,200여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실향의 아픔을 겪은 면민들은 서로 만나서 고향의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쉼터가 없어 아쉬움을 안고 있었는데, 이번 망향의 동산과 탑 완공으로 ‘고향 생각’의 공산을 마련하게 됐다.
 
 
최병남 위원장은 “고향을 떠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로 서울지역에서 살면서 시제 때나 면민의 날 행사 때 재경향우회를 중심으로 모여 고향얘기를 나눴었다”며 “이제 만남의 쉼터가 마련된 만큼 더욱 자주 한자리에 모여서 고향을 추억할 수 있게 됐다”고 만시지탄의 감정을 표현했다.
 
망향의 동산에는 망향탑, 망향비, 마을위치도 등의 조형물이 설치됐는데 망향탑은 남성과 여성을 단순화 시킨 추상형태로 사라진 고향을 그리워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형상과 하단중앙에 망향탑이라는 문구를 새겨 잊혀져 가는 마을을 후대에 까지 전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탑 뒷면 언덕에는 다도호 아래 수몰된 마을 위치를 표시하는 조형물을 설치하였으며, 광장에는 마을명을 새긴 대리석판을 배치하였다.
 

3. 3. 중흥 골드스파&리조트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나주호로 558-314 (061-339-5000)
 
 
 

4. 4. 녹야원(鹿野園)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이 만든 순동(純銅) 부조 탱화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인 녹야원(Sarnath, Sarnātha)은 인도의 바라나시의 북방 약 10km에 위치해 있는데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과 함께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한 곳이다.
 
30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나무와 꽃을 심어 아름다운 숲을 조성한 녹야원(주지 효공) 스님은 새로운 형식의 본존불 탱화를 구상하고 최완수 선생님에게 작품을 의뢰하여 2년여의 자료조사와 모형도 제작, 수정 작업을 거쳐 2010년 11월 7일 무설전 본존 탱화 점안 및 봉안법회를 봉행했다.
 
녹야원 순조 부조 탱화는 자연채광이나 전등 등의 밝기에 따라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면서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순동 부조를 본존불로 모신 것은 불교 미술에 획기적인 일로, 목각 부조 형식의 탱화가 더러 있지만 순동 부조 형식의 탱화가 본존 탱화로 모셔지기는 이번이 사상 처음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이 정성을 다한 불심으로 만든 탱화는 가로 3m, 세로 1.6m 크기의 순동 부조물로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첫 설법을 했던 녹야원의 정경과 다섯 제자, 보상 등을 조각한 작품이다.
 
효공 스님은 “세상을 지혜로운 눈빛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자비로운 미소와 손길로 보살피는 부처님의 품안에 모든 중생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고 말씀하셨다.
 

5. 5. 문성암(文聖庵)

문성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백양사의 말사로 1987년 선객 다정스님이 운흥사(雲興寺)의 산내 암자였던 문수암(文殊巖) 터에 창건하였다. 선승 다정스님 꿈에 현몽한 나주 문성암(文聖庵)은 스님이 나주 죽림사와 운흥사를 오가며 수행할 때 문성암 앞의 커다란 소나무를 보고 사찰이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또 운흥사 초가에서 기거할 때 스님이 문성암 쪽에서 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꿈을 꾸고 절을 짓고자 결심하였다. 운흥사의 암자인 문수암이 있었던 곳으로 문수는 문수대성(文殊大成)이며 여기에서 문성(文成)을 따서 암자의 이름을 지었다. 문수가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선원 터로 적합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하루는 절에서 노보살이 꿈을 꾸었는데 불이 나서 그 불길이 하늘을 태웠다고 하는 길몽을 꾸었다고도 한다.
 
문성암 법당에는 참회전(懺懷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 불단에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여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이 협시되어 있는데 불상들은 모두 흙으로 조성되었다. 정안와(淨安窩), 마진루(摩震樓) 등의 현판이 걸린 선방과 백미굴(白眉窟)이라 부르는 요사와 수각(水閣)이 있다.
 
문수보살이 화현한 터라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절이다.
 
 
문성암 지장전 건립불사는 2012년에 시작돼 지장전 낙성식과 지장보살 존상 봉안 점안법회를 2015년에 회향했다. 20여 평 규모의 새 지장전은 전통 양식의 전각으로 3미터 높이의 석조 지장보살 좌상이 봉안됐습니다.
문성암은 백양사 포교국장이자 광주 관음사 신임 주지로 취임한 소궁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나를 찾는 암자여행-암자는 내게 물같이 바람같이 살라하네
 
<암자로 가는 길><암자에는 물 흐르고 꽃이 피네><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를 저술한 정찬주 작가는 10여 년 동안 깊은 산 암자를 찾아다녔다. 그의 길을 따르면 ‘봄날의 암자는 나를 설계하고, 여름은 성장시키고, 가을은 사색하고, 겨울은 성숙시킨다’고 한다.
 
작가는 계절별로 그런 화두를 달고 찾은 암자들을 가리켜 “산사는 내면의 접속부호다”라고 소개한다. 책 속에는 김천 천덕산 삼성암, 합천 가야산 금강굴, 성주 선석산 중암, 무안 승달산 목우암, 영광 모악산 해불암, 장성 백암산 약사암, 익산 미륵산 사자암, 파주 고령산 도솔암, 양양 오봉산 홍련암, 김해 무척산 모은암, 청도 호거산 북대암, 포항 내연산 서운암, 담양 추월산 보리암, 장수 거령산성 영월암, 서천 종천면 영수암, 아산 설화산 오봉암, 한라산 영실 존자암, 장안읍 불광산 척판암, 양산 영축산 비로암, 경주 남산 칠불암, 광양 백운산 상백운암, 임실 성수산 상이암, 진안군 운장산 남암, 공주 계룡산 대자암, 예산 봉수산 대련암, 함양 마천 지리산 금대암, 함양 지리산 문수암, 함양 백운산 상연대, 해남 두륜산 상원암, 해남 달마산 부도암, 보성 천봉산 만일암, 나주 덕룡산 문성암이 실려 있다.
 

6. 6. 방산교회

 
 
나주 다도면 방산리 한적골 입구에 있는 방산교회(조규전 목사)는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졌다. 15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아주 작은 마을이 되었다. 북쪽의 하마산, 남쪽의 국사봉 등 주변의 산에 둘러싸인 데다 앞산이 꽃봉오리 같다하여 꽃봉오리 방(芳)자를 써서 ‘방산’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강릉유씨가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끝자락에 방산재라는 재각이 있다. 현재 교회건물은 1979년 새로 건립한 건물이고, 다섯 칸의 옛 예배당은 식당으로 사용한다.
 
전남의 선교역사는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4년 전주에 선교부를 설치한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나주에도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1897년 목포에서 영산강을 타고 영산포에 상륙한 유진 벨 선교사 일행은 나주읍성 안에 숙소로 사용할 초가 한 채와 성 밖 향교 부근에 선교기지로 사용을 땅을 매입하는 등 전도를 시작했지만, 당시 외국 종교에 대한 배타심이 너무 심해서 목포로 다시 돌아간다.
 
1908년 10월 10일 선교사 오웬과 한국인 마서규, 임성옥, 노응표, 조상학 씨 등이 나주 서문정에 예배당을 개척하여 서문정교회에서 배유지 선교사와 변창연 조사가 시무하였다.
 
이세종, 이현필, 정규오 목사, 정옥남 장로 등은 나주지역 다도면 화순군 초창기 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7. 7. 동학농민군 유광화 선생 기념비

 
유광화(劉光華, 1858∼1894)는 1858년 전라도 나주 다도 방산리에서 유몽렬과 김해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화(光華)는 그의 자(字)로 본명은 유재희(劉載熙)이며 호(號)는 죽산(竹山)이다. 그는 학문에도 정진해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성격이 올곧아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경선 부대에서 700여 명의 농민군과 함께 활동했던 선생은 주로 군사물자를 조달하던 책임을 맡았다. 최경선 부대가 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격파된 후에 화순, 나주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894년 12월 10일 체포돼 처형되었다. 선생의 손자인 유길홍 씨가 할아버지의 서찰을 동학농민혁명 100년 만에 1994년 6월 세상에 발표하였다.
 
 
제번하고 동생 광팔 보시게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광팔이 자네가 형인 나를 대신 해서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그 얼마나 천만다행한 일이 아니겠나.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라네.
그러나 형편이 극히 어렵다 보니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식으로 지내고 있는데,
고초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네.
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
사정이 어려워져
또 한 번 돈과 비단을 청하니 살펴 주길 바라네.
또한 매우 급한 일이라네.
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하는 것일세.
뒷일은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예를 갖추지도 못했네.
갑오년 늦가을 형 광화.
 
際煩舍弟光八卽見
國家患難民之所患
余出家逗逼於數年不顧家事
固然不似子道也
汝光八兄代任齊家爲之幸矣
然而事勢極難故
天衾地席之苦楚則不可狀也
囊者遣財多少要需之
近況極甚於前故
通察付送之
焦眉之急也
死生縣命國運
後事所託於昆弟
摠摠不備禮
甲午 晩秋 兄 光華
 
대접주 최경선
 
새 세상을 열기위해 온몸을 바친 최경선
 
전봉준의 오른팔로 활약 화순 남면에서 생포돼 처형당해
 
최경선(崔景善)은 전봉준과 손화중·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였다. 족보명은 병석(炳碩), 자(字)는 낙필(洛弼) 또는 경선(景善)이다. 태인현 서촌면 월천동(지금의 전북 정읍군 북면)에서 1859년 11월에 출생해 태인 주산마을에서 성장했다. 최경선은 태인의 김덕명 포에 속해 있던 접주였다.
 
최경선은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전봉준의 오른팔로서 혹은 책사(策士)로서 전봉준과 운명을 같이 했다. 그는 1893년 11월, 농민들이 탐관오리 축출을 맹세하면서 작성한 사발통문에 이름을 올린 20명 중의 한명이다. 최경선은 1894년 음력 3월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영솔장 직책을 맡아 황토현과 황룡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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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