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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 (2017)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2018.07.16. 10:38 (2018.07.16. 02:38)

Ⅲ. 선사시대 때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인류가 불을 처음 이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임실군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인류가 불을 처음 이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임실군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하가유적에서 뗀석기와 몸돌, 슴베찌르개, 각추상석기, 나이프형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34) 임실 상가 윷판유적에서 서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그 부근에서 섬진강이 U자형으로 휘감아 돈다. 호남정맥 남쪽 기슭에 시작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져 신평천을 이루고 계속 남쪽으로 흐르다가 신평면 소재지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유적 중 슴베찌르개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임실 하가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냥 도구를 제작하던 곳으로 밝혀졌다. 슴베찌르개는 일본열도의 구석기와 관련성이 깊어 향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구석기문화의 교류 양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았다. 특히 일본 고유의 석기로 알려진 나이프형 석기가 출토됨으로써 우리나라와 일본 구석기문화의 교류 및 일본 후기 구석기문화의 원류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로 큰 관심을 모았다.35) 임실 하가유적을 중심으로 60여 개소의 구석기유적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36) 임실군이 구석기시대부터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한 것으로 점쳐진다.
 
기원전 10,000년경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는 토기의 발명과 마제석기의 출현 등으로 상징된다. 이 시기의 초기에는 본격적인 농경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탈바꿈하면서 정착생활을 영위하는 생활유적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하여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대체로 하천변이나 해안가에서 주로 발견된다. 임실군은 섬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양쪽에 평야와 구릉지가 넓게 펼쳐져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좋은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1993년 섬진강댐 수몰지구인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수습37)된 이후, 현재까지 10여 개소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달리 옥정호라고 불리는 섬진강댐은, 1928년 구댐과 1965년 신댐이 완공되었지만, 당시에는 학술조사를 실시하지 않고 댐 공사가 진행되어, 지금도 많은 매장문화재가 물속에 잠겨있다. 섬진강댐 수몰지구에서 수습된 빗살무늬토기편에서 다양한 문화요소가 확인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임실군을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과 교류관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15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청동기시대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중국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아 안정적인 농경생활의 시작, 마제석기의 본격적인 사용, 사회복합도의 증가가 한층 뚜렷해진다. 그리고 토기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무문토기가 주종을 이루어 달리 무문토기시대라고도 불린다. 기원전 700년경부터는 이전의 화전농법에 의한 밭농사에 비해 거의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정착농경인 논농사로 생활방식이 바뀐다. 청동기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지석묘와 석관묘, 옹관묘 등 다양한 무덤이 새롭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에서 풍화암반층을 장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판석형 할석을 잇대어 놓은 석관묘가 조사되었다.38) 섬진강 강줄기와 평행되게 장축방향을 두고 석관의 바닥면에는 무문토기를 일부러 깨서 전면에 깔았다. 아직까지 옹관묘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 초 운암면 운정리 장자골에서 다수의 옹관묘가 모습을 드러낸 바 있었기 때문에 이른 시기의 옹관묘가 그 존재를 드러낼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은 그 성격이 상세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임실군 전 지역에 골고루 산재된 40여 기의 선돌도 큰 관심을 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지석묘는 31개소에 100여 기 정도 분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39) 이 지석묘들은 주로 하천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평야가 펼쳐져 있거나 교통로가 통과하는 운암면과 덕치면, 신덕면, 신평면 일대에 주로 산재되어 있다. 하나만 있는 경우도 간혹 확인되고 있지만 대부분 수기 내지 수십 기씩 무리를 이루고 있다. 특히 덕치면 사곡리 안하마을에는 농협창고를 중심으로 북쪽에 20여 기와 남쪽에 10여 기의 지석묘가 한곳에 무리지어 있다. 신평면 소재지 서쪽 산자락 정상부에도 크고 작은 20여 기의 지석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임실군에 산재된 지석묘는 대체로 구릉지와 하천변, 산기슭에 입지를 두었는데, 그 입지에서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차이점이 없다. 아직까지 탁자식 지석묘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기반식 혹은 개석식 지석묘가 일색을 이룬다. 지석묘의 상석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면서 그 주변의 하천 혹은 산줄기와 평행되게 장축방향을 두었다. 섬진강댐 수몰지구인 운암면 운정리에서 5기의 지석묘가 조사되었는데,40) 진안 용담식 지석묘의 특징인 방형 혹은 원형의 묘역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으로는 덕치면 망월촌41)과 성수면 도인리42)가 있다. 모두 교통의 중심지로 다른 지역의 생활유적과 마찬가지로 그 주변지역이 잘 조망되는 구릉지 혹은 산줄기의 정상부에 입지를 두었다. 임실 망월촌리에서 5기와 임실 도인리에서 7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이 주거지들은 대체로 풍화암반층을 일정한 깊이로 파내어 바닥면을 마련하고, 그 중심부에 장타원형 구덩이가 배치된 전형적인 송국리형이다. 아직까지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지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임실군의 청동기문화는 송국리형 주거지의 확산과 함께 발전한 것43)으로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청동기시대에도 농경문화의 발달과 함께 그 주변지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점쳐진다.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중국 연과 고조선의 무력 충돌로 고조선 유이민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격변의 시기를 맞는다. 고조선의 준왕 및 유이민의 남하로 지석묘 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면서 새로운 질서의 재편 과정은 마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條에는 마한에 모두 54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한의 영역이 오늘날 경기 서해안·충남·전북·전남 등에 걸쳐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소국들은 대체로 군 단위마다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실군에도 마한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지만, 아직은 그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력기원 개시 전후부터 300년경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을 원삼국시대라고 부른다.44) 1970년대 고고학계에서 처음 제기된 시대 구분법으로,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기 이전까지 삼국시대의 과도기적인 단계로, 그 이전에는 삼한시대·부족국가시대·성읍국가시대·김해기·마한으로 불리었다. 원삼국시대에는 청동기의 소멸과 함께 철 생산의 성행, 지석묘의 소멸, 김해식토기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전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목관묘와 목곽묘, 옹관묘가 더욱 대형화되고, 여기에 지역성이 강한 주구묘와 분구묘, 수혈식 석곽묘가 새롭게 출현한다.
 
임실 망월촌에서 39기와 임실 도인리에서 21기, 청웅면 석두리45)에서 37기의 원삼국시대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임실 석두리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자리한 임실 석두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중복관계를 보였다. 임실 석두리는 대부분 2∼3기 이상씩 중복관계를 보이고 있으면서 대부분의 주거지가 화재로 폐기된 것으로 밝혀졌다. 임실역에서 동남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임실 도인리는 인위적으로 구획한 것처럼 구릉지의 정상부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대형 주거지가 배치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마한의 주거지는 그 평면형태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풍화암반층을 파내어 생활공간이 마련되었는데, 그 출입구는 대부분 남쪽에 두었다.
 
유물은 항아리와 장란형토기, 귀때토기, 시루, 바리, 그릇받침 등 마한의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호남지방의 마한계 분묘유적과 생활유적에서 나온 鳥形土器가 도인리 20호 주거지에서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이제까지 고창 예지리 1호분과 익산 간촌리 2-3호, 나주 용호 14-3호, 영광 군동 A-6호묘, 서천 오석리 96-6호분과 나주 복암리 랑동 7호 주거지에서 조형토기가 나왔다. 임실 석두리 22호 주거지에서는 함안 황사리 고분군46) 등 경남 함안지역 출토품과 흡사한 4세기 후반대 가야계 고배가 출토되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구의 속성과 유물의 조합상에서 여러 지역의 문화요소가 함께 공존하여 문화상으로는 漸移地帶47)를 이루었다. 선사시대 이래로 지속된 섬진강유역의 지역성이 마한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34) 이기길·차미애·김수아, 2008, 『임실 하가유적』, 조선대학교 박물관.
35) 이기길, 2007, 「한국 서남부와 일본 큐슈의 후기구석문화 비교 연구」, 『호남고고학보』 25, 호남고고학회, 5~42쪽.
36) 이형우, 2008, 『임실 섬진강유역 구석기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 BK21사업단·전북문화재연구원.
37) 金圭東·崔興鮮, 1998, 「任實 蟾津댐 水沒地區 遺蹟 地表調査 報告」, 『扶安 海岸一帶 遺蹟 地表調査 報告』, 國立全州博物館.
38) 군산대학교박물관, 2007, 『임실 운정리 유적』, 호남문화재연구원.
39) 全州歷史博物館, 2007, 앞의 책.
40) 군산대학교박물관, 2007, 앞의 책.
41) 湖南文化財硏究院, 2008, 『任實 望月村遺蹟』, 益山地方國土管理廳.
42) 군산대학교 박물관, 2011, 『임실 도인리 유적』, 임실군.
43) 李宗哲, 2000, 「松菊里型 住居址에 대한 硏究」, 『湖南考古學報』 12, 湖南考古學會, 85~124쪽.
44) 金元龍, 1986,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45) 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0, 「임실청웅우회도로공사구간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자문위원회의 자료집」 참조.
46) 조영제 외, 1994, 『함안 황사리분묘군』, 경상대학교박물관.
47)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을 가진 두 지역 사이에서 중간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지역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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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