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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 (2017)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2018.07.16. 18:11 (2018.07.16. 02:38)

Ⅸ. 임실군 도요지와 도자문화 역동성

 
1. 초기청자의 전파루트와 후백제 / 우리나라에서 초기청자의 출현시기와 관련해서는 9세기 전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그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吳越國206)에서 이주한 공인집단 및 오월이 송에 멸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진 일부 도자 장인들이 고려에 유입되어 그 기능을 전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초기청자가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목   차
[숨기기]
 

1. 1. 초기청자의 전파루트와 후백제

 
우리나라에서 초기청자의 출현시기와 관련해서는 9세기 전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그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吳越國206)에서 이주한 공인집단 및 오월이 송에 멸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진 일부 도자 장인들이 고려에 유입되어 그 기능을 전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초기청자가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청자의 본향이 월주요로 오월은 越州窯207)의 후원을 토대로 번영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고려정부가 주도적으로 중국 청자 장인들을 데려와 수도권 일대에서 양호한 입지를 선택하여 요장을 설립하고 초기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 절강성 월주요는 해무리굽과 길이 40m 이상 되는 대형의 벽돌가마[塼築窯]로 상징된다. 그리고 초벌구이를 하지 않고 건조된 그릇에 유약을 입혀 한 번만 굽는 단벌구이가 그 특징이다. 경기도 용인 서리와 시흥 방산동, 황해도 봉천 원산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대형 전축요는 길이 40m, 내벽의 너비 200cm 내외로 측면에 출입구와 선해무리굽완이 상징적인 유물이다. 우리나라 초기청자 요지에서 밝혀진 유구와 유물의 속성은 대체로 중국 절강성 월주요와 긴밀한 친연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진안 도통리는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대형 전축요의 분포양상과 그 특징을 근거로 전축요의 축조기술과 청자의 제작기술이 중서부에서 남서부로 확산된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여주 중암리와 서산 오사리, 대구 진인동, 칠곡 창평리, 진안 도통리 등은 요지의 길이가 절반으로 축소되었고, 선해무리굽과 한국식해무리굽완을 생산하다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中先南後說로 우리나라의 중서부가 남서부보다 전축요가 흙가마[土築窯]보다 앞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는 대형 전축요에서 문양이 없는 초기청자만을 생산하였다는 점에서 이곳만의 강한 지역성이 입증되었다.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의 내륙수로와 해상교통로가 그물망처럼 잘 구축된 곳이 새만금208)이다. 선사시대부터 천혜의 교통망을 살려 해양문물교류의 허브역할을 담당하였고, 마한에 이르러서는 패총의 보고이자 해양문화의 거점지역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함에 따라 동진강하구의 가야포 등 새만금 거점포구를 통한 국제해상교류도 활발하였다. 백제의 웅진·사비기 때는 백제의 대내외 관문이자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찌 보면 군산과 군산도는 선사시대부터 줄곧 천혜의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잘 구축된 문물교류의 허브였다.
 
해상왕 장보고 선단에 의해 사단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는 새만금 해역을 장악하였던 후백제가 오월과의 국제외교를 가장 왕성하게 펼쳤다. 견훤왕은 892년 나라를 세우고 처음으로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900년 후백제를 선포한 뒤 오월에 사신을 다시 보내 오월왕으로부터 백제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900년 전주로 도읍을 옮긴 견훤왕은 새만금 거점포구를 출발해 군산도를 경유하는 사단항로를 이용하여 오월에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918년 후백제가 사신과 더불어 말을 오월에 보내자, 927년 오월국 사신인 班尙書가 서신을 갖고 후백제를 방문하였다. 중국 청자의 본향인 오월과 가장 왕성하게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다.
 
그러나 고려는 918년 나라를 세우고 그 이듬해 오월에 사신단을 한 번만 파견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견훤왕이 그토록 큰 비중을 두었던 오월과 국제외교의 결실로 청자 제작기술이 최초로 후백제에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후백제의 견훤왕이 45년 동안 오월과 돈독한 국제외교의 결실로 오월의 선진문물인 월주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에 전파된 것이 아닌가 싶다. 후백제 때 축성된 전주 동고산성과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의 출토품 사이에 서로 조형적인 유사성과 친연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전주 동고산성 출토품을 중국제 청자로 분류하였는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그 생산지가 진안 도통리로 밝혀졌다.
 
반면에 중국 오대십국의 혼란기 때 중국인 장인집단이 고려에 유입된 것으로 본 주장도 있다. 그런데 월주요의 장인집단은 오월로부터 국가차원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로의 망명보다 오히려 국제외교를 통한 후백제로의 파견 내지 유입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초기청자 요지 중 진안 도통리 경우만 유일하게 초기청자만을 생산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진안 도통리의 운영주체와 운영시기를 추론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시흥 방산동과 용인 서리의 경우에는 초기청자와 초기백자를 함께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후백제 도읍인 전주와 인접된 진안고원은 도요지의 보고이자 도자문화의 중심지이다. 진안고원에서 도자문화의 첫 장을 열었던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는 오월의 첨단기술 전파로 후백제 때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부터 해양문물교류의 허브역할을 담당하였던 새만금 거점포구로 오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로 유입된 것 같다.209) 오월의 반상서가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를 방문할 때 오갔던 吳越과 後百濟의 使行路를 초기청자의 전파경로로 추정된다. 당시의 경로를 복원해 보면, 항주에서 월주를 거쳐 명주에 다다르고 주산군도에서 사단항로로 군산도를 경유하여 만경강 내륙수로로 전주까지 손쉽게 도달한다.
 
여암 신경준에 의해 편찬된 『山經表』210)에 실린 15개의 산줄기 중 그 길이가 가장 짧은 금남호남정맥은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면서 두 강의 발원지도 함께 거느리고 있다. 금남호남정맥 산줄기 남쪽 섬진강유역에 속한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외궁리에 3개소의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이 3개소의 초기청자 요지는 구획성과 함께 그 규모가 방대하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211)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 요지는 백제 마돌현에 속하였던 곳으로 고려 이전까지 줄곧 임실군의 속현이었다. 후백제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만을 생산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진안고원은 초기청자부터 옹기까지 도자문화가 융성하였던 곳이다. 진안고원에 속한 전북 진안군에 120여 개소와 임실군에 40여 개소의 도요지 중 전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전주에서 출발해 전북 완주군 상관면 용정마을을 지나 호남정맥 마치를 넘으면 진안 도통리까지 아주 용이하게 도달할 수 있다. 진안 좌포리는 호남정맥 마치를 넘어 진안고원 방면으로 가기 위한 사람들이 섬진강을 건넜던 나루가 있던 곳이다.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 요지와 전주를 이어주던 길은 龍井과 馬峙의 지명 속에 담긴 것처럼 그 의미가 컸던 것 같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을 따라 후백제가 구축해 놓은 외곽 방어선 안쪽에 진안고원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남원 실상사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흡사한 초기청자가 나왔다. 남원 실상사는 견훤왕이 무진주에 도읍한 이후 실상산문에 큰 관심을 두어 실상사 조계암 구지에 세워진 편운화상의 부도에 후백제의 연호인 正開가 사용된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는 견훤왕의 미륵신앙이 김제 금산사에서 익산 미륵사지로 바뀔 정도로 익산 미륵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922년에는 익산 미륵사탑을 복구하고 백제 무왕의 미륵신앙을 부활시킴으로써 전제군주로서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종래에는 모두 중국제 청자로 분류212)하였기 때문에 향후 초기청자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 위한 연구방법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936년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가 갑자기 침체기에 빠진다. 아마도 초기청자에서 茶器와 祭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핵심 소비층인 후백제 왕실과 도읍인 전주로의 공급이 중단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진안 도통리에 설치된 강주소의 설치목적과 그 역할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최고의 선진문물인 청자 제작기술을 가진 첨단기술 집단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해 剛朱所가 설치되었는데,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으로 그 운영주체가 고려로 바뀐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가마터의 문을 닿았다.
 
 

2. 2. 최고의 분청사기와 후기백자 보고

 
2016년 임실군 도요지를 대상으로 정밀 지표조사 때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에서 처음으로 도요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구담마을 주민들의 제보와 최성미 원장님의 현지조사가 이룬 쾌거이다. 1998년 이광모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시절’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구담마을은 섬진강을 따라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아마도 섬진강을 따라 자리한 수많은 마을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 아닌가 싶다. 이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윗골로 불리는 골짜기에 도요지가 있다. 현지조사 때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가마터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임실군과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휘감고 물이 넉넉해 도요지가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모두 두 차례의 현지조사를 통해 도요지의 실체가 파악됐다. 이 골짜기 중앙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는 줄곧 동북쪽으로 흘러 구담마을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이 물줄기를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 구역으로 나뉘는데, 남쪽 구역에서만 도요지가 발견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웟골에는 몇 채의 민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민가가 없고 대부분 농경지로 개간됐다. 도요지는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북쪽 기슭 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는데, 오래 전 계단식 매실 밭과 논으로 개간되는 과정에 가마터가 심하게 유실 내지 훼손됐다.
 
현지조사 때 매실 밭 남쪽 경계에서 가마터의 흔적을 찾았다. 지표면에 가마의 벽체가 드러날 정도로 유구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며, 가마는 등고선과 직교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다. 가마터 부근에 약간 볼록하게 솟은 곳이 있는데 또 다른 가마터로 추정된다. 가마의 벽체를 비롯하여 도침과 백자편, 옹기편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데, 유물의 분포 범위는 대략 200m 내외이다.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일부 소형 접시도 포함되어 있다. 도침은 높이 10cm 내외되는 원통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자의 종류와 그 특징을 근거로 남쪽 구역에서 발견된 도요지는 조선 후기 백자 가마터로 추정된다.
 
반면에 북쪽 구역에서는 가마터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물이 다양하게 수습됐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벽이 얇고 옆으로 돌대를 두른 고려시대 토기편과 후기청자 저부편, 분청사기편, 순백자편이 함께 발견됐다. 유물의 대부분은 기종이 다양한 분청사기편이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백자편은 기벽이 얇고 색깔이 투명한 순백색을 띤다. 오래 전 계단식 농경지로 개간되어 가마터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유물의 기종이 다양하고 완만한 자형지형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본래 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남쪽 구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온 늦은 시기의 조선 후기 백자편은 섞여있지 않았다.
 
임실 구담 도요지는 임실군 도자문화의 변화과정과 그 역사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가 생산됐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행정 구역상으로 임실군에 속했다. 진안 도통리에서 생산된 초기청자가 가장 많이 나온 곳이 임실 진구사지이다. 후백제 때 임실의 발전상을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진안 도통리는 벽돌가마에서 흙가마로 바뀌고 오직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그런데 936년 후백제의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가 갑자기 침체기에 빠진다. 아마도 초기청자에서 茶器와 祭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핵심 소비층인 후백제의 왕실과 전주로의 유통이 중단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 무렵 진안 도통리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거나 고려에 의해 강제 이주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진안 도통리를 제외하면 시흥 방산동 등 다른 초기청자 요지는 대부분 개경 부근에 위치한다. 그리고 고려의 지방 통치제도 정비에 따른 해상교통로의 발달로 진안 도통리 장인집단이 고창, 부안 등 서해안으로 이동했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 이후 진안고원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장인집단이 이주 혹은 이동함에 따라 마침내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 요지가 문을 닫았다. 반면에 부안 유천리에서는 진안 도통리 중평 초기청자의 전통을 이어 받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평가받고 있는 상감청자와 비색청자를 생산했다.
 
전북 부안과 전남 강진에서 만든 천하제일의 비색청자와 상감청자는 고려 말에 이르러 큰 위기를 맡는다. 고려의 대몽항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부안, 강진의 청자문화가 쇠퇴한다. 이 무렵 임실군을 중심으로 진안군과 순창군, 남원시 일대에서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왜구의 잦은 침입과 극심한 피해로 가마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당시 최고의 도공들이 안전한 내륙지역으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임실 구담 도요지 북쪽 구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당시 장인집단의 이주를 고고학적으로 방증해 준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부안 유천리를 운영했던 최고의 도공들이 호남정맥을 넘어 전북 동부지역이 이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호남정맥의 가는정이와 마치, 구절재가 가장 대표적이다. 후백제 수도 전주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하던 진안 도통리를 가려면 호남정맥 마치를 넘었는데, 마치는 본래 왕의 길, 즉 후백제 견훤왕이 넘던 고개로 추정된다. 견훤왕은 호남정맥 마치를 넘어 후백제 최첨단국가산업단지였던 진안 도통리를 자주 찾지 않았을까? 임실군 관촌면 상월리·회봉리,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백운면 반송리에서 후기청자와 분청사기가 함께 섞여있는데, 모두 호남정맥 마치를 넘던 내륙교통로와 관련이 깊은 도요지들이다. 1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진안 도통리를 떠났던 장인집단이 고려 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동진강 하구 부안군 계화면 염창산 부근에 가야포가 있다. 삼국시대 때 국제 교역항으로 운봉가야 및 장수가야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서해의 거점포구로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포까지 가려면 대부분 호남정맥 가는정이를 이용했다. 호남정맥 구절재도 동진강과 섬진강유역을 곧장 이어주던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던 큰 고갯길이다. 고려시대 부안 일대에서 청자문화를 꽃피웠던 장인집단이 호남정맥 가는정이, 구절재를 넘어 임실군과 순창군, 남원시 일대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죽계리 도요지와 순창군 인계면 심초리, 동계면 어치리 도요지가 이를 방증해 준다.
 
원통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임실 학정리 도요지는 상품의 분청사기를 중심으로 순백자, 옹기가 폭 넓게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서쪽 구역에서 순백자와 옹기가 서로 붙은 상태로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본래 사구실마을로 불리던 학정마을은 도요지의 분포 범위가 동서길이 700m에 달한다. 전북지역 내 분청사기 도요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현지조사 때 학정마을 입구에서 가마의 벽체로 민가의 담장을 두른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조사단 모두가 깜짝 놀랐다. 임실 학정리 도요지를 중심으로 도요지가 밀집 분포된 것은 백자와 분청사기의 원료인 백토 혹은 백석의 산지와 관련이 깊다. 임실군의 백토와 장인들의 지혜가 하나로 합쳐져 명품의 순백자와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당시 남원에는 자기소가 한 곳 도기소가 두 곳에 있었다. 자기소는 남원부 북쪽의 아산리에 있었으며 중품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도기소는 남원부 서쪽의 초랑리와 동쪽의 은령리에 있었다”라고 기록213)되어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남원부 북쪽 아산리 자기소를 임실 학정리로 추론해 두고자 한다. 이제까지의 지표조사에서 조선 초 분청사기가 채집된 도요지는 임실군을 중심으로 남원시, 순창군, 진안군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폭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남원부에 속한 지역 중 지정학적으로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이다.
 
金宗直이 지은 아버지 金淑滋(1389~1456)의 行狀을 통해 임실 학정리에서 생산된 도자기의 질을 유추214)해 볼 수 있다.
 
고령에서 해마다 白沙器를 바쳤는데 공인工人의 솜씨가 매우 거칠어서 이지러지고 흠집 난 그릇이 많아서 수령이 詰責을 받았다. 그런데 선공(김숙자)이 그 곳에 가서는 공인을 불러서 이르기를, “옛날에 舜 임금은 河濱에서 질그릇을 만들었으므로, 胡公을 器用에 이롭다 하여 陳에 封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祖孫이 대대로 그 業을 지켜왔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거칠단 말이냐. 너희들의 처자는 모두 떡[餠餌] 만들 줄 알 것이니, 篩를 여러 번 사용하면 쌀가루가 정결해지고 오래도록 문지르면 결이 매끄러워지는데, 그 용공用工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라고 하였다. 마침내 아홉 번 체질하는 법을 가르친 결과, 그릇의 정치하고 선결하기가 廣州나 南原의 것보다 우월해졌다. 이에 앞서서는 그릇을 進獻할 적마다 광주와 남원의 공인은 상을 받고, 고령현의 공인은 흔히 죄를 받았는데, 지금은 고령현의 공인은 상을 받고, 광주와 남원의 공인은 도리어 견책을 받음으로써, 지금까지 선공의 은택에 힘입고 있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 남원과 광주, 고령 등 세 지역에서 최상급의 분청사기를 나라에 진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숙자가 고령현감으로 있으면서 도자기를 정교하게 만들도록 하여 광주, 남원에서 만든 것보다 더 좋아졌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고령의 도자기가 비교할 만한 훌륭한 대상으로 광주와 남원에서 만들어진 것을 언급하고 있다. 당시에 남원에서 만들었던 도자기가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과 달리 上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도자기를 바칠 때마다 남원의 사기 장인들이 상을 받았다고 하는 것에서도 뒷받침해 준다.
 
그러다가 임실 구담 도요지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는다. 아직은 임실군 도요지를 대상으로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 이유를 단정할 수 없지만 정유재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 정유재란 때 분청사기를 만들던 최고의 도공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이 높다. 당시 최고의 도공으로 알려진 심당길, 이삼평 등 50여 명의 도공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 무렵 상품의 분청사기를 굽던 삼계면 학정리 도요지도 급기야 가마터의 문을 닫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남원부 읍지 『龍城誌』215)에는 “예전에 砂器店이 阿山坊에 있었고 여기에서 役을 담당하였는데 거듭 흉년을 만나 점점 도망하고 몇 사람밖에 남지 않아 역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한꺼번에 도주하였다고 하였다. 1689~1690년에 남원부사를 지냈던 呂翼齊가 상급 관청의 책망을 두려워하여 여러 방에 그 역을 나누었고, 방의 책임자들은 죄를 면하고자 함께 모아서 납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였어도 이것이 規例가 되었으며, 남원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기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경종 2년(1722)에 남원부사를 지냈던 李顯章은 白骨徵布의 폐해가 남원에서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고 하였다. 100여 년 전부터 사기장들이 사옹원의 匠人案216)에 올랐는데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수 없어 남원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힘을 합하여 身布를 바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기 장인들의 나이를 계산해보니 대부분 100살이 넘었으니 장인 안에서 삭제하여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어떠한지 아뢰었다. 여기서 사옹원의 장인 안에 이름을 올렸는데 도망한 장인들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도공들로 추정된다.
 
다른 기록을 통해서도 남원부 장인들이 당시에 겪었던 고통을 살필 수 있다. 崔昌大(1669~1720)는 1698년에 전라도 어사로 나갔었는데 남원에 이르렀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따르면 “李善이라는 자가 5대조인 李春京 때부터 대대로 尙衣院의 세금을 내고 있는 억울한 사정과 함께 남원현 아산면에 사기점이 있었는데 폐허가 된지 오래인데도 사옹원의 稅布로 고통스러워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남원부 아산면 사기점의 도공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사기점이 문을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옹원의 세포가 100여 동안 부과되어 고통이 심했다는 것이다.
 
한편 영조 원년(1725) 蔡彭胤이 사옹원 소속의 남원 사기장인 22명에 대해 사옹원 提調의 뜻을 아뢰었다. 사옹원의 御器匠人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니 도망하는 일이 있으면 사옹원의 闕文에 따라 그 수를 다시 채우는 것이 관례라고 하였다. 또한 지난 임인년(1722)에 남원부에서 도망한 자들을 대신하여 채우라하였고 3년 동안 폐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하니 지금 전라감영을 통해 혁파해 달라 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사기 장인을 그대로 두게 해달라고 하였고 영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결국 남원부에서는 사옹원에 소속된 22명의 사기장인의 계속해서 역을 부담해야만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아무튼 임실 구담 북쪽 구역 도요지가 갑자기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그 이후 한 세기 동안 공백기를 거친 뒤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남쪽 구역 가마터가 다시 문을 열었던 것 같다. 임실군 모든 지역에서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도요지가 조선 후기 백자를 생산하던 도요지들이다. 조선 초 삼계면 학정리에서 상품의 분청사기를 만들었는데, 정유재란 때 최고의 도공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그 맥이 갑자기 끊겼다가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후기 백자의 보고로 다시 임실군의 도자문화가 융성하였다. 아직은 지표조사 자료만으로 도자문화를 했기 때문에 향후 임실군 도자문화의 실체와 그 역사성을 규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절실히 요망된다.
 

 
206) 오월(907-978년)은 중국 오대십국 시대 10국 중 하나로 당나라 절도사 錢鏐가 현재의 절강성 항주를 중심으로 저장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이다. 중국 청자의 본향으로도 유명하다.
207) 중국 절강성 월주 지방에서 운영되던 가마로 기원전인 진나라 때부터 북송시대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청자를 생산했다. 당나라 말 5대에는 항주를 거점으로 하는 오월 錢氏의 越州余姚窯에서 비색 청자를 구웠다. 우리나라의 청자 발생 시점에 제작기술을 전해준 가마로 알려져 있다.
208) 호남평야의 심장부인 김제·만경평야를 달리 ‘金萬平野’라고 부르는데, ‘새만금’은 ‘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이다. 오래 전부터 기름진 땅으로 유명한 만경·금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다.
209) 후백제 국사이자 도선의 제자인 경보가 921년 중국 유학을 마치고 임피 포구로 귀국하였는데, 만경강하구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신창마을에 있었던 신창진이 임피 포구로 추정된다.
210) 조선 영조 때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신경준에 의해 편찬된 전통지리서이다. 우리나라 산줄기의 흐름, 산의 갈래, 산의 위치를 山自分水嶺의 기본 원리에 바탕을 두고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해 놓았다. 白頭大幹을 중심으로 長白正幹, 錦南正整, 湖南正脈, 錦南湖南正脈 등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15개로 분류하였다. 1900년대 초 우리 곁을 떠났다가 1980년 서울 인사동 고서방에서 산악인 이우형이 조선광문회에서 발간한 영인본을 발견해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211) 다시 말해 해증이들 강주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일정한 간격으로 아주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지방의 호족세력보다 국가차원에서 조성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임실군과 진안군에 밀집 분포된 160여 개소의 도요지 중 전주에서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인 이점도 빼놓을 수 없다.
212) 정읍 고부구읍성에서 출토된 자기류 중 해무리굽으로 그 색조가 녹갈색과 황갈색을 띠고 있는 청자류도 모두 중국제 청자로 분류하였다.
213) 『世宗實錄』 「地理志」 全羅道 南原都護府 “磁器所一 在府北阿山里 品中 陶器所二 一在府西草狼里 一在府東銀嶺里”
214) 이문현, 2015, 「조선시대의 砂器匠人」, 『雲水情談』, 임실문화원 참조.
215) 房斗天이 편한 전라도 남원의 지지로서‚ 포함된 시기는 1701년(숙종 27년) 柳龜徵이 到任했다는 기록이 下限이다. 저본은 1676년(숙종 2) 『東國輿地勝覽』의 新增 명령이 내려졌을 때에 李燾‚ 崔與天이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책 끝의 補遺에는 1708년(숙종 34)의 기사가 실려 있고‚ 南原復號事蹟은 1752년(영조 28)에 쓴 것임에서 보아 이는 『龍城誌』가 처음 만들어진 뒤 다시 발간하면서 첨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6)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全羅道谷城縣司饔院匠人壬午式改都案』이라는 문서가 남아 있다. 전라도 谷城縣의 司饔院 소속 匠人들의 명단을 적은 책으로, 제1책은 壬午式(1882년)이고 제2책은 己卯式(1879년)으로서 제2책이 시기적으로 3년 앞선다. 임오식의 표지에는 ‘임오년 3월 15일에 작성하여 1책은 본원에 두고 1책을 20일에 제급한다.’ 는 내용이 적혀 있다. 명단의 기재 양식은 두 책이 동일하다. 먼저 이름을 적고 抄定된 연도‚ 나이‚ 아버지의 이름‚ 거주지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인원수는 두 책 모두 32명으로서 이름과 나이 등 모든 내용이 변화 없이 똑같지만 말미의 手決은 다른 사람이다. 같은 사옹원 장인의 改都案으로 규장각 도서에 강원도 原州牧의 것과 경상도 安東府의 것이 남아 있는데, 남원부의 사옹원 장인들도 이러한 문서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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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