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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정자 (2013)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2024.01.06. 12:57 (2018.07.16. 02:38)

1. 광제정(光霽亭) - 삼계면 세심리

 
광제정은 연산군 때 매당(梅堂) 양돈(楊墩, 1461∼1512)이 지은 정자이다. 원래는 삼계면 후천리 광제마을에 있었으나, 현 건물은 양돈의 후손인 양성모가 1871년에 세심리로 이건하였다. 광제(光霽)는 양돈의 호이다.
목   차
[숨기기]
광제정은 연산군 때 매당(梅堂) 양돈(楊墩, 1461∼1512)이 지은 정자이다. 원래는 삼계면 후천리 광제마을에 있었으나, 현 건물은 양돈의 후손인 양성모가 1871년에 세심리로 이건하였다. 광제(光霽)는 양돈의 호이다.
 
양돈은 학문과 덕행이 높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과 교류가 많았다. 남효원 등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기도 하였으나,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구미의 서쪽 강변인 산인동에서 고기를 낚으며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냈다. 그는 중종 2년(1507)에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다. 양돈이 세상을 떠난 뒤 사림들에 의해 정조 12년(1788) 아계사(阿溪祠)가 건립되어 그의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기도 하였다.
 
매당 양돈이 정자의 이름을 광제(光霽)라 한 것은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날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황정견이 송대의 사상가인 주돈이를 평할 때 "마음이 넓고 쾌활하기가 맑은 날의 바람과 비온 후 달과 같다(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라고 하여 주돈이의 인품이 광풍제월과 같다고 하였다. 광풍제월은 비갠 뒤 아름다운 경치처럼 혼탁한 세상에 물들지 않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광제정은 3단 계단식 축대 위에 건축되었고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정자 한가운데 온돌방인 환도실(環堵室)이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으며 한 가운데 계단식 통로가 있다. 광제정에는 장성의 하서 김인후(1510-1560)선생이 지은 광제정기(光霽亭記), 노사 기정진과 전라 관찰사 이호준 선생이 지은 광제정중건기(光霽亭重建記)를 비롯해서 하서 김인후와 그의 9세손인 신호 김록휴 그리고 군수 이병석, 후계 노익원, 이병섭 등이 시판 등 1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중 ‘매당’이라는 현판은 광제정중건기 내용을 통해서 볼 때 매당 양돈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정진의 중건기에는 광제정을 옮겨 지은 내력이 적혀 있다. 즉 양돈의 후손이 기정진을 찾아와서 기문을 부탁하였는데, ‘땅이 바뀌었는데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일이 구관(舊貫)을 벗어났다고 하지만, 옛터 임학(林壑)에서 사용하던 광제정(光霽亭)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양보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기정진도 처음에는 여기에 대해 의아해 하다가 곰곰이 생각해보고서 말하기를 ‘이 정자가 이름을 얻은 까닭을 추구해보면, 땅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만약 땅 때문이라면 이 땅에 광풍제월정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어떤 사람이 도서(圖書:주렴계가 지은 태극도설과 통서를 말함)의 미진한 말뜻에 대해서 유념(留念)했다면 어느 땅인가를 막론하고 광제(光霽)의 주인이 되는 것에는 무방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한 정자가 옮겨가고 이름이 따라가는데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실제 물건이 있는 장소에 이름이 반드시 따라가는 것이니 이름을 양보하고 안 하고를 뭐 논하겠는가. 하서선생이 쓴 옛 제영시(題咏詩)가 이미 새 현판에 새겨져있는데 어찌 다른 문자(文字)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정자를 옮겨짓고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치밀하게 묘사하여 이 지역 사림들과 후손들이 정자에 대해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려주는 정자이다. 현재 이 정자는 1990년 6월 30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3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1. 1. 光霽亭記

梅堂隔世想餘音 亭在山高與水深
雨歇芳郊淸潤色 烟消靜夜見明心
三盃酒裏看天地 一局棋中送古今
鞍馬昔年秋峽晩 可憐奔走失登臨
河西 金麟厚
 
광제정기
 
매당(梅堂)과 세대는 다르나 여운이 상상이 되니, 梅堂隔世想餘音
정자는 산이 높고 물이 깊은 곳에 지어져있었노라. 亭在山高與水深
비가 개이자 풋풋한 교외에는 윤색(潤色)한 듯 깨끗하고, 雨歇芳郊淸潤色
연무가 걷히자 고요한 밤인데도 명심(明心)이 보이더라. 烟消靜夜見明心
세 잔의 술잔 속에서 천지(天地)를 살펴보고, 三盃酒裏看天地
한 판 장기를 두면서 고금(古今)을 보냈노라. 一局棋中送古今
옛적 말을 타고 늦가을에 골짜기 갔었을 때, 鞍馬昔年秋峽晩
아쉽게도 바쁘게 가느라 오르지 못했노라. 可憐奔走失登臨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2. 2.

亭新名舊續前音 移在水源淸且深
風流無定夷猶地 誠意終成肯搆心
取近松杉偏感古 輸奇泉石却圖今
吾祖昔年留墨蹟 悠然興慕擬登臨
莘湖 金祿休【河西九世孫】
 
새 정자에 옛 편액으로 전인(前人)의 뜻을 이었으니, 亭新名舊續前音
물의 근원이 맑기도 하고 또 깊은 곳에 옮겨지었네. 移在水源淸且深
풍류(風流)는 일정한 곳 없으니 배회할만한 지역이고, 風流無定夷猶地
성의(誠意)로 낙성을 마치니 선대 이으려는 마음이네. 誠意終成肯搆心
송삼(松杉)으로 지었으니 유독 옛 감회가 느껴지는데, 取近松杉偏感古
천석(泉石)으로 꾸몄으니 도리어 지금을 생각해서일까. 輸奇泉石却圖今
우리 선조께서 옛적에 묵적(墨蹟)를 남겨두었으니, 吾祖昔年留墨蹟
유연(悠然)히 사모하는 마음 일어나 오르고 싶었노라. 悠然興慕擬登臨
 
신호(莘湖) 김녹휴(金祿休)【하서(河西) 구세손(九世孫)】
 
 
 

3. 3.

峨洋何必要知音 晩向林亭托契深
半夜好風收雨脚 一天晴月滿江心
煙橫小店分朝暮 山帶輕嵐閱古今
十里松楸長在眼 不堪扶杖獨登臨
沙村 張經世
 
아아양양하니 뭐 꼭 지음(知音)해줄 것 바랠까, 峨洋何必要知音
저물녘 수풀 정자를 향해 마음을 깊이 맡기노라. 晩向林亭托契深
밤중에 좋은 바람 부니 빗줄기가 걷혀서이고, 半夜好風收雨脚
하늘 쾌청하고 달이 뜨니 강물이 가득차서라네. 一天晴月滿江心
작은 점사에 비낀 안개는 아침과 저녁을 분별하고, 煙橫小店分朝暮
엷은 남기(嵐氣) 낀 산은 고금의 풍상을 겪었더라. 山帶輕嵐閱古今
십리에 송추(松楸)가 아득히 눈에 들어오는데, 十里松楸長在眼
지팡이도 짚지 아니한 채 혼자서 올라갔노라. 不堪扶杖獨登臨
 
사촌(沙村) 장경세(張經世)
 
 
 

4. 4. 光霽亭重建記

光霽故上庠梅堂楊公諱墩亭號也 謹按
其遺事 公蚤有俊聲 時値蔑貞 隱淪以
終 故事業無耀人者 然其堂以梅 其亭以
光霽 則雅尙不苟 可驗其一端矣 至使秋
江高士賀榮叔以取端 河西大賢想餘音
於隔世 則不賢而能之乎 抑又聞亭旣墟
而其傍有村 出洞而交路 其上有店 至今
皆以光霽亭爲名 夫以一人之棲遯 能變
其地名 嚴陵瀨之外 未聞焉 非賢有德者
不能也 歲辛未 公之後孫 重建於坊內甘
隱山下 距舊墟十里而近 亭旣成 或有以
地改名仍 事出舊貫之外 古墟林壑 不肯
讓我以名 則若之何 正鎭初亦聽瑩於此
思之不然矣 原此亭之得名 地歟人歟 若
以其地 則濂翁故宅 先有光風霽月亭 此
地不應更有此亭矣 今有一人 苟能留心
於圖書未盡之言意 不論某地 不妨是光
霽主人 曩也公旣主人於此亭矣 托衣履
於甘隱三百餘年 亭之徙以從之 誰云不
可 實之所在 名必從之 讓不讓奚論 河西
舊題咏 旣有新板 安用他文字爲 但其重
建顚末 不可無記云爾 是歲南至前五日
幸州 奇正鎭 記
 
광제정중건기(光霽亭重建記)
 
광제(光霽)는 고(故) 상상(上庠) 매당(梅堂) 양공(楊公) 휘(諱) 돈(墩)의 정자이름이다. 삼가 그 유사(遺事)를 살펴보니 공(公)은 일찍이 뛰어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 연산군(燕山君) 때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은거(隱居)해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 때문에 드러낼만한 사업(事業)도 없었다. 그러나 당(堂)을 ‘매당(梅堂)’이라 하고, 정(亭)을 ‘광제정(光霽亭)’이라 하였으니 그의 고상한 아취(雅趣)만은 구차하지 않았다는 한 단서는 징험할 수 있다. 심지어 추강(秋江)같은 고상한 선비도 ‘영숙(榮叔)의 단아(端雅)함은 취할만하다.’고 치하하였고, 하서(河西)같은 대현(大賢)도 ‘시대는 다르지만 여음(餘音)을 상상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공이 어질지 않았다면 이렇게 칭찬을 했겠는가.
또 들으니 정자는 이미 허물어졌지만 그 옆에는 있는 마을입구를 나와서 교차하는 길이 있고 그 위에 점사(店舍)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모두 그곳을 광제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저렇듯 한 사람이 은거(隱居)해 살았다고 해서 그 지명(地名)이 바꿔서 불러지는 경우는 엄릉뢰(嚴陵瀨) 이외에 다른 이름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점사(店舍)를 ‘광제정’이라 불러질 수 없는 일이다.
신미(辛未)년 공의 후손이 방(坊) 구역 내의 감은산(甘隱山) 아래에, 옛 터와의 10 리 가까이에 정자를 중건(重建)했다. 정자가 이미 낙성(落成)되자, 혹자가 ‘땅이 바뀌었는데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일이 구관(舊貫)을 벗어났다고 하지만, 옛터 임학(林壑)에서 사용하던 광제정(光霽亭)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양보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나 정진(正鎭)도 처음에는 또한 여기에 대해 의심을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이 정자가 이름을 얻은 까닭을 추구해보면, 땅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만약 땅 때문이라면 염옹(濂翁)의 고택(故宅)에 먼저 광풍제월정(光風霽月亭)이 있으니 이 땅에 이 광풍제월정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어떤 사람이 도서(圖書)의 미진한 말뜻에 대해서 유념(留念)했다면 어느 땅인가를 막론하고 광제(光霽)의 주인(主人)이 되는 것에는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접때 공은 이미 이 정자에 주인이셨고 의리(衣履: 무덤)를 감은산(甘隱山)에 모신지 300여년이 되었다. 정자가 옮겨가고 이름이 따라가는데 누가 불가(不可)하다 하겠는가. 실제 물건이 있은 장소에 이름이 반드시 따라가는 것이니 이름을 양보하고 안 하고를 뭐 논하겠는가. 하서(河西)선생이 쓴 옛 제영시(題咏詩)가 이미 새 현판에 새겨져있는데 어찌 다른 문자(文字)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그 중건(重建)하게 된 전말(顚末)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서 기문(記文)을 적는다.
 
하지(夏至) 5일 전에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은 기(記)한다.
 
 
 

5. 5. 光霽亭重建記

光霽亭盖梅堂楊公之所構者也 公之雲仍
世襲經學 薰沐於我先祖陶庵先生 而講論
世德 故雖以不佞 仰公之風韻者雅矣 公孝友根
天 文章盖世 爲當時諸賢之所稱道 戊午避士
禍 隱居于南原甘隱山之下 以一片■心 連徵不
就 遊息於其間 而遂終焉 於是因士林刱立阿
溪書院 以爲躋享矣 及其毁撤 後孫嗟惜不
已 重修斯亭 以寓追慕之意 委訪講世
仍請亭記 嗚呼 余以菲才蔑學 按察南
藩 聞其言嘉其誠 又念先誼 不勝愴感 院
雖已毁 亭旣更新 從自以往 多士景仰薖數
之所 諸孫復覩杖屨之儀 豈不休哉 忘其蕪
拙 不敢終辭 謹記其事如右云爾
崇禎紀元後四壬 申季春 觀察使三州李鎬俊
 
광제정중건기(光霽亭重建記)
 
광제정(光霽亭)은 대개 매당(梅堂) 양공(楊公)께서 지은 정자이다. 그리고 공의 후손들이 대대로 익히는 경학(經學)은, 우리 선조(先祖)이신 도암선생(陶庵先生)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아서 세덕(世德)으로 강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재주 없는 내가 공의 평소 풍치를 앙모하게 되었다. 공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천부적으로 타고 나셨고,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한 시대를 휩쓸었으니 당시 제현(諸賢)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무오(戊午)년 사화(士禍)를 피하여 남원(南原) 감은산(甘隱山) 아래에 은거(隱居)하게 되었다. 일편단심으로 연이어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노닐고 휴식하면서 지내다가 마침내 생을 마쳤다. 이에 사림(士林)들이 아계서원(阿溪書院)을 창립(刱立)하여 제향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서원이 훼철(毁撤)되는데 미쳐서는 후손들의 안타까워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이 정자를 중수(重修)하여 추모(追慕)하는 마음을 붙이게 되었다는 사실(事實)을,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그리고 이어 정자의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아아, 나는 짧은 재주로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남쪽지방을 안찰(按察)할 때에 그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성의에 대해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또 선대와의 교의(交誼)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원은 비록 이미 훼철되었지만, 정자는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지어졌다. 지금부터는 많은 선비가 선생이 은거하던 장소를 경앙할 것이다. 그리고 후손들은 다시 지팡이 짚고 나막신을 착용한 선생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거친 글 솜씨를 망각한 채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중건하게 된 사실을 위와 같이 기록했을 뿐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4번째 임신(壬申)년 계춘(季春)에 관찰사(觀察使) 삼주(三州) 이호준(李鎬俊).
 
 

6. 6.

高山流水有遺音 知者知其趣味深
岸柳風和觀物性 庭梧月上見天心
前人述矣言猶昨 君子居之號至今
勉着眞工無極圈 靜時可對動時臨
後溪 盧翼遠
 
고산(高山)과 유수(流水)에 남긴 자취 있으니, 高山流水有遺音
지자(知者)는 취미(趣味)가 깊다는 알 것이네. 知者知其趣味深
언덕 버드나무에 훈풍부니 물성(物性)을 살피고, 岸柳風和觀物性
뜰 오동나무에 달이 뜨니 천심(天心)이 보이더라. 庭梧月上見天心
전인(前人)께서 남기신 말씀 어제 같은데, 前人述矣言猶昨
군자가 거처한 정자는 지금까지 불러지네. 君子居之號至今
힘써 참 공부하면 무극(無極)에 이르나니, 勉着眞工無極圈
정(靜)할 때 뵌 듯 동(動)할 때 오는 것 같네. 靜時可對動時臨
 
후계(後溪) 노익원(盧翼遠)
 
 

7. 7.

山重水抱自淸音 亭在其間一洞深
高士昔年休隱地 後仍斯日守成心
詩篇相賀分多少 盃酒爭迎論古今
聊想花春名勝會 惟吾恨未共登臨
知府 李秉奭 書
 
첩첩한 산을 물이 안고 흘러 저절로 맑은데, 山重水抱自淸音
정자가 그 곳에 있어 한 골짜기입구가 깊네. 亭在其間一洞深
고상한 선비가 옛적 휴은(休隱)한 곳이고, 高士昔年休隱地
후손이 오늘날까지 수성(守成)하였노라. 後仍斯日守成心
시편(詩篇)으로 서로 하례하며 다소(多少)를 나누고, 詩篇相賀分多少
배주(盃酒)로써 서로 맞이하여 고금(古今)을 논했네. 盃酒爭迎論古今
에오라지 꽃피는 봄 명승지에 모였을 것인데, 聊想花春名勝會
오직 나만 함께 올라가지 못해서 아쉬웠노라. 惟吾恨未共登臨
 
지부(知府) 이병석(李秉奭) 서(書).
 
 

8. 8.

梅堂雅操少知音 講學眞工義理深
風月襟懷淸者道 江山詩債得之心
濂溪圖極先通古 曲水流觴後視今
不肖孱孫猶肯搆 遊人自是喜登臨
十三世孫 錫珍
 
매당(梅堂)의 아조(雅操)는 알아주는 이 적지만, 梅堂雅操少知音
강학(講學)하는 참 공부는 의리(義理)가 깊었네. 講學眞工義理深
풍월(風月)하는 감회(感懷)는 말이 깨끗하고, 風月襟懷淸者道
강산(江山)의 시채(詩債)는 마음에 터득했네. 江山詩債得之心
염계의 태극도설은 먼저 고금(古今)을 통한 것이고, 濂溪圖極先通古
곡수에 술잔 띄우니 뒤에 금석(今昔)을 보인 것이네. 曲水流觴後視今
불초한 잔손(孱孫)이 오히려 정자 중건했으니, 不肖孱孫猶肯搆
노니는 이는 이제부터 기쁘게 오를 것이네. 遊人自是喜登臨
 
13세손 석진(錫珍)
 
 

9. 9.

塤床唱和自知音 風月名亭境更深
遯世高標龜曳尾 住湖閒趣鷺窺心
分符晩學空懷古 肯搆賢仍若待今
華額重懸人景仰 依然道貌席間臨
監務 安東 金啓鎭 書
 
형제간에 화목했다는 것은 본래 알았었는데, 塤床唱和自知音
광월(光風)과 명정(名亭)은 지역도 아늑하네. 風月名亭境更深
은거(隱居)하는 높은 의표는 거북이가 꼬리 끄는 듯, 遯世高標龜曳尾
호남에서 한가한 아취는 해오라기가 마음을 엿본 듯. 住湖閒趣鷺窺心
만학하라는 분부를 받고 공연스레 옛날 회고했겠지, 分符晩學空懷古
어진후손이 긍구(肯搆)하니 오늘을 기다린 것일까. 肯搆賢仍若待今
화려한 편액을 다시 내걸고 사람들이 우러르니, 華額重懸人景仰
의연히 도인의 모습으로 자리에 오시는 듯하네. 依然道貌席間臨
 
감무(監務) 안동(安東) 김계진(金啓鎭) 서(書).
 
 

10. 10.

亭之移建襲先音 綿力因循歲已深
俎豆遽當中撤日 羹墻莫寓遠追心
肆吾後裔詢謀始 命彼群工告訖今
風月無邊梧柳翠 庶幾道貌儼然臨
十三世孫 錫源
 
정자를 이건(移建)하라는 선대의 뜻을 받고, 亭之移建襲先音
재력이 없어 미루다가 한 해가 벌써 지났네. 綿力因循歲已深
조두(俎豆)를 갑자기 훼철하는 날을 당하자, 俎豆遽當中撤日
갱장(羹墻)하여 추모하는 마음 붙일 곳 없네, 羹墻莫寓遠追心
이에 우리후예들 짓기를 모의하였으니, 肆吾後裔詢謀始
저 목수들에게 명하여 오늘에 완공했네. 命彼群工告訖今
끝없는 풍월(風月)에 오동 버들 푸르니, 風月無邊梧柳翠
도인의 모습으로 의젓하게 오시옵소서. 庶幾道貌儼然臨
 
13세손 석원(錫源)
 
 
 

11. 11.

昔我先祖梅堂先生 當群匹㭬喪之際 絶
意騫騰 歸釣湖山之陽 築亭菉豆梁
上 深契周茂叔風月之趣 揭扁光霽 玩
太極之動靜 探道器之顯微 覃思力
踐 哲保以終 後經兵燹 亭遂廢 子孫屢
擬復繕 力單未果 及先生院宇見輟 羹
墻之慕 莫之追伸 乃相與謀曰 院中舊用
有略爾存者 當重營先亭 而舊墟稍
間 功役倍劇 此甘隱一麓 吾祖杖屨
于玆 託衣履于玆 且也泉石之勝 名於山西
盍徙而從之 歲辛未之孟陬 爰命梓人
寫紗山先楸 五閱月而功告訖 原韻 軼
而不傳 惟金河西張沙村二詩 見於龍
城志【沙村詩又載宋俛仰續集 以爲俛仰之作 今姑從龍城志】幷重建後
諸詩揭之板 亦敢仰賡焉
 
先亭百世永垂音 移建于玆度義深
杖屨遺墟重復意 杉松陾地近從心
無邊光景還如舊 有道形容庶覩今
萬樹繁花佳節會 吾宗情話好登臨
十三世孫 相一 改 錫謨
 
옛적 우리 선조(先祖)이신 매당선생(梅堂先生)께서는 붕당(朋黨)으로 희생을 겪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당하였다. 그래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호산(湖山) 남쪽에 돌아가서 낚시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녹두량(菉豆梁) 위에 정자를 건립하고 주무숙(周茂叔)의 풍월(風月)하는 아취(雅趣)가 마음에 들어서 ‘광제(光霽)’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태극(太極)이 동(動)하고 정(靜)하는 것을 연구하고, 도기(道器)가 현(顯)하고 미(微)하는 것을 탐구하되, 깊이 생각하고 힘써 실천에 옮겼으며 현명하고 사려 깊게 몸을 보존하여 생을 마쳤다.
그 이후 병란[兵燹]을 겪은 나머지 마침내 정자는 폐허되었다. 자손이 여러 번 복구하려고 했지만 재력이 없어 복구하지 못했다. 이어 선생의 원우(院宇)가 철거당하게 되자, 갱장(羹墻)하는 마음을 펼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서원에 옛적 쓰고 남은 약간의 목재를 가지고 마땅히 선정(先亭)을 중건해야 한다. 그러나 옛터가 조금 떨어져있어서 공사를 두 배로 강행해야 할 상황이다. 이곳 감은산(甘隱山) 한 기슭은 우리 선조께서 머물렀던 곳이고 또 무덤이 있는 곳이다. 게다가 천석(泉石)의 아름다움도 중국의 산서(山西) 보다 명성이 나 있으니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신미(辛未)년 5월에 재인(梓人:목수)을 명하여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산과 선산(先山)을 비단에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5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다. 원운(原韻)은 이리저리 옮겨 보관하는 과정에서,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김하서(金河西)·장사촌(張沙村) 시(詩) 2편만이 용성지(龍城志)에 보인다.【사촌(沙村)의 시(詩)는 또 송면앙(宋俛仰)의 속집(續集)에도 실려 있는데 면앙(俛仰)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선 용성지(龍城志)를 따른다.】아울러 중건(重建)한 뒤에 지은 여러 편 시(詩)도 현판에 새겨서 내걸었다. 그리고 또 감히 우러러 화답한다.
 
선대의 정자 백세토록 유음(遺音)을 남겼으니, 先亭百世永垂音
이곳에 이건(移建)하여 탁의(度義)가 심오하네. 移建于玆度義深
장구(杖屨) 모신 유허지에 중건할 것을 결의하고, 杖屨遺墟重復意
삼나무·소나무를 북돋아서 청청하게 자라게 했네. 杉松陾地近從心
끝없이 펼쳐진 광경은 도리어 옛 그대로이고, 無邊光景還如舊
도가 있는 모습은 거의 지금 뵙는 것 같구려. 有道形容庶覩今
온갖 수목 번화한 꽃 가절(佳節)에 모였으니, 萬樹繁花佳節會
우리 종씨들 올라와서 다정한 담화가 좋구려. 吾宗情話好登臨
 
13세손 상일(相一: 錫珍으로 개명).
 
 

12. 12. 光霽亭重修記

先賢之風詠 後學之慕仰 是天理之
油然也 亭榭之興替 基址之遷幻 是氣
數之所使也 氣或有變 而理不常泯
則是亭之重建也 因舊號而遷新址
者 果無害於先賢之風詠後學之慕
仰矣 惟我先祖梅堂先生 以根天之孝
友 需世之經學 早登太學 將期大用
遭時戊己 絶意斯世 與伯兄龜巖先
生痛哭南下 于時同德者 惟秋江南
先生孝溫也 因以遯跡於淳昌龜尾村
前雁水灘上 散人洞中 漁釣忘世 連
徵不就 至今居人 尙稱兄弟巖者 卽
其遺址也 及其伯兄下世後 築室於南
原甘隱山下公之先考翰林公墓下 以
寓追慕之誠 而暇日風詠之意 搆小
亭於近地 盖取諸光風霽月 而揭
扁曰光霽亭 與一時諸賢 觴詠亭
上 盤桓自娛 公之下世後 亭榭頹圮 重
修無日 且後學營建俎豆之所於阿溪
祠 近於公之墓下矣 祠又遭掇 嗚呼氣
數其變易耶 天理其難諶耶 先生
風詠之意 後學於何處慕仰乎 乃
者數三雲仍 營建舊亭 而僉議皆
以爲 公之築室 旣出於追慕先山之意
則後之重建 莫如公墓之近地 且俎豆
之遺址 亦在於邇 則先生之氣像 尤於
是想矣 卜地於阿溪上流 瀟灑一亭 兀
然水石之上 光霽二字 因揭輪奐之額
霽月光風 復覩於是矣 此果氣有時
變易而理無時不著耶 若夫公之懿蹟
前賢之述備矣 亭之重建 記跋之文
詳矣 初非不肖之所敢容喙 而槪論
氣數所使隨時遷幻者以著天理之
不常泯者云爾
崇禎紀元後四壬申十月二十七日 十二世孫 馨河 謹記
 
 
광제정중수기(光霽亭重修記)
 
선현(先賢)께서 풍영(風詠)하신 것을 후학(後學)들이 앙모(仰慕)하는 것은, 이는 천리(天理)로써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정사(亭榭)가 흥폐(興廢)에 의하여 기지(基址)가 옮겨가는 것은, 이것은 기수(氣數)가 그렇게 하게 한 것이다. 기수는 혹 변하기도 하지만 천리(天理)는 떳떳하여 멸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정자를 새 터에 옮겨 중건(重建)하고 인하여 이름은 구호(舊號)대로 사용하였으니 결과적으로 선현께서 풍영하신 것을 후학들이 앙모한다는 것에 무해(無害)하게 된 것이다.
우리 선조(先祖)이신 매당선생(梅堂先生)께서는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는 천부적으로 타고 나셨다. 그리고 경학(經學)에 대해서는 세상에 쓰일만한 인재이셨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들어가 장차 크게 기용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무오·기묘년 사화(士禍)를 만나서 세상에 펼치려던 포부를 접게 되었다. 그래서 백형(伯兄) 구암(龜巖)과 함께 통곡을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당시에 동덕(同德)이신 분은 추강(秋江) 남효원선생(南孝溫先生)뿐이었다. 인하여 순창(淳昌) 구미촌(龜尾村)앞의 만수탄(萬水灘)위쪽 산인동(散人洞)에 자취를 감추고 물고기를 잡고 낚시질을 하면서 세상을 잊고 지냈다. 하지만 연이어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형제암(兄弟巖)’이라 부르는 곳이 바로 그 유허지[遺址]이다.
백형(伯兄)이 돌아가시게 되자, 남원(南原) 감은산(甘隱山)아래쪽으로, 공의 선고(先考)이신 한림공(翰林公)의 묘소아래에 실(室)을 지었다. 그리고 선고(先考)을 추모하여 정성을 폈다. 그리고 한가한 날 풍영(風詠)하려는 생각으로 작은 정자를, 근처의 땅에 지었으니 대개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편액을 ‘광제정(光霽亭)’이라 내걸고 당시 여러 제현(諸賢)들과 정자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으며 읊조리기도 하고 배회하며 스스로를 즐겼다. 공께서 하세(下世)하신 이후에 정사(亭榭)는 허물어졌다. 중수할 겨를이 없었던 차에, 또 후학(後學)들이 아계사(阿溪祠)에 조두(俎豆)를 모실 장소를 건립했다. 공의 묘소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아계사도 또 훼철(毁撤)되었다.
아아, 기수(氣數)가 변한 것인가. 천리(天理)는 믿기 어려운 것인가. 선생께서 풍영(風詠)하신 뜻을, 후학들이 어느 곳에서 앙모할 것인가. 이에 두세 명 후손들이 전에 있었던 곳에 정자를 중건하기로 했다. 또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집을 지은 것은 이미 선산(先山)을 추모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훗날 중건하는 장소로도 공의 묘소 근처만한 곳이 없다. 또 조두(俎豆)를 모셨던 아계사의 집터도 근처에 있으니 선생의 기상(氣像)을 이곳에서 더욱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집터를 아계사의 상류에 잡았다. 씻은 듯 깨끗한 정자가 물 좋고 돌 좋은 곳에 우뚝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인하여 ‘광제(光霽)’ 두 글자가,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정자에 내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제월(霽月)과 광풍(光風)을 이 정자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경우를 보고 과연 기수(氣數)는 때로 변역(變易)하지만 천리(天理)는 어느 때든 드러나지 않을 때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일까.
저 공의 아름다운 자취는 전현(前賢)들이 다 기술(記述)하였다. 또 정자를 중건할 때에 기문(記文)·발문(跋文)에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당초에 불초(不肖)한 내가 감히 기문(記文)을 쓸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수는 수시로 변환(變幻)하는 것이고, 천리는 떳떳해서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략 거론해서 말했을 뿐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後) 4번째 임신(壬申) 10월 27일, 12세손 형하(馨河)는 삼가 기(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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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