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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정자 (2013)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2024.01.06. 12:24 (2018.07.16. 02:38)

5. 담락정(湛樂亭) - 청웅면 남산리

 
담락정은 청웅면 남산리의 명교 마을에 위치해 있다. 면 소재지 농협에서 좌회전하여 너 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남산리가 나오고 다시 성석정을 지나 한참을 더 가면 명교마을이 있는데, 담락정(湛樂亭)은 명교마을 내에 있다.
목   차
[숨기기]
담락정은 청웅면 남산리의 명교 마을에 위치해 있다. 면 소재지 농협에서 좌회전하여 너 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남산리가 나오고 다시 성석정을 지나 한참을 더 가면 명교마을이 있는데, 담락정(湛樂亭)은 명교마을 내에 있다. 담락정은 팔작지붕에 겹치마를 두르고 정면3칸, 측면 1칸으로 상량문에는 경술년 갑신(甲申) 10월 을사(乙巳) 라고 적혀있어 경술년인 1910년 당시 이 지역에서 천석(千石)을 한 천안 전씨 전석기(全錫琦)가 세웠다. 주인인 전석기의 담락정기와 기우만이 쓴 담락정기, 전석만이 쓴 상량문 등 총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담이 무너져 없고, 시멘트 기와로 개량되었으며, 주련 4개와 은행나무 3그루가 담락정의 역사를 증명하여 주고 있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1. 1. 湛樂亭記

夫有實志者 不事表襮 而至其所至焉
行實事者 不假標榜 而爲所當爲焉 此其
章章明者也 雖然古之欲純一無息者 號齋
以誠 要惺惺其心者 揭軒以敬 此非故爲標題
也 顧名思義而躬行之道 固如是爾 今不肖
起數間亭 而以湛樂署之者非他焉 欲吾
兄弟繼述先業 而庶幾乎無忝也 何者
昔我先考雲農公 孝悌天植 晩年友愛
尤篤 與吾叔父恒同一室 起居飮食 動靜
呼吸 必相須而不容蹔離 彭城之大被 田眞
之紫荊 曠千載而一轍 人無間言 雖不肖無
狀 過庭差有自得者夙矣 而忽焉風樹之
感 靡逮涕蔌蔌沾臆 繼自今昆季 同處于
此亭 相愛之道 常慕先人所篤行而繩武 則
或可以免夫不孝之名 嗚呼兄弟一身爾 人之
四肢百體諸關節 何莫非一脈所貫通也 寸
指拇有傷 不成全體 兄弟相離而貳 則非
全人也 可不戒哉 若夫居亭取流峙之勝
而爲游賞之樂 則是第二義也 故洞府之
明媚 溪山之秀麗 與夫雲烟花卉 飛潛
動植之態狀 千萬登欄可眺已 今不必一
二云爾
歲壬子槐月下澣 全錫琦 識
 
담락정기(湛樂亭記)
 
대저 성실한 뜻이 있는 사람은 표방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그 지극한 바에만 이르며, 성실히 일을 행하는 사람은 거짓 표방(標榜)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바만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은 그 매우 분명하게 하려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옛날 순일(純一)하여 쉼이 없고자 하는 사람은 재(齋)에 ‘성(誠)’이라 호(號)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을 성성(惺惺)하게 하려는 사람은 헌(軒)에 ‘경(敬)’을 내걸기도 하니 이는 고의로 표제(標題)하려는 것이 아니라, 명(名)을 돌아보고 의(義)를 생각하여 몸소 실천하려는 도(道)가 진실로 이와 같아서였을 뿐이다.
지금 불초한 내가 두어 칸 정자를 건립하고 ‘담락(湛樂)’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형제가 선대의 가업을 계술(繼述)하여 부모를 욕됨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옛 우리 선고(先考) 운농공(雲農公)께서는 천부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셨던 분이다. 말년에 와서는 우애(友愛)가 더욱 돈독해져서 우리 숙부(叔父)와 항상 한 집에 동거하되, 기거(起居)·음식(飮食)·동정(動靜)·호흡(呼吸)을 꼭 함께 하시고 잠시도 서로 떠나 있지 않으셨다. 마치 팽성(彭城)의 대피(大被), 전진(田眞)의 자형화(紫荊花)같이 하기를, 천 년 전과 똑같이 하셨으나, 사람들이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비록 불초는 못났으나 아버지에게 조금 가르침 받은 것이 일찍이 있었는데 갑자기 풍수지감(風樹之感)을 당하자, 슬픈 눈물이 가슴을 적셨지만 이제 미쳐갈 수 없게 되었다. 이어 형제들과 이 정자에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우애하는 도(道)로써 항상 선인(先人)의 독실한 행적을 추모하고 그리고 뒤를 이어간다면 혹여 불효(不孝)했다는 이름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호라, 형제는 한 몸이다. 사람의 사지(四肢)와 백체(百體)의 관절(關節)은 어느 것인들 일맥(一脈)으로 관통(貫通)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 마디 엄지손가락이라도 상처가 있으면 온전한 몸이 될 수 없고, 형제가 서로 떠나서 다른 마음을 가진다면 온전한 사람이 아니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정자에 거처하면서 흐르는 물과 우뚝한 산의 경치를 찾아서 물에 놀고 산을 구경하는 낙(樂)은 두 번째 의(義)이다. 그러므로 동부(洞府)의 아리따움과 계산(溪山)의 수려함은 저 운연(雲煙)과 화훼(花卉), 날짐승과 물고기, 동물과 식물의 천태만상과 함께 난간에 올라가면 바라볼 수 있으니 지금 꼭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다.
 
임자(壬子) 괴월(槐月: 4월) 하한(下澣) 전석기(全錫琦)는 지(識)하노라.
 
 
 

2. 2. 上樑文

孝爲百行首 君子之事親 養致敬喪致哀
睦乃一家肥 聖人之敎民 弟宜恭兄宜友
 
莫匪彝性
實難踐行
 
仰念顯祖事天
繼感皇考樂地
 
三年居廬之墓枯苫飮坎 哀號徹泉
幾夜聯枕之床紫荊交蔕 鬱結成帳
 
維此玉田面
古稱椧橋頭
 
松柏老於封塋
花樹美於里衖
 
柳州寒食子厚豈忘先墓之思
太行白雲狄公遙想親舍之在
 
肆余不肖
旣不堪肯搆之責
敢何望塗雘之功
 
然而心搆此亭 已久經始營始
所以額扃其榜 莫若湛兮樂兮
 
如壎如箎
爰居爰處
 
蓮峯霜月願作一行雁而同歸
棣原春風好取雙飛鴒而共急
 
侍考墓於前案岵兮屺兮益切瞻望
陪祖靈於後屛假耶來耶恒若陟降
 
臨羹墻而寓慕
履霜露而悽心
 
燕以翼貽以謨實是先世之垂俗
幹其蠱繩其武豈非小子之微誠
 
鳳舞龍飛萃淑氣於洞府
牛眠馬(足+尊)占幽宅於福堂
 
日月牖子午針審方位而奠宅
山水屛丙丁石護墻垣而臨軒
 
取諸族於此中
侍阿兄於其上
 
類馮君之大小歌謠起於河西
願陳氏之季元圖繪傳於天下
 
聲聞九皐之鶴 石頭遙臨
靈伏千載之龜 溪心淡淨
 
乃歌短唱
以助修樑
 
兒郞偉抛樑東
斗滿山高聳碧空
蹈海先生何處去
有留明月到天中
 
兒郞偉抛樑西
白蓮斜月碧窓低
星菴夜寂鍾聲脫
一抹曇雲半架棲
 
兒郞偉抛樑北
伯夷高節立何特
玉虹倒掛瀑龍湫
六月靑山飛雪色
 
兒郞偉抛樑南
雲水風煙萃葛潭
腥市塵晴漁火睡
淡粧芝峀繞蒼嵐
 
兒郞偉抛樑上
玉臺縹渺列仙幌
靑溪道士問何歸
騎鶴千年留几杖
 
兒郞偉抛樑下
屋溜淙淙鳴畵榭
獻鉢胡僧禱福田
名山何處住精舍
 
伏願上樑之後 三奇呈祥 百靈降福 柱天礎地 撑萬歲而壽傳 肖子仁孫 嗣百歲而修戢
壬子菊秋上澣 不肖錫萬 稿
 
 
상량문(上樑文)
 
효(孝)는 백행(百行)의 으뜸이니 군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에 공경을 다하여 봉양하고 슬픔을 다하여 상을 치르며, 화목(和睦)은 한 집안을 살찌게 하니 성인이 백성을 교화할 때에 아우는 형을 공경하고 형은 아우와 우애하도록 했네. 누구나 타고난 품성을 갖고 있지 않음이 없으나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이네. 생각건대 현조(顯祖)께서는 하늘을 섬기셨고, 추념건대 황고(皇考)께서는 땅을 즐기셨네.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 이엉 깔고 웅덩이 물만 마시니 슬픈 울부짖음은 황천까지 들렸었는데, 며칠 밤 형제가 연침(聯枕)하며 화해하자, 자형화(紫荊花)가 다시 살아나니 울결한 마음이 풀렸었다.
이곳 옥전면(玉田面)은 옛적에 명교머리[椧橋頭]라 불렀으니, 송백(松柏: 친구)이 고향에서 늙었으며 화수(花樹: 종족)가 마을에서 화목했네. 유주자사(柳州刺使)로 재직하면서 자후(子厚)가 한식(寒食)에 어찌 선묘(先墓)께 추모하는 것 잊었겠는가, 태항산(太行山)에서 적공(狄公)은 백운(白雲)을 보고 아득히 부모님이 계신 곳을 생각했노라. 이에 나 불초는 이미 긍구(肯搆)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감히 어떻게 단청한 공노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애써 이 정자를 지으려고 이미 오래 동안 경영하였다. 그러므로 문에 편액을 내걸기를 형제끼리 화목하게 하고, 훈[壎]처럼 지(篪)처럼 이에 살고 이에 거처하였네. 연봉(蓮峯)에 서리 내리고 달이 뜨면 한 줄 기러기처럼 날아가길 바랐었고, 체원(棣原)에 봄바람불면 한 쌍 할미새가 날아와 다급히 알려서 좋았네. 어버이 묘소를 안산(案山)에 모셨으니 산에서 또는 민둥산에서 더욱 절실히 바라보았고, 조부모 영령을 병풍 뒤에 모셨으니 참으로 오시는가를 항상 오르내리는 듯이 하였네. 국그릇과 담장에 보인 듯 추모하고, 서리와 이슬을 밟은 듯 마음이 슬펐노라. 후손들에게 도모를 끼쳐주시니 이는 실로 선세(先世)께서 드리워주신 풍속이고, 아비의 가업 주관하여 뒤를 이었으니 어찌 소자(小子)의 작은 정성이 아니겠는가. 봉황이 춤추고 용이 날아오르는 상이니 숙기(淑氣)가 동부(洞府)에 모였고, 소가 잠자고 말이 쭈그리는 상이니 유택(幽宅)을 복당(福堂)에 잡았도다. 일월(日月)로써 북쪽 남쪽을 밝혔으니 지남침으로 방위를 살펴서 유택을 정했고, 산수(山水)로써 화재를 방어했으니 돌로 담장을 보호하여 추녀까지 임했도다. 제족(諸族)은 이곳 중앙에 모셨고 아형(阿兄)은 그 위쪽에 모셨으니, 대풍군(大憑君)·소풍군(小馮君)을 칭송하는 가요가 하서(河西)에서 들리는 것처럼, 진씨(陳氏)인 계(季)·원(元)이 그린 도회(圖繪)가 천하(天下)에 전해지길 바랐노라. 구고(九皐)에서 학의 울음소리 들리니 멀리 바윗돌 앞쯤 온 것 같은데 천년된 영귀(靈龜)가 엎드려 있으니 시냇물 수심이 깊고 정결해서이네. 이에 짧은 창가를 불러 상량 올리는 것을 돕노라.
 
어영차 들보를 동쪽에 던지니,
높이 두만산(斗滿山)이 창공에 우뚝 솟았네.
도해선생(蹈海先生)은 어느 곳으로 가셨는가,
명월(明月)에 머물렀다가 하늘에 도착했더라.
 
어영차 들보를 서쪽에 던지니,
백연(白蓮)에 달 지니 창 밑이 푸르네.
고요한 밤 칠성암의 가느다란 종소리는,
일말 흐린 구름시렁 중턱에 깃들더라.
 
어영차 들보를 북쪽에 던지니,
백이(伯夷)의 높은 절개는 어찌 저리 우뚝할까.
옥무지개가 용추(龍湫)폭포에 거꾸로 걸렸으니,
6월 푸른 산에서 설색(雪色)이 날리는 것 같네.
 
어영차 들보를 남쪽에 던지니,
운수(雲水)의 풍연(風煙)이 갈담(葛潭)에 모였네.
어물전에 비린 냄새 없으니 어부가 졸아서이고,
엷게 단장한 지초 굴은 푸른 남기가 에워쌌더라.
 
어영차 들보를 위쪽에 던지니,
옥대(玉臺)는 아득하고 신선휘장 펼쳐져있네,
청계도사(靑溪道士)는 어디로 가셨나 물었더니,
학을 타고 천년을 안석과 지팡이에 머문다하네.
 
어영차 들보를 아래쪽에 던지니,
집에 물방울 종종 떨어져 화사(畵榭)에 울리네,
오랑캐 중은 바리때 받들고 복전(福田)을 빌다가,
명산(名山) 어느 곳 정사(精舍)에서 주거하시는가.
 
삼가 바라건대 상량을 올린 이후에 삼기(三奇)가 좋게 나타나고 백령(百靈)이 복을 내려주옵소서. 기둥과 초석은 만년토록 버텨서 오래 보전케 하시되, 자식과 손자가 백년토록 이어서 보수하게 하옵소서.
 
임자(壬子) 국추(菊秋) 상한(上澣) 불초(不肖) 석만(錫萬)은 고(稿)하노라.
 
 
 

3. 3. 湛樂亭續記

亭曰湛樂 雲水二全君錫琦錫萬築
也 錫琦之述備矣 此後出故曰續記 第其
所謂 顧名思義 欲吾兄弟 繼述而無忝
盖其至意 全氏世風孝友 父祖相傳 長枕
大被 民到于今稱之 二君擩染於家庭
者宜爾 而其末段所言 兄弟一身 四肢百
骸 何莫非一脈所貫通 寸指有傷 不成全
體 非實心友于道 不得如此 彼子父異
財 兄弟不相恤者 抑獨何心哉 聞其風
可以知愧矣 此雖二君之私 而可以有補
於世敎 承先裕後之道 此數句語 竭盡
而無餘蘊 吾又何語以贅之 旣以語錫
萬 悉次以爲後記
玄黓之歲肇冬 幸州奇宇萬 謹書
 
담락정속기(湛樂亭續記)
 
정자를 ‘담낙(湛樂)’이라 하였으니 운수(雲水)의 두 전군(全君) 석기(錫琦)·석만(錫萬) 형제가 건립한 것이다. 석기(錫琦)가 지은 기문(記文)에 자세하게 내용이 갖추어졌으나, 이것은 뒤에 썼기 때문에 ‘속기(續記)’라 하였다.
다만 그 이른바 ‘명(名)을 돌아보고 의(義)를 생각하되, 우리형제가 선대의 가업을 계술(繼述)해서 부모에게 욕됨이 없도록 하려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 지극한 뜻은 전씨(全氏) 집안 세풍(世風)은 부조(父祖)께서 효우(孝友)하시고 장침(長枕)하시고 대피(大被)하신 것을 서로 전했으니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어서 석기(錫琦)와 석만(錫萬)이가 가정(家庭)에서 마땅히 훈습을 받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끝 문장에 ‘형제는 한 몸이니 사지(四肢) 백해(百骸)가 어느 곳이든 일맥(一脈)으로 관통(貫通)한다. 그래서 한 마디 손가락에 상처가 있으면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진심으로 우애하는 도를 터득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이 할 수 없다. 저 아들과 아비가 재산을 달리하고, 형제들이 서로 구휼(救恤)하지 않는 것은 또한 유독 어떤 마음에서일까. 그 소문만 들어도 부끄러워할만하다. 이는 비록 두 형제의 사사로운 일이지만 세교(世敎)에 일조를 했다고 할 수 있고, 선대를 잇고 후손을 풍요롭게 하는 도는, 이 몇 구절에서 다했고 남은 것이 없으니 내가 또 무슨 말로 덧붙이겠는가. 이미 석만(錫萬)이가 전해준 말을 모두 편차하여 속기(續記)를 적노라.
 
임□(壬□)년 초겨울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은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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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