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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정자 (2013)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2024.01.06. 12:41 (2018.07.16. 02:38)

16. 비비정(飛飛亭) - 성수면 봉강리

 
성수면 오류(五柳)마을 앞에서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봉강리 신계월 마을에 들어서면 회관을 지나 마을 안에 정자가 있다. 비비정(飛飛亭)은 간재 전우(艮齋 田愚)가 쓴 이건기(移建記)에 의하면 선조6년(1573) 창주첨사(昌州僉使) 최영길(崔永吉)이 삼례역 남쪽에 세웠는데, 영길의 10세손 창렬(滄烈)이 1930년 이곳 계월 촌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목   차
[숨기기]
성수면 오류(五柳)마을 앞에서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봉강리 신계월 마을에 들어서면 회관을 지나 마을 안에 정자가 있다. 비비정(飛飛亭)은 간재 전우(艮齋 田愚)가 쓴 이건기(移建記)에 의하면 선조6년(1573) 창주첨사(昌州僉使) 최영길(崔永吉)이 삼례역 남쪽에 세웠는데, 영길의 10세손 창렬(滄烈)이 1930년 이곳 계월 촌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비비정의 원기(原記)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쓰고 비비정의 중건기는 직각(直閣) 서준보(徐俊輔)가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글자체를 보아서는 확실한 판단이 어렵다. 한편 현재의 건물은 1930년 3월에 재건한 것으로서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고 건물 가운데에는 4尺의 환도실(環堵室)이 있으며 내부에는 비비정기, 비비정이건기 등의 현판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우리나라 18현의 한 사람으로 각 향교나 서원에 모셔져 있는 인물이다. 본관은 은진이며,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 또는 화양을 사용하였으며, 시호는 문정이고 영조 32년에 종사 문묘 되었다. 부친은 송갑조이다.
 
그는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봉림대군의 사부로 병자호란 때는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하였다. 그는 효종, 현종, 숙종 때 남인과 대립하여 서인과 노론의 영수로서 정국을 주도하였으며, 동춘당 송준길과 서적편찬 및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우암은 1689년 숙종에게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로 인하여 제주도에 유배된 후 국문을 받기 위하여 상경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현재 정읍에 가면 ‘우암 선생 수명비’가 서있다.
 
우암은 문장이 뛰어나 전국의 많은 비문을 지었으며, 동춘당은 우암이 지은 비문을 주로 썼는데 양송(兩宋)이 함께 제작한 금석문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우암의 글씨는 성격처럼 호탕하면서 자유분방하였기 때문에 대자(大字)를 잘 썼다. 특히 편액이나 비문이 많이 있어 한국 서예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동춘당과 함께 양송체로 부르고 있다. 저서인 송자대전 목판본은 대전 우암공원 장판각에 보관돼 있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1. 1. 飛飛亭移建記

飛飛亭昔在全州參禮驛之南 今以頹
圮移竪於任實之桂月村 盖創之者僉
使崔公諱永吉也 移竪者其後承也 崔
公十世孫滄烈 以尤庵先生原記 直閣
徐公俊輔重建記見示 而要余記其實
余竊觀 尤翁以張岳二公爲武臣之所當
勉慕者 其指深矣 此可與知者道 難與俗
人言 噫 今之時視尤翁時 爲如何哉 子焉而遺
其親者 臣焉而後其君者 姑無論已 至於開
門揖寇而甘心事讎者 亦有之矣 時一思之
使人髮上指而眦欲裂矣 吾願崔公之遺裔
遠胤 必以張候之仗義討賊 岳王之誓死
雪恥 爲心而後 始可謂善繼述矣 滄烈又能
從事儒術 吾知其將與族之人 講聖賢之
學 守禮樂之敎 而大爲世道之助 如尤翁
之所望於崔氏者 必矣 盍相與勗之哉 滄
烈對曰 先生之所以敎告之者 大矣遠矣
凡爲吾祖之後承者 孰有不安意以受之哉
遂書其語 俾歸而刻置其壁 夫是亭始因地名而名之
今因崔公子孫之居 而得建於此也
■…■ 仲秋 田愚 記
 
 
비비정이건기(飛飛亭移建記)
 
비비정(飛飛亭)은 전주(全州)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있었는데 무너져서 임실(任實) 계월촌(桂月村)에 옮겨지었다. 대개 창건한 사람은 첨사(僉使) 최공(崔公) 휘(諱) 영길(永吉)이며, 옮겨 지은 사람은 그 후손이다. 최공(崔公)의 십세손(十世孫) 창렬(滄烈)이가 우암선생(尤庵先生)이 지은 원래의 기문(記文)과 직각(直閣) 서공(徐公) 준보(俊輔)가 지은 중건기(重建記)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사실(事實)을 기록해줄 것을 요청했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우옹(尤翁)은 장(張)·악(岳) 두 무신(武臣)을 의당 힘써 앙모해야할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그 지남(指南)하는 것이 깊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지자(知者)와는 말할 수 있으나 속인(俗人)과는 말하기 곤란하다.
아아, 지금시대로써 우옹(尤翁)의 시대와 비교해본다면 어떠한가.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뒤로하는 사람과, 신하로서 그 임금을 뒤로하는 사람은 우선 논할 것 없거니와, 문을 열고 원수에게 읍(揖)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원수를 섬기는 사람도 또한 있으니 때때로 한번 생각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두발(頭髮)이 치솟고 눈초리가 찢어지게 하는 일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공(崔公)은 후예(後裔)이면서 또 먼 세대의 맏아들이다. 그래서 반드시 장후(張候)를 의(義)로써 토적(討賊)하고 악왕(岳王)을 맹세코 죽여 설치(雪恥)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에, 비로소 선대를 잘 계술(繼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창열(滄烈)이 또한 유학(儒學)을 공부한 사람이다. 나는 그가 장차 족인(族人)과 성현(聖賢)의 학문을 강론하고 예악(禮樂)의 가르침을 준수하여 크게 세도(世道)에 대해 도움을 끼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야 우옹(尤翁)도 최씨(崔氏)에게 바라는 바를 기필하게 될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창열(滄烈)이가 대답하기를 ‘선생께서 하신말씀은 원대(遠大)하십니다. 무릇 우리 할아버지의 후손으로서 누군들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말을 글로 써서 돌아가 그 벽(壁)에 새기도록 했다. 저 정자 이름은 처음부터 지명(地名)으로 지었고, 지금은 최공(崔公)의 자손이 거주하는 곳으로 옮겨서 이건(移建)한 것이다.
 
■…■ 중추(仲秋) 전우(田愚)는 기(記)하노라.
 
 
 

2. 2. 飛飛亭重建記

尤翁曾爲崔公俊良 記其大父僉使
諱永吉之飛飛亭 亭在參禮驛矣 崔
公八世孫滄烈來 求文於余 則任實
桂月里己亥三月爲重建之地■■
也 余曰 崔氏欲武乎 尤翁之說 在能
爲張能爲岳 則足以光大僉使公垂
緖矣 欲文乎 吾敢無辭 而進之聖門
之學 如鳥數飛 無時不飛 無日不飛
飛飛不已 則說且樂且君子矣 焉知
飛飛亭所望於後人者 不在此而在
彼而已乎 第有所感者 是亭蓋三圮
矣 方再圮而起也 道伯章甫幷心幹
事 耿然爲全省勝事 今竟如何
王室蕩然 非復舊樣 而上下恬視 不
思更張 況有動心於一亭者哉 噫
是年 五月日 高靈申得求 書
 
 
비비정중건기(飛飛亭重建記)
 
우옹(尤翁)이 일찍이 최공(崔公) 후량(後良)을 위하여 그의 대부(大父) 첨사공(僉使公) 휘(諱) 영기(永吉)의 비비정(飛飛亭) 기문(記文)을 써 주었는데 정자는 삼례역(參禮驛)에 있다. 공(公)의 8대손 창열(滄烈)이가 와서 나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한 정자는, 임실(任實) 계월리(桂月里)에 있는데 기해(己亥)년 3월에 중건(重建)했■■다.
내가 말하기를,
“최(崔)씨는 무(武)를 하려고 했는가. 우옹(尤翁)의 말은 장비(張飛)가 되고 악비(岳飛)가 되었다면 첨사공(僉使公)이 업적을 크게 빛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니면 문(文)을 하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내가 감히 사양할 것 없이 말하겠노라. 성인(聖人)의 학문(學問)은 새처럼 자주자주 날아서 어느 때든 날지 아니한 때가 없고, 어느 날이든 날지 아니한 날이 없이, 날고 나는 것을 그만두지 아니하니 기쁘고 또 즐겁고 또 군자이다.
崔氏欲武乎 尤翁之說 在能爲張能爲岳 則足以光大僉使公垂緖矣 欲文乎 吾敢無辭 而進之聖門之學 如鳥數飛 無時不飛 無日不飛飛飛不已 則說且樂且君子矣
 
어찌 알겠는가. 비비정(飛飛亭)이 후인(後人)에게 바라는바가 무(武)에 있지 않고, 문(文)에 있다는 것을.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이 정자가 세 번이나 무너졌다는 것이다. 마침 두 번째 무너져서 중건(重建)할 때에는 도백(道伯)과 장보(章甫)들이 마음을 아울러 공사를 주관해서 경연(耿然)히 온 고을의 경사스런 일이 되었지만, 지금의 경우는 어떠한가. 왕실(王室)이 탕연(蕩然)히 옛 모습을 복구하지 못하고 있고, 상하 관료들이 태연히 보면서도 갱장(更張)할 생각도 하지 않는데, 하물며 한 정자가 무너졌다고 마음이 움직이겠는가. 안타깝다.”
라고 하였다.
 
이 해 5월 고령(高靈) 신득구(申得求)는 서(書)하노라.
 
 
 

3. 3. 飛飛亭重建記

飛飛亭事實 旣載於我曾王考重修之記
余無容更言 而其後亭又毁圮 只有遺址
先王己亥 我先考按節湖南 克承先蹟 有
意未及而遞 雖捐廩百金 付倉付還 俾爲
拮据改建之計矣 至今五十年間 因循延拖
亭固未就 財則漸敷 至於數千金之多 今
上己丑 道內章甫 設置湖山影堂 而士論以
爲不可不更起此亭 欲以己亥留殖之財 圖
所以經紀之方 問議於道伯趙公寅永 院儒
黃斯文仁源 又千里跋涉來請於余 余於少
時 詳知此事 每以尙未改建 爲之歎愴 今聞
湖儒之言 樂而許之 蓋地之興廢有數存
焉 而先正命名之舊亭 吾家兩世之遺志
得以快成於今日 此非但爲一道士林之光
而已 余之與幸 興感容有其旣乎 若夫守
護葺理 使此亭與影堂 同其永久 則諸
生之責也 影堂諸儒謂余 不可無文字 故
槪言其更建事蹟 謹繼曾王考遺文而
記之如此云爾
上之三十一年辛卯 崇政大夫行禮曹判
書兼知經筵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
提學世孫右賓客奎章閣原任直閣
徐俊輔 記
 
 
비비정중건기(飛飛亭重建記)
 
비비정(飛飛亭)의 사실(事實)은 이미 우리 증왕고(曾王考)께서 적은 중수기(重修記)에 실려 있으니 내가 거듭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정자가 또 무너지고 터만 남게 되었고, 선왕(先王) 기해(己亥)년 우리 선고(先考)께서 호남(湖南)을 안절(按節)할 때에 선대의 유적을 이어 계승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직(遞職)했다.
비록 100 금(金) 정도의 금액을 출연(出捐)하여 창고(倉庫)에 부여하고 환자(還上)에 부여하여 개건(改建)할 수 있는 자본은 저축되었으나, 지금까지 50년 동안 피일차일 끌다가 정자는 건립도 못하고, 돈만 점점 더 불어나서 몇 천 금까지 많아졌다.
금상(今上) 기축(己丑)년 도내(道內)의 장보(章甫)들이 호산영당(湖山影堂)을 설치(設置)하였다. 그리고 사론(士論)이 ‘불가불 다시 정자를 건립하자.’고 하여서, ‘기해(己亥)년 유치(留置)하여 식리(殖利)해 두었던 재정(財政)으로 경영하는 방도를 도모하기 위하여 도백(道伯) 조공(趙公) 인영(寅永)에게 문의(問議)하였다. 그리고 원유(院儒) 황사문(黃斯文) 인원(仁源)도 천 리 길을 허겁지겁 와서 나에게 중건기(重建記)를 요청하였다.
나는 소싯적에 이 사안(事案)에 대해 상세히 알았으므로 늘 오히려 건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호유(湖儒)들의 말을 들으니,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대개 땅[地]의 흥폐(興廢)에도 운수(運數)가 있어서일 것이다. 선정(先正)께서 명명(命名)하신 구정(舊亭)은 우리 집안 양세(兩世)의 유지(遺志)로써 지금 흔쾌하게 성취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비단 한 도(道)의 사림(士林)들에게 영광으로 그칠 뿐 아니라, 나도 다행히 참여하게 되었으니 감회(感懷)가 혹여 이미 있었던 것인가 생각된다.
저 수호(守護)하고 수리(修理)하여 이 정자와 영당(影堂)이 함께 영구(永久)토록 유지하게 하는 일은 제생(諸生)들의 책임이다. 영당(影堂)의 제유(諸儒)들이 내게 말하기를, ‘문자(文字)가 없어서는 불가(不可)하다.’고 하기에, 대략 중건하게 된 사적(事蹟)을 말하고, 삼가 증왕고(曾王考)의 유문(遺文)을 계술(繼述)하여 기록하기를 위와 같이 했을 뿐이다.
 
상(上) 31년 신묘(辛卯) 숭정대부 행예조판서 겸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세손우빈객 규장각원임직각(崇政大夫行禮曹判書兼知經筵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孫右賓客奎章閣原任直閣) 서준보(徐俊輔)는 기(記)하노라.
 
 
 

4. 4. 飛飛亭記

飛飛亭在全州參禮驛之南 其主人崔後良
也 良嘗請記於余曰 亭之作在萬曆癸酉
作之者吾祖永吉也 吾祖永吉以弓馬拔身
官至昌洲僉使 吾父完成亦以弱冠 官羅暖
萬戶 至吾良 蓋三世也 余曰 武人苞苴輦載
奔走權門 以圖進用 老死而後止者 滔滔也
今昌洲獨能免此 而作亭於形勝之地 居處
遊息 導迎淸曠 能以壽終 斯已難矣 羅暖上
不以是賂諸貴勢 下不以是易其衣食 修葺
塗墍 樑棟如新 可謂孝矣 今君又愛文字 旣
揭扁額 又請記以示後人 其繼述之意又深
矣 因問名亭之義 則曰因地名而名之也 余
曰 君世世將種也 古者張翼德之信勇 岳武
穆之忠孝 皆名以飛 而曠世相感 豈非武臣
之所當勉慕者耶 安知君之後承不有張岳
之倫 而凡登斯者 皆以二子爲心 則其爲世
道之助也 豈淺鮮哉 良頓首曰 亭小而義大
人微而語高 受賜之厚 無以踰焉 請歸而刻
之楣間也
時崇禎上章涒灘九月日 華陽老叟記
 
 
비비정기(飛飛亭記)
 
비비정(飛飛亭)은 전주(全州)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있고 그 주인은 최후량(崔後良)이다. 후량이 일찍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정자를 지은 해는 만력(萬曆) 계유(癸酉)년이고 지은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 영길(永吉)이십니다. 우리 할아버지 영길(永吉)께서는 궁마(弓馬)로써 발탁(拔擢)되어 관직이 창주첨사(昌洲僉使)에 이르렀고, 우리 아버지 완성(完成)께서도 또한 약관(弱冠)의 나이에 관직이 나난만호(羅暖萬戶)를 지내셨고 그리고 나 후량에 이르기까지 대개 3대를 거쳤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인(武人)은 포저(苞苴)를 수레에 싣고 권세 있는 가문(家門)을 분주히 오가면서 승진을 도모하다가 늙어서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을 도도히 하고 있다. 지금 할아버지 영길(永吉)께서는 창주첨사(昌洲僉使)로서 유독 이러한 폐단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자를 경치 좋은 곳에 짓고 거처하면서 유람하기도 하고, 또 맑고 넓은 자연을 만끽하면서 능히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었으니 이렇게 하기는 이미 어려운 일이었다.
나난(羅暖)이라는 곳은 위로는 귀한 세력에게 뇌물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아래로는 의복과 음식을 교역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한 형편인데도 흙을 발라서 수리하고 들보와 기둥을 새 모습으로 꾸몄으니 효도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 그대는 또 문자(文字)를 좋아하여 이미 편액(扁額)을 내걸고 또 기문(記文)을 요청하여, 이로써 후인(後人)에게 보여주려고 하니 자기 선대를 계술(繼述)하려는 생각 또한 깊다고 하겠다.”
하였다. 인하여 정자 명(名)을 지은 의미를 물었더니, 말하기를,
“지명으로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 집안은 대대로 장수(將帥)의 종자이다. 옛적 장익덕(張翼德)은 용맹으로 신임을 받았고, 악무목(岳武穆)은 충신이며 효자이니 두 사람 다 비(飛)로 이름을 지었다. 시대는 다르지만 느낌은 같은데 어찌 무신(武臣)을 마땅히 흠모하려고 힘쓰지 않겠는가. 또 어찌 알겠는가. 그대의 후손 중에 장익덕(張翼德)·악무목(岳武穆)의 무리 같은 사람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무릇 이 정자에 올라와서 모든 사람들이 장익덕(張翼德)·악무목(岳武穆) 두 사람처럼 되겠노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면 그것도 세도(世道)에 일조를 한 것이 어찌 적었다고 하겠는가.”
라고 하니, 후량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정자는 작지만 뜻은 크게 말씀해주시고 사람은 미미하지만 말씀은 고상하게 해주셨습니다. 후덕하게 해 주신 말씀을 준수하여 돌아가서 문미(門楣)에 새기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숭정(崇禎) 경신(庚申) 9월 화양노수(華陽老叟)는 기(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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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