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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의 정자 (2013)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2024.01.03. 13:11 (2018.07.16. 02:38)

30. 만류당(萬流堂) - 신평면 대 리

 
만류당기 / 나는 지난 갑진(甲辰)년 봄으로부터 어느덧 3년을 이 서당에서 생도들을 가르쳐왔다. 이 서당은 곧 만류당(萬流堂) 이선생(李先生)의 영혼이 깃든 곳이며, 예전의 남애사(南涯祠)로 신평(新平) 마호(馬湖)의 남쪽이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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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류당 이득환 선생(1601∼1655)의 호(號)이며 신평면 대리에서 생도들을 가르쳐왔던 서당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서당은 곧 만류당(萬流堂) 이선생(李先生)의 영혼이 깃든 곳으로 만류당의 사후(死後)에 제자들이 이곳에 남애사(南涯祠)를 짓고 제사를 지내오기도 하였다. 선생께서는 넓고 깊은 학식과 뛰어난 문장을 지녔으며, 만류당(萬流堂)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봉곡(鳳谷) 김선생(金先生) 동준(東準)공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사서(史書) 및 성리학(性理學) 등의 서책을 전수받고 깊이 연구하여 스스로 마음속에 깨우친 바가 많았다. 더욱이 역학(易學)에 침잠(沈潛)하여 사상팔괘지변(四象八卦之辨)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수학론(數學論) ․ 선학론(仙學論) ․ 공중루각기(空中樓閣記) ․ 분비집(憤悱集) ․ 경학편(警學篇) ․ 걸퇴서(乞退書) 등의 책들이 세상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선생은 본래 전주부(全州府) 출신이지만,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전후하여 여러 지방을 방랑하다가 지금의 신평면 창인리와 이어서 대리에 정착, 이곳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오로지 제자(弟子) 양성(養成)에 힘써와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하였다. 그 후 그 제자들은 스승의 집터에 집을 새로 지어 남애(南涯)라 이름 짓고, 대대로 이곳에서 공부하였으며, 만류당(萬流堂)을 남애사(南涯祠)에 배향 하여 스승의 얼을 계승하여왔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1. 1. 萬流堂記

余業於訓蒙往在甲辰春繼三周歲喫苦于是堂 堂卽萬流李先生妥靈之所而前所揭南涯祠也在新平馬湖之陽 先生學識博洽文章贍敏自號萬流堂 早登司馬自幼時就正于鳳谷金先生東準之門 諸子史性理等書精思硏窮不待昏疑而皆自得於心 尤沈潛易學著四象八卦之辨 又有數學論仙學論空中樓閣記憤悱集警學篇乞退書總若干卷行于世 以若夙抱宜乎大用而命與時違困不得志 又徑龍蛇之亂無意於世寓志江湖以訓導官僑于本縣縣之北倡仁里是也 以獎率後學興起斯文爲己任 德性之純文望之菀卓然爲南州師表 文學之士多出其門而二槐堂金公諱鳴健是其高足也 噫先生之沒也家無嗣續香火從此而絶文籍亦隨以亡 天胡忍斯難諶者理也 鄕人憐之立祠馬湖而俎豆之 若使先生之道賢仍繼承則豈獨祠一鄕而止哉 粤在戊辰士林不幸以 朝令至於毁綴有(?)於氣數而然歟 祠 危墟後學金光烈氏李錫魯氏斯堂而築之以爲後生肄業之所 且議本祠畓庫中三斗落給付墓直八斗三升落用享墓祀之意 俾成本祠立栥每年寒食備薦苾芬迄今不替 可謂無孫而有孫 無祠而有祠 墓在斗流峰向巳(亥)之原 于今數百載白楊自老蒼松當鬱 行路之過是峰者孰不嗟歎哉 忽一日二槐堂七世孫光國甫袖先生文若蹟示余而告之曰 挽近人心不古山下愚氓犯葬于先生山所龍上 若或遷延而未掘則我先祖槐堂公之靈對先生之靈豈肯曰余有後守哉 晝夜焦思左右協力幸使卽掘庶可慰兩公之靈 然而若無記實孰諒此由肆圖不朽欲使之後之人有所懲艾焉 請無惜一言也 余聞而感之不敢以不文辭之問協議者誰也 曰朴康鄭李韓四五同志也 問掘之何速也 曰金使奉斗氏以慕賢之誠大有力焉 矧乎先生之始祠享也 我高王考白茅公作奉安文至今手澤尙新 是以不肖聞而稔之 恍若親炙其嚮慕之誠不後於當日及門之士 故敢亡僭踰略記顚末庶覺後之覺者焉
癸丑四月十五日後學咸陽朴泓根謹誌
幹事員 金光國 朴鍾遠 康玄錫 李鍾淵 李吉求 韓共錫 朴根
 
 
만류당기
 
나는 지난 갑진(甲辰)년 봄으로부터 어느덧 3년을 이 서당에서 생도들을 가르쳐왔다. 이 서당은 곧 만류당(萬流堂) 이선생(李先生)의 영혼이 깃든 곳이며, 예전의 남애사(南涯祠)로 신평(新平) 마호(馬湖)의 남쪽이다. 선생께서는 넓고 깊은 학식과 뛰어난 문장을 지녔으며, 만류당(萬流堂)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봉곡(鳳谷) 김선생(金先生) 동준(東準)공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사서(史書) 및 성리학(性理學) 등의 서책을 전수받고 깊이 연구하였는데, 조금의 의문도 없이 스스로 마음깊이 깨우칠 수 있었다. 더욱이 역학(易學)에 침잠(沈潛)하여 사상팔괘지변(四象八卦之辨)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수학론(數學論) ․ 선학론(仙學論) ․ 공중루각기(空中樓閣記) ․ 분비집(憤悱集) ․ 경학편(警學篇) ․ 걸퇴서(乞退書) 등의 책들이 세상에 전해진다.
선생께서는 크게 쓰일만한 자질을 지니고 계셨지만, 운명이 시대와 맞지 않아 끝내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더구나 용사지란(龍蛇之亂)을 몸소 겪으면서 출세의 뜻을 접고 훈도관(訓導官)으로 강호(江湖)에 우거(寓居)하였으니, 우리 고을의 북쪽 창인리(倡仁里)가 바로 그곳이었다.
선생께서는 후학(後學)을 이끌고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신이 할 일로 여겼으며, 순수한 덕성(德性)과 뛰어난 문망(文望)은 호남(湖南)의 사표(師表)로 우뚝하였다. 문학지사(文學之士)들이 거의 그의 문하(門下)에서 배출되었는데, 이괴당(二槐堂) 김공(金公) 휘(諱) 명건(鳴健)은 그의 제자였다.
슬프도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제향(祭享)이 끊겼으며, 그의 문적(文籍)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하늘이 어찌 이런 어려움을 차마 그만둘 리 있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마호(馬湖)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왔도다. 그리하여 선생의 도학(道學)이 어진 선비들에게 이어지게 된다면, 이 어찌 한 고을에 사당에만 그치리오! 하지만 무진(戊辰)년 사림(士林)의 불행으로 서원(書院)을 훼철(毁撤)하라는 조정(朝廷)의 명령이 내려지고 말았도다. 그리하여 사당이 폐허가 되었으나, 후학 김광렬(金光烈)씨와 이석노(李錫魯)씨가 이 서당을 새로 지어 후생들이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다. 그리고 또한 향사답(享祀畓) 삼두락(三斗落) 묘직(墓直) 팔두이승락(八斗三升落)을 마련하여 묘사(墓祀)를 지낼 수 있도록 주선하였으므로, 매년 한식(寒食)날 제수(祭需)를 갖추어 흠향케 하기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자손(子孫)이 없어도 있으며, 제사가 없어도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묘는 두류봉(斗流峰)아래 해좌(亥坐)로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백양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있으니, 이 봉우리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 어느 누가 감탄하지 않으리오! 문득 어느날 이괴당(二槐堂)의 칠세손(七世孫) 김광국(金光國)씨가 만류당선생의 문적(文蹟)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인심(人心)도 옛날 같지 않은 터에 산 아래 어리석은 한 사람이 선생 산소(山所)의 내룡(來龍)에 묘를 썼지요. 만일 이대로 나두고 이장(移葬)시키지 않는다면, 저희 선조(先祖)인 이괴당공의 혼령이 어찌 만류당선생의 혼령을 뵈올 수 있을 것이며, 저 또한 어찌 이를 수호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밤낮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차에 주변 사람들과 협력하여 다행스럽게도 이장을 시킴으로써, 그나마 만류당공과 이괴당공의 혼령을 위로할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상을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런 연유를 알 것이며, 또 후세에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오니 이에 대한 글을 부탁합니다.”라고 하였다. 하여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감히 글이 짧은데도 사양하지 못한 채로, 이런 일을 서로 협의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으며, 그는 박모(朴某), 강모, 정모, 이모, 한모 등 네다섯 명의 동지들이었다고 하였다. 또 어찌 그리 빨리 묘를 파낼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는 김봉두(金奉斗)씨의 모현지성(慕賢之誠)이 크게 힘이 되었다고 하였다. 더구나 사당을 세우고 만류당 선생을 처음으로 제사지낼 당시에, 나의 고조(高祖)인 백모공(白茅公)이 지은 봉안문(奉安文)도 아직까지 그 손때가 새롭기만 하였다. 이에 불초(不肖) 또한 익숙히 들었던지라, 선생에 대한 흠모(欽慕)의 정성이 그 당시 직접 배웠던 제자들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외람되게도 그 전말(顚末)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이를 알리노라.
 
癸丑四月十五日後學咸陽朴泓根謹誌
幹事員 金光國 朴鍾遠 康玄錫 李鍾淵 李吉求 韓共錫 朴根
 
 
 

2. 2. 萬流書堂重修記

余視篆之二年에 邑子李重㽕呈書曰 任人之解讀書는 自萬流李學官而始也라. 峽(?)雄眛하고 初若(?)庭이러니 然이나 萬流自京으로 來訓蒙士하여 課以往史하고 飭以行家하니 使今日家詩而戶書者는 皆萬流之賜也라. 其書堂이 舊在縣北馬項里러니 萬流歿而書堂(?)虛且久矣라. 一鄕之士 劬書礪行하여 或(?)於鄕試?하며 登於 朝者 莫非萬流開荒之功이라. 而今에 書堂鞠爲茂草하니 多士之恥也라. 請仍其舊址에 改構書堂하고 (??)士子弦誦藏修하여 以卒萬流勸學之志라.
내가 이곳 현감으로 와서 2년째 되던 해였다. 이 고을의 이중유(李重㽕)란 사람이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우리 임실고을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만류(萬流)선생 이학관(李學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몽매하고 무지하였지만 만류선생께서 서울로부터 내려와 어리석은 사람들을 훈도(訓導)하고, 역사를 가르치며 올바른 행동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집집마다 시를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만류선생의 은덕인 것입니다. 그 서당(書堂)이 옛날 우리 고을의 북쪽 마항리(馬項里)에 있었으나, 만류선생이 돌아가시자 서당은 폐허가 된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우리 한 고을의 선비들이 글과 행동에 힘쓰는 사람들이나, 혹은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조정(朝廷)에 오른 사람들 모두가 만류선생의 개황지공(開荒之功-無知를 깨우쳐준 공로) 아닌 것이 없건만, 이제 그 서당은 무너져 잡초만 무성할제 모든 선비들의 부끄러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오니 삼가 그 옛터에 서당을 다시 지어서 오래도록 이 고을의 선비나 자제들로 하여금 시(詩)와 음악(音樂)을 암송하고 연주하며, 올바름을 닦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만류선생의 학문을 권장했던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조처하여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余는 於是에 始知世有萬流하고 求見其集하니 萬流는 蓋 孝廟朝人也라. 好易學하고 隱德不曜하며 河洛合一之圖하며 數學仙學之論에 多發古人所未發之旨하여 至若券弁之必書하다.
皇朝崇禎者 能得淵明讀書彖熙之義하니 豈不誠當世之賢士也리오. 惜乎라 我 朝用人이 不用才하고 專用(?)門하여 使此人으로 抱才枯死於蓬雚之下할제 其功이 不過化一縣學究而止하니 安得無後人之限也리오.
나는 이리하여 비로소 세상에 만류선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의 문집(文集)을 구하여 읽어보게 되었다. 만류선생은 효종(孝宗) 때 인물이다. 그는 역학(易學)을 좋아하였으며, 자신의 덕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하도낙서(河圖洛書-󰡔周易󰡕 책을 뜻하기도 하며, 보통 河洛理數라하여 󰡔易󰡕을 근거로 占을 치는 책)와 수학(數學) 및 선학(仙學-神仙術이나 道家 및 老莊學) 등에 관한 논의(論議)는 옛 학자(學者)들도 미처 밝히지 못한 뜻을 밝힌 것이 많으며, 이런 내용을 책모서리에 빠짐없이 기록하였던 것이다.
중국(中國)의 숭정제(崇禎帝-明나라 思宗을 말함. 崇禎은 그의 年號. 1628년에서 1644년까지 在位하였음)는 도연명(陶淵明)의 단괘(彖卦) 길상(吉祥)의 의미를 색다르게 쓴 사람을 등용했하였는데, 어찌 참으로 당세의 현명한 인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되 재주를 가지고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경학만 가지고 인재를 등용한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재주를 간직한 채 초야(草野)에서 그냥 죽어가게 하고 말았으니, 그 공이 한 고을을 학구(學究)로 이끄는 것에 그치고 말았구나. 그러니 어찌 후세인들의 한스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且集中云 判書李公慶徽 爲高山倅時에 與弟正言公交億으로 親受易學할제 萬流謂人曰 易之淑奧處를 高山은 再論始解하고 正言은 一諭卽解라하니라. 正言은 卽左議政華谷公也라. 余於華谷公爲稱甥 而方視(?)華谷公之曾孫錫奎氏하고 又(?)高山하여 而書堂之役하니 這在此時事로 若巧會하여 遂與高山捐(?)以相之라. 余之樂助是役者는 豈但尙萬流之學行而已리오. 善慕華谷公問易之事也라. 今에 李君之距萬流且百年矣나 能不忘敎學之功하고 重建此堂하니 其好賢之誠을 不可泯矣라. 士之登此堂者 又能體李君之意하고 勸課不懈하면 則萬流讀書之種이 其永不絶矣리라. (?)連詳書하여 以勉後之學者하노라.
또한 만류선생의 문집(文集)을 살펴보면 판서(判書) 이공(李公) 경휘(慶徽)씨가 고산(高山)에 살고 있을 때, 그의 동생 정언공(正言公) 교억(交億)씨와 함께 직접 역학(易學)을 배웠다고 한다. 그때 만류선생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역(易)의 심오(深奧)한 곳을 고산(高山) 이경휘는 두 번 이야기하면 겨우 이해하였으나, 정언(正言) 이교억은 한 번만 말해줘도 곧장 이해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언(正言)은 곧 좌의정(左議政) 화곡공(華谷公)을 말한다. 나는 화곡공의 생질(甥姪)이다. 그래서 때마침 화곡공의 증손(曾孫)인 석규(錫奎)씨를 만나보고, 또 고산(高山)에 가서 만류선생의 서당 재건(再建)에 대해서 상의했다. 이런 일이 마침 잘 들어맞아 마침내 고산에서도 연금(捐金)하여 돕게 되었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이 일을 도운 것은 어찌 만류선생의 학행(學行)을 높여서일 뿐이겠는가? 이는 화곡공(華谷公)께서 만류선생에게 역학(易學)을 배웠던 것을 추념(追念)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제 이군(李君) 중유(李重)는 만류선생으로부터 백년이나 뒤이건만, 능히 만류선생의 교학지공(敎學之功)을 잊지 않고 이 서당을 중건(重建)하니, 그의 호현지성(好賢之誠)은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서당에 오르는 선비들 또한 능히 이군(李君)의 의도를 체감(體感)하고 권선(勸善)과 학업(學業)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만류선생의 독서(讀書)에 대한 터전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되리라. 그래서 전말(顚末)을 자상하게 적어 후일(後日) 배우는 사람들을 권면(勸勉)코자 하노라.
 
己丑 蠶月上澣에 潘南 朴一源은 稿하노라.
기축(己丑)년 잠월(蠶月-3월)에 반남(潘南) 박일원(朴一源)은 쓰노라.
 
 
 

3. 3. 萬流先生墓碑文

公의 姓은 李요 諱는 得寏이며 韓山人이라. 牧隱의 八世孫也라. 自號를 萬流堂이라하다. 乙亥에 登司馬하고 十一歲에 就正于鳳谷金先生 諱東準之門하다. 諸子史性理等書를 不待質疑하고 自得於心하다. 沈潛易學하여 著四象八卦之辨하고 又有數學論仙學論空中樓閣記憤悱集警學篇乞退書 總若干卷하다. 以若夙抱宜乎大用이나 命與時違하니 困不得志하여 寓於江湖하다. 以訓導官으로 僑于本縣新平面昌仁垈하여 獎率後學하며 興起斯文하니 爲南州師表라. 鄕人이 憐其無嗣하여 立祠南涯하고 設俎豆之禮하다. (?)在戊辰에 士林不幸으로 朝令至毁撤하니 祠廡旣墟라. 後學이 矜式할제 每年寒食에 備薦苾芬하여 迄今不替하다. 墓는 在本面斗流里後麓하고 亥坐原이다. 君子之靈은 如水在地於千百載하니 其澤不泯이라. 乃敢慕賢하여 立碣略記하다. 靑山은 峨峨하고 綠水는 洋洋하며 萬流之風은 山高水長하리라.
歲在戊午端陽月午日에 新平面大里 門下生이 謹竪하다.
 
 
만류당비문
 
公의 姓은 李氏며, 諱는 得寏(득환)으로 韓山人이다. 牧隱선생의 八世孫으로, 自號를 萬流堂이라고 하였다. 乙亥에 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열한 살 때 鳳谷 金先生 諱東準의 門下에 들어가 배웠다. 公는 諸子百家書와 史書 및 性理學 등의 책을 묻지 않고서도 마음속에 깨우쳤다. 易學을 깊이 硏究하여 四象八卦之辨을 지었으며, 또한 數學論 ․ 仙學論 ․ 空中樓閣記 ․ 憤悱集 ․ 警學篇 ․ 乞退書 등 제법 많은 책을 著述하였다. 일찍부터 크게 쓰일만한 才能과 抱負를 간직했지만, 運命은 時代와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困窮속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江湖에 寓居하고 말았다. 訓導官으로 本縣의 新平面 昌仁里 언덕에 寄居하며, 後學들을 獎率하고 斯文을 興起시켜 湖南 각 고을의 師表가 되었다. 鄕人들이 先生의 後嗣 없음을 안타까워하여 南涯書院 세워 祭祀를 지내왔었다. 그러던 가운데 大院君 戊辰년에 士林의 不幸인 書院을 毁撤(훼철)하라는 朝廷의 명령으로 書院은 이미 헐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後學들은 先生을 尊敬하고 본받기 위하여 해마다 寒食날이면 祭需를 갖추어 歆饗토록 하기를 오늘날까지 그치지 않았다. 墓所는 本面 斗流里의 뒤쪽 산자락에 있으며 亥坐다. 君子의 英靈은 마치 물이 영원히 이 땅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恩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감히 그의 어짊을 欽慕하여 碑石을 세우고 簡略하게나마 자취를 적는다. 靑山은 드높고 綠水는 성대히 흐르니, 萬流先生의 學風은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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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