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과평(僧科坪) 약 4백 50여 년 전, 명종 7년(1555)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당시 봉은사 주지 보우선사와 함께 고려조의 승과제도를 부활키로 하였다.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모인 승려들이 수천명에 이르러, 시험장소가 좁아 응시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지금의 삼성동 봉은사 앞뜰을 시험장으로 하여 시험을 보게 하였다. 이 뜰을 ‘중의 벌’ 혹은 ‘승과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 양재역 벽서사건 조선 중기 명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친 문정왕후가 섭정을 함으로써 국권을 좌우하게 되었다. 명종 2년 어느날 부제학 정언각이 양재역에 갔다가 우연히 벽을 보니 붉은 글씨로 ‘위에는 여왕이 섭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력을 농락하여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그대로 서서 기다리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것을 이기, 정명순 등이 과거 을묘사화의 잔재라고 주장하여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을 죽이고 당시의 지식인 20여명을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뒷날 이 사건을 '양재역 벽서의 옥(獄)'이라고 불렀다.
◈ 성종(成宗, 1457∼1494) 조선왕조 제9대 왕이며 재위기간은 1469∼1494년.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고(1485), 『대전속록(大典續錄)』을 발행하여(1492) 통치의 전거(典據)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학문연구를 후원하고, 관학을 진흥시켰으며 편찬사업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많은 양서를 간행케 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야인들을 차례로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는 등 세종 이후 조선의 중흥을 가져온 가장 뛰어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인 정현왕후와 함께 안장된 능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선릉(宣陵)이다.
◈ 한명회(韓明澮, 1415∼1487)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좌에 오르도록 한 일등공신. 그 후 3대 왕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한 그는 현달한 재상으로서, 그리고 국구(國舅)로서 역대 왕들의 총애가 극진하였다.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는 한강변에 압구정을 짓고 선비들을 모아서 시연을 베풀곤 하였다.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던 그 정자가 있던 곳은 압구정동 1동 456번지 일대(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 한강변이다.
◈ 보우(普雨, 1509∼1565) 조선 중기의 고승,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 보우는 법명이다. 1548년(명종 3) 문정대비로부터 부름을 받고 현 강남구 소재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선교양종(禪敎兩宗)과 도첩제도(度牒制度)를 부활시켰고, 1565년에는 중단되었던 승과(僧科)를 부활케 하였다. 보우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 청허당 휴정(淸虛堂 休靜 1520∼1604)과 사명당 유정(泗溟堂 惟政 1544∼1610) 조선 중기 봉은사 출신의 승려들로서, 휴정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특명으로 제자 유정과 함께 승병 1,500명을 모으고 이듬해 명나라 군사와 함께 서울 수복에 공을 세웠다. 서산대사(西山大師)로 더 알려져 있다.
후에 유정은 휴정의 뒤를 이어 명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평양을 수복했고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유정은 또한 1597년 정유재란 때 울산의 도산에서 공을 세웠으며, 1604년 국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고 귀국하였다.
◈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조선말기의 정치가. 김옥균·서광범·서재필 등과 함께 혁신적인 체제개혁을 지향하는 개화당을 조직, 1884년 10월 개화당 인사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의 개입으로 정변은 실패하고 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한명회가 지은 정자 압구정과 한강에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며 떠있던 저자도의 최후 소유자이기도 했는데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가 역적으로 몰려 재산이 몰수되면서 정자도 철거되었다.
◈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조선 말기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자. 호는 도산(島山). 흥사단을 창설하고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역임하는 등 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안중근, 윤봉길 의사 의거 때마다 투옥되는 등 끊임없는 독립운동에 따른 옥고 중에 보석되어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강남구에는 부인(이혜련)과 함께 그의 묘가 있는 도산공원이 있으며 신사동 네거리부터 영동대교 남단까지 연결되는 대로를 그의 호를 따서 도산대로라 이름하였다.
■ 사적 ◈ 선정릉 제199호, 삼성동 131
■ 유형문화재(시지정) ◈ 광평대군 묘역 제48호, 일원 수서동 산 10-1 ◈ 봉은사 선불당 제64호, 삼성동 73 ◈ 홍무 25년 장흥사 명동종 제76호, 삼성동 73 ◈ 오공신회맹축 제97호 역삼동 797-3 ◈ 봉은사 판전의 김정희 서 현판 제83호, 삼성동 73 ◈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 초판 제84호, 삼성동 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