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다도면은 전남의 내륙 중앙부에 위치한다.
다도면은 나주시청에서 동서쪽으로 24km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쪽은 화순군 도암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은 산포면과 남평읍, 서쪽은 봉황면에 접하고 있다.
인류에게 강은 가장 먼저 접근하기 쉬운 인간의 삶터이다. 고대문명의 발상지가 전부 큰 강 유역이었듯이 다도면에 살았던 고대인들도 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강은 그만큼 인간에게 풍요로움을 주는 곳이다.
이른 시기부터 농경문화가 전개된 나주 지역에는 선사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이후 옹관고분문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적이 집중되어 있고 최근에 들어서 하나씩 발굴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전남 주암호 수몰된 지구에서 구석기유적의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대체로 후기 구석기인 2-3만 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것이 전남 지역의 최초의 구석기 유물의 확인이었다.
나주지역은 1998년 목포대학교 박물관팀이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동강면, 공산면, 왕곡면 등지에 다량의 구석기 유물이 산포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당시 밝혀진 유물로는 몸돌, 찍개류, 다면석기 등과 단면 주먹도끼, 양면 주먹도끼, 칼형도끼 등인데, 자갈돌 석기전통을 가진 구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3-6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최근 2001년에는 나주시 금천면 신가리 당가마을 유적에서는 많은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적 내의 지층을 일별해보면 지층별로 시기를 알 수 있는데, 혹독하게 추운 빙하기와 비교적 따뜻한 간빙기의 흔적이 나타난다. 지층이 얼었다가 풀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지층을 뚫고 내려오는 얼음쐐기의 규모가 국내에서 발견된 것 중 최대의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당가유적에서는 최종빙기와 최성기에 걸치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7만년 전후 혹은 그 연대를 넘는 중기구석기시대의 문화층으로 목포대학교박물관팀은 추정하였다. 게다가 두 개의 문화층이 더 확인되어 각 시기별 석기문화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발굴이었다. 게다가 제2문화층에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30-45cm가량의 폭을 가진 얼음쐐기구조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석영제 자갈돌을 석재로 활용한 다양한 종류의 석기들이 확인되었는데,
금천면 중기구석기 유적
양면을 박리하여 둥근 날을 조성한 양면찍개, 여러 면 석기류 및 격지, 석구라고 할 만큼 둥근 형태를 가진 여러 면 석기, 외면찍개류, 몸돌 등을 발굴하였다. 특히 지층의 형성과정을 보면 오랜 기간에 걸친 3개의 문화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자갈돌석기 전통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면 석기와 찍개 그리고 대형 긁개 등 우리나라 중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 보이는 석기문화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구석기 유물과 유적은 강가나 해안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로써 이들의 생활형태를 추정해보면 특정지역을 점거하여 주거하였던 것이 아니고 영산강 지류에 형성되어 있는 구릉의 전 지역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생계를 유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에 많은 유적이 분포하는 것은 당시 구석기인들이 수렵과 채집 그리고 부분적으로 강이나 바다의 자원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 지역에서는 아직 신석기 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에서 발견된 기원전 1천년경의 벼의 꽃가루는 당시의 유적이 존재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벼의 원산지가 동인도와 베트남 등지의 무더운 기후 지역이기 때문에 나주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농경사회가 형성되었으며 이에 따른 신석기 농경문화가 영산강의 퇴적층 속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원전 1천 년경에 시작되는 청동기시대에 나주에서는 고인돌과 유물산포지의 유적과 토기, 석기 및 청동기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유물이 삶의 흔적을 나타내는 도구들인 반면 청동기시대 유물과 유적은 죽음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고인돌은 우리 선조들이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 인식을 담고 있는 유적이다.
나주지역의 고인돌은 지석(支石)이 없는 개석식(蓋石式)과 남방식이 대부분이나, 봉황면 만봉리 저수지와 다시면 회진리 회진토성, 다시면 송촌리 본촌 등의 고인돌이 판석으로 만든 석실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북방식으로 밝혀졌다. 남방식은 지석묘 덮개돌 밑에 4-8매의 지석을 고이고 지하에 석실을 만든 형태이며, 개석식은 지석 없이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바로 덮개돌을 덮는 형식이다.
기존에 알려진 고인돌은 133개군 1,41기였으나 1998년의 지표조사시 117개군 1,000기가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14개군 60기가 새롭게 확인된 유적이기 때문에 이미 35개군 101기의 고인돌이 도로건설이나 경지정리, 묘지조성, 야산개간 등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주지역의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들로는 무문토기편이나 화살촉 등이 많다.
그리고 유물산포지는 대체로 주거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장 대표적인 곳이 노안면 영평리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석검, 삼각형석도, 방추차, 편평단인석부로 보아 주거지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곳이다.
2001년 발굴된 금천면 촌곡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수혈주거지 총 9기가 나주지역에서 최초로 발굴되었다. 주거지의 형태는 방형과 타원형이며, 그 내부에는 충청도지방의 송국리 계통의 타원형의 구덩이와 주공이 있고, 층위상의 계단식과 방형계가 원형계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촌곡리 제4호 수혈유구에서 석기제작에 필요한 석재와 미완성의 석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주거지와 생산 장소라는 공간분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주지역의 청동기문화는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문화의 성격은 대체로 충청도의 송국리 고인돌문화와 유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생업수단은 수렵과 채집 이외에도 농경이 포함될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자료는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
학자들은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지배계층이 출현하는 족장사회에 진입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 나주판촌리지석묘군(羅州板村里支石墓群)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판촌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군.
나주판촌리지석묘군(羅州板村里支石墓群)은 논 가운데에 14기(基)가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뚜껑돌식[蓋石式]으로 돌방[石室]의 구조에 따라 세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부정형할석(不整形割石)으로 만들어진 장방형돌방무덤[長方形石室墓], 판석(板石)을 수직으로 세워 돌널[石棺]과 돌방을 만든 형식, 그리고 판석을 지면에 평행으로 높여 돌방을 구획한 것 등 세 가지 형식이 그 것인데, 축조순서에 있어서도 위와 같다.
이 판촌리 고인돌은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장축(長軸)의 방향도 모두 동서방향으로 통일되어 있다.
제6호와 제11호, 제4호와 제12호, 제13호와 제14호 고인돌의 경우는 하나의 뚜껑돌[蓋石] 아래에 두 개의 돌방이 함께 있는 복합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이 고인돌사회가 적어도 부부나 혈연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혈연집단이었으며, 아울러 이곳은 그들 성원들의 공동묘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돌방의 규모를 볼 때 성인을 직접 묻기에는 너무 작은 것들이 있는데, 이는 이차장용(二次葬用)이나 유아용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들 판촌리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에는 제3호고인돌 부근에서 발견된 슴베식돌살촉[有莖式石鏃]이 1점 있고, 그 밖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그리고 이들 고인돌들은 한국 고고학 편년에 적용해볼 때, 초기철기시대 또는 청동기 시대 후기(서기전 300∼0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나주마산리고분군(羅州馬山里古墳群)
나주 마산리 고분군 및 출토 옹관 실측도
분야 : 선사시대:고대-삼국성격고분 건립시기 : 백제시대 초기(3세기경) 규모 : 구덩이(길이 225∼260㎝, 너비 60∼65㎝, 깊이 30㎝)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나주 마산리 고분군 및 출토 옹관은 1975년에 실시된 나주댐(대초댐) 수몰지구 발굴조사 때에 마산리 2구 쟁기머리의 고인돌을 발굴하던 중 발견되었다. 모두 3기로서 백제 위석식 고분이며, 그 밖에 독무덤 1기도 함께 발견되었다. 고분은 평지의 바닥에 깊이 30㎝ 내외의 구덩이를 파고, 주위에 돌아가면서 구획삼아 40㎝ 미만의 부정형 할석을 1, 2열 포개 두른 간단한 구조의 위석묘이다. 바닥에는 작은 자갈을 깔았으며 널을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구덩이의 규모는 길이 225∼260㎝, 너비 60∼65㎝이다.
유물은 1호분에서 구형 둥근 바닥의 회백색 연질토기항아리와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
2호분에서도 구형 둥근 바닥의 연질 황갈색 백제토기항아리가 출토되었다.
3호분에서는 몸통이 매우 넓은 항아리 1점이 출토되었다.
토기형식으로 보아 백제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호분의 철편은 손칼의 모습과 비슷하며 돌방의 동쪽 벽 가까이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위석묘는 그 구조 자체가 널무덤에 돌을 두른 것으로 보아 널무덤에서 발전한 무덤양식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위석묘는 담양 제월리에서도 유개합(有蓋盒)ㆍ마구ㆍ무기류ㆍ청동거울 등과 함께 발견된 적이 있다.
이러한 위석묘는 마산리와 제월리의 출토유물을 비교해볼 때, 널무덤에서 발전한 새로운 변형양식의 묘제이다.
3세기경에 출현하여 6세기 후반까지 돌방무덤과 관계없이 병행되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묘제는 널이 사용되지 않은 앙와신전장(仰臥伸展葬)의 간단한 봉토분이며, 머리방향은 서침(西枕)과 북침(北枕)의 두 가지 예가 보인다.
나주의 옹관고분시대는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따르자면 삼국시대에 속하는 시기다.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시기와 동시대이긴 하나 일제 강점기 이후 주욱 이어져온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놓고 보면 삼국 외에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풍부한 유물을 보여주고 있다. 국사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의 내용과『진서(晋書)』, 그리고 일본의 고대기록인『일본서기(日本書紀)』등의 역사기록과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회는 역사적으로 마한(馬韓)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마한은 삼한중 하나로 진국(辰國)에 뒤이어 한반도 남부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삼한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 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한(馬韓)은 경기·충청·전라지방, 진한(辰韓)은 낙동강의 동쪽, 변한(弁韓)은 낙동강의 서쪽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중국측 기록인『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를 보면 얼마동안 마한이 삼한의 주도권을 행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한은 새롭게 등장한 북방계의 백제에 의해 점차 밀려나고 있음이『삼국사기』에 나타나고 있다. 온조왕 26년(서기 8년)에 마한의 국읍을 병합하였고, 27년(서기 9년)에는 드디어 마한이 멸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사료에서는 마한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온조왕대로 올려서 기록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마한이 멸망하였다는 것은 중부지역의 목지국이 해체되었음을 의미하며 그 시기는 대체적으로 3세기중엽으로 보고 있지만, 이시기에 남쪽에서는 마한의 성읍국가들이 남아 있다고 추정된다.
또한 고고학계에서는 이미 나주지역에서 수 차례 고분군에 대한 발굴이 이어졌고, 그 성과에 따라 역사학계와는 달리 6세기에 들어서서야 백제에 통합되었다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복암리 3호분 발굴에 직접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했던 전남대학교 임영진 교수의 주장을 보면 마한의 발전단계를 5단계로 나누고 3단계에 처음으로 영산강 유역의 마한을 언급하면서 충청도 지역의 마한이 3세기 후반에 백제에 흡수되었고, 그 잔류세력이 영암군 시종면 일대 해안과 가까운 지역에서 함평과 영암 지역으로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던 세력들을 통합하여 나가는 발전과정을 거쳐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면서 4세기 중엽에는 보다 내륙 쪽인 나주 반남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갔다고 보고 있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 (羅州 伏岩里 古墳群) 사적 제404호 (1998년 2월 20일 지정)
전라북도 지역의 옹관묘가 대형화하기 직전에서 발전을 멈춰 4세기 중엽 이미 백제에 통합되었다고 보았고, 영산강 유역은 전혀 백제의 영향력 없이 독자적인 대형 옹관묘를 조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남대 임영진 교수는 마한 세력이 다시 5세기 중엽에 다시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 그곳에서 6세기 초에 마지막을 맞게 되었다고 보았고, 그 증거로 복암리 3호분을 들었다.
▲ 나주 오량동 옹광가마터 (사적 제456호, 2004년 10월 27일 지정)
문화재청은 2001년과 2002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17기의 가마 중 5기의 가마를 조사했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옹관묘에 사용된 대형 전용옹관 가마터가 나주시 오량동에서 대량 발굴되어 또 다른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형 옹관(甕棺) 고분들이 강력한 세력을 가진 고대국가를 형성했다는 반증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옹관의 주인과 제작방법에 많은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옹관 가마터가 한 곳에 집중된 상태로 1천5백여 년이 지나 나주시 오량동에서 발견되어, 호남지역 고대사회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줄 열쇠로 학계 안팎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그 동안 고고학계는 옹관을 구운 가마는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었다. 따라서 오량동 가마터는 한국고대문화사를 새로 쓰는 결정적인 단서가 됨을 의미한다.
옹관은 옹기와 같은 성질을 가진 동일시대의 생활용기로 점토와 제작방식 등에 있어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그 규모가 크고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묻는 일종의 관으로써 용도가 한정돼 있어서 제작방식과 유통에 많은 의문점을 지녔다. 길이가 1.5~2m에 이르고, 무게가 100㎏ 내외로 대형이어서 화도(火度)를 맞춰 일반 옹기처럼 가마에 넣어 굽기가 불가능할 것이란 점 때문에 옹관의 제작과정은 지금까지 수수께끼에 쌓여 있었다. 그래서 학계는 그 동안 고분에서 출토된 옹관들은 장례시 무덤 옆에서 구덩이를 파고 흙을 쌓은 임시가마에서 만들어 관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해왔다. 이 때문에 수많은 옹관의 출토에도 불구하고 옹관을 만든 가마 등의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집단 가마터 발견으로 이러한 주장은 낭설이 되어버렸다. 대형옹관을 직접 구워낸 대규모 가마터가 집적된 유적이 확인되어 옹관을 한 지역에 토굴형 가마를 짓고 옹기처럼 구워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근 영산강 수계를 따라 분포한 옹관고분지역의 수요에 따라 대량생산을 통해 분배, 공급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특히 가마의 성격뿐만 아니라 점토채취와 옹관을 빚은 공방터, 운송로인 나룻터 등도 인근에 묻혀 있을 가능성도 높아 옹관제작과정과 영산강 수로를 통한 유통경로까지 새롭게 드러날 경우 당시의 지배세력의 상업생산 및 경제활동 범위와 내용도 추정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백제다, 마한이다, 또는 전혀 다른 고대국가 세력이다"는 등 옹관묘의 주인을 놓고 쌓인 고대정치세력의 실체규명에도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더불어 문화재 당국의 학술조사가 이뤄지면 이 같은 옹관을 둘러싼 고대사회의 풍습과 세력형성, 경제활동 등의 의문점을 풀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특히 오량동 가마터는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복암리 고분과 직선거리로 2㎞에 인접해 있고 양지역 옹관이 시기와 제작방법, 문양, 제작자가 동일한 것으로 확인돼 4~5세기 호남 서남부지방의 고대사회의 베일을 벗겨줄 결정적 유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나주 오량동 옹관가마터 발견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계는 물론 문화재 당국도 깜작 놀라고 말았다. 우리나라 고대사의 한 축을 형성한 호남권의 묻혀진 역사를 밝혀줄 실마리가 마침내 나왔다는 환호성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나주 복암리고분의 주인으로 알려진 영산강권역 지배세력에 대한 의문이 풀릴 중요한 유적이다"면서 "이 정도라면 국가사적지로 지정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한발 앞서 나갔을 정도다.
최성락 목포대박물관장은 "이번 기초조사를 토대로 나주시와 문화재청이 예산을 책정해 고대사회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학술조사연구와 보존대책을 병행해야한다"면서 "집단적으로 조성된 가마터의 보존상태가 양호해 국가사적지 지정이 충분하고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유적의 최초 발견자인 박철원 동신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남도로부터 사적지로 가지정 받아 현장을 보존하고 성격을 파악한 다음 국가사적지로 지정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면서 "사적지 지정은 기초조사를 실시한 지역뿐만 아니라 인근 구릉지 3곳 모두를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옹기를 굽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흙과 불을 관리하는 능력은 1천5백여 년 전의 지배세력에겐 통치권의 기반이 되기에 충분했다. 옹기나 옹관 등을 굽기 위해 가마를 짓고 불을 때는 기술은 당시의 산업 생산 활동으로선 최고의 수준으로써 지금으로 치면 최첨단산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발굴팀의 추정으로는 나주 오량동 옹관 가마터는 4~5세기 호남지방 지배세력이 운영하던 관요(官窯)로 산업생산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가마의 규모가 길이 9m, 너비 2.2~2.5m, 깊이 75㎝에 이르는 대형 가마로서 복암리고분과 영산강변 인근 구릉지에 밀집 조성돼 「옹관가마단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기초조사를 실시한 7만여 평의 발굴지 외에도 맞은 편 능선 2만여 평의 구릉지에서도 가마터 흔적이 추가로 나타났다. 또 현재 농공단지가 들어선 뒷쪽 묘역 인근 1만5천여 평 언덕배기에서도 역시 동일한 집단 가마터 흔적이 엿보여 오량동 일대가 영산강 수로와 연결된 생산과 운송의 지리적 조건을 완비한 대규모 가마촌을 형성, 당시의 「최첨단 산업단지」였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더욱이 이곳에서는 옹관뿐만 아니라 옹기 등의 도기파편도 함께 출토돼 다양한 생활용기 생산의 집적단지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때문에 발굴이 계속될 경우 점토채취장을 비롯하여 공방터, 재료 가공터, 다양한 종류의 가마, 옹관 및 옹기의 창고, 운송 나룻터, 도공들의 거주지 등 체계적인 분업화 현장의 형태를 틀림없이 갖춘 산업생산의 전진기지가 드러날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오량동 옹관 가마터는 완만한 구릉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토굴을 파고 들어가는 터널식으로 통풍과 배수 등을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2개 정도의 옹관이 들어갈 소성실과 불을 때는 연소실 및 배수로 등을 안쪽과 입구 쪽으로 구분해 과학적 방식으로 설치됐다. 연소실 쪽엔 장작불 땐 숯덩이가 그대로 남아 있고 입구 양편에 기둥을 세워 작업공간을 확보한 흔적도 보인다. 특히 각 가마들은 수차례 반복 사용한 후 폐기한 다음 다시 안쪽으로 더 파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한 장소에서 두 세 번의 가마를 새로 지어 장기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구운 옹관은 가마불 온도가 800~1천도로 1천200 내외의 경질토기나 그 이상인 청자·백자 등 보다 낮아 불을 다루기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또 풍향과 계절, 나무, 점토 등에 따라 불의 성질이 달라 당시 도공들은 옹관 빚는 솜씨와 불 다루는 기술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2000년에 실시한 옹관제작실험 결과 1m짜리 옹관은 성공했지만 1.5m 이상의 대형옹관은 허물어져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지금도 옹관굽기의 기술은 수수께끼에 가깝다.
다만 나주 지역 곳곳에 산재한 옹관편을 볼 때 지금 옹기를 성형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면이 보이고 있다. 흙을 지금처럼 곱게 빻아서 반죽했던 것이 아니라 모래가 드문드문 섞인 거친 흙을 사용했으며 여기에 탄화물 즉 재를 섞어서 반죽함으로써 두꺼운 옹기를 구울 때 터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그 무게 역시 크게 줄인 것으로 여겨진다.
복암리고분의 주인공이었던 당시의 지배세력이 영산강 인근의 나주와 영암, 함평, 영광, 해남 등지에 옹관을 배분·판매하는 강력한 경제권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오량동 가마단지는 그 지배력의 원동력이 됐던 첨단산업단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이 백제에 복속된 것은 앞 장에서 논의한 바 있지만 지금까지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동성왕 시대 이후로 보인다.
물론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마한 통합은 온조왕 시대이며,『일본서기』 신공기는 영산강 유역의 공략이 근초고왕대(369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20년에 熊津橋(웅진교)를 架設(가설)하였다. 7월에 沙井城(사정성:위치미상)을 쌓고 ?率(한솔) 毗陀(비타)로 鎭戍(진수)케 하였다. 8월에 왕은 耽羅[탐라:濟州島(제주도)]가 貢賦(공부)를 바치지 않으므로 親征(친정)하여 武珍州[무진주:光州(광주)]에까지 이르렀다. 耽羅(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罪(죄)를 청하므로 그만두었다. (…王以耽羅不修貢賦親征至武珍州耽羅聞之遣使乞罪乃止耽羅卽耽牟羅)
이 기록을 보면 동성왕이 백제의 발달한 항해술을 두고 육로로 친정하여 무력시위를 하였다는 것인데, 그나마 무진주에 머물렀다는 것은 아직 영산강 유역을 복속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 기록을 근거로 영산강 유역은 강력한 토착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고,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패하여 죽은 이후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 때부터 성왕 이전까지는 남쪽보다는 신라와 고구려와의 투쟁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영산강 유역에 대해서는 최소한 자치권을 인정하였으리라는 것도 그리 큰 억측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한성 이남의 땅을 고구려에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다시 사비로 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영산강 유역을 공략하였다는 것이 차라리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지배한 것은 어쩌면 1세기 정도밖에 안 되는 기간일 수도 있다.
백제는 6세기 중반 이후에야 영산강 유역에 할거하던 독자적인 고대 연맹체를 해체시키고 직접 지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대 연맹체의 중심지였던 반남면 일대에 대하여 하위의 행정단위인 일개 성(반나부리성)으로 편제하였고, 대신 나주시내 일대에 대해서는 그보다 상위의 행정단위인 군(발라군)으로 편제하였다. 이는 기왕의 토착 맹주세력을 억누르면서 새로운 지역의 세력집단을 중심으로 재편성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이후 서기 660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당은 지배야욕을 드러내어 전남 지역에 사반주, 대방주, 분차주의 3주를 설치하려 하였고, 이 가운데 나주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 대방주였다. 그러나 실제로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신라에 의해 축출된다.
서기 667년 당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난 후 신라는 전국을 9주로 편제하고 나주를 발라주(發羅州)로 승격시켜 오늘날의 전남지방을 관할하는 치소로 삼았다. 이는 영산강 유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였음을 통일신라가 인정했음을 뜻한다. 이는 과거 백제가 고대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였던 반남 지역을 반나부리현이라는 일개 현으로 강등시켰던 것과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토착세력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음인지 발라주는 9년만에 발라군으로 강등되고 무진군(지금의 광주)을 무진주로 승격시켜 무진주 중심의 지방편제로 개편하고 반남지역은 다시 반남군으로 승격시켰다. 이와 함께 신라의 군사조직인 10정 가운데 미다부리정을 미동부리현에 설치하여 무진주 관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토착세력을 통제하게 한다. 이후 발라군은 경덕왕 16년에 금산군(錦山郡)으로 중국식 지방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 시대 말기에 신라와 중국과 일본을 망라한 해상무역왕인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된다. 청해진 대사란 관직은 신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직명으로 신라의 중앙정부가 장보고의 영향력을 인정해주는 부분이다. 나주와 장보고의 인연은 철야현에서 있었던 민애왕과의 격전으로 알려져 있다.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고 난 후 균정과 제륭이 왕위쟁탈전에서 균정이 패하면서 균정의 아들 우징이 청해진에 도움을 요청했다. 장보고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경주로 향했다. 장보고군은 무진주 속현이었던 철야현에서 부딪혀 크게 승리하고 경주까지 가서 우징을 신무왕으로 등극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신무왕의 뒤를 이은 문성왕의 왕후가 되기를 바랐으나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가진 신라가 이를 용인하지 않아 장보고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경주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무진주의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살해하고 청해진을 와해시키고 말았다. 당시 나주는 장보고의 영향력 아래 중국의 산동반도와 해상교역을 했다고 하며 청해진의 와해로 인하여 신라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싹텄으리라 추측된다.
지방의 치소였던 무진주와 그 군사력이 집결된 미다부리정은 중앙정부를 대표하는 곳이었고, 해상무역을 해온 나주지방의 호족들과는 점차 대립관계가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앙에서 방수군의 장수로 무진주에 온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면서 나주지역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어온 방수군(防戍軍)인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속하게 되고 북쪽에서는 궁예가 고려(후고구려, 태봉, 마진)를 세워 후삼국으로 다시 정립된다. 나주는 거듭되는 전쟁으로 인해 전비 마련에 큰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견훤이 무진주에서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느슨해진 통제를 틈타 바다를 통해 들어온 송악의 왕건과 손을 잡게 된다.
왕건이 나주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몇 가지 측면에서 후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우선 첫째로 후삼국의 쟁패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후백제를 위 아래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취해 위협했다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승리의 요인이었다. 둘째로 광대한 나주평야의 양곡을 획득함으로써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에게 안정을 되찾게 해주고 또한 풍부한 군량미로 인한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어 또 다른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왕건 개인으로서는 궁예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됨으로써 훗날 유금필, 배현경, 박술희 등이 앞장선 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또한 나주에서 장화왕후 오씨를 만나 2대왕인 혜종을 얻게 된다.
나주는 왕건으로 인해 금성군에서 나주라는 이름을 얻는다. 당시 상황으로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무진주를 두고 나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동안 무진주 중심의 지방편제에서 나주중심의 지방편제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특히 왕위에 등극한 직후인 918년 9월 나주도대행대(羅州道大行臺)를 설치하고 전 광평성 시중 구진(具鎭)을 나주도대행대 시중으로 임명하여 파견한다. 나주도대행대란 고려의 중앙정부와는 별도로 나주를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특별기구였다. 이처럼 나주를 특별구역으로 하고 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직명을 중앙의 최고관직인 시중이라 칭했던 것이나 그 자리에 광평성의 시중을 파견했던 것 등은 나주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견훤은 왕위 계승문제로 아들들 간의 다툼이 일어나 맏아들 신검에 의해 김제 금산사로 유폐되었고, 결국 금산사를 빠져나와 나주로 탈출하여 송악의 왕건에게 의탁하고 만다. 이로써 후삼국은 외세의 개입없이 순수하게 옛 삼한의 땅에서 일어난 힘, 우리 민족에 의해 통일되었다.
고려는 성종 2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12목을 정할 때 나주, 전주, 승주에 목(牧)을 설치하였고, 현종 9년 전국을 8목으로 조정할 때 전주와 승주는 제외시키고 나주만 호남 유일의 목으로 남게 하였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몽진했던 것도 역시 고려왕실과 나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친후백제 노선을 견지했던 무진주는 통일신라시대 지방 편제의 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양현(海洋縣)으로 강등하여 나주목을 중심으로 한 지방 편제를 확고히 하였다.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중심은 목이었다. 도 단위에 해당하는 안찰사는 감찰업무만 수행하였고 반면 도 단위의 항상적인 지휘업무는 목의 계수관의 몫이었다. 따라서 나주목은 전남지역 군현에 대한 감독업무를 수행하는 중심치소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주목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5개의 속군과 11개의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고, 지방관이 파견된 1부, 4군 4현의 영군현을 지휘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지방 편제는 어느 정도 지방의 호족 세력의 강약을 염두에 두고 시행된 일종의 봉건제도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를 정비하면서도 나주는 목으로 조선조 말기까지 이어졌다. 태조 2년에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을 정하면서 완산, 광주, 나주의 세 곳이 계수관으로 정해졌고, 세종 때에는 광주가 빠지고 남원도호부, 장흥도호부, 제주목이 추가되었다. 이때 나주목은 해진, 영암,영광 등 3군과 강진, 무장, 함평, 남평, 무안, 고창, 흥덕, 장성 등 8현을 영속하고 있었다. 계수관제도는 관찰사제도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행정 기능은 관찰사에게 모두 넘어가고 주로 군사조직에 활용되었다. 계수관제가 진관체제로 개편됨에 따라 전남지방의 군사조직은 나주의 병마첨절제사가 담당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외관직 조에 따르면 나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 종5품의 판관 1명을 두고 목사 아래 좌수 1인, 별감 3인, 군관 50인, 아전 80인, 기생 22인, 사령 41인, 관비 17인이 소속되어 있다.
조선조 나주는 국난극복의 선봉에 있었다. 1592년 임진년 일본 전국시대를 마감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평정한 여세를 몰아 조선 침략에 나섰다. 이른 바 ‘明征假道(명나라를 칠 길을 빌림)’를 명분으로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3군으로 나누어 파죽시세의 군세로 한양까지 점령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하였다. 이때 나주에서는 수원부사를 지낸 김천일이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에 뜻있는 인사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출병하여 북상하여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1차로 왜군을 맞아 대승하였다.
선조가 있는 의주에 장계를 올려 선조는 김천일에게 호남창의사(湖南倡義使)칭호를 내리고 장예원 판결사(掌禮阮 判決事)를 제수하였다. 김천일은 이후 권율과 작전을 함께 짜고 지휘를 함께 하는 등 의병장으로써 권율의 행주산성 싸움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한 진주성에 들어가 주장으로 큰 싸움을 맞게 되었다. 진주성은 호남의 관문이라 진주성을 지키지 못하면 호남의 53성이 짓밟힐 위기에 처하여 김천일은 관군도 아닌 의병장으로 가장 먼저 입성하여 막강한 적의 군세를 막고 병든 몸으로 성과 운명을 함께 하였으며 성이 함락되자 맏아들 상건과 함께 순의의 길을 택하였다. 적은 진주성 싸움에 10만 대병을 동원할 정도로 총력을 기울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수만의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진출할 여력을 잃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후조당 이용제 장군, 김해부사 이종인, 동강면의 최오 의병장 등 나주의 의병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전국에서 가장 왕성한 의병활동을 벌여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주역이 되었다. 이러한 나주의 의병정신은 진정 나주를 지탱하는 하나의 정신적 원류로서 일제강점기까지 계속 이어져왔다.
6. 6. 한말의 국권 상실기(1894-1910)
이 시기에 1894년 나라를 바로잡고자 하는 동학의 봉기가 있었고, 1895년 나주관찰부의 설치가 있었고, 단발령과 이를 무자비하게 집행하였던 관리들에 항거한 나주인들의 의거가 있었으며, 1897년 대한제국 선포가 있었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이 있었다.
나주는 다른 어느 고장보다 보수성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그러나 그 보수성은 당시 나주인들이 가진 가치관중 가장 소중한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당대의 상황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나주는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던 시기에 항일의 의기로 일어선 항일의병 활동이 특히 왕성했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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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일제는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남평군 일원과 함평군에 넘겨주었던 적량, 여황, 장본의 3개면을 다시 편입되어 총 42개면이 되었다가 각 면 폐합에 따라 19개면, 222개 동리로 개편되었다. 1917년에는 양지면이 영산면으로 개칭되고, 1929년 나주면과 나신면을 합하여 나주면으로 칭하였으며 1931년 나주면은 나주읍으로, 193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였다. 영산포는 현재 전라남도자동차운전면허시험장이 들어선 내영산 일대에 주로 사람들이 살았으나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강 건너 현재의 이창동과 영산동 등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른다.
1919년 삼일절독립투쟁 때는 나주는 별다른 소요가 없었다. 나주읍내 수백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가 자진해산하는 정도로 규모도 작았다. 나주지방의 민족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이어진다.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신간회, 학생운동 등이 조직되고 나름의 운동을 펼쳐나간다.
1920년 나주청년수양회로부터 시작하여 1922년 나주청년회관을 준공하고 나주청년회로 이름을 바꾸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나주의 노동 농민운동은 주로 경성에서 활동하던 사회운동가 이항발(李恒發, 1891년 11월 25일 ~ 1957년 3월 20일)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는데, 궁삼면 토지회수토쟁 지원, 소작쟁의 지원, 노동자들의 파업 지원 등의 활동을 펼쳤다. 게다가 1927년 창립된 신간회는 나주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을 모아 나주협동상회운동, 남평유림각 사건, 학생독립만세운동 등에 큰 역할을 하였다.
▲ 궁삼면 토지회수 항일농민투쟁(1908~1945)
1887년. 이 해는 극심한 흉작으로 전라남도 나주군 영산포 읍(舊 上谷面)과 왕곡면(旺谷面, 舊 郁谷面) 세기면(細技面, 舊 技竹面)은 거의 한 톨의 수확도 거둘 수 없었다. 당시 탐관오리들은 이를 기회로 포착하고 지죽면, 욱곡면, 다시면 등지의 드넓은 땅을 착복해버렸다. 당시 거듭되는 흉년으로 조세를 내지 못한 농민들에게 경저리(지방관) 김성창(金聖暢) 등이 대납하였다고 하면서 백지날인을 시켜 훗날 이 땅을 모두 몇몇 관리 앞으로 옮기고 이를 다시 경선궁(慶善宮, 嚴妃의 저택)의 궁장토로 되팔아버림으로써 궁삼면(宮三面)이란 명칭을 갖게 된 사건이었다. 이에 불복한 농민들이 소송을 걸어 최고재판소로부터 농민들이 승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선궁은 다시 이 땅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팔아 땅을 잃은 농민들은 해방이 되고 동척을 그대로 인수한 미군정의 신한공사에 이르기까지 땅을 되찾기 위한 끝없는 투쟁을 전개해왔던 것이다. 나주지역에는 1950년부터 시작된 남한의 토지개혁 때 땅을 되찾고도 아직 자기 앞으로 소유권 등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땅이 상당수 있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선 동사무소에서 땅의 원주인을 되찾아주는 운동까지 펼쳤을 정도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은 소설가 문순태에 의해 『타오르는 강』이라는 대하소설로 형상화되어 우리에게 다시 그 꺼지지 않는 불길을 보여주었다.
타오르는 강 1, 2권 - 문순태
동양척식주식회사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되찾은 나주는 곧바로 20일에 일본인 나주경찰서장으로부터 치안권을 인계받아 박공근을 치안대장으로 하는 치안대를 구성하고 곧 이어 김창용을 위원장으로 박준삼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 나주지부를 발족시켜 해방공간에서 나주를 우리 나주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중앙의 건준이 인민공화국으로 바뀐 뒤 지방은 인민위원회로 바뀌게 되는데, 나주는 건준이 그대로 인민위원회로 이행된다.
10월 하순 미군이 전라남도에 들어오면서 도 인민위원회의 해산을 명하게 되는데, 나주의 경우 미군정은 인민위원회가 추천한 김창용을 나주군수로, 박형배를 경찰서장으로 그대로 받아들였다.
1946년 들어서면서 미군정은 이미 그들이 인정했던 토착적인 민족운동세력을 좌익으로 보고 이들을 모두 연행하여 축출하는 대신 일제 때의 관리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주지역의 인민위원회 세력은 그 세력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일제보다 더 가혹하게 실행하는 공출 등으로 1946년 11월 1일 7천여 명 이상의 민중이 참여하는 대규모 민중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 봉기는 미군과 경찰과 비행기까지 동원한 진압으로 16명이 사망하였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민중봉기는 11월 봉기 이후 계속되었다. 그러나 군정과 경찰은 적극적으로 우익을 육성하였고, 특히 1950년부터 시작된 토지개혁 이후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우파 중심의 사회로 재편되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집단적으로 학살된 양민학살이 6.25전쟁기에 이곳 나주 다도면에서도 있었다. 자력보다는 타력에 의한 성격이 강했던 한국의 해방, 해방 당시 북쪽은 주로 소련의 영향 아래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좌익세력이 장악하였고, 남쪽은 이승만, 김성수 등을 중심으로 친일세력을 규합한 우익세력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중도좌익세력,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등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군이 진주하면서 일제의 행정력과 경찰력을 그대로 활용하고 그 권력의 정점만 일제에서 미군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일제에 붙어서 조선민중을 핍박하던 자들이 일제의 패망으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 관망하다가 미군정에 의해 다시 권력에 빌붙을 기회가 생기고, 여기에 정권을 잡기 위해 국내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세력을 확장하려는 이승만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한민당이라는 정당으로 그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다도면 암정리 소개작전
한국전쟁 당시 다도면 암정리 갱갱굴과 절꼬랑에 살면서 피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군경이나 빨치산 양쪽으로부터 적으로 취급당하고 살았다. 군경은 나주나 영산포로 피난가지 않았다 하고 괴롭히고, 빨치산은 군경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면서 밤낮을 번갈아가면서 괴롭혔다.
1월 21일 아침이 밝아오자 눈덮힌 산으로부터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산을 쳐다보니 산에서 군경이 봉황쪽에서 넘어오고 있었고 마을 아래쪽으로도 들어와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총소리를 들은 마을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귀로는 핑핑 스치는 총알소리를 듣고 옆에서는 다른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기를 쓰고 뛰어서 도망하였다. 1차 작전이 끝나자 군경은 빨치산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다가 집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쏘아 죽였다. 이날 28명이 억울하게 죽었다.
55년만에 다도면 양민학살 위령제 봉행(2006.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