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 1224-142
불회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로 잡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뒤, 기둥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을 둘렀다. 평방 위에 공포(栱包)를 짜 올렸는데, 안팎으로 각각 4출목, 3출목의 포작(包作)을 짜고 화려한 장식을 조각하였다. 또 가운데 칸 양쪽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을 조각하였다. 내부에는 우물천장을 하고 장여와 천장 사이에 있는 벽에 22개의 각종 벽화를 그려 넣어 공간을 장엄하였다.
『조선사찰사료』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나주시 다도면 덕룡산 동쪽기슭에 세운 것이 시초로, 그 후 고려 말 원정국사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정조 22년(1798) 무오 2월 큰 화재를 입어 그 후 순조 8년(1808) 무진 5월에 중건하고, 1978년 목재와 기와를 바꾸어 말끔히 보수되었다. 2001년에는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에서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310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대웅전 내부에는 22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온통 연꽃과 바다 물고기와 게가 조각되어 있다.
보물 제1310호. 불회사 대웅전 내부 사진
불회사 대웅전 뒤편에는 동백나무 숲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비자나무 군락지가 있다. 불회사는 처음에는 어귀의 돌장승과 아름다운 대웅전에 끌리며 여름철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숲이 주는 상쾌함과 봄비 내리는 날의 대웅전 뒤편의 춘백 숲에서 느끼는 봄기운, 특히 5월쯤 연두 빛으로 막 피어나는 둥그런 산 속에 들어 낮은 대웅전의 모습은 놓치기 아까운 봄 풍경이다. 절 주위의 전나무, 삼나무, 비자나무 등의 숲은 아늑한 분위기를 이루며 단풍이 가장 늦게 드는 지역으로 그 빛깔이 인근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랫동안 볼 수 있는 곳으로 인근의 나주호와 더불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불회사는 특히 사계절 어느 때나 아름다운 산수를 자랑하는 곳으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불회사 대웅전을 둘러싸고 있는 ‘비자나무 숲과 차나무 숲’은 산림청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국가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관리(2016.1.6.)되고 있으며 임상이 아름답고 산림생태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300~400년생 비자나무는 수고 14m에 달하고 이곳의 비자나무와 차나무는 약재 공급원 및 방화림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2. 2. 불회사 건칠 비로자나불좌상(羅州佛會寺乾漆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1545호 시대 : 고려시대 재료 : 건칠불 지정일 : 2008년 03월 12일
불회사 대웅전의 주존으로 모셔진 건칠비로자나불좌상은 삼베와 칠을 6∼8겹 정도 겹으로 올려 제작한 건칠상으로, 눈동자와 백호는 수정을 감입하였다.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우고 철정으로 고정하였다.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은 지권인의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상으로 무릎이 넓은 장대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신체비례와 앞으로 숙인 구부정한 자세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특징이다. 손 모습이나 군의를 묶은 띠 매듭, 대의 착의법 등은 고려 후기 특징인 반면 신체에 비해 큰 얼굴과 상체가 긴 신체 비례, 도식적인 옷자락 표현 등에서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건칠불은 지금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아 그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지는 불상인데, 그 조성 방법이 꽤 많은 공력과 까다로운 과정을 거친다.
특히 주먹 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형태의 지권인 (智拳印)의 수인(手印)은 고려후기의 화엄경 변상도에 등장하는 비로자나불의 수인인데, 불회사 불상은 현존하는 조각에서 이 수인이 표현된 이른 예일 뿐만 아니라 조각적으로도 우수한 불상이다. 나주 시내의 심향사 아미타불과 함께 역사적인 가치가 큰 불상이다.
건칠불은 간단하게는 삼베나 종이에 옻칠을 해서 여러 번 겹쳐 만든다고는 하지만, 기본 바탕 몸체가 되는 소조불이 먼저 만들어지고, 거기에 삼베를 한 겹 한 겹 덧대어 가면서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삼베를 덧대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옻칠이며, 옻칠은 삼베와 삼베를 이어 붙이고 겹겹이 붙이는 역할을 주로 하지만, 거기에 더해 천과 천 사이의 틈을 메우고 미세한 두께감을 더하여 불상의 전체적인 볼륨감을 높이는 데에도 한몫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세밀한 조각 작업을 거치고, 내부의 바탕이 된 소조불을 파낸 후, 채색이나 금칠을 하여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건칠불인데 후손들이 그것도 모르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대부분 목조불상으로 알고 있다.
건칠불상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조선전기에 걸쳐 제작되고 유행하였던 불상의 재료로서 현재 약 20여 구 정도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고려말∼조선초 여래상 작품은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경기도 안성 청원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전라남도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44호), 전라북도 남원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17호), 전라남도 나주 죽림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경상북도 봉화 청량사 건칠여래좌상, 경상남도 하동 쌍계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등이며 비로자나불상은 불회사 불상이 유일하다.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44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
고려시대 희랑대사의 진영상(眞影像)으로 1989년 4월 1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999호로 지정되었다. 앞쪽은 건칠기법으로 뒤쪽은 나무로 제작한 이 상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으며,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과 녹색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그 밑에 금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모습에는 금빛이 찬연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곳은 대담하게 강조하여 노스님의 범상하지 않은 위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서 인간적인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조성 연대는 고려 초인 930년경 이전으로 추정되며,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일한 승려의 진영 조각이라는 점에서도 미술사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나주 덕룡산(468m)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불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말사로 백제 침류왕 1년(384년) 인도승려 마라난타가 중국 영파를 거쳐 영광의 법성포에 도착하여 국왕의 지원으로 불갑사를 창건한 뒤 불회사를 세우고 백제 도성으로 갔다고 전해온다.
불회사를 창건한 마라난타(摩羅難陀, Mālānanda)
불회사의 원래 이름은 불호사이었으나, 1808년 조선 순조 때 대대적으로 중창하면서 이름을 불회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불회사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 당시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었던 곳으로, 불회사 산문을 나서면 화순 운주사로 가는 길과 장흥 유치로 넘어가는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스님들이 많이 모여 살고 절을 대상으로 섰던 큰 장터라 하여 그 이름을 중장터라 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1310호인 나주불회사대웅전羅州佛會寺大雄殿이다. 정조 23년(1799)에 중건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식성이 돋보이는 조선후기의 화려한 다포집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진 팔작지붕(지붕면의 정면은 사다리꼴과 직사각형을 합친 모양이고, 옆면은 사다리꼴에 삼각형을 올려놓은 모양의 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모두 궁창판이 있는 4분합의 빗살문인데 한국전쟁 이전에는 꽃살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기둥은 민흘림기법(아래로 내려올수록 직경이 커지게 다듬는 기법)을 사용했다. 윗면은 기둥 위 창방에 넓고 두터운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전통목조 건축에서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를 짜 올렸으며 포작(공포를 짜맞추는 일)에 있어서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매우 화려한 장식을 보인다. 특이한 점은 중앙 칸 양 기둥 사이에 왼쪽엔 여의주, 오른쪽엔 물고기를 문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는데 외부로는 용두가 그리고 건물 내부의 대들보로 용꼬리를 끼워 넣었다. 건물 내부의 천정을 연꽃봉오리가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부안 내소사대웅보전(보물 제291호)과 건축수법에서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내부의 본존불은 종이를 소재로 한 비로자나부처님을 봉안했으며 좌우에는 흙으로 조성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입상이 모셔져 있다.
불회사 일봉암과 복암사 석굴
웅치의 일봉암자를 회상하며(憶熊峙日封小庵)
香烟深鎖石壇頭 향긋한 연기가 돌제단 언저리에 깊이 잠겼고 古殿寥寥碧桂秋 오래된 전각은 쓸쓸하고 푸른 달빛의 가을이었네 八十老僧見客至 여든의 노승은 손님이 온 것을 보고 呼?合掌供山羞 동자를 불러 합장하며 산속의 음식을 대접했네
이 시는 시서선생이 다도면에 소재하는 불회사에 딸린 일봉암자를 방문하고 난 후 당시의 느낌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일봉암은 터만 남아 있다.
일봉암과 관련된 불회사는 1978년 불회사 대웅전 기와 보수 공사시 발견된 상량문의 기록에 366년 마라난타 스님이 창건하고 희연조사가 656년 재창 1264년경 원진국사가 3창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1798년 2월 큰불이 나 소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지명스님이 1799년 5월 15일 상량하여 현재에 이른다 불회사란 이름은 당초에는 불호사였던 것이 1808년 경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봉암은 불회사 3창주 원진국사와 관련이 깊은 암자이다. 원진국사의 속명은 조한용으로 나주 금천 출신으로 고려말 참의 벼슬을 지낸 후 조선이 들어서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출가한 분이다.
스님이 불회사를 중창하고자 원을 세우고 탁발을 하다 절로 돌아오던 길에 호랑이를 만나 → 호랑이의 목에 걸린 비녀를 뽑아주자 → 그해 겨울 처자를 물어다 절 마당에 내려둠 → 처자가 안동 김 상공의 딸임을 알고 데려다 주자 → 그 집에서는 스님에게 불회사 복원에 필요한 시주를 하였는데 스님의 신통력으로 수미산만큼의 쌀을 다도로 보냄 → 이 자금으로 대웅전을 건립하는데 좋은날 좋은 시각에 상량을 하려는데 일이 장대하여 상량시각을 못맞추게 되자 스님이 뒤산 봉우리에 올라 “호법 선신중이시어 부처님의 대작불사가 해가 짧아 원만히 회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피를 드리워 주소서” 기도하니 해가 잠시 멈추어 원만히 상량식을 마쳤다고 한다.
당시 스님이 기도 드린 곳에 암자를 세우고 일봉암이라고 하였다 한편 스님이 말년에 남암 암자에 수도할 때 까만 새가 아침 저녁으로 날아와 잣나무에 앉아 스님과 대화를 했다는 잣나무를 흑조수라 했는데 몇 년전 태풍으로 한그루는 부러져 현재는 한그루만 남아있다. 6.25때 소실된 일봉암에 대한 역사가 수백년 전 한사람의 노력이 새롭게 빛을 내고 있습니다.
3. 3. 나주 운흥사 '불조삼경(佛祖三經)’
보물 제694-(2)호
분 류 기록유산/전적류/목판본/사찰본 수량/면적 1권 1책 / 38장(표지 2장 포함) 지정(등록)일 2012.02.22 소 재 지 전남 나주시 시 대 고려시대
현전본 중 가장 이른 시기 목판본, 인쇄 문화연구에 귀중
나주시는 지난 23일 나주 운흥사에 소장된 '불조삼경(佛祖三經)'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694-(2)호로 지정되었다고 밝혔다.
운흥사에 소장 '불조삼경(佛祖三經)'은 현존본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361년에 전주 원암사 판각 책판에서 인출한 책으로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고려시대의 불교학 연구의 경향과 인쇄 출판문화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있다.
'불조삼경(佛祖三經)'은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 사이에 한국불교에 깊은 영향을 미친 중국 원나라의 고승인 몽산 덕이(蒙山 德異)가 편찬한 것으로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 '불유교경(佛遺敎經)', '위산경책(山警策)' 등 3종이 합책되어 있다.
불설사십이장경은 석가의 가르침을 42장으로 간추려 설명한 것으로 가장 먼저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된 불교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불유교경은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적은 것이고, 위산경책은 중국 선종(禪宗)의 일파인 위앙종을 개창한 위산 영우(靈祐)가 지은 책이다. 이들 세 책은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알려졌다. 현재 이 책은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오직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판본만이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송원판(宋元版)을 저본으로 고려시대에 전라도 전주 원암사에서 1361년에 간행된 판본과 1384년에 간행된 것 등 2종의 판본이 현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나주 운흥사본(1361년본)과 동일 판본이 이미 보물 제694호로 지정된 바 있어 가지번호를 부여하여 보물 제694-(2)호로 지정한 것이다.
나주 운흥사에 소장된 '불조삼경(佛祖三經)'은 뒤에 발원문이 있어 고려시대 말기 1361년(공민왕 10)에 전라도 전주의 원암사에서 행심(行心)의 발원으로 법공(法空)이 간행의 책임을 맡아 윤선(尹善)의 도움으로 간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운흥사 불조삼경은 2009년 나주시가 문화재로 지정 신청해 3년만에 지정된 쾌거로 지난해 12월 지정예고 기간을 거쳐 올해 2월 22일자로 지정 고시됐다. (나주신문 2012.2.27.)
▲ 보물 제694-2호 불조삼경 (佛祖三經) 2012년 국보 보물지정보고서
『불조삼경(佛祖三經)』은 원나라의 고승인 몽산(蒙山)덕이(德異)가 석가가 설법한『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과 석가가 열반에 들어가기 직전에 최후 가르침인『불유교경(佛遺敎經)』, 그리고 중국 위앙종(僞仰宗)의 개창조로 알려진 위산 영우(靈祐)의 어록인『위산경책』을 합집한 책이다. 특히『불설사십이장경』은 석가의 가르침을 42장으로 간추려 설명한 것으로 불교의 경전을 처음 접하는 초보자에게 불교의 교훈적인 가르침을 쉽게 설명하고 있어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데 도움을 준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불조삼경(佛祖三經)은 원나라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1361년에 전주(全州)원암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1책이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권수에는 원나라 몽산 덕이가 초서로 쓴 서문이 붙어 있고 서문 다음 장에『불설사십이장경』이란 권두서명이 보이고 있으며, 다음의 2행에 역자인 ‘가섭마등(迦葉摩騰)’과 ‘법난(法蘭)’등이,3행에는 주해자인 수수(守遂)가 표시되어 있다. 다음 장에는 송나라 진종(眞宗)이 쓴 『불유교경(佛遺敎經)』에 대한 어제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서문에 이어『불유교경』의 권두서명이 보이고 있으며, 다음 행에 역자 및 주해자가 표시되어 있다.그리고『불유교경』에 이어서 장수(張銖)가 1139년에 쓴『위산경책』의 서문이 실려 있고, 서문 다음 장부터 『위산경책』의 경문이 시작되고 있으며, 끝에는 비구 행심(行心)의 지문(誌文)이 수록되어 있어 이 책은 행심이 발원하고 법공(法空)이 간행의 책임을 맡아 윤선(尹善)의 도움으로 1361년에 전주 원암사에서 간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시대 간본은 전라도 전주 원암사에서 1361년에 간행된 판본과 1384년에 간행된 것 등 2종의 판본이 현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흡사하나 판식의 특징상 판면에 계선의 유무에 따라 확연히 구분된다. 1361년판은 계선이 없고, 1384년판에는 계선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운흥사 소장본『불조삼경』은 현존본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361년에 판각한 책판에서 인출한 책으로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고려시대의 불교학 연구의 경향과 인쇄 출판문화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불조삼경(佛祖三經)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초기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로 후한의 가섭마등(伽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한역한 것이며,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을 모두 42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크기는 세로 26.3cm, 가로 17.2cm이다. 이 책에는 인도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불유교경』과 당나라 영우(靈祐)가 지은『위산경책』이 함께 들어 있는데,『불설42장경』과 합쳐서 불조3경(佛祖三經)이라고 부른다. 책 끝에 있는 기록을 통해 고려 우왕 10년(1384)에 지봉(志峯), 지도(志道)와 시주자 김씨가 함께 간행하고, 이색(李穡)이 간행에 관계된 기록을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글씨체로 보아 송나라의 원본을 보고 다시 새겼음을 알 수 있으며, 글자의 새김이 정교하고 인쇄상태가 선명한 것으로 보아 판을 새긴 후 처음 찍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694-2호 불조삼경 (佛祖三經) 운흥사 소장
불조삼경 (보물 제694-1호) : 서울 용산구,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불조삼경 (보물 제694-2호) : 전남 순천시, 송광사 소장 불조삼경 (보물 제695호) : 서울 용산구,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불조삼경 (보물 제1224호) : 강원 원주시, 한솔제지㈜ 소장 불조삼경 (보물 제1224-2호) : 부산 금정구, 범어사 소장 고양 원각사 불조삼경 : 경기 고양시, 원각사 소장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불조삼경(佛祖三經)』은 원나라의 고승인 몽산(蒙山)덕이(德異)가 석가가 설법한『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과 석가가 열반에 들어가기 직전에 최후 가르침인『불유교경(佛遺敎經)』, 그리고 중국 위앙종(僞仰宗)의 개창조로 알려진 위산 영우(靈祐)의 어록인 『위산경책』을 합집한 책이다.
특히 『불설사십이장경』은 석가의 가르침을 42장으로 간추려 설명한 것으로 불교의 경전을 처음 접하는 초보자에게 불교의 교훈적인 가르침을 쉽게 설명하고 있어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데 도움을 준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불조삼경(佛祖三經)은 원나라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1361년에 전주(全州)원암사에서 간행한 목판본 1책이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권수에는 원나라 몽산 덕이가 초서로 쓴 서문이 붙어 있고 서문 다음 장에 『불설사십이장경』이란 권두서명이 보이고 있으며, 다음의 2행에 역자인 ‘가섭마등(迦葉摩騰)’과 ‘법난(法蘭)’등이,3행에는 주해자인 수수(守遂)가 표시되어 있다. 다음 장에는 송나라 진종(眞宗)이 쓴 『불유교경(佛遺敎經)』에 대한 어제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서문에 이어 『불유교경』의 권두서명이 보이고 있으며, 다음 행에 역자 및 주해자가 표시되어 있다.그리고 『불유교경』에 이어서 장수(張銖)가 1139년에 쓴『위산경책』의 서문이 실려 있고, 서문 다음 장부터 『위산경책』의 경문이 시작되고 있으며, 끝에는 비구 행심(行心)의 지문(誌文)이 수록되어 있어 이 책은 행심이 발원하고 법공(法空)이 간행의 책임을 맡아 윤선(尹善)의 도움으로 1361년에 전주 원암사에서 간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시대 간본은 전라도 전주 원암사에서 1361년에 간행된 판본과 1384년에 간행된 것 등 2종의 판본이 현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흡사하나 판식의 특징상 판면에 계선의 유무에 따라 확연히 구분된다. 1361년판은 계선이 없고, 1384년판에는 계선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운흥사 소장본『불조삼경』은 현존본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361년에 판각한 책판에서 인출한 책으로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고려시대의 불교학 연구의 경향과 인쇄 출판문화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4. 4. 나주 운흥사지 금동여래입상(羅州 雲興寺址 金銅如來立像)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암정로 398 좌표 : 북위 34° 54′ 31.8″ 동경 126° 48′ 7.5″ 규모 : 전체높이 11.2㎝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260호 시대 : 통일신라 지정일 : 2003년 05월 27일
나주 운흥사지 금동여래입상은 운흥사지 발굴조사(발굴조사기관: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2001년 9월 16일 출토된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광배와 몸체와 대좌가 함께 주조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육계는 비교적 두텁고 높게 솟아 있으며 머리는 언뜻 보면 소발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오랜 세월동안 마모상태가 심한 편이긴 하나 나발의 흔적이 역력하다. 더구나 이 나발은 육계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상호는 호형의 예리한 눈썹과 일자형의 눈모습인데 눈두덩이 두툼하게 돋아난 행인형 모습이다. 코와 입술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윤곽이 보이지 않지만 입주위의 양볼에 나타난 알맞은 볼륨은 8∼9세기 금동불에서 느낄 수 있는 모습이다.
양쪽 귀는 길게 수직으로 내려와 어깨 위에서 멎었고 목 밑으로 장식되는 삼도(三道)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이채롭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어깨를 깊숙하게 덮고 있는데, U자형의 옷주름이 앞가슴으로 내려오면서 그 끝자락은 깊숙하게 U자형을 그리면서 다시 위로 올라와 양팔을 걸쳐 동체 뒤편으로 연결되고 있다. 다리는 약간 벌려 직립하였으며 발등과 발가락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수인은 우리나라 초기불상에서 나타나는 통인으로서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대좌는 상·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원형이다. 하대에는 2줄의 띠줄이 돌려지고 그 위로 외잎 8엽의 복련이 조식되었다. 또 상대 역시 외잎 8엽의 앙련이 조식되었는데, 상·하대 연화문의 기법은 매우 소박하고 단조롭다.
광배는 주형거신광인데 상단의 끝머리가 약간 손상되어 꾸부려져 있다. 보존처리시 훼손이 염려되어 그대로 존치했다고 한다. 이 광배는 우리나라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형거신광이면서도 약간 특이한 형식이다. 즉 상단 얼굴 부위쯤에서 두 개의 타원형이 겹쳐진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광배형식은 국내 금동불에서는 희귀한 편이다. 광배의 장식문양을 보면, 외곽은 불꽃무늬로 가득차게 했고, 그 내부로 다시 외곽 형태와 같은 두광과 거신광이 겹친 타원형을 그렸는데 2줄의 음각 띠줄을 돌려 구분하였다. 내부의 두광과 거신광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었으나 그 기법은 정교하거나 치밀하지 않고 매우 형식화 되었다. 광배의 뒷면은 상·하로 구멍이 뚫려 타원형으로 관통되게 하였는데, 이 구멍은 불신내부와 대좌의 내부까지 관통되게 하였다.
나주 운흥사지 금동여래입상은 삼국시대 금동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형거신광이면서도 특이하게도 두 개의 타원형이 겹쳐진 이중원형의 거신광이다. 운흥사지 금동여래입상은 광배 및 대좌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예로서 전남에서는 최초의 사례라 하겠다. 현재 이 금동불은 보존처리가 완벽하게 완료된 상태로서 보관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서 동 시기의 유물이 많지 않다는 데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으며, 고대 불교문화사 이해와 비교연구를 하는데 있어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세부 문양기법이나 주형의 거신광 등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가치가 뛰어나다.
덕룡산(德龍山) 운흥사(雲흥寺)는 초의 선사가 15세(1800년)에 출가수행 한 사찰이다. 《덕룡산 운흥사사적》 및 《운흥사진여문중창기》의 기록을 보면 신라 효공왕때 연기조사, 즉 도선국사가 덕룡산에 이르러 산수의 기와 이치를 보고 자리를 정하여 초막을 치고 이를 도성암(道成庵)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중창했고, 조선시대에 들어 1573년(선조 6년), 1684년(숙종 10년), 1758년(영조 34년)에 중창했다.
초창기에 불렀던 도성암이라는 이름은 웅점사(熊岾寺)로 개칭되었으며 16세기 이후 웅치사(熊峙寺), 18세기 후반부터 운흥사로 다시 개칭됐다고 전해진다. 웅치사의 웅(熊)자의 불을 뜻하는 점 4개가 있어 화재가 빈번하다고 하여 운흥사(雲興寺)로 개칭한 내용이 운흥사사적에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380칸 규모의 대사찰로 15채의 전각과 10채의 요사채 등 20개의 암자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1694년과 1702년 두 차례 화재와 한국전쟁 때 전소됐다. 현재는 혜원 스님이 1998년에 부임하며 점차 불사를 이루고 있는 사찰이다.
운흥사는 창간 후 현재까지 7번의 중창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18세기 초반까지 30여동의 당우가 있었고, 20여개의 산내암자를 거느렸던 큰 사찰이다. 조선 후기 다선일여(茶禪一如)로 유명한 초의선사가 어린 시절 동진출가했던 절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운흥사와 운흥사의 옛 암자터인 동원과 문수암터인 문성암 주변으로 차나무가 많이 있어 곡우와 입하 사이에 많은 시민들이 차를 따고 덖을 수 있는 곳이다.
운흥사에 있던 초의선사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스님이 대둔사 주지로 부임하여 스님들 사이에서는 운흥사가 대둔사의 큰 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운흥사 초입에 있는 석장승은 할머니 장승 뒤에 강희58년(1719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인근 석장승의 제작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다. 사찰 입구의 장승은 사마의 접근을 막는 금역을 표시하는 것으로 운흥사와 불회사의 석장승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불회사의 하원당장군(남)·상원주장군(여)은 운흥사석장승에서는 남녀가 엇바뀌어 표시되고 있는데, 장승에 새겨진 당(唐)은 사당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의미하고 주(周)는 꼬불꼬불한 길을 의미한다고 한다.
2001년에는 신법당지(대웅전)와 그 주변을 발굴하여 3개의 건물지를 확인하고 그 중 3건물지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을 발굴하였다. 본체와 광배, 대좌를 하나로 만든 높이 11.2cm의 이 불상은 주형거신광(배와 같은 형태로 두광과 신광이 함께 있는 광배)을 취하고 있으며, 통견으로 훤칠한 체구를 감싸면서 양쪽 다리 아래까지 드리워져 있다. 상호는 육계(부처의 정수리)가 높고 갸름하며 목에는 삼도(三道, 부처가 되기 위하여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상징함, 見道, 修道, 無學道)가 희미하게 나타난다.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줌), 왼손은 여원인(與願印, 소원을 들어줌)의 수인을 하고 있고, 그 크기를 고려하여 스님들이 소지하고 다니던 불상이며 삼국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남 지역에서 출토된 금동불이 모두 광배가 없는 입상만 확인되었는데, 운흥사 출토 금동불은 본상과 광배, 대좌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전남에서는 최초의 예라고 한다.
〈나주신문〉 운흥사 보존정비기본계획 최종마무리
지난 9일 운흥사에서 정인 혜원주지, 연구책임자 순천대 건축학과 남호현 교수, 동신대 고고학과 이정호 교수, 순천대 조경학과 이정 교수 등과 시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제 3차 자문위원회를 끝으로 운흥사 보존정비 기본계획에 대한 용역보고회를 최종적으로 마쳤다.
나주 운흥사지 보존정비기본계획서에 의하면 지난 7월, 8월 2차례의 자문회의를 통해 산지가람의 배치수법, 연차적 복원, 초의선사와 차의 과장된 연관문제, 외부공간의 산책로, 야생차밭, 주차장의 활용 등 타당한 운흥사의 보존정비위한 방향을 수립한 것으로 제시하였다.
정인혜원 주지스님은 이곳 사찰이 지금은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 있어 쓸쓸한 여운만 맴돌지만 차의 대가인 초의선사도 이곳에서 출가한 것으로 전혀져 내려오고 있으며, 한때 현 해남 대흥사의 큰절로 역사적 보존정비가 높은 사찰임을 피력했다.
책임연구원 남호현 순천대 교수는 운흥사 보존정비기본계획에서 가장 난점은 역사적으로 신라 효공왕대 도서국사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질적 고증자료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면서 운흥사 주지스님, 나주시 관계자, 여러 자문위원들과 심혈을 다한 만큼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현재 운흥사에는 감속에 감을 품고 있는 연화감나무가 자생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 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사역정비복원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의 보존정비의 경중에 따라 역사적 유물로 가치가 높은 사찰관광지가 될 전망이다. (2005.1.16. 나주신문)
초의선사는 속성(俗姓)이 장씨(張氏),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법명은 의순(意恂), 자는 중부(中孚), 법호는 초의이다.
초의선사는 조선 정조10년(1786) 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나 15세(1800년)에 전남 나주군 남평 운흥사(雲興寺) 벽봉민성(碧峰敏性)을 은사로 하여 삭발출가 하였다. 19세에 해남 대흥사(大興寺) 완호(玩虎)대사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삼장(三藏)을 수학하고, 21세에 대교(大敎)를 졸업했다. 그 후 화순 쌍봉사(雙峰寺)로 옮겨 금담(金潭)선사로부터 선을 배우고 토굴에 들어가 참선에 전념하다가, 24세에 대흥사로 돌아와 연담(蓮潭)대사로부터 초의(草衣)라는 호를 받았으며, 1809년 강진에 귀양 와 있던 정약용(丁若鏞)을 만났다.
대둔사(大芚寺)에 머물며 다산초당을 왕래하였는데, 이때 다산의 차 제조법 등을 배우기도 했다. 1817년(순조 17) 32세 때 경주 불국사에서 크게 깨달았다. 이 무렵 초의와 백파 사이에 선문논쟁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1826년에 대흥사 뒤쪽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이곳에서 홀로 40여 년 간을 수행에 전력했다.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면서 지은 차서(茶書)인 《다신전(茶神傳)》이 있다. 다신전의 내용은 찻잎따기, 차만들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을 끓이는 법, 차를 끓이는 법, 차를 마시는 법, 차의 향기, 차의 색 등 20여 가지 목차로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1856년(철종 7) 김정희가 죽자 2년 후 과천까지 가서 조문하고 돌아와 그 후 일지암에 머물며 두문불출하다가 나중에는 쾌년각(快年閣)이라는 작은 움막을 지었고, 1866년 80세에 입적했다.
나주 운흥사 초의선사 (草衣禪師) 출가사찰
스님의 일상생활은 선(禪)과 시(詩)와 차(茶)가 집약된 모습이었다. 스님은 선 수행에서의 깨달음을 시문을 통하여 표현했는데, 스님의 시와 글은 이미 당시에 정결하고 간명하며 세속적인 분위기를 초탈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님은 선수행과 차를 마시는 것을 일치시켜 차를 마시는 가운데 깨달음의 기쁨을 느끼고자 했다. 1세기 후 효당(曉堂) 崔凡述(1904〜1979)은 스님을 ‘한국의 차성(茶聖)’으로 자리매김하고 스님의 차서인 『東茶頌』을 ‘한국의 차경(茶經)’이라고 극찬하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부여했다.
선사는 1830년 스승 완호의 사리탑에 새길 글을 홍현주에게 받고자 상경하였다. 이때 예물로 자신이 만든 차를 준비하였는데, 이 차의 맛을 보게 된 박영보(朴永輔)가 「남차병서(南茶幷序)」를 지어 사귐을 청하였다.
「동다송」은 1837년 홍현주가 다도(茶道)에 대해 묻자 초의가 그 요청에 따라 지어준 시이다. 홍현주에게 보낼 때는 ‘동다행(東茶行)’이라고 이름 붙였었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등 당대 최고의 거유 석학들과 깊은 교류를 통하여 도교는 물론 유교 등 범서에도 능통한 분이었다.
저서로는 《초의집(草衣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이선내의(二禪來義)》가 있다.
초의선사 영정 / 다산 정약용선생 영정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7호. 문수보살상(좌협시) 높이 202㎝, 보현보살상(우협시) 207㎝.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 1224-142
나주 불회사 대웅전에는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이 협시한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본존불은 좌상으로서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도상적 특징인 지권인을 결하였고, 칠과 포를 여러 겹 반복해서 올리고 건조하여 만든 건칠불이다.
좌우 협시 보살상은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올려 조상을 완성한 뒤, 다시 옻을 여러 번 올리고 금을 붙이고 칠하여 완성한 소조상(塑造像)이다. 즉 본존불은 건칠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고, 좌우 협시보살상은 소조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두 불상의 제작 기법이 다르다는 것은 양식적으로도 시간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의미이다.
비로자나불상은 고려 후기의 특징인 이국적인 상호와 활달한 선묘, 단아한 형태미를 보이고, 이에 비해 협시보살상은 보다 인간적인 상호와 단순화된 선묘, 장대한 형태미 등 조선 초기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추정컨대 본존 불상을 먼저 조성하고 약간의 시간적 틈을 두고 좌우 협시보살상을 제작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좌우협시 보살상에서는 지물(持物)이나 승물(乘物) 등 뚜렷한 도상적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삼존상은 조성 당시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이 협시하는 삼존형식일 것으로 생각된다.
보살상이 쓰고 있는 보관의 모습을 살펴보면, 동판을 두들겨 문양을 만들어 넣은 꽃잎 모양의 보관 위에 동판을 잘라 만든 꽃무늬, 불꽃무늬, 구름무늬, S자형의 관대 등을 부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정수리에는 머리카락을 땋아 올려 높은 보계를 만들었으며, 보관의 턱을 이루는 보발은 넓은 띠 모양으로 부착하여 머릿결을 나타냈다.
구레나룻과 귀밑머리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의 보발을 어깨 위에서 둥근 고리모양으로 복잡하게 엮어 다시 3가닥으로 뽑아 구불구불 드리웠다. 이러한 보발의 표현은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귀여운 인상이며, 버들잎 모양으로 반개한 눈은 사바세계를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목구비는 얼굴 가운데로 몰려 작고 오밀조밀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조선 전기에 제작된 불화나 불상에서 쉽게 볼 수 있으므로 이 시기의 양식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귀는 타원형의 귓바퀴에 ‘y’자의 상·하각의 연골과 열쇠구멍 형태의 귓구멍을 양감 있게 처리하였으며, 가늘게 늘어진 귓불에는 꽃모양의 귀고리를 부착하였다. 특히 실제처럼 이공(耳孔)을 뚫어 사실감을 더하였다.
작은 얼굴에 비해 신체는 건장하며, 복부를 약간 내밀어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드러냈다. 어깨는 약간 치켜 올려 세웠으며, 목에는 삼도의 주름이 자연스럽게 새겨져 있다. 가슴은 밋밋하게 처리하였으며, 가슴 아래에는 수평으로 간결하게 걸친 군의(裙衣)의 단이 표현되었다. 불신에는 천의를 이중으로 두텁게 걸쳤는데, 두 장의 옷이 교차하는 모습이 우측 허리 앞뒤에서 확인된다.
옷주름은 불필요한 주름을 최대한 억제하여 간결하고 힘 있게 처리하였고 소조불의 특징을 잘 살려 골이 깊고 날이 선 입체적인 주름으로 표현되었다. 왼쪽 어깨에는 Ω형 주름이 약간 측면으로 돌아가 표현되었는데, 이런 형태의 주름은 조선 전기의 특징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요소이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은 나뭇잎 모양으로 날카롭게 마무리하였고 뒷자락도 이에 상응하게 연미복의 꼬리처럼 끝을 날렵하게 들어 올려 멋을 냈다. 팔뚝 아래로 살짝 들리면서 생긴 옷자락은 좌우로 ‘Ω’형으로 접어 멋을 부렸고, 나뭇잎처럼 늘어진 옷자락에는 V자형 주름을 속도감 있게 새겨 넣어 긴장감을 부여하였다.
좌협시보살상은 꽃무늬의 귀걸이와 띠 모양의 팔찌를 착용하였고, 우협시보살상은 꽃무늬의 귀걸이와 띠 모양의 팔찌, 그리고 여기에 더해 3줄로 늘어진 목걸이를 하나 더 착용하였다.
이러한 목걸이의 표현은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 금동보살좌상(15세기)과 1474년에 조성된 강진 무위사 좌우 협시보살상의 목걸이와 거의 흡사하다. 좌우협시 보살상의 수인은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를 서로 반대로 처리하였으며, 수인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설법인을 결하였다. 보살상의 모든 손가락은 장단을 맞추듯 자연스럽게 구부려 생동감 있다.
양감 있는 갸름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장대한 형태미, 왼쪽 어깨에 형성된 Ω형 주름, 무릎까지 날렵하게 늘어진 옷주름, 3줄로 늘어진 목걸이 등 보살상의 양식적 표현은 부여 무량사 금동보살좌상, 강진 무위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1474년), 그리고 서산 개심사 목조관음·지장보살상(1484년경) 등 15세기에 조성된 보살상들과 유사하다.
나주 불회사 보살입상은 비로자나불상의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상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비로자나삼존형식을 이루고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귀중한 작품이다. 특히 본존불은 건칠 기법으로, 좌우협시 불상은 소조 기법으로 제작되어 조선 전기 불상의 제작 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6. 6. 나주불회사원진국사부도(羅州佛會寺圓眞國師浮屠)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 1224-142 소유자 : 불회사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225호 시대 : 고려 충숙왕 4년(1317년) 지정일 : 2000년 06월 20일
원진국사부도
다도 불회사 원진국사부도는 맨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으나 맨 아래의 기단부와 그 위 몸돌이나 지붕돌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앞면에는 부도의 주인공과 세운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부도의 총높이는 175㎝이며, 기단부 높이 82㎝, 탑신 높이 60㎝, 옥개석 높이 33㎝이다. 부도의 맨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으나 맨 아래의 기단부와 그 위 몸돌이나 지붕돌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지대석은 정사각형으로 두껍고 큰 3개의 판석으로 짜 맞추었는데, 앞면은 지상에 노출되었으며 뒷면은 묻혀 있는 상태이다. 그 위로 받침석 없이 원형의 복련석을 앉혔으며, 겉면에는 얕은 음각으로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복련석 위로는 중대석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형식은 중앙에 약간 배가 부른 고복형이면서 역시 원형이며 별다른 조식은 없다. 상대석의 앙련은 원형이며 역시 간략화된 음각 8엽을 새겨 위의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부는 배흘림기법이 보이는 팔각이다.
탑신 앞면에는 “圓眞國師通照之塔(원진국사통조지탑)”이라는 해서체의 당호가 새겨져 있고, 탑신 하측에는 “延祐四年丁巳五月日立(연우4년,1317년 충숙왕4년, 정사5월 일입)”이라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우동이 뚜렷한 팔각이며 귀꽃 부분에서 약간 반전을 보였고 밑면은 수평이다가 처마 쪽에서 가벼운 곡선을 나타냈다.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나주 불회사 부도에 기록된 내용과 실존인물 조한룡(원진국사)과의 년대차가 100년이나 차이가 나는 것은 혼란했던 고려시대에서 두 명 이상의 원진국사가 불회사에 머물고 활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 1105년(고려 숙종 10) 운문사(雲門寺)를 중창한 원진국사(圓眞國師) 나. 보경사의 원진국사[圓眞國師, 1172(고려 명종 2)~1221(고려 고종 8)] 승형(承逈). 1214년(고종 1) 보경사 주지가 됨. 상주 출신 다. 1317년(고려 충숙왕 10) 불회사 부도를 세운 원진국사부도(圓眞國師浮屠) 라. 1403년(조선 태종 3)에 불회사를 삼창(三刱)한 원진국사(元禛國師) 속명은 조한룡(曺漢龍). 나주 출신
원진국사의 한글 표기로는 같으나, 한자가 다 틀리고 활동시기가 다르다.
조한룡(曺漢龍, 1340년대∼1414년(태종 14)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승려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세염(洗染)‧입록(立祿)‧청한(淸閑)‧도연(道衍)이다.
고려 시중(侍中) 조정통(曺精通)의 셋째 아들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조씨 집안은 고려 조정에서 평장사(平章事)·복야(伏射) 등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으로 8대를 연이어 국가교육기관[國學]에서 학문을 탐구했는데 모두 태도가 독실하고 성적이 탁월하여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맏형 우태(右台:右議政) 조경룡(曺景[慶]龍)과 함께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어 1357년(공민왕 6)에 형 판서(判書) 조응룡(曺應龍)‧제 참의(參議) 조변룡(曺變龍)‧감사(監司) 조현룡(曺見龍) 등 5형제 모두 과거 급제하여 ‘조씨오룡(曺氏五龍)’이라 불렀다. 5형제는 경룡(景龍)· 응룡(應龍)· 한룡(漢龍)· 변룡(變龍)· 현룡(見龍)이다.
공민왕 4년(乙未: 1355)에 실시한 과거에서 경룡과 한룡이 다 같이 최고 점수를 받아 갑과(甲科)에 뽑히고 이어 공민왕 6년(乙酉, 1357)에 나머지 세 형제가 모두 높은 점수로 과거에 급제한. 임금은 “조씨집 다섯 용[曺氏五龍]이 계속하여 과거에 급제하니 고금에 드문 일이다.” 칭찬하고 쌀과 술, 고기 등을 하사하는 한편 3일간 풍악(風樂)을 잡히고 거리를 돌며 축하행진을 하게 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조에 들어와 이들 형제의 벼슬은 조경룡이 우의정(右議政), 조응룡이 판서(判書), 조한룡·조변룡이 참의(參議), 조현룡이 감사(監司)에 각각 이른다
조한룡은 처음 상서(尙書)의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글을 옷자락에 쓰고, 고려 조정에서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이었던 서견(徐甄)과 함께 금천(衿川)에서 숨어 살다가 나라 망한 설움을 함께 가끔 시를 지어 망국의 한을 달래곤 했다.
이후 불교에 입문하여 세염선사(洗染禪師)의 법호를 얻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참의(參議)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황제로부터 보의장군(保義將軍)의 명예작위를 받았다. 이에 1404년(태종 4,甲申年)에 태종은 예조좌랑(禮曹佐郞) 계단(季摶)에게 명하여 봉황산(鳳凰山) 효자동(孝子洞)에 ‘여충선효(麗忠鮮孝)’라는 보의장군효자비(保義將軍孝子碑)를 세우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중이 되어 도갑산(道甲山)을 거쳐 불회사(佛會寺)로 들어가 1413년(태종 13) 2월 17일에 영남의 갑부 김상(金相) 집안의 시주를 얻어 불회사를 삼창(三倉)하고, 화순(和順) 만연사(萬淵寺) 법당을 중건한 후에 원정국사(元禎國師)의 법호를 얻었다.
1414년(태종 14)에 입적하여 세조대왕이 청간(淸簡)의 시호를 내렸다.
스님께서는 말년에 큰절 건너편에 남암(南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시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까만 새가 날아와 뒤편에 있는 잣나무 가지에 앉아 스님과 대화를 했다하여 그 나무를 백수(柏樹, 잣나무)라 하지 않고 흑조수(黑鳥樹)라 불렀는데 2,000년 8월 호남을 휩쓴 태풍으로 한 구루는 부러지고 지금은 단지 한 구루만 남아있다. 당시 5개의 강력한 태풍이 한반도에 연달아 상륙하여, 흑산도의 풍속 극값은 2000년 8월 31일 12호 태풍 ‘프라피룬’ 통과 시 최대풍속은 47.4m/s, 최대순간풍속은 58.3m/s으로 기록되었다. 불회사에서는 나무가 서있던 남암 자리에 두 개의 어린 잣나무를 다시 심고 시름시름 죽은 나무를 불회사 마당에 옮겨와 옛날의 스님을 추억한다.
1971년에 조한룡의 출생지인 나주시(羅州市) 오룡동(五龍洞) 효자리(孝子里: 나주시 금천면 죽촌리)에 충효사(忠孝祠)가 세워졌다. 또한 강진군(康津郡) 대계원(大鷄院)과 진도군(珍島郡) 효충사(孝忠祠)에서도 그를 배향하였다.
창령 조씨 족보에는 조정통(시중공파), 경룡(景龍, 감사공파)· 변룡(變龍, 감사공파)한룡(漢龍, 청간공파)· 응룡(應龍, 봉간공파)· 현룡(見龍, 우태공파)으로 한룡의 증손자인 진동의 조흭은 정언공파로 기록되어있다.
조한룡은 특히 효자로 이름난 사람으로 병으로 몸져누운 아버지가 한겨울에 잉어를 잡숫고 싶다 하여 연못에 나가 얼음을 깨니 잉어 한 마리가 튀어올라와 이를 조리하여 드렸다고 하며, 지금도 그 연못이 효자못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절의 중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원진국사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을 중건하게 되었다. 공사가 이루어지자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하여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때 원진이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일봉암이라고 한다.
길 양옆으로는 2,300년 된 비자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사찰 본체의 대문인 사천왕문에는 사천왕상 대신에 탱화만이 그려져 있다. 사천왕문에서 일직선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2층 구조의 커다란 누각인 대양루大陽樓가 나타나는데 1층에는 덕룡산의 자생 차 맛을 느낄 수 있는 ‘비로다경실’이 있고 2층은 재가불자 및 일반인들의 수련을 위한 공간이라고 한다. 대양루의 계단을 오르면 덕룡산을 배경으로 마치 날아갈 듯 팔작지붕이 우아한 대웅전이 자태를 드러낸다.
사찰입구에 서있는 석장승 퉁방울눈에 큼지막한 주먹코가 인상적이며 남장승은 송곳니가 뻗어있어 도깨비 상처럼 보이기도하며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져 있었는데 누군가가 추가로 선을 새겨 정(正)자로 보이기도 한다. 여장승은 '주장군(周將軍)이다. 당(唐)자는 사당가는 길을 뜻하며, 주(周)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고 한다.
무지개다리 위의 진여문과 천왕문이 하나의 전각처럼 붙어 있으며 천왕문 외벽에 그려진 마라난타초전불교도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기 위해 법성포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렸다.
원진국사의 속가인 창녕조씨 가문에 전해지는 오룡사적기(五龍事蹟記)에는 동진 태화 원년(서기 366년, 내물왕 11년, 고국원왕 36년, 근초고왕 21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승 마라난타존자가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다.
366년은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소수림왕 2년(372년)보다 6년이나 앞선 기록이며, 백제의 수도 한성에 마라난타가 입성한 384년보다 18년 앞선 해이기도 하다.
어느 지역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있어왔으나 서남해안 쪽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던 것은 기록이 없을 뿐 당시 뱃길을 고려할 때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다는 사실을 보면 그 당시에 벌써 인도와 교역이 있었고, 이를 통하여 불교가 전래되어 민간신앙과 함께 존속할 수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역사학계에서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근초고왕 24년(369년)에 복속하였다고 하나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로 나타나는 본격적인 복속은 6세기 이후에야 백제계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의 기록이 영산강유역까지 아우른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은 것이 침류왕 원년일 뿐이며 한성에 들어가기 전에 뱃길을 따라 영산강 유역에서 불교를 포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 불회사 창건시기에 대한 두 가지 설화 불회사의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하는데, 하나는 384년(침류왕 1)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창건하고 681년(신문왕 1)에 왕명으로 중창되었다고도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367년(근초고왕 22)에 희연이 창건하고 713년에 연기가 중창했다는 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어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절의 중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원진국사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을 중건하게 되었다. 공사가 이루어지자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하여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새 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때 원진이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일봉암이라고 한다.
불회사의 전설 고려 말 참의벼슬을 지낸 조한용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들어서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모든 것을 뒤로하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습니다.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한 벌만으로 구름처럼 흐르는 만행을 하던 스님은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스님은 오랜 세월에 쇠락한 불회사를 복원하고자 원을 세우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탁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절로 돌아오던 중 산길에서 울고자 하나 울지도 못하고 일어나고자 하나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스님을 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목에 걸려있는 비녀를 본 스님은 호랑이가 아무 말도 못했지만 사람을 잡아먹다가 그렇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스님은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비녀를 뽑아주었습니다.
그해 겨울, 호랑이는 한 아리땁고 귀한 집 아이로 보이는 처자를 물어다 절 마당에 내려놓고 갔습니다. 초죽음이 된 처자를 구명한 스님은 그가 천리 밖 안동 만석꾼의 외동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자가 기력을 회복한 후 남장을 시켜 스님은 함께 하루에 십리를 걷기도 하고 이 십리를 걷기도 하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안동에 도착했습니다. 김 상공은 딸을 살려준 은인인 스님을 사랑에 모시고 며칠 동안 잘 모신 후 보답을 하고자 하니, 스님은 불회사 복원 불사에 시주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지고 간 작은 걸망을 꺼내 시주 미를 담게 하니, 김 상공의 부인은 작은 걸망에 몇 되의 쌀이 들어갈 것인가를 염려했습니다. 스님은 걸망에 가득하면 충분하다 하고 가득 채울 것을 권했습니다.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이 들어가는 쌀을 보고, 부인은 곳간을 열고 스님에게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가져가시라 했습니다. 이에 스님께서는 신통으로 공양미를 이곳에 보냈다고 합니다.
이때 수미산만큼이나 많은 쌀을 보관했던 곳이 지금의 화순 ‘중장터’라고 전합니다.
김 상공이 시주한 쌀로 거대한 불회사 대웅전을 지으며 좋은 날, 좋은 시간을 택하여 상량식을 올리려는데 일이 너무 장대하여 상량시간을 맞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뒷산 봉우리에 올라가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기를 “호법 선신중 이시여, 부처님의 대작불사가 해가 짧아 원만히 회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피를 드리워 주소서“ 하니 해가 잠시 멈춰 상량식을 제시간에 원만히 마쳤다고 합니다.
그 뒤 스님께서 기도드린 곳에 암자를 세우고 해를 멈추게 한 곳이라 하여 일봉암이라 하였으나 6.25전란으로 소실되고 지금은 샘터만이 남아 그곳을 찾는 이들의 갈증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이에 한룡이 화답하여 읊조린다.
이들의 시를 본 사헌부의 관원이 두 사람을 법에 따라 처벌하려 하자 당시 임금은 ‘주(周)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伯夷·叔齊) 같은 부류들을 꼭 처벌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만류했다. 하루는 한룡이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니 어머니는 비로소 그가 스님이 된 것을 알고 크게 놀라 울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비록 고려 조정의 충신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어미가 아직 살아 있거늘 어찌 차마 머리를 깎고 부모가 물려준 몸을 생각지 않는단 말이냐? 집안은 이제 파멸이니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하느냐…”한룡은 끓어 엎드려 어머니께 사죄했다.“신하로써 이미 불충을 저지르고 또한 불효자가 됐으니 그 죄 큽니다. 불충하고 또 불효하느니 차라리 불충하기는 하되 어머니의 뜻만이라도 받들겠습니다.”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룡은 즐거운 표정을 짓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어머니의 슬픈 마음을 가시게 했다.
시비(侍婢)를 시켜 머리 감을 물을 떠오게 하여 머리카락을 당겨서 묶으니 머리카락은 그 자리에서 2자(尺)나 자라났다. 그날 한룡은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서울로 가서 며칠 지난 뒤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고 또 다시 참의(參議)에 임명된다.
한룡은 늙으신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하여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때 한 노스님이 찾아와 “세염(洗染)스님께서 이곳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 계시냐?”고 공손히 여쭙는다.
세염은 한룡이 스님이 되면서 바꿔 불렀던 이름이다. 참의 조한룡은 웃으며 말했다. “스님은 정말 모르십니까? 제가 바로 세염입니다만 연로하신 어머니 때문에 차마 벼슬을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갈 마음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속히 돌아가십시오, 제가 다시 만나 뵐 날이 있을 겁니다.” 그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한룡은 3년상(喪)을 치르고 또다시 3년이 지난 다음 비로소 아무도 모르게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부귀영화도 벼슬도 다 떨쳐 버리고 표주박 하나, 누더기 한 벌로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도는 세염 스님의 행각은 계속된다. 호남지역을 두루 다니다 전남 영암군 월출산 도갑사(道岬寺)에 잠시 주석(住錫)하던 그는 또다시 그곳을 떠나 한동안 자취를 감춘다.
그 뒤 그는 전남 나주군 덕룡산 불회사(佛會寺)에 머물며 중건(重建)에 착수한다. 이때 지은 시에는 그의 충정(忠節)이 잘 나타나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1호 지정일 : 1968년 12월 12일 지정
불회사 사찰 입구에 있는 석장승
불회사를 절 입구에는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신상인 석장승(石長栍) 한 쌍이 사찰 입구 300m 지점 오솔길 좌우에 마주보고 서 있다. 할아버지 장승은 툭 튀어 나온 퉁방울눈을 하고, 이맛살을 굵게 찌푸려 남도 특유의 해학적 표정을 짓고 있다. 할머니 장승은 절을 찾는 사람들을 반기는 듯 웃음을 머금은 표정이 다정다감한 할머니의 표정 그대로이다.
할아버지 장승의 키는 2.3미터, 할머니 장승은 1.7미터이다.
길 양옆으로 오른편에 남장승, 그리고 왼편이 여장승인데 남장승(하원당장)은 얼굴 조각 선이 깊고 수염을 표현한 듯 양각선이 턱밑으로 내려와 있다. 입 좌우에 송곳니가 하나씩 솟아있으며 전체적으로 선이 뚜렷하고 머리에서 중앙을 솟아오르게 하여 상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각자는 원래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었던 것을 누군가 ‘하下’자에 덧새겨 ‘정正’자로 바꾸었다. 좌측 여장승(주장군)은 남장승에 비해 얼굴이 확연히 여성적으로 온화하여 선이 얇고 부드러우며 웃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장승은 절 입구에 세워 경내의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맞는 수문신상守門神像으로 숙종肅宗 45년(1719)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불교와 민간신앙이 어우러졌음을 말해준다.
장승의 앞면에는 ‘당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당(唐)자 주(周)자 글씨는 길(道)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자는 사당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주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강원도를 포함하여 30여기의 석장승이 중요민속문화재로 등록되어있다.
용화산 성불사지 석장승 위치 :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유촌리 산20-2 강원도 민속자료 제5호 우리나라 호법장승 가운데 이른 조선시대 전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강원도에 호법장승이 없다고 알려진 이제까지의 인식을 바꿔주는 중요한 자료로써 대부분의 호법장승과는 달리 몸체까지 온전히 조각하였다.
장승, 장생이란 문자가 나타난 가장 오래된 기록을 찾아보니 신라 선종(禪宗) 9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3조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의 비문인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신라 경덕왕 18년, 759년)에 「是以乾元二年 特敎植 長生標柱 至今存焉」란 기록이 보인다.
가지산문은 전라남도 장흥군 가지산의 보림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선종 9산문의 하나로, 가지산선문(迦智山禪門)이라고도 한다. 가지산파의 본사를 보림사로 한 것은 중국 남돈선(南頓禪)의 개창조 혜능(慧能, 638~713)이 조계(曹溪) 보림사에서 선법을 떨친 전통을 잇고 있음을 말해 준다.
가지산파는 도의(道義)가 개창하였다. 도의는 784년(선덕왕 5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馬祖) 도일(道一, 709~788)의 제자인 서당(西堂) 지장(智藏, 735~814)의 법을 받고, 821년(헌덕왕 13년) 귀국하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거주하였다. 유학승이었던 그가 중앙에 머물지 않고 지방에 있었던 사실은 당시 신라 사회에는 교학 불교가 융성하여 무위(無爲)한 선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도의는 진전사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후 법을 염거(廉居, 미상~844)에게 전하였다.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법을 체징(體澄)에게 전하였다. 체징은 837년(희강왕 2년)에 중국에 가서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를 만나보았으나, 도의가 물려준 법(法)외에는 달리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840년(문성왕 2년)에 귀국하였다.
처음 그는 무주의 황학사(黃壑寺)에 머물렀으나, 859년(헌안왕 3년)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0)의 요청으로 보림사로 이주하여 형철(逈徹) 등 8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화엄종(華嚴宗) 사찰이던 보림사에 선종 승려인 체징을 주석하도록 한 것은 신라 왕실에서 선사들을 후원하여 왕권을 안정시키려 한 의도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김언경(金彦卿) 등 신라 중앙 귀족의 후원을 받아 산문 규모가 커지면서 가지산문을 형성하였다. 가지산파는 당시 교학 위주의 종교와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선도하고, 고려 말까지 성세를 이루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 1206~1289)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보물 제158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비의 총 높이는 3.46m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동력길 20 규모 : 경내 일원 시대 : 1918년 (추정) 지정일 : 1986년 02월 07일
9. 9. 홍기헌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5호)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풍산내촌길 3-8 시대 : 조선시대 18세기 말 지정일 : 1984년 01월 10일
10. 10. 홍기응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51호)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동력길 18-1 시대 : 19세기 말 지정일 : 1984년 01월 10일
11. 11. 홍기종 가옥(민속자료 제10호)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덕동길 76-18 시대 : 19세기 말 지정일 : 1986년 02월 07일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암정로 398 소유자 : 운흥사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12호 재질 : 석각 / 돌 여장승 : 높이 200cm, 머리둘레 195cm, 가슴둘레 205cm, 얼굴너비 75cm 남장승 : 높이 270cm, 머리둘레 200cm, 가슴둘레 200cm, 얼굴너비 55cm 시대 : 조선시대 숙종45년(1719) 서체 : 해서(楷書) 지정일 : 1968년 12월 12일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이 석장생은 사찰 입구 길가에 있는데 우측이 여장생, 좌측이 남장생으로 되어 있다. 여장생은 원시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한 인상을 하고 있다. 좌측의 남장생은 거대해서 위엄이 있으나 안면이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 특유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또 큰 치아 두 개가 입의 좌우에 노출되어 있고 수염이 턱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불회사 장생과 운흥사 장생이 다른 점은 불회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 남상이고 좌측이 주장군으로 여상인데 반해서 운흥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으로 여상이고 좌측이 주장군(周將軍)으로 남상이 되어 위치와 새긴 글씨가 서로 뒤바꿔져 있다.
그러나 그 조각법과 원형의 눈동자 등 형태가 거의 흡사한데다 여상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는 ‘化主僧卞學康熙五十八年二月日木行別座金老卽伊(화주승변학강희58년2월일목행별좌김노즉이)’라는 내용이 음각이 되어 있어 화주승 변학(卞學)과 조선시대 지방관서의 정·종5품의 관직인 별좌(別座) 김씨가 함께 주도하여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3. 13. 귀래당(歸來堂, 지정번호: 제21호)
○ 소 재 지 :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615-1번지 ○ 토지소유자 : 풍산홍씨 호은공문중 ○ 지정예정면적 : 215㎡ ○ 시 대 : 1623년 최초 건립, 1996년 중건
귀래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했던 호은(壺隱) 홍민언(洪民彦, 1537~1626)의 강학처(講學處)이다. 홍민언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제(從弟) 홍민성(洪民聖)과 광주 대촌면 양과리 출신 사인 야정(野亭) 최후립(崔厚立)ㆍ홍립(弘立) 등 의병 5백 명을 모집하여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의 진지로 출병하였다. 그러나 錦山에 도착하기 전 7,000명의 의병이 적장 고바야가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こばやかわたかかげ, 1533년~1597.7.26.)가 이끄는 15,700명의 일본군 제6진과 싸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모두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자, 남평(南平) 의병장(義兵將) 괴정(槐亭) 최시망(崔時望)과 함께 운봉(雲峰)으로 진격하여 왜적들과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南平 지석강 전투에도 참전하여 남평 현감 박지효(朴之孝), 의병장 홍시정(洪時挺)과 함께 왜장(倭將) 현소(玄蘇)가 남평(南平) 지석산(砥石山)에 침입하자 왜적 3백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 152명을 생환시켰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 / 고바야가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97년 정유재란 때도 병량(兵糧)을 모집했으나 왜적이 물러감으로 의관(義穀)을 관에 바쳤다. 전란이 끝난 후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사복사주부(通訓大夫司僕寺主簿)에 올랐다. 하지만 시대의 격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1613년 계축옥사(광해군 5년, 1613) 당시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 및 자신들의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의 화를 입어 3년간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등극하고 벼슬이 내려졌지만 사양하고, 1623년에 귀래당 정자를 건립해 평생 후학을 길러내다 세상을 떠났다. 직접 쓴「歸來堂記」현판이 남아있다.
14. 14. 운흥사석불좌상(지정번호 : 제29호)
○ 소 재 지 : 나주시 다도면 암정리 971-3번지 운흥사 ○ 소 유 자 : 운흥사 ○ 시 대 : 고려시대
운흥사 석불좌상은 1960년대 후반, 나주 동강면의 밭에서 발견된 것인데, 2001년 3월 20일 운흥사 팔상전에 봉안되었다.
석불의 외모에서 나타난 기본형식은 영암 도갑사석불(보물 제 89호)과 연계되고 있으나 양각의 깊이, 두광에 나타난 화사한 인동당초문과 화염문의 활기 넘치는 기법에 비해 움츠린 듯한 어깨선의 둔화, 법의의 형식화된 옷 주름과 좌우측 손목과 손가락 모양으로 볼 때 조성연대는 고려 말 14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인체에 대한 실재감의 결함이나 얼굴에 나타난 개성이 뚜렷하지 않은 점 등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화염문과 인동당초문 등 원형 두광을 갖춘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충분한 보전가치가 있다.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출현한 천 년 전 석불좌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