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大井)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중앙에 큰 우물이 나오고 우물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 위에 정자가 보인다. 정자에는 청세정(淸洗亭)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기문에 오연경(吳璉卿)이 정자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자를 지은 오연경은 처음에 광주(廣州)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는데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재랑(齋郞)을 지냈고 나중에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되었다. 병자(丙子)년 북쪽 오랑캐가 창궐(猖獗)할 때에 임금의 어가를 따라서 남한산성에 들어가 만전(萬全)을 도모하려고 하였는데 화친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통곡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멀리 숨어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바로 그곳이 지금의 대정마을이다. 공은 이곳에서 정자를 건립하고 에오라지 원울한 마음을 의탁하고 ‘청세(淸洗)’라 이름 하였으니, 오랑캐의 흙먼지를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이다. 그의 후손들도 대대로 이곳에 세거하면서 공(公)의 뜻을 이었다.
이 정자에는 장성의 학자인 변시연(邊時淵)이 지은 청세정명(淸洗亭銘)을 비롯한 현판이 7개가 있고 주련이 8개가 있다. 정자 건립 년대가 단기 4293년 경자년으로 되어 있어서 1960년에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進士吳公璉卿 丁丑下城後 名亭淸洗 蓋尊周義也 後孫井愚翁 使余爲銘 淸吾心之活水 洗一己之私欲耶 傾東海之淸波 洗赤牛 之汙辱耶 苟百世之下 觀乎此三字之額 應可以 頑廉懦立矣 黃州 邊時淵 謹銘
청세정명(淸洗亭銘)
진사(進士) 오공(吳公) 연경(璉卿)은 정축(丁丑)년 이 고을에 내려온 뒤로 정자를 청세(淸洗)라고 이름 지었으니 대개 존주(尊周)하는 뜻이다. 후손 정우(井愚) 옹께서 나로 하여금 명(銘)을 쓰도록 하였다.
내 마음의 활수(活水)를 깨끗이 하여 한 몸의 사욕(私欲)을 씻는 것인가 동해(東海)의 청파(淸波)를 길러다가 적우(赤牛)의 오욕(汙辱)을 씻는 것인가 진실로 백세(百世) 이후에 이 세 글자 편액을 살펴보면 응당 완악한 사람은 청렴하게 되고, 나약한 사람은 뜻을 세우게 되리라. 淸吾心之活水 洗一己之私欲 耶 傾東海之淸波 洗赤牛 之汙辱耶 苟百世之下 觀乎此三字之額 應可以 頑廉懦立矣
황주(黃州) 변시연(邊時淵)은 삼가 명(銘)하노라. 黃州 邊時淵 謹銘
玉潔秋光不附懸 孤亭撑節斥和邊 皇天暫眩華中日 强虜百穿世隙年 刺腹魂尋門戶入 裂書士間棟樑連 人間氣象無歸處 得與星河作配延 後孫 秉秀 謹稿
추모운(追慕韻)
옥같이 깨끗한 추광(秋光) 붙들어 매지 못하는데, 玉潔秋光不附懸 외로운 정자에서 절개 지켜 척화(斥和)하였네 孤亭撑節斥和邊 황천(皇天)이 잠시 중화를 현혹시킨 날 皇天暫眩華中日 강노(强虜)는 갖가지로 세상을 엿 보았지 强虜百穿世隙年 자복(刺腹)한 혼이 문호(門戶)를 찾아왔고 刺腹魂尋門戶入 열서(裂書)한 선비가 동량(棟樑)에 연이었네 裂書士問棟樑連 인간에서 기상(氣象)이 돌아갈 곳이 없으나 人間氣象無歸處 성하(星河)와 함께 길이 짝할 수 있으리라. 得與星河作配延
후손(後孫) 병수(秉秀) 근고(謹稿).
春峀白雲石逕懸 明時歸臥小亭邊 國綱何幸有三士 天意應當無百年 田蕪西疇想晉潛 月來東海羞齊連 沙邨千古江聲在 淸洗狂塵爽氣延
원운(原韻)
봄 산굴에 백운(白雲)이 피어나고 돌길이 매달려 있는데 春峀白雲石逕懸 밝은 시대에 돌아와 작은 정자에 누웠네 明時歸臥小亭邊 국가 기강은 얼마나 다행인가 삼학사가 있으니 國綱何幸有三士 하늘의 뜻은 백 년 안에 응당 오랑캐를 멸망하리 天意應當無百年 서쪽 밭에 잡초 우거지니 진(晉) 도잠(陶潛)이 그립고 田蕪西疇想晉潛 동해에 달뜨니 제(齊) 노중련(魯仲連)에 수치스러워라. 月來東海羞齊連 사촌(沙邨)에 천고토록 강물 흐르니 沙邨千古江聲在 광진(狂塵)을 깨끗이 씻고 좋은 기운 맞이하네 淸洗狂塵爽氣延
淸洗高名北斗懸 規模來自黑城邊 靑衫杖屨逍遙日 白首雲仍肯搆年 松閱先天蒼不改 畔回特地笏相連 賓朋膏秣傾湖海 月夕花朝還復延 顧堂 金奎泰 謹稿
敬次 淸亭急峽世懲懸 志氣韓天獨照邊 槿域媾書歸北日 首陽節操落南年 皡收一點雲筇握 可否談隣水月連 雪恥胡塵非但事 歲星精彩掛樑延 鶴溪 李玹宰 拜稿
경차(敬次)
청세(淸洗)라는 높은 이름 북두에 매달려 있고 淸洗高名北斗懸 규모는 흑성 주변에 지어졌더라 規模來自黑城邊 청삼(靑衫)과 장극(杖屐)이 소요하였고, 靑衫杖屐逍遙日 백수(白首)와 운잉(雲仍)이 긍구(肯搆)했네 白首雲仍肯搆年 소나무는 선천(先天)을 지나도 푸르름 바꾸지 않았고 松閱先天蒼不改 두둑은 우뚝한 땅 돌아서 홀이 연이었네 畔回特地笏相連 벗들과 수레는 호해(湖海)를 기울여 오니, 賓朋膏秣傾湖海 달 밤과 꽃 피는 아침에 연이어 오고가네 月夕花朝還復延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 근고(謹稿)
경차(敬次)
청세정이 가파른 골짜기에 세상에 내걸려, 淸亭急峽世懲懸 지기(志氣)는 대한의 하늘을 홀로 비추었네. 志氣韓天獨照邊 조선 땅에서 화친문서를 가지고 북으로 가는 날, 槿域媾書歸北日 수양(首陽)은 절개 지키러 남쪽에 낙향하였지. 首陽節操落南年 한 점 티끌도 거두며 구름 지팡이 짚고 다니고 皡收一點雲筇握 가부(可否)를 담소하며 수월(水月)과 이웃했네. 可否談隣水月連 오랑캐에게 치욕을 씻을 뿐 만 아니라, 雪恥胡塵非但事 세성(歲星)의 정채(精彩)를 들보에 끌어다 걸으련다. 歲星精彩掛樑延
학계(鶴溪) 이현재(李玹宰) 배고(拜稿)
亭之淸洗 惟有世間漏出之節 豈以首陽 之門 乃有徹徹不淪之致 子孫感悵 益有 不洗之千秋也 十世祖考諱璉卿 生于廣 城 仁廟朝中司馬 仕齋郞 贈司僕正 丙子北胡之亂 胡塵滿朝 天何忍之 穢德 滌之而汙也 固守南漢欲圖萬全之計 媾 旣成而計自頹 遂痛哭而歸 幾於畿南 千里而居南原黑松 追搆亭於淸洗之節 逍遙於其間 吟歎其不得志 聊收一生 世 間漏出 向所謂者也 其當時朝北之時 則 家道洗貧如流 亭隨頹而不振者 胡强之 理氣也 八世祖考諱姬翰 遷大井之後 家 亨履險漸進者 胡亡中理氣也 乃亭之重 建之議 松歟井歟 亦地蔭不德 故遂重建 於井 淸以洗之 必有發暉之日 徹徹不淪 者 向所謂者也 嗟乎 一義一節 上雪國家 之恥 下遺子孫之淸素 今日則淸洗吾家 之心法也 故代無宦波 不通叛逆 以逸爲 食 以素爲飮 追思落南當世 則血耶心耶 抑亦吾門之子孫耶 平泉水石猶有嘉 子 孫況吾祖先之節義乎 血心感悵 益有不洗 之千秋 向所謂者也 息噯筆停 三向而 痛記 歲壬子仲冬 不肖後孫 秉柱 謹識
幷韻 血心亭子照天懸 勇退畿南千里邊 穢德慙藏司僕職 國華涅黑拾書年 滌來祖業承暉烈 傳繼宗規紀蹟連 感悵蕭蕭秋更碧 首陽節操劒精延
청세정기(淸洗亭記)
청세정(淸洗亭)은 세간에 빠진 절개가 있으니, 아니 수양 오씨((首陽吳氏) 가문으로서 철저히 불의에 빠지지 않는 절개가 있어서랴. 이에 자손들이 슬퍼하는 것은 더욱 천추에 씻어내지 못함이 있도다. 십세(十世) 조고(祖考)의 휘(諱) 연경(璉卿)은 광성(廣城)에서 태어났다. 인묘조(仁廟朝)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재랑(齋郞: 참봉 종9품)을 지냈고 사복시 정(司僕寺正: 정3품)에 증직(贈職)되었다. 병자(丙子)년 호란 때에 오랑캐의 티끌먼지가 조정에 가득하였다. 하늘은 어찌 차마 예덕(穢德: 임금의 부덕)을 씻는다고 하면서 더럽히려고 하는가. 남한산성을 고수(固守)하여 만전(萬全)을 기하려고 했으나 화친(和親)이 성립되고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침내 통곡을 하고 경기 남쪽 천리쯤 되는 남원(南原) 흑송(黑松)에 돌아와 정자를 지었다. 오호라. 청세의 절개로 그곳에서 소요(逍遙)하면서 펴지 못한 뜻을 읊조리다가 에오라지 한 생애를 마무리했으니, 이것이 앞서 말한 ‘세간에 빠진 절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북쪽 오랑캐에 조회할 때에는 집안 살림이 물로 씻은 듯 극빈하였고, 정자도 따라서 무너져 떨치지 못하였으니, 오랑캐가 강한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팔세(八世) 조고(祖考) 휘(諱) 희한(姬翰)께서 대정(大井)으로 이사한 이후에는 어려웠던 집안형편이 점점 나아졌으니, 오랑캐가 망해가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자의 중건(重建)을 ‘흑송(黑松)에 할 것인가. 대정(大井)에 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흑송은 토양이 음습하여 부덕(不德)하므로 마침내 대정에 중건하였다. 치욕을 깨끗하게 씻어내어 기필코 절개를 드날리는 날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위에서 이른바 ‘철저히 불의(不義)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아, 한결같이 절의(節義)를 지켰으니 위로는 국가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는 자손(子孫)에게 청빈함을 끼쳐주었다. 오늘날에는 청빈함이 우리가문의 심법(心法)이 되어 대대로 벼슬살이 세파에 휩쓸림이 없었고 반역(叛逆)에 연루되지 않았다. 은일(隱逸)과 청빈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삼았다. 남쪽으로 낙향할 당시를 미루어 생각하면, 혈기(血氣)로 했을까. 본심(本心)으로 했을까. 아니면 또한 우리가문의 자손 때문이었을까. 평천장(平泉莊)에서는 수석(水石)도 오히려 아름답게 여겼는데 자손으로서 우리 선조의 절의(節義)에 있어서 뭐 더 말할게 있겠는가. 이것이 앞서 말한 ‘혈심을 슬퍼하여 더욱 천추에 씻어내지 못함이 있다’는 것이다. 한숨을 내쉬고는 붓을 놓고 세 번 정자를 향하여 통곡하고 기문(記文)을 적노라.
임자(壬子) 중동(仲冬) 불초후손(不肖後孫) 병주(秉柱)는 삼가 기록하노라.
병운(幷韻)
혈심으로 지은 정자 하늘에 매달려 비추니 血心亭子照天懸 경기 남쪽 천리되는 곳에 용퇴했구나 勇退畿南千里邊 예덕(穢德)이 부끄러워 사복시(司僕寺)에 감추었고 穢德慙藏司僕職 국화(國華)가 더렵혀져 습서로서 세월 지냈네 國華涅黑拾書年 조업(祖業)의 치욕을 씻어 선열(先烈)을 계승하고, 滌來祖業承暉烈 종규(宗規)을 전승하여 유적(遺蹟)을 기념했네. 傳繼宗規紀蹟連 슬픈 마음 소소하여 가을이 더욱 푸르른데 感悵蕭蕭秋更碧 수양(首陽)의 절조는 칼날같은 정신으로 이어지리 首陽節操劒精延
淸洗亭在帶方之黑城 吳公諱璉卿所以作也 人已遠而墟亦久 後孫重建于所居大井案山 之上 以不忍見廢 而故起此以伸追慕之私也 始公生長廣州 早中司馬 仕爲齋郞 後贈司 僕正 丙子北胡之猖獗也 隨駕入城 欲圖萬 全 及其媾成矣 遂痛哭還第 如不欲生 因以遐 遯晦迹 蓋南原居始於公 而因起亭 聊託寃 鬱 淸洗以名之 以淸洗胡塵之義也 方先王 之被圍也 國家存亡 乃呼吸間 而亦忠臣義士 損軀報國之秋也 公之奮義盡忠者 有以自發 乎痛哭之中 而淸洗之心 終不變於終老燕閒 之日 其扶殖萬古君臣之義者 亦大至矣 有詩 曰 田蕪西疇想晉潛 月來東海羞齊連 櫟泉宋 文元公嘗以爲 忠情言志 而又以其所以名亭 者 有尊周之義 噫 前哲所以稱停者至矣 而後 生何敢贅言哉 余嘗讀古之倡義史 有以仰公 暮節而又所欽者 方且後承蕃衍 敦睦爲先 好 賢尙禮 以有聲于今 詢知醴泉靈芝 別有其根 源也 亭旣成以井愚秉鎔之善余也 願有以記 而且曰亭之始也 發其議者 ■默善基 而助其 役者 仁善時泳吉泳 余方九耋癃聾 不堪筆 硯役 有所以感焉者 書之如此 而若其溪山之 勝風月之淸 四方諸山 空濛晻靄 隱見出沒於 空曠有無之外 而朝夕之間 氣象萬千者 登臨 者自有得矣 玆不復述 歲庚子五月下澣 李炳殷 記
청세정중건기(淸洗亭重建記)
청세정은 대방(帶方)의 흑성(黑城)에 있으니 오공(吳公) 휘(諱) 연경(璉卿)께서 지었다. 사람은 이미 멀어졌고 터 또한 오래되니 후손들이 거주하던 대정(大井)의 안산(案山) 위에 중건(重建)하였다. 폐허된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 정자를 지어 추모하는 마음을 편 것이다. 처음에 공은 광주(廣州)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재랑(齋郞)을 지냈고 나중에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되었다. 병자(丙子)년 북쪽 오랑캐가 창궐(猖獗)할 때에 임금의 어가를 따라서 남한산성에 들어가 만전(萬全)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화친이 이루어지자 마침내 통곡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살고 싶어 하지 않은 듯 했다. 이어 멀리 숨어서 자취를 감추었으니, 대개 남원(南原)에서 세거한 것은 공(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공은 이어 정자를 건립하고 에오라지 원울한 마음을 의탁하고 ‘청세(淸洗)’라 이름하였으니, 오랑캐의 흙먼지를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선왕(先王)이 포위되어 국가의 존망이 한 순간의 호흡 사이에 달려 있어서 또한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해야 할 때였다. 공께서 의(義)에 분개하여 충성을 다한 것이 통곡하던 중에 저절로 나타났고, 수치(羞恥)를 깨끗이 씻으려는 마음은 늙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군신간의 의리를 만고에 부식한 것이 또한 크고 지극하도다. 그래서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서쪽 두둑에 밭이 우거지니 진(晉) 도잠(陶潛)이 그립고, 동해에 달뜨니 제(齊) 노중련(魯仲連)에 부끄러워라.’하였다. 문원공(宋文元)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은 일찍이 말하기를, ‘충분(忠憤)으로 뜻을 말했다.’고 하였고, 또 청세정(淸洗亭)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존주(尊周)하는 의리가 있다고 하였다. 아, 전철(前哲)께서 부합되게 말씀하신 것이 지극하니, 후생(後生)이 어찌 감히 군더더기 말을 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옛적 창의사(倡義史)를 읽을 적에 공이 늦도록 절개 지킨 것을 우러르고 또 흠모한 바가 있었다. 바야흐로 후손이 번성하여 화목을 우선으로 하고 현인을 좋아하고 예(禮)를 숭상하여 지금까지 명성이 있으니, 진실로 예천(醴泉)과 영지(靈芝)는 별도로 근원(根源)이 있다는 것을 알겠구나. 정자가 이미 낙성되자, 정우(井愚) 오병용(吳秉鎔)이 나와 친교가 있다는 이유로 기문(記文)을 써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또한 말했다. “정자를 짓자고 처음에 의견을 발의(發議)한 사람은 ■묵(■默)·선기(善基)이고, 공역(工役)에 협조한 사람은 인선(仁善)·시영(時泳)·길영(吉泳)이다. 나는 바야흐로 90대의 귀먹은 노인으로서 글 쓰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이 정자에 대해 감회(感懷)가 있어서 이와 같이 적는다. 저 계산(溪山)의 승경과 풍월(風月)의 맑음, 사방 여러 산의 흐릿한 아지랑이는 텅 빈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은미하게 나타나고, 아침저녁 사이의 만천가지 기상(氣象)은 정자에 올라와서 보면 자연히 알 수 있으니, 이에 더 기술하지 않겠노라.
경자(庚子) 5월 하한(下澣)에 이병은(李炳殷)은 기술함.
余久聞郡北大也村吳氏 多述先美蹟 心嚮 往之 恨不一至其處目擊其眞際也 往年秋 與析荷田兄鎰健俛窩李君道衡 偕唁井愚 吳翁秉鎔於所謂大也村 吳宗老少次第敍 懽 遂引至村南小岡登亭之揭其名以淸洗 者 則岡巒周遭林木蒼翠中 有一松 大可合 抱 高能十尋 幢幢如車盖 盖與境相得也 低 徊久之 酒至羊羹又至 觥籌交錯 談說流暢 酒半井愚揖余而言曰 在昔仁廟丙子之 亂 行宮守南漢 擧朝遑遑時 則我十世祖考 進士諱璉卿 府君爲勤王馳赴 則媾已成矣 遂痛哭而南歸帶方之黑松坊 却足榮途 翛然 物外 爰謀一日之居然 而以淸洗題其額 府君歿 而子姓之居自黑松移大也 於二世 之後 則亭遂廢而墟矣 至往年庚子宗議咸 曰 亭之形之廢而子姓之居 又不免遷革 勢 也 亭之名之存 而府君之義 百世不磨 理也 理之所存 顧何嘗拘於勢哉 且夫血血相禪 於前祖後孫之間 而自有一氣融貫之妙 則 或者以地之有彼此 而遽置疑於有所阻碍 者 其取義蓋如此 願子之爲之記而有以明 之也 余曰有是哉 亭之易地而不易名 則是 固淸洗亭也 名之所獨而非所全 則是眞 公之淸洗亭也 名不替義長存 而孰敢間然 於黑松大也之異其壤乎 夫名之以淸洗者 卽淸心洗欲之謂也 不洗其欲而未聞有淸 其心者也 心旣淸然後 始可以讀天下之書 講天下之義理 緬想公偃仰於是亭之日 以 物物之曠慶 加日日之新功 所讀者 聖賢之 書也 所講者 春秋之義也 擧天下之物 無足 以攪吾方寸之靈境 則欲已洗矣 心已淸矣 實之修而名 豈有不相隨者乎 名之立而實 豈有不相副者乎 有名有實 疇能爭公之淸 洗乎 吾於是乎又有爲淸洗亭後人商量者 以 名亭之意而言 則名其外實德其內也 以述 先之道而言 則堂構其末 心法其本也 吳氏 諸公 無徒詢其外而詢其內 無徒守其末而 守其本 則是亭也豈不足以有光於百世乎 亭之重建始末及四圍景物 有他述備矣 奚 庸疊述 歲在閼逢執徐重陽後四日 月城 金種嘉 記
청세정기(淸洗亭記)
나는 군(郡) 북쪽 대야촌(大也村)에 사는 오씨(吳氏)들이 선대의 미적(美蹟)을 잘 계술(繼述)한다는 것을 들고서 마음속으로 사모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그 곳에 가서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난 해 가을에 석하(析荷) 전일건(田鎰健)형과 면와(俛窩) 이도형(李道衡)군과 함께 정우(井愚) 오병용(吳秉鎔) 옹(翁)을 위문하였다. 이른바 대야촌(大也村)에서 오(吳)씨 종중(宗中) 노소(老少)가 차례차례 기쁘게 반겨주었다. 마침내 마을 남쪽 작은 언덕으로 이끄니 ‘청세정’이라 이름을 내건 정자에 올랐다. 산 등성이가 주위의 임목(林木)과 어우러져 짙푸른 가운데에 한 소나무가 있었다. 크기는 한 아름쯤이고 높이는 10 발쯤 되며, 죽죽 늘어진 것이 꼭 수레덮개 같으니, 이곳의 경계와 잘 어울렸다. 한참 동안 배회하자, 술이 나오고 양고기 국[羊羹]이 또 나왔다. 술잔이 자주 오고가면서 말들이 유창해지고 술자리가 반쯤 어우러졌을 때 정우(井愚)가 나에게 읍(揖)하고 말하기를, “옛적 인조(仁祖) 병자(丙子)년 난리[亂]에, 행궁(行宮)하여 남한산성을 지키느라 온 조정이 황급할 때에 우리 십세(十世) 조고(祖考)이신 진사(進士) 휘(諱) 연경(璉卿)부군께서 근왕(勤王)하기 위하여 달려갔더니 화친이 이미 성립되었습니다. 드디어 통곡하고 남쪽으로 대방(帶方)의 흑송방(黑松坊)으로 돌아오셔서 벼슬길에서 발길을 돌리고 세상 밖에 초연하였습니다. 홀연히 하루를 도모하여 정자를 짓고 청세(淸洗)라고 편액을 내걸었습니다. 부군(府君)이 돌아가시고 자손들이 흑송(黑松)에서 대야(大也)로 이사하니, 2대가 지난 후에 정자는 마침내 무너지고 터만 남게 되었습니다. 지난 경자(庚子)년에 종중(宗中)에서 의논(議論)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정자 형태가 다 무너지고 자손들의 거주지도 또 옮겨가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형세이지만, 정자의 이름이 남아있고 부군(府君)께서 지킨 의(義)는 백세(百世)토록 퇴색하지 않는 것은 이(理)입니다. 이(理)가 존재하는 곳에 어찌 형세(形勢)에 장애가 되겠습니까. 또 혈(血)과 혈이 앞의 조상과 뒤 후손 사이에 이어져감에 자연히 일기(一氣)가 화합하여 관통하는 묘가 있으니, 혹자는 땅에 피차가 있는 것을 가지고 문득 장애가 있을 까 의심을 두기도 합니다. 그 취한 뜻이 대개 이와 같으니, 원컨대 그대는 기(記)를 써서 이를 밝혀주소서.”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옳습니다. 정자 터는 바뀌었어도 이름은 바뀌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청세정입니다. 이름만 홀로 남아있고 정자가 온전하지 않더라도 이는 진실로 공의 청세정입니다. 명(名)이 바뀌지 않고 의(義)가 길이 보존되는데 누가 감히 흑송(黑松)과 대야(大也)의 땅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저 ‘청세’라고 명명한 것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욕심을 씻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욕심을 씻지 아니하였는데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이 깨끗해진 뒤에 비로소 천하의 글을 읽을 수 있고 천하의 의리를 강론할 수 있습니다. 아득히 공께서 이 정자에서 한가롭게 지내시던 날을 생각하노라면, 물물(物物)마다 경사스럽고 날마다 새로이 공교로움을 더하며, 읽는 것은 성현(聖賢)의 책이고 강론하는 것은 춘추의 의리였으니, 천하의 만물로도 방촌(方寸) 즉 마음의 영경(靈境)을 교란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욕심이 이미 씻어지고 마음이 이미 깨끗해진 것입니다. 실(實)을 닦았는데 명(名)이 어찌 서로 부합되지 않겠으며, 명(名)이 있고 실(實)이 있는데 누가 공의 청세(淸洗)와 다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에 또한 청세정의 후인(後人)을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자를 명명한 뜻으로서 말하면, 명(名)은 그 외(外)이고 실덕(實德)은 그 내(內)이며, 선대의 도를 계술하는 것으로서 말하면, 당(堂)을 짓는 것은 그 말(末)이고 심(心)을 본받는 것은 그 본(本)입니다. 오씨(吳氏) 제공(諸公)들께서 그 외(外)에 대해서만 묻지 아니하고 그 내(內)에 대해 물으며, 그 말(末)에 대해서만 묻지 아니하고 그 본(本)을 지킨다면 정자는 어찌 백세토록 빛나지 않겠습니까. 정자를 중건(重建)한 시말(始末)이나 사방 주위의 경물(景物)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갖추어 서술하였으니 어찌 중첩해서 서술하겠습니까.” 하였다.
갑진(甲辰)년 중양(重陽) 후 사일(四日)에 월성(月城) 김종가(金種嘉)는 기(記)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