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산 아래에 서북쪽을 뒤로하고 동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산을 등지고 시냇물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융경(隆慶) 3년(己巳:1569) 현감 성인(成訒) 때에 불타서 만력(萬曆) 37년(己酉:1609)에 현감 김두남(金斗南)이 중창(重創)하였다. 숭정 (崇湞) 38년(乙巳:1665) 현감 홍진(洪璡) 때에 불에 탔으므로 다시 중창하고, 강희 (康熙) 5년(丙午:1666)에 기와로 지붕을 이었으며, 건륭(乾隆) 정묘년(丁卯年:1747)에 현감 서유상(徐有常)이 다시 색칠을 하여 아름답게 꾸몄다. 가경(嘉慶) 8년(癸亥:1803)에 현감 이희기(李羲耆)가 중창하였고, 중수기(重修記)는 성담 (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07) 선생이 지었다.
도광(道光) 20년(庚子:1840)에 현감 정기철(鄭基轍)이 보수하였고, 함풍(咸豊) 7년(丁巳:1857)에 현감 신석년(申錫年)이 다시 보수하였으며, 동치(同治) 8년(己巳:1869)에 현감 원세철(元世澈)이 중수하였다. 기문(記文)과 현판이 있다.
객사(客舍)의 서쪽으로 100보(步)쯤 되는 곳, 봉황산 아래에 남향하고 있다. 내 아(內衙)의 이름은 와치재(臥治齋)라 하고, 외아(外衙)의 이름은 청심헌(淸心軒) 이라 하였다. 숭정(崇情) 14년(신사 : 1641) 현감 황환(黃渙) 때 중창(重創)하였으 며 옛날의 편액(扁額)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숙종 20년(갑술 : 1694)에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박경후(朴慶後)가 편액에 맥 우당(麥雨堂)이라 썼고, 강희(康熙) 병신년(1716)에 현감 이만성(李萬成)이 중건 한 뒤에 절애당(節愛堂)을 평근당(平近堂)으로 편액을 고쳐 썼다.
건륭(乾隆) 55년(경술 : 1790)에 현감 남공철(南公轍)이 편액을 청필헌(聽必軒) 이라 썼으며, 동치(同治) 8년(기사 : 1869)에 현감 원세철(元世澈)이 새롭게 중건 하고, 상량문을 성균관 거재유생(居齋儒生) 윤태일(尹泰一)로 하여금 지어 올리 게 하고, 기문(記文)은 현감이 스스로 지었다. 또한, 현판이 있는데 편액의 글씨와 주련(柱聯)은 함열(咸悅)에 사는 진사 서홍순(徐洪淳)을 시켜 쓰게 했다.
순찰사 이성중(李成中)·현감 윤행엄(尹行儼)·판서 윤행임(尹行恁 1762~1801)· 현감 홍철모(洪哲謨)·순찰사 이시재(李時在)·현감 정준화(鄭駿和)·현감 민두 호(閔斗鎬)의 시가(詩歌)를 읊은 현판이 있다.
雲水館在鳳凰山下乾坐巽向負山臨溪隆慶三年己巳成候訒時灾萬曆三十七年己酉金候斗南重創崇禎三十八年乙巳洪候璡時災因爲重創康熙五46)年丙午盖瓦乾隆丁卯徐候有常又爲丹雘嘉慶八年癸亥李候羲耆重創重修記性潭宋先生製之道光二十年庚子鄭候基轍修補咸豊七年丁巳申候錫年修補同治八年己巳元候世澈重修有記文懸板
衙舍在客舍西百步許鳳凰山下南向內衙名曰卧治齋外衙名曰淸心軒崇禎十四年辛巳黃候渙時重創古額今無康熙甲戌(1694)巡相朴公慶後題額麥雨堂丙申(1716)李候萬成重建後以節愛堂題額平近堂47) 乾隆五48)十五年庚戌南候公轍題額聽必軒同治八年己巳元候世澈一新重建上樑文使齋儒尹泰一製進記文親製有懸板題額與柱聯使咸悅進士徐洪淳書之有巡相李公成中尹候行儼尹判書行恁洪候哲謨巡相李公時在鄭候駿和閔候斗鎬吟詠懸板
46) ‘四’자를 역자가 ‘五’자로 바로잡았다. 47) ‘甲戌’의 앞에 있던 ‘丙申李候萬成重建後以節愛堂題額平近堂’18자를 역자가 ‘麥雨堂’뒤로 바로잡았다. 48) ‘四’자를 역자가 ‘五’자로 바로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