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행편은 삼강록(三綱錄)과 그 밖의 충(忠)・효(孝)・학행(學行)을 겸비한 사람 들을 모두 유사(有司) 이정의(李廷儀)가 작성한 단자(單子)에 따라 기록해 넣었다.
조 평(趙 平)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충의(忠義)와 효행(孝行)으 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학문과 품행이 무리 들 중에서 빼어났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우러러 사모 하여 제례(祭禮)를 행하였다. 뒤에 간행한 문집이 있어 서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곽흥무(郭興懋)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을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여 공신(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조평 선생 묘비 사림(士林)들이 그의 충의(忠義)를 사모하여 사당(祠堂)을 건립하였다. 그의 효성 과 우애, 학문과 품행은 지금까지도 칭송되고 있다.
박 창(朴 昶)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호(號)는 매헌(梅軒)으로 수심재(收心齋) 박훈(朴薰)의 현손(玄孫)이다. 타고난 품성과 자질이 엄격하고 의지가 굳세며, 효성(孝誠)과 우 애가 두텁고 성실하여, 한평생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 선조(先祖)의 교훈을 준수하 였다. 상(喪)을 당하여, 그의 형 욱(旭)과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음직(蔭職)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박승락(朴承洛)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號)는 양호정(養浩亭)으로,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5세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화평스러우며, 선조의 가훈(家訓)을 계승하였 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대를 잇는 효자라 하였다.
이명근(李命根)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 는 졸우재(拙愚齋)이다. 학문과 효행(孝行)이 당대(當代)에 으뜸이었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으므로, 관찰사가 임금에게 아뢰는 장계(狀啓)에 올라 봉상시(奉常寺) 참봉에 제수되었으 며,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공(公)이 일찍이 기강(紀綱)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 잡을 규약(規約)을 제정하였으니, 그것은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101)의 주자학규(朱子學規)와 비슷한 것이었다.
한흥업(韓興業)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의 6세손으로, 선전관(宣傳官) 벼슬을 하였다. 광해군 왕조를 당하여 벼슬을 아니할 생각을 고수하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스스로를 산수(山水)를 즐기는 즐거움에 맡기고 누정(樓亭)을 지어 이름을 피암(避暗)이라 하였다. 뒤에 고부(古阜)군수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아니 하고, 은둔하여 아무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사는 생활을 즐기다가 일생을 마쳤다.
심찬서(沈纘西)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풍산군(豊山君)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 다. 효도로써 부모를 봉양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덕행으로 관찰사의 장계에 올 랐다. 통정대부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심세기(沈世紀)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승지(承旨)에 증직된 찬서(纘西)의 아들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 행실로 조정에 상달(上達)되어,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 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總管)에 증직되었다.
윤극승(尹克昇)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 는 우재(愚齋)이다.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고, 학 식과 효행이 당대(當代)에 널리 알려졌다.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1711~1788) 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경학(經學)과 예설(禮說)에 대한 연구를 한평생 멈추 지 아니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였다. 문집(文集) 이 있어 집안에 잘 간수하여 보존되고 있다. 음직(蔭職)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었다.
이정진(李靖鎭)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졸와(拙窩)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 손이다. 예복(禮服)을 입고 허리띠를 두르고, 예(禮)를 익히고 학문을 닦아 인륜(人倫)을 밝히니, 일가 친족들이 모두 감동하여 따르고, 이웃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박치운(朴致雲)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호(號)는 청암당(晴菴堂)이며, 수심재(收心齋)의 6세손 이다. 성품과 자질이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효심 (孝心)이 지극하였다. 『훈몽집(訓蒙集)』 2권을 지었다.
박경설(朴慶設)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7대손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 과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극진하였으며, 가훈(家訓)을 대대로 물려받아 온갖 행실 에 이어졌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고 존중하는 바 되었다.
이근만(李根萬)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소모사(召募使) 정란(廷鸞)의 후손이다. 학문과 식견 (識見)이 고상하고 현명하였으며, 품행을 수양하고 삼가고 근신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 행실로 당대(當代) 사람들의 추앙과 존중을 받았으며, 향천(鄕薦)에 들었다.
박광건(朴匡鍵)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호 는 지봉(芝峯)이다. 품성과 자질(資質)이 온화하 고 순박하였으며, 종조부인 백모정(白茅亭) 경태(慶泰)의 교훈을 받들어, 여러 아 들들을 인(仁)・의(義)로써 가르쳤다.
윤술환(尹述煥)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유가(儒家)의 학문 을 익히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향교의 문묘(文廟)에 종사하면서, 항상 선비가 쓰 는 두건(유건:儒巾)을 쓰고 생활했으며, 예경(禮經) 등의 해설에 뛰어났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였다.
한홍규(韓弘奎)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贈職)된 홍직(弘直)의 동생이다. 학문이 고상하고 총명하였으며, 일에 임하면 침착하고 몸가짐에 모범이 되기를 숭상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칭찬하고 사모하였다. 음직(蔭職)으로 통 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이규상(李圭祥)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정이당(靜履堂)의 8세손이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바르고 굳세었다. 넷째 동생 규연(圭淵) 또한 문장이 화려함으로 알려졌는데, 서로 더불어 우애하였다. 아들과 조카들에게 도의(道義)로써 가르쳤으며, 손님들을 예 의로써 대접하였다. 책상 위에는 항상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이 있었으며, 당시의 재상(卿宰)들과 서신을 내왕하였는데, 아직도 『묵은집(黙隱集)』에 실려 있다.
홍원섭(洪遠燮)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후덕하며 인품이 단정하였다. 몸가짐을 삼가서 옛 사람들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므로, 누차 향천(鄕薦)에 들었다.
이봉기(李鳳基)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근만(根萬)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고 뛰어났으며, 언론이 정직하였다. 기강(紀綱)을 붙들어 일으키고 풍속을 교화하였 으며, 항상 온화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명망(名望)이 온 고을에 중(重)하였다. 여 러 차례 향천(鄕薦)에 들었으며, 숙련가(행가:行家)의 풍모가 있었다.
이회연(李會沇)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자하였으며, 몸을 수양하는 것을 일삼고, 아들과 조카를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빈손으로 재산을 이루어 위토답(位土畓)을 바치고, 일가친척과 의 정의(情誼)를 돈독(敦篤)히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추앙과 존중을 받았다.
이 집(李 潗)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집안이 본래 청렴하고 가난하였는데, 빈손으로 부자가 되어 위토답(位土畓)을 준비하여 바치고 무덤 앞의 석물(石物)들을 모두 갖추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윤이현(尹頤鉉)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학문과 효성과 품행으로 그 시대에 널리 알려졌다. 유가(儒家)의 학문에 종사하여 문집(文集) 몇 권을 남겼다.
한치순(韓致淳)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호(號)는 오재(梧齋)이고, 피암공(避暗公) 흥업(興業) 의 7세손이다. 예복(禮服)을 입고 띠를 두르고 늙도록 예경(禮經)을 연구하고 익 혔으며, 매산(梅山)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예학(禮學)에 밝아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올랐다. 문집(文集)이 있다.
한형록(韓亨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부원군(府院君) 확(確)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솔직하고 진실하였는데, 효심(孝心)과 우애로써 마음을 다스렸으며, 아들 가르치는 것을 업(業)으로 하여 문학을 가르치고 인도하였다. 일가 친족들과 화목하였으므 로 마을 사람들이 공경하고 감탄하였다.
한 승(韓 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청봉(靑鳳)이다.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받아 익 히고, 스승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아서, 품행과 도의(道義)가 매우 돈독(敦篤)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인재로 천거됨을 입었다.
심봉원(沈鳳遠)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풍산군(豊山君)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일가 친족들과 즐겁고 정답게 이야기하였다. 서로 선행(善行)을 권면하고 격려하였으므로 남들이 믿고 따랐으며, 절조(節操)를 지 키고 인자(仁慈)하였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군(護軍)을 제수 받았다.
심진룡(沈鎭龍)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봉원(鳳遠)의 아들이다. 효심(孝心)을 이어받아, 부모를 모시고 봉양하는 데 시종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누구도 그에게 미칠 수가 없었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오영석(吳榮錫)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호(號)는 학정(鶴汀)이다. 효성과 우애와 문학으로 전 국에 널리 알려졌으며, 음직(蔭職)으로 감역참봉(監役參奉)에 임명되어, 여러 고 을의 수령(守令)을 역임하고 통정대부에 이르렀고, 종2품관 내장원경(內藏院卿) 에 승진되었다. 그가 경유하는 고을마다 불망비(不忘碑)가 세워졌다. 퇴직하고 학산(鶴山)에서 살면서, 매일 경향(京鄕)의 문우(文友)들과 함께 문장을 논하고 시를 읊었다. 조용하고 한가한 것을 업(業)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물가 평지 (平地)에 사는 도사(선관:仙官))라고 일컬었다. 만년(晩年)에 마음속으로부터 우 러나오는 효성이 더욱 두터워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묘(墓) 자리를 구하였다.
이동의(李東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고, 진사 승영(升榮)의 아 들로서, 통정대부 벼슬을 하였다. 성품이 본래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봉양 하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게다가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 으나, 여러 차례 과거시험의 복시(覆試)에서 실패하였는데, 그가 몸소 과거의 일 로 서울과 시골을 분주히 오가면서, 그의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효성이 마침 내 그의 명성을 세상에 드러내었다. 언론이 강직(剛直)하였으며, 강상(綱常)을 바 로잡고 풍속을 교화(敎化)함으로써 마음을 다스렸다. 그의 아들 기상(起相) 역시 그의 어버이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윤태근(尹泰根)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인정이 두터우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렸다. 젊은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예제(禮制) 지키기를 마치 나이가 많은 사람과 같이 하였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음식을 공양(供養) 하였으며, 비록 구하기 어려운 음식물이라도 기필코 구하여 드렸다. 항상 자기 동생이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며, 집안이 본래 청렴하고 가난하 여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므로, 자주 집 밖으로 나고 들었지만 나갈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뵙고 인사드려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일가 친족과는 화목하고 친우를 만나볼 때면 항상 화락(和樂)한 기운이 있었다. 아들과 조카들을 선행(善行)으로써 가르쳤는데, 그의 아들 병한(秉漢) 또한 효자로서 칭 송되었다.
박상수(朴翔洙)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의 10세손이다.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 세고 강하며, 부모의 뜻에 순종하여 가정을 잘 다스렸다. 예경(禮經)에 통달하였 으며, 향촌(鄕村)의 강상(綱常)을 바로 세웠다. 그의 아내 오(吳)씨 또한 훌륭한 행실(烈行)로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최봉기(崔鳳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진사(進士) 진기(鎭紀)의 6세손으로서, 통정(通政)대부 벼슬을 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으며, 언론(言論)이 바르고 곧았으므 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최봉조(崔鳳朝)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진사(進士) 응숙(應淑)의 12대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仁慈)하였고, 가정의 교훈을 계승하여 문학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최헌익(崔憲翼)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진사(進士) 응숙(應淑)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래 인자 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데 예절이 밝았다. 형제들과 우애하고 가족과는 화목 하였으며, 통정(通政)대부를 지냈다.
윤행두(尹行斗)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송암(松菴)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효성과 품행이 뛰어나고 학식이 풍족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다만 신체를 봉양할 뿐만 아니라 겸하여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였다. 또 품행을 수양하는 일은, 다만 자기 자신을 수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 치는 데 미쳤으므로, 남쪽 지방의 문우(文友)들이 우러러 사모하며, 내왕하면서 교유(交遊)하였다.
이경우(李暻宇)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으로 도정(都正)에 임명되어 종2품 가의(嘉義)대부로 승진하였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어질 고 자비로웠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것을 한스럽게 여겨,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항상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다. 홀몸으로 집안을 일으켰으며, 여러 아들을 글을 가르쳐 과거에 급제하여 각각 가업(家業)을 유지하게 하였으니, 평안 히 복록(福祿)을 누릴 만하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갈(墓碣)을 세우고, 위토답(位土畓)을 마련하고 정려(旌閭)까지 허락받아서 본래의 뜻을 다 이루었으 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이현의(李賢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며, 도정(都正)을 지낸 태영(泰榮)의 아들이다. 관찰사의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3품 의관(議官)으로 승진하였고 뒤에 비승(秘丞)에 이르렀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므로, 부모를 모시면서 뜻을 받들어 봉양하고, 신체를 받들어 보양 (保養)하였으며, 그의 동생과 우애하여 네 물건 내 물건의 구분이 없었다. 또 대대 로 전해오는 자그만 가업(家業)을 지키면서,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을 제일(第一)로 삼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에 베푸는 일이 적지 않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이병의(李炳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석우(石愚)인데, 효령(孝寧)대군 보(補)의 후 손이며, 현의(賢儀)의 동생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 와 형제간의 우애를 가정에서 실행하였다. 문학으로 온 나라에 널리 알려졌는데, 손에는 고사(古史)의 명문(名文)을 놓지 아니하였고, 입에서는 사율(四律)의 시 (詩)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후학(後學)들을 칭찬하여 추천하였으므로, 세상 사 람들이 모두 흠모하고 본받았다. 젊은 나이에 중앙과 지방의 중신(重臣)들과 교유(交遊)하면서, 문장으로써 서로 친하게 지냈다. 타고난 체격이 본래 크고 걸출(傑出)하였으며, 언론이 넓고 해박하여 친우들과 응대(應待)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참판 윤태일(尹泰一)과 서로 교유(交遊)하였으며, 봄・가을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또 강회(講會)를 온 마을의 의식(儀式)으로 만들었다. 강회유사 (講會有司)는 동면(東面)의 참봉 심진표(沈鎭杓), 진사 양기형(梁基衡),재유(齋儒) 이광의(李光儀), 윤병제(尹秉濟)와, 서면(西面)의 의관(議官) 박종헌(朴琮憲), 재유(齋儒) 박홍근(朴弘根), 이기상(李起相), 한광석(韓光錫), 최봉길(崔鳳吉)이다.
이봉숙(李鳳淑)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써 마음을 다스렸다. 부모를 봉양하면서 최선을 다하였 으며, 늙은 어버이를 모시며 늙은 나이에 이르도록 아무 탈 없이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다. 문학적 재능과 도덕적 수양으로 온 마을 사람들이 추앙하고 존중하는 바 되었다.
조병용(趙柄鏞)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세마(洗馬) 벼슬을 한 평(平)의 후손으로 참봉 벼슬을 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인정이 두터우며,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그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것을 한탄하며, 그의 동생에게 우애하고 집안 사람들과 화목하였다. 『운학집(雲壑集)』을 간행(刊行)하여 세상에 널리 유포(流布)하였으니 조상을 드러내려는 마음이 대단히 왕성하였다. 글을 가 르치는 데에도 순서가 있어서, 그의 아들 희제(熙濟)를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 에게 배우게 하였는데, 그의 학문이 날로 발전하였다. 가정이 본래 청렴하고 빈한 하였는데, 문우(文友)들과 교제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이웃마을 사람들이 공경 하고 우러렀다.
심지원(沈志遠)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웠는데, 젊은 나이에 부모상(喪)을 당하여 오래 모실 수 없었던 것을 항상 한탄하였다.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곤궁함을 잘 견디어내며, 글을 읽어 서 곧고 깨끗한 절의(節義)와 기개(氣槪)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언론이 바르고 곧아서 강상(綱常)을 육성・확립하는 것을 제일로 삼았으며, 친구를 접대하는 데에 전혀 겉치레가 없었다. 매번 여러 사람이 한데 모이는 자리를 주관하였는데, 진실 한 마음에서 행한 것이라 감동하여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옛사람의 질박한 풍격(風格)이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사모하였다.
심진헌(沈鎭憲)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효도하고 우애 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타고난 신병(身病) 으로 오래도록 잠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과 약물(藥物)을 항상 구하여 드리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형제간에 우애하여 화목하고 즐거움이 깊었는데,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므로, 마을 사람들 이 사모하여 본받았으며, 종중(宗中)의 일을 주관하는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며 사모하였다.
이영우(李英宇)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孝寧)대군 보(補)의 후손으로 경기전 참봉을 지냈다. 어린 나이에 가정을 계승하였는데,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도덕의 수양을 행하고, 사람의 접대(接待)를 온화하게 하였다. 오랫동안 부모를 모시면서 그 뜻 을 받들어 순종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예의 집행을 한결같이 고제(古制)를 준 수하였다. 또 예경(禮經)을 연구하여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이 여기에 근원하였다. 아직도 전하는 옛사람의 질박한 풍격(風格)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며 본받 았다.
노광하(盧光夏) 본관은 교하(交河)이며, 문광공(文匡公) 사신(思愼)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웠다. 어버이가 병에 걸리자 하늘에 빌었으며, 어버이의 신 체를 보양(保養)하고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여, 기쁘게 하는 데에 정성을 다 하였으므로, 당대(當代)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 대부의 자급(資級)을 받아 종2품 가선(嘉善)대부로 승진되었다.
노병린(盧秉麟) 본관은 교하(交夏)이며, 문광공(文匡公) 사신(思愼)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디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며, 농사를 지어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였다. 성실한 생활을 목표로 삼고, 친족(親族)・인척(姻戚)과 화목하고 친구들에게 신의(信義)가 있었 다.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의 추앙(推仰)과 존중을 받았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 (通政)대부에 제수되어 가선(嘉善)대부에 이르렀다.
곽수의(郭守懿)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문헌공(文憲公) 원진(元振)의 후손이고, 반송당(伴松堂) 흥무(興懋)의 9세손이다. 효심(孝心)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그의 양(養) 부모를 봉양하면서 즐겁게 그 뜻을 받들어 봉양하였으며, 어버이의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다. 집안이 비록 빈한하였으나 제사음식을 지성으로 준비 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박홍근(朴弘根)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백모정(白茅亭) 경태(慶泰)의 현손이다. 본성(本性)이 자비하고 어질며,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대대로 이어받아서, 집안이 빈한하였으나 부지런히 책을 읽음으로써, 문학과 예설(禮說)로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심진표(沈鎭杓) 심진표 선생 사진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으로 호(號)는 동곡 (桐谷)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을 가정에서의 가르침으로 이어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 에 합격하였으나 계속하여 회시(會試)에 실패했다. 내시부(內侍府)의 예외적인 천거(별천:別薦)에 참 여하여, 장릉(莊陵)참봉에 제수되어 부임하라는 임 금의 분부(교시:敎示)까지 있었으나, 신병(身病)을 이유로 면직(免職)을 청하였다. 참판 민형식(閔亨植), 승지 박시순(朴始淳)이 칭찬한 글에 이르기를, ‘그대 같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의 포부(抱負)를 부질없이 늙게하는 것이 애석하다.’하였다. 별천(別薦)을 받았으므로 호남의 사우(士友)들이 우러러 사모하였다.
곽수익(郭守翼)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문헌공(文憲公) 원진(元振)의 후손이고, 반송당(伴松堂) 흥무(興懋)의 9세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마음속에 서 우러나오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한평생 이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 다. 일가 친족과 화목하여 그 의리를 밝혔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따랐다.
곽정규(郭正奎)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문헌공(文憲公) 원진(元振)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기면서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신체를 보양(保養)하였으며, 형제들과 우애하고 집안사람들과 화기(和氣)가 충만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공경하고 따랐다.
한학교(韓學敎)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부원군(府院君) 확(確)의 후손이며, 교관(敎官) 기필 (基弼)의 아들이다.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효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 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계속된 복시(覆試)에서의 실패를 항상 한탄하면서, 아 들의 효행을 표창하였다. 그는 가산(家産)을 기울여 선산(先山)의 비갈(碑碣)을 세웠으며, 그의 동생과 우애하고 집안 사람들과 화목하고 즐겁게 지냈다. 여러 아들들을 가르쳐서 대체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을 알았으므로, 고향 사람들과 일가 친족들로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의 아들 동석(東錫)・정석(鼎錫)도 효자로 칭송되고 있다.
윤태윤(尹泰允)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순박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을 마음속에 굳게 지켰다. 어버이의 병환이 위급해져서, 먼 곳으로부터 약을 구하여 올 때 한밤중에 도깨비불이 앞을 인도하였는데, 끓여 드려 효험이 있었다. 또 부모의 묘와 형의 묘 3, 4기(基)를 이장(移葬)하면서, 기필코 좋은 땅(길지:吉地)을 구하였으니 효성 과 우애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일이다. 화락(和樂)한 마음으로 사람들과 교제하 고, 친족과 화목하기를 돈독하게 하였으니, 평소의 생각이 있었던 바라 마을 사람 들이 공경하고 따랐다.
오석우(吳錫宇)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도정(都正) 벼슬을 지내고 가의(嘉義)대부에 올랐다.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효성으로 품행을 수양하고, 부모를 여읜 어린아이로 부터 성인(成人)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서도, 색동옷을 입고 산소에 가서 부모 를 기쁘게 하였다. 비갈(碑碣)을 세우고 묘역(墓域)을 깨끗이 청소하였으며, 재각 (齋閣)을 세우고 아호(雅號)를 지어주었다.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으며 벼슬이 높아 그 명성이 대대로 길이 전할 것이다.
유제근(柳濟根)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낙봉(駱峯) 헌(軒:1462~1506)의 후손이다. 효자・열녀를 대대로 가문에 전하고 품행의 수양을 실행하며, 여러 대에 걸쳐 증직(贈職)을 받고 정려(旌閭)를 허락받는 것을 평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집안이 비록 청렴하고 빈한하나, 농사짓고 베짜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손님들을 응대하였으므로, 중앙과 지방의 글하는 선비들이 많이 교유(交遊)하였으니, 대가 (大家)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한형리(韓炯履)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부원군(府院君) 확(確)의 후손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부모를 향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홀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시종(始終) 을 한결같이 고제(古制)를 준수하였다. 형제들과 우애하고 가정에서 지켜야 할 규칙과 도리를 잘 이어갔으며, 일가 친족들과 화목을 돈독히 하고 친척들과 정화 (情話)를 즐겁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감탄하였다.
오재두(吳在斗)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참판을 지낸 영석(榮錫)의 아들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음직(陰職)으로 참봉을 지냈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착하여, 어 버이를 섬기면서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하여 온화한 기운이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가족이 지켜야 할 규율을 잘 지켜서 이어가고, 선(善)을 행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을 대가(大家)의 풍도(風度)를 삼았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또 경서(經書)의 취지를 연구하여 자기 자신을 통제할 방도를 삼아서, 비록 한 마디 의 말이나 한 가지 행동이라도 소박하고 깨끗하게 본분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였으 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본받았다. 그가 실제로 행한 덕행들은 지방 유생들이 낸 진정서(陳情書)에 실려 있다.
홍재기(洪在祺)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하고 인정이 많으며, 효심(孝心) 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양자로 들어간 집에서 성장하여, 양부모를 봉양하는 도리 를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의 공양(供養)에 끊임이 없었다. 상 (喪)을 당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묘지를 구하여 좋은 땅을 사서 안장(安葬)하 였다. 자손들이 집 안의 뜰에 가득하며 교훈에 적절한 도리가 있었다. 그의 동생 재원(在爰)과 한집에 살았으나, 항상 화락(和樂)하고 태평하였으며, 가장 가까운 친족들과 화목하여 대대로 가문에 전해내려오는 행실이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 이 칭찬하였다.
한철교(韓喆敎)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부원군(府院君) 확(確)의 후손이다. 효심(孝心)이 지극히 순수하여 오래도록 늙은 어버이를 모시었다. 가정이 본래 빈한하였으므로 힘써 재산을 운용하여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였다. 생활이 몹시 곤란한 중에도 책을 읽 어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며, 상(喪)을 당하여 상례(喪禮)의 봉행을 예제(禮制)에 따라 준수하고, 지켜야 할 거적자리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아들과 조카들을 교훈하는 것이 도리에 알맞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공경하며 따랐다.
이기상(李起相)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효령(孝寧)대군 보(補)의 후손이며, 통정(通政)대부 동 의(東儀)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효성이 매우 돈독 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데에 지극하고 극진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정성스런 마음으로 묘지를 구하여 기필코 좋은 땅을 매입하였다. 홀아버지를 보양하면서, 세 끼니 입에 맞는 음식을 내외가 주선하였고, 먼 지방의 얻기 어려운 음식물이라 도 기필코 구하여 드렸으니, 감동할 만한 그의 효심에 누가 공경하여 따르지 않을 것인가.
김병수(金秉秀)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후손이다.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대부를 지냈다. 타고난 성품이 본디 순박하고 검소하였고, 어버이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으로 섬겼으며, 일가 친족과 화목하고 온 집안이 화락 하였으므로, 같은 동네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김사표(金思杓)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 .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효성이 매우 돈독하여, 부모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고 신체를 보양(保養)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뜻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아들을 가르치는 데 알맞은 도리가 있었고, 일가 친족들과 화목하였으므로 법부(法部)에 서 위원(委員)으로 임명하였다.
김인수(金仁秀)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후손이다. 명성(名聲)을 구하지 않고,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품은 뜻을 지켜나갔다. 장수(長壽)를 이유로 임금이 상을 내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려주었다.
김사광(金思光)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후손이다. 효도와 품행으 로 천거되어 과천(果川) 부교원(副敎員)에 임명되었다. 그의 덕행이 『삼강록(三綱錄)』에 실려 있다.
한동일(韓東一)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의 후손이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학문에 정진(精進)하여, 학문과 효행(孝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한종혁(韓宗赫)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의 후손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독실한 품행과 도의로 명망(名望)이 있었다.
홍종성(洪鍾晟)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임진왜란 때의 공신 석방(碩舫)의 후손이다. 마음속으 로부터 우러나오는 효성이 지극히 순박하였으며, 항상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서 부모・조부모를 함께 봉양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고 청렴 하여 힘써 농사지어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였다. 일이 없어 한가한 날에 책을 읽어서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삼았다. 마음가짐을 공평히 하고 소박하고 깨끗 하게 본분을 지키며, 돈후(敦厚)하고 공손하여 향임(鄕任)의 자리에까지 이르렀 다. 언론이 바르고 곧았으며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아니하여 옛사람의 풍도(風度) 가 있었다.
한봉휴(韓鳳休)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 병환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6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는데,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感應)한 것이라고 말 하였다.
최종하(崔宗河)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성품이 본디 상세하고 분명하였다. 동생과 한집에 살면 서 화락(和樂)한 기운이 있고 격분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입고 먹는 것을 함께하 니 세상 사람들이 그 우애를 칭찬하였다.
이한영(李漢榮)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어버이를 섬기면서 효도하였고, 동생과 함께 한집에 살면서 우애하고 화락(和樂)하였다.
한규필(韓圭弼)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문장이 화려하고 정 ・명백하였으며, 성품이 본래 충실하고 인정이 두터웠다. 형과 함께 한집에 살면서 화락하였으며, 매양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걱정하면서도 일상(日常)적인 공양을 거르지 아니하였다.
한우석(韓宇錫)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 .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고,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고 신체를 보양 (保養)하는 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전신택(全愼宅)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어버이에게 효도하였다. 일이 없어 한가한 날에 학문을 연구하여, 경서(經書)의 뜻을 능통하 게 이해하여 시경(詩經)의 주해(註解)를 가르쳤으니, 재능과 효행을 구비하였다. 일가 친족과 화목하고 친구들을 접대하니,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이홍의(李鴻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가정을 물려받아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서, 비록 한 마디의 말이나 한 가지 행동이라도 어버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그의 둘째 형은 승지(承旨)로 항상 서울에 머물렀고, 큰형 정의(鼎儀)와 동생 상의(尙儀)는 한집에 살면서 화목하고 즐거웠 으며,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다. 게다가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에 형제가 온갖 정성 을 다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바였다.
곽도영(郭道永)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문헌공(文憲公) 원진(元振)의 후손이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구하여 드렸다. 형제간에 우애하여 네 것 내 것을 구분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일가 친족과 화목하여 남의 위급함을 구제하는 풍도(風度)가 있어 가족이 화목하고 따랐으므 로, 그 명성이 이웃에 널리 알려졌다.
곽동호(郭東鎬)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오암(鰲巖) 유번(維藩)의 6세손이다. 효행과 학행(學行)이 드러나서,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대부에 임명되었다.
곽만현(郭萬顯)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호(號)는 송암(松菴)이다. 반송(伴松) 흥무(興懋)의 6 세손이고, 청계(聽溪)의 후손이며 태증(泰曾)의 손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 고 신중하며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이 극진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으며, 초상(初喪) 이후 졸곡(卒哭)까지의 일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과거 공부를 하지 아니하였으며, 경서의 내용과 이치에 밝았으므로, 누차 고을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명단에 들었다.
이병익(李炳益)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봉기(鳳基)의 아들이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는 것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품성을 수행할 것을 대대로 가문(家門)에 전하 였다. 부모를 봉양하면서 마음을 즐겁게 하는 데에 힘썼으며, 그 뜻을 받들고 순종 하여 옛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상(喪)을 당하여는 한결같이 옛날의 법식과 제도를 준수하였으며, 마음을 집중하여 책을 읽고 경서(經書)의 뜻을 연구하였다. 동생 병화(炳和)와 우애가 매우 두터워서 온 가정이 화락(和樂)하였다. 아들과 조카들을 가르쳐 마침내 학식이 많은 선비들이 되었으니, 어떤 업무에 정통한 사 람의 풍모가 분명하다.
한달휴(韓達休)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이 극진하여,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여지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하늘에 빌었으며, 형 봉휴(鳳休)는 손가락을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효험이 있었다. 3일 뒤에 또 임종(臨終)할 지경에 이르러, 공(公)이 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오래지 않아 곧 소생하여 3일 동안 연명(延命)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들 형제의 효심(孝心)이 하늘과 사람 들의 감응(感應)을 얻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규찬(韓圭燦)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 .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돈후(敦厚)하며, 선조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지키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 기며 일가 친족과 화목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고 존중하였다.
한규영(韓圭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안양공(安襄公) 종손(終孫)의 후손이다. 선조를 받들면서 효도를 생각하고, 사람과 교제할 때에 인자함으로 하였으며, 일에 직면하여 삼가고 조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착함을 칭찬하였다.
오석도(吳錫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군수(郡守)를 지낸 변하(變夏)의 11대손이다. 성품이 본 디 자애롭고 어질며, 어버이를 효도로써 섬기고, 일가 친족을 화목함으로써 사랑하 며, 힘써 자신의 몸을 수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선행(善行)을 칭찬하였다.
이춘영(李春榮)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평생 활달하고 다른 사람의 위급을 구해주는 기풍(氣風)이 있었다.
이규일(李圭一)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래 절약하 며,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가업(家業)을 엄히 지키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아들 을 교육하여 덕이 있는 기상이 볼만 하였다.
박정두(朴鼎斗)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의 후손으로 효행과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노년(老年)에 어버이를 모시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는 진실한 마음으로 묘지를 구하여 여러 차례 이장을 하면서 길지 (吉地)를 구하였다. 일이 없는 한가한 날에 책을 읽어 경서의 뜻을 깊이 연구하여 몸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방도로 삼았다. 마을의 회의에 이르러서는 굳세고 곧은 것을 근본으로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본받았으며,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박수근(朴洙根)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며, 낳아준 부모와 길러준 부모를 섬기면서 지극히 순수하였다. 게다가 일가 친족과 화목하고 형제들과 우애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 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이광의(李光儀)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효령(孝寧)대군 보(補)의 후손이며 참봉 영우(英宇)의 아들로서, 선대(先代)의 효성과 우애를 계승하였다. 가정이 본래 청렴하고 가난하 였으므로, 힘써 재산을 모아 부모를 편안히 봉양하였으며, 선조를 표창하고 찬양 할 마음으로, 지성으로 사업을 경영하고 중앙과 지방으로 활동하여 그 이름을 드 러냈으니, 효심이 지극하여 그러하였던 것이다. 형제간에 우애하고 여러 일가 친족들과 화목하여, 화락(和樂)한 기운이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문학으로 당대에 명성이 있었다.
조병섭(趙炳燮) 본관은 옥천(玉泉)이다. 효도와 우애를 대대로 물려받아서, 상중(喪中)에 있는 3년 동안 예제(禮制)를 정성을 다하여 지켰으며, 비록 바람이 부는 추운 때나 더웁 고 비가 오는 때에도, 산소를 찾아 돌보고 청소하는 일을 거르지 아니하였다. 한편 그의 생(生)의 초기에 글재주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내왕하며 교유하였는데, 말이 대체로 강직(剛直)하였으므로, 매번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여하는 때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였다.
유관환(柳琯煥)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을 조심스럽게 익히고 지 키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가까운 친족들과 화목하였다. 아들과 조카들을 가 르쳐서 온 가족이 융화하니 시골의 사우(士友)들이 많이들 심방하였으며, 사람들 이 모두 칭찬하였다.
최 증(崔 增)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문간공(文簡公) 철지(哲之)의 후손이고, 효자로서 봉사 (奉事)에 증직(贈職)된 헌지(憲之)의 8세손이며, 진사(進士) 상익(相翊)의 손자로 서,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냈다. 가정을 물려받아 효도와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 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아들로서의 직분을 극진히 다하였다. 또 동생들과 한집에서 살면서 친 하고 화목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최봉우(崔鳳宇)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진사(進士) 응숙(應淑)의 후손이다. 가정을 물려받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으로 품행을 수양하는 것을 일삼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상중의 예를 집행하면서 옛날의 예제(禮制)를 어기지 아니하였으며, 온갖 정성을 다하여 산소를 구하여 기필코 좋은 묘지를 얻었으니, 어찌 효심에 감동할 만한 믿음이 아닌가! 큰집 작은집 사람들이 다같이 화목하고, 아들과 조카 들이 모두 이루어 나아갈 전망(展望)이 많았으므로, 시골 사람들이 칭찬하며 감탄 하였다.
최봉길(崔鳳吉)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석정(石汀)이다. 문학과 포부로써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나 여러 차례 회시(會試)에 실패하였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으로 마음을 다스렸으며,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아들로서의 직분을 극 진히 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복을 입으면서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 며, 한편으로 학문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여 추천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 며 감탄하였다.
심진하(沈鎭夏)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고, 참봉을 지낸 필원(弼遠)의 아들이다. 가정을 물려받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과 품행의 수양으로 마음을 다스렸으며, 집안이 빈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아들 된 자 의 직분으로 극진히 공양하였다. 예설(禮說)에 숙달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그에게 물었으며, 일가 친족과 시골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심영순(沈英淳)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으로, 참봉을 지낸 진우(鎭祐)의 아들이다. 대대로 내려온 가업을 이어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매우 화락(和樂)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 두 우러러 따랐다.
심동규(沈東奎)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정양공(靖襄公)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집안이 본래 청렴하고 빈한하나 어버이 섬기는 일에 부지런하고 힘써 농사지어,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하였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단정하였으며, 유생 들이 모이는 곳에 왕래하면서 교유(交遊)하여 진취적(進就的)인 전망(展望)이 있 었다.
조승제(趙升濟)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세마(洗馬)를 지낸 평(平)의 후손이다. 가정을 계승하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이 매우 깊었으며, 가정이 화목하고 일가 친족이 화목하였다. 언론이 강직하고 방정(方正)하여 매번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때를 당하면, 맨 먼저 그 사람을 점고(點考)할 뿐이었다.
정기인(鄭基仁)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성품이 본래 효심이 지극하여 노년(老年)에 부모를 모 시면서 아들로서의 직분을 능히 다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시종 한결같이 예제 (禮制)를 준수하였으며, 일가 친족끼리 화목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다. 서울과 시골을 드나들면서 신의(信義)를 세상에 실행하였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가 장수(長壽)하지 못한 것이 한 탄스럽다.
정인귀(鄭寅龜)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익혜공(翼惠公) 난종(蘭宗)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품행의 수양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집 안에서는 부모 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을 공경하였는데, 매양 그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극진한 정성을 다하였으 며,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기를 잠시도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봉문(逢門)에 살면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고결하였 으므로, 일가 친족들이 모두 순종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이 흠모하며 모방하였고 사람들이 모두 매우 축하하였다.
노학규(魯學奎) 노학규 선생 사진
본관은 강화(江華)이고, 부사(府使) 벼슬을 한 여 (輿)의 후손이다. 하늘이 낸 효도와 행실로 부모를 봉 양하는 모든 일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어머니가 눈이 어두워서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루 세 때 마시고 먹을 때, 채소와 해물을 가리지 않고 손으로 드리고 말로 이를 아뢰었다. 잠자리에 눕고 일어날 때 항상 부축하여 보호하였으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 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10여 년이었다.
설병용(薛炳庸) 본관은 순창(淳昌)이다. 문학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효도와 우애를 가정에서 실천하였다. 여러 차례 회시(會試)에서 실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엾게 여기며 한탄하였다. 자제들을 교육하여 가업(家業)을 계승할 전망(展望) 이 있었다.
윤태주(尹泰柱)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황(璜)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웠으며,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정성스럽게 하고 형 공경하기를 매우 돈독히 하였다. 선조의 제사 받드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들과 조카들을 가르쳐서 뜻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방향이 있었다.
송재호(宋在浩)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둔학(遯壑) 경원(慶元)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장사지내는 일에 능히 예제(禮制)를 준수하였다. 홀로된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고 그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하루 세 때의 공양(供養)에 해물(海物)과 채소를 구하여 드 렸으며, 비록 추위와 더위가 극심한 때에도 잠시도 거르지 아니하였다. 그의 동생 들을 치우쳐 사랑하였지만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지 아니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은 흠모하고 감탄하였다.
최홍석(崔弘錫)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문간공(文簡公) 철(哲)의 후손으로서, 효자로 봉사(奉事)에 증직(贈職)된 헌(憲)의 9세손이고, 진사 상익(相翊)의 증손이며, 진사 영환 (榮煥)의 손자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효도와 가르침을 대대로 가문에 전하였다. 부모와 조부모를 봉양하면서 주야로 곁에서 모시며 대소변을 몸소 받아 내고, 가족이나 노비들에게 이를 시키지 아니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 를 지키고 고기 없는 반찬으로 식사하였으며, 거적자리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경 전(經傳)의 뜻을 여러모로 연구하여 고금(古今)의 일에 정통하였으며, 지식이 아 주 풍족하였다. 온 집안이 화목하여 집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며, 은혜를 베풀 고 선(善)을 행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으며 그의 요절(夭折)을 탄식하였다.
최명석(崔命錫) 진사(進士) 홍석(弘惜)의 동생이다. 가정을 이어받아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시종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으며, 장형(長兄)의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지키고 상복을 벗지 않는 등 모두 고제(古制)를 준수하였다. 대대로 학문하는 집 에 내왕하면서 예경(禮經)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품행을 수양한 행적이 있다.
최 정(崔 綎)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문헌공(文憲公) 부(溥)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인정이 두터우며,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하였다.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하고 신체를 보양(保養)하는 데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정성을 다하였다. 상(喪)을 당하여 장사(葬事)하는 일에 아들로서 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그의 동생들과 우애하여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다. 성품이 본래 어질고 선(善)하여 다른 사람의 근심을 근심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즐거 워하여 일깨워주는 기풍이 있었다. 그의 아들 태영(台永) 역시 효자로 칭송되었다.
홍재호(洪在鎬)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진사 한섭(漢燮)의 아들로서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부모를 봉양하면서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말 한 마디, 하나의 행동도 그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과거(科擧)의 일로 여러 해 동안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사이에. 진실한 마음으로 고생을 당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드러났다. 자식들을 교육함에 일정한 방향을 이루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며 추앙하였다.
태종현(太鍾顯) 본관은 섬계(陝磎)이며 임진왜란의 공신인 참봉 구(竬)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 래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다. 경 학(經學), 박사식(博士式), 경의(經疑), 문대(問對)에 매우 정통하여, 학부(學部) 선발시험에 합격하였으며,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는 우아한 명망(名望)이 있었다.
오석룡(吳錫龍)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군수(郡守)를 지낸 섭하(燮夏)의 후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였으며, 또한 글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 졌다. 여러 차례 회시(會試)에 실패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매우 한탄하였으나, 아들과 조카들을 잘 가르쳐서 진취적 전망(展望)이 있었다.
이귀현(李龜鉉) 본관은 상산(商山)이며 청풍당(淸風堂) 성임(聖任)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근면하고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게다가 선영(先塋)의 일로 여러 해 동안 고생을 겪으면서도 문학에 매우 뛰어나서 대대로 학문하는 집안에 내왕하면서, 품행을 수양하는 행적이 있었다.
공세량(孔世亮) 본관은 곡부(曲阜)이고, 호(號)는 동양(東陽)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 문헌공 (文憲公) 서린(瑞麟)의 후손이다. 절약(節約)과 검소(儉素)로 마음을 다스렸으며 글 잘하는 것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누차 초시(初試)에는 합격하였으나 계속해서 회시(會試)에 실패하였다. 후배들을 칭찬하고 추천하기를 좋아하여, 제 자들이 점점 더 나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김기진(金基鎭)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어린 나이에 아 버지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고아(孤兒)였다.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 면서, 밤에 이부자리를 펴고 아침에 문안 드리며, 겨울에는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였다. 어머니의 입에 맞는 음식을 비록 먼 곳이라도 반드시 구하여 공양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돈독한 효행(孝行)이라고 칭 찬하였다.
박계춘(朴啓春) 본관은 양(密陽)이고 낙촌(駱村) 충원(忠元)의 후손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이 지극히 순수하여, 부모를 봉양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잉어를 먹고 싶어하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다 드렸으며, 산에 기도하고 산삼을 구하여 드렸으니, 어찌 하늘이 감동할 만한 효성 이 아닌가! 음직(蔭職)으로 통정(通政)대부직에 올랐다.
박진풍(朴鎭豊) 본관은 양(密陽)이며 강수(江叟) 선생 훈(薰)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디 효성 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봉양하기를 진실로 옛날 사람(古人)들의 행실처럼 하였으 며, 제사 받들기를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의 어려운 행실 을 칭찬하였다.
박진규(朴鎭奎) 본관은 양(密陽)이며 강수(江叟) 선생 훈(薰)의 후손이다. 어버이가 병들매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으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손님 대접하 기를 화평(和平)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박용래(朴龍來) 본관은 양(密陽)이며 눌재(訥齋) 선생의 후손이다. 형제간에 우애하여, 동생 성래(聖來)와 의복과 거처(居處)를 항상 서로 양보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 두 칭찬하였다.
전영진(全令珎)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충건공(忠健公) 익(翊)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가 노망(老妄)하여, 술 때문에 몹시 성을 내어도 더욱 그 뜻에 순종하였고, 아버지의 병환에 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다.
윤태호(尹泰浩)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문효공(文孝公) 효손(孝孫)의 후손이다. 어버이 병환 때 오리고기를 원하였으므로, 제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하니 홀연히 오리 한 마리 가 제단에 떨어져서, 이것을 요리해 드려서 어버이 병환에 효험이 있었다. 그의 효성에 대한 감응(感應)이 이와 같았으므로, 여러 차례 고을에서 올린 유장(儒狀) 에 올랐다.
윤병희(尹秉禧)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본디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어버이를 속이지 아니하고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으며, 아버지의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비록 먼 지방의 산물(産物)이라도 어버이의 입맛에 맞으면 구하여 드리었으니, 다만 아버 지가 있는 것만을 알고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또한 일가 친족과 화목하였으므로 본면(本面)의 약소(約所)로부터 상을 받았다.
윤용섭(尹鏞燮)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에 대한 우애로써 마음을 다스렸으며,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아들로서 의 직분을 극진히 다하였다. 형제들과 우애하여 한집에 함께 살면서 화목하고 즐 겁고 편안하였으므로, 분가(分家)하여 따로 살림을 차릴 생각이 없었다. 조상을 받드는 마음이 뛰어나서 부지런히 종중(宗中)의 일을 살폈으며, 문학에 뛰어나서 마음을 집중하여 연구하고 품행을 수양한 행실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으 며, 본면(本面)의 약소(約所)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의 동생 광섭(光燮) 역시 효성 과 우애로 칭찬되었다.
전동조(全東祚)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타고난 성품이 굳세고 곧으며, 어버이를 섬기면서 효성 이 극진하여,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고 신체를 보양(保養)하는 데 온갖 정성 을 다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90세까지 수명을 누렸다. 상을 당하여 슬퍼함으로 인하여 몸이 야윔에 절도가 있 어, 한결같이 고제(古制)와 같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봉현(李鳳炫)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효심(孝心)이 지극히 순수하여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고기 가 없는 반찬으로 식사하여,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의 효성이 지극함을 칭찬하였다.
최광열(崔光烈)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문간공(文簡公) 철(哲)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과 효행 (孝行)이 돈독하여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예제(禮制)를 지키며, 조객(弔客)을 맞이하는 일들을 한결같이 나이가 든 사람처럼 하였다. 그 의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밤에 이부자리를 펴고 아침에 안부하는 일에 어 김이 없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이 섬기기를 살아계신 이 섬기듯 하여 그 적당함을 얻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이우철(李愚澈)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효성을 가정에서 행하여,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함으로써 아들의 직분을 잘 수행하였다. 제자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칭찬하 여 추천한 사람이 많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전후택(全厚宅)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으로 행실을 다스렸으며, 집안이 빈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밭 갈고 힘써 농사지어 아들로서의 직분을 다하였다. 형제에게 우애하여 너와 나 의 구분이 없었으며, 친우들을 잘 접대하였으므로, 시골의 많은 선비들이 내왕하 며 교유(交遊)하였다. 근면하고 검소한 행적들이 많이 있다.
최석룡(崔錫龍)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진사(進士) 응숙(應淑)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 극히 효성스러워서, 아버지의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으며, 뜻을 받 들어 즐겁게 봉양하고 건강을 위하여 보양(保養)하는 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의 며느리 김해김씨 또한 시아버지에게 효도하여 며느리로서의 도리에 따랐으 므로, 누차 면(面)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석의(李錫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한 행실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경의(李景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한 행실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윤태순(尹泰順)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가정이 지극히 빈한하였는데, 80세의 늙은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므로, 종중(宗中)의 칭찬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전(李 淟)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으로서, 효심(孝心) 과 우애와 문학과 덕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한규섭(韓圭燮)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청성군(淸城君) 종손(終孫)의 후손이다.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과 형제에 대한 우애가 지극히 순수하였으며,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 면서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奉養)하고 신체를 보양(保養)하는 데에 온갖 정성 을 다하였다. 형제에게 우애하여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으며, 아들과 조카들을 가르치는 데에 적절한 도리가 있었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흠모하며 본받았다.
노병우(魯炳宇) 본관은 강화(江華)이며, 부사(府使)를 지낸 여(輿)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과 효행이 매우 돈독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부지런히 농사지어 맛있는 음식으 로 봉양(奉養)하였다. 성격이 본래 견실(堅實)하여 친우들 사이에서 인재를 이끌 어주는 품격(品格)이 많았다.
박희진(朴熙鎭) 본관은 양(密陽)이며, 호(號)는 옥천(玉泉)으로 송은(松隱) 공의 후손이다. 어 버이를 섬기면서 절도(節度)가 있었으며, 제사를 받들면서 예제(禮制)를 준수하 였다. 속초산(束草山)에 살면서 산기슭에 한 누정(樓亭)을 짓고 그 이름을 복성와 (復性窩)라 하고, 10여 명의 학도들과 봄·가을에 학술모임을 가졌다.
황진곤(黃鎭坤) 본관은 우주(紆州)이며 문숙공(文肅公)의 4대손이다. 호(號)는 신포(新圃)이고 효행(孝行)과 문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문집(文集)이 있었다고 전한다.
오재호(吳載灝)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해남(海南) 군수를 지낸 변하(變夏)의 후손이다. 타고 난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봉양하면서 항상 기쁘게 그 뜻을 따랐으 며,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공양하였다. 형제들과 우애하여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 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의 선행(善行)을 칭찬하였다. 그의 아들 주섭(柱燮) 또한 효자로 일컬어졌다.
한규열(韓圭烈)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청성군(淸城君)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래 온순하여 일 가 친족들과 화목하였으며, 힘써 부지런히 농사지어 정성껏 선조의 제사를 받들었 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한동수(韓東洙)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진사(進士) 규성(圭成)의 손자이다.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동도 어버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는 데 힘썼으므로, 온 집안이 화목하였다.
한용수(韓鏞洙)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동수(東洙)의 동생이다. 형제간에 우애하는 데 힘쓰고 오로지 화목과 화락(和樂)을 숭상하였다.
최봉구(崔封求)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만육(晩六) 양(瀁)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견실(堅實)하였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항상 의지할 곳이 없었음을 한탄하며, 형 공경하기를 아버지를 공경하듯 하였으며, 그의 조카들을 사랑하기를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다름없이 하였다. 신의(信義)로써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이교윤(李敎潤) 본관은 성산(星山)인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집 안이 본디 빈한하여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한 일이 많았다. 선산(先山)에 투장(偸葬)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자, 정성스런 마음으로 소송을 제기하여 파낸 것이 12무덤이나 되었다. 재물을 모아서 선산(先山)의 비갈(碑碣)과 제각(祭閣)을 새롭게 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름 있는 지관(地官)에게 정성을 바쳐서 기필코 좋은 묏자리를 얻어, 선조를 위하고 자신이 죽은 뒤를 위한 계책을 삼으니, 누가 흠모하 고 감탄하지 않을 것인가! 중년(中年)에 효촌(孝村)에 우거(寓居)하였으니 오늘의 거항동(居項洞)이다.
이규석(李圭錫)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정리당(靖履堂) 두연(斗然)의 8대손이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가풍(家風)을 세습하여 매일 학업에 힘써 고결(高潔)한 선비의 행실이 있었다.
김영옥(金永玉)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창주(滄州) 익희(益熙)의 9세손이다. 성품이 본래 온화하였으며, 가문(家門)을 일으켜세우고,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며, 정성으로 선조의 제사를 받들었다.
강윤휴(姜胤烋)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호(號)는 삼은재(三隱齋)로서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회중(淮中)의 후손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순수하였는데, 책을 읽는 여가에 냇물에서 고기잡고 산에서 나무하여 어버이에게 반찬을 마련하여 드렸으 니,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았던 왕상(王祥)이나,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하였던 맹종 (孟宗)만이 효자라는 미명(美名)을 독차지할 일은 아니다. 문학으로 호남에 그 명 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노년(老年)에 호산(湖山)에서 궁벽하게 살았다. 동쪽으 로는 청련대(靑蓮臺)가 펼쳐 있고, 남쪽으로는 망선정(望仙亭)이 늘어서 있어서 쉴 때마다 이에 올랐으니, 자못 편안히 살면서 오래된 마을[古村]을 즐기는, 지향 (志向)하는 바가 고상한 참 처사(處士)의 풍취가 있었다. 그의 손자 돈형(敦馨) 또한 문학의 길에 나아갔으니 대대로 전해오는 가업(家業)을 잘 계승한 것이다.
한필석(韓弼錫)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청성군(淸城君) 종손(終孫)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래 지극히 순수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심한 중풍병을 앓다가 갑자기 앉은뱅이가 되어 문밖에 나가지 못한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지만, 오줌과 변을 받아내고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는 것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가을에 곡식이 익을 때면 그의 동생 과 함께 어깨에 메는 가마에 어버이를 모시고 들길을 두루 돌아다니며, 아무개의 농사는 잘되고 아무개의 농사는 잘못되었다고 자세히 가르쳐 드렸다. 이와 같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을 다른 사람들이 본받기가 어려웠다.
한규택(韓圭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귀와(龜窩) 응성(應聖)의 후손이고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홍규(弘奎)의 손자이다. 어버이가 병들어서 항상 물고기 먹기를 원하였으므 로,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어망(魚網)을 던지고 어살을 설치하여 물고기를 잡아 드렸다. 또 개고기국을 원하자 매월 한 차례씩 끓여 드렸다. 상(喪) 을 당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몸이 야위어 목숨을 잃었다.
진준엽(晉俊曄)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남원군(南原君) 석(錫)의 후손이며 감찰의관(監察議官)을 지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이 매우 돈독하여,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동도 어버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아니하였으며, 맛있는 음 식으로 봉양하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극진하였다. 여러 아들들을 교육하여 문학에 몹시 뛰어났다. 근면하고 검소하여 가정을 일으키고 규모 있게 절약하여 쓰니, 가난한 일가 친족들과 고난을 함께한 친구들로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에 그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착한 행동을 칭찬하고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워 주었다.
김기성(金基聖)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육행당(六行堂) 처겸(處謙)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래 온화하였으며,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선조들의 제사를 효성으로 받들었다.
한진수(韓鎭洙)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후손이다. 호(號)는 조서(棗西)이며, 배우는 데 부지런하고 예를 숭상하는 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윤태욱(尹泰旭)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정려(旌閭)가 있는 은담처사(隱潭處士) 두표(斗杓)의 6세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으로 마음을 다스렸으며, 항상 부모를 일찍 여읜 것을 한탄하였다. 집안이 본래 지극히 빈한하였으므로, 낮에는 밭 갈고 밤에 책을 읽었는데,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두 책을 매일 밤 한 차례씩 외우기를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 선행을 칭찬하였다.
김재영(金在英)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육행당(六行堂) 처겸(處謙)의 후손이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잘 섬겼으며,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드렸다. 비록 한 일의 은 한 것까지도 먼저 아뢴 뒤에 행하여, 온 집안이 화목하였다.
김재호(金在浩)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육행당(六行堂) 처겸(處謙)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늙으막에 그의 어버이를 모시면서 기쁜 얼굴로 그 뜻을 받 들어 즐겁게 봉양하였으며, 형제들과 우애가 극진하여 항상 화락(和樂)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용섭(朴容燮)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늙도록 오직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데에만 힘썼으며, 예법을 본받아 준수 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의 선행을 칭찬하였다. 그 행적이 유장(儒狀)에 있 고, 또 포상으로 음식을 대접받았다.
박봉래(朴鳳來) 본관은 양(密陽)이며, 효자 기진(琪鎭)의 손자이다. 부모를 잘 섬기고 시(詩) 와 서(書)에 재미를 붙이고 즐기면서 성수산(聖壽山)에 숨어 살았다. 서재(書齋) 에 제오(霽梧)라 현판을 걸고, 수십 명의 학도들과 경서(經書)의 취지(趣旨)에 대 하여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강원형(姜遠馨)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회중(淮仲)의 후손이다. 부모에 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한 행실이 돈독하고, 형편이 곤란한 중에도 책을 읽었 으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품행을 수양하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김준수(金俊洙)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창주(滄洲) 익희(益熙)의 10세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가 병환 중에 생선을 먹고 싶어하자, 냇가에 나가 울부짖으니 얼음 위에 거북이가 올라왔으므로 요리하여 드렸다. 병환이 위급해지 자 넓적다리 살을 베어 끓여 드려 석 달을 연명하였다. 이로 누차 면(面)으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유생들이 올린 진정서에도 나타난다.
정동현(鄭東泫)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세종조에서 병조판서을 역임한 홍덕(弘德)의 후손으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을 지낸 통정(通政)대부 기호(祺浩)의 아들이며, 참봉 벼슬을 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보통사람과 달라서 본디 재덕(才德)을 겸비한 훌륭 한 인물이 될 것이 기대되었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고 두터웠다. 두루 방법과 계략(計略)을 찾아서, 전답의 전세(田稅)를 경감하여 면리(面里)에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였으며, 불망비(不忘碑)를 세워주었다.
박기진(朴琪鎭) 본관은 양(密陽)이며, 문도공(文度公) 훈(薰)의 후손이다. 성품이 본래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부모를 잘 보양하였으며, 다섯 아들을 교육하여 문학으로 세상에 널리 소문이 났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신현태(申鉉泰)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무순공(武純公) 개(漑)의 후손이다. 효성과 우애로 마음을 다스리고 부모를 효성으로 잘 봉양하였으며, 일가 친족들과 화목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착함을 칭찬하였다.
신현대(申鉉大)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무순공(武純公) 개(漑)의 후손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 오는 효성으로 품행을 수양함이 아주 뛰어났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일가 친족들 과 화목하였다. 서재를 지어 아들과 조카들을 교육하고 빈객을 응대하니, 많은 문우(文友)들이 찾아와서 모두들 칭찬하였다.
* 원문 371쪽 참조.
이 현행편은 효행(孝行)과 선행(善行)이 있어 고을로부터 천거를 받았거나, 감 영(監營)이나 고을로부터 상(賞)을 받았거나, 정부로부터 조세(租稅)와 요역(徭役)을 면제받았거나 증직(贈職)을 받은 사람들을, 속지(續誌)에서 뽑아 기록한 것 이다.
이 경(李 經)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1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 지키기를 나이든 사람과 다름이 없이 하였다. 겨울철에 제삿날이 돌아오면 목욕을 하고 지 건(紙巾)을 만들어 몸소 제사드렸는데, 그의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오히려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호(號)를 반우당(飯牛堂)이라 하였다.
이 위(李 緯) 반우당(飯牛堂) 경(經)의 동생이다. 소학(小學)으로써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았으며, 끝내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었다. 매번 제삿날을 당하면 열흘 동안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대문에서 빈객을 맞이하지 아니하였으며, 입제일(入祭日)로부터 파제일(罷祭日) 이튿날까지 3일 동안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몹시 슬퍼 하였다. 제기(祭器)에 담은 곡식이 혹 완비(完備)되지 않았으면, 여러 날 밥을 굶 어서 마치 조상들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처럼 하였다.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되었다.
곽 창(郭 昶)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타고난 성품이 공손하고 온순하며 마음속으로부터 우 러나오는 효심(孝心)이 매우 돈독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여 감탄하였 다.
최원복(崔元福) 교관(敎官)을 지낸 응한(應漢)의 손자로서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에 대한 우애가 지극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곽영방(郭榮邦) 현감을 지낸 득형(得亨)의 손자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어서 상복을 입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마침내 묘역(墓域)에 움막을 짓고 여묘(廬墓)살이를 하다 가 끝내 묘(墓) 아래에서 늙어 죽었다.
윤 수(尹 琇)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호(號)는 영모재(永慕齋)인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11세손이며 참봉을 지낸 은주(殷柱)의 6세손이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것을 한탄하며 소급하여 상복을 입었 다. 여러 차례 감영(監營)에서 임금에게 아뢰는 보고서에 올랐다.
박사묵(朴思黙)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증손이다. 홀로된 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준수하였고 형제들과 우애하였다.
박사익(朴思益) 사묵(思黙)의 동생이다. 상(喪)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준수하고 분묘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관청에 천거하여 관청에서 음식을 내려주 었으나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곽희겸(郭希謙) 득형(得亨)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인하여 몸이 야위었으며, 마침내 생명을 잃는 데에 이르렀다.
채몽화(蔡夢華)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생원(生員) 원상(元祥)의 손자이다. 상(喪)을 당하여 슬 픔으로 인하여 몸이 야윔이 정도를 지났으며, 장사지내고 제사하는 일을 모두 예 제에 맞게 하였으므로, 유회소(儒會所)에서 관청에 보고하였다.
윤빈거(尹賓擧)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10대손이고 도승지(都承旨)를 지낸 예생(禮生)의 9대손이며, 참봉 은주(殷柱)의 5대손이다. 어머니 병환이 위급 하여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동생이 중병을 앓자 가산(家産)을 기울여 약을 구하였다. 또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깨뜨려 그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으므로, 누차 고을의 천거와 감영의 보고에 올랐다.
이세형(李世馨)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깨뜨려 그 피를 마시게 하여 하루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를 칭찬하였다.
이계정(李繼貞)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며칠 동안 회생(回生)하였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천거하였다.
양 련(梁 堜)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형제들과 우애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효도와 우애에 대하여 말할 때면 반드시 이 사람들을 말하였다.
최흥립(崔興立) 어머니가 병환으로 기절하자 당황한 중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안으로 넣음으로써 조금 뒤에 소생하였다.
심극현(沈克賢)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풍산군(豊山君) 귀령(龜齡)의 후손이다.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함으로써 3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으며 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시험하였다. 여러 차례 고을의 천거와 감영에서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보고에 올랐다.
곽녹현(郭祿顯)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마을과 고 을과 감영에서 올린 진정서와, 암행어사의 제사(題辭)와 예조(禮曹)에 내린 문적 (文蹟)들이 있어, 이것들이 쌓여 책(卷軸)을 이루지만, 아직도 장려하고 표창되지 못하고 있다.
곽수후(郭壽垕)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孝誠)이 보통사람과 달라서, 매일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조상의 산소를 살펴보는 일을,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에도 피하지 아니하였다.
박치룡(朴致룡)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6세손이다.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살아 있을 때 섬기고 죽었을 때 장사지내는 일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였다.
김명건(金鳴健) 본관은 개성(開城)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심(孝心)이 아주 뛰어나서, 살아 있을 때 섬기고 죽었을 때 제사하는 일들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였 으며, 만류당(萬流堂) 이득환(李得寏) 선생에게서 글을 배웠다.
유응삼(柳應三)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蘇生)하였다.
주경팔(周慶八)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조영희(趙永禧) 아버지가 병들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박필량(朴必良)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수심재(收心齋) 훈(薰)의 후손으로, 어버이 상을 당하여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송정부(宋廷富) 찰방(察訪)을 지낸 우룡(遇龍)의 아들이며, 아버지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고, 3년 동안 맑은 죽만을 마셨다.
황후재(黃厚載) 일찍이 문학으로 그 명성이 드러났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족과 화목하였으 므로 사람들이 모두 선행(善行)을 칭찬하였는데, 특히 운계(雲溪) 황신귀(黃信龜:1633~1685)가 칭찬하였다.
곽천두(郭天斗) 14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몸이 여윈 것이 정도를 넘었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이를 마시게 함으로써 며칠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다.
김주팔(金柱八)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이관휘(李觀輝) 9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고기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었으며, 어머니가 병들어 서 손가락을 찢어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한만영(韓萬榮) 어머니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황상찬(黃尙讚) 어머니가 병들어서 꿩고기를 먹고 싶어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울부짖으니 마침 꿩이 날아들어 이를 잡아 드렸다.
박승경(朴承慶)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어머니 병환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고, 제사 때 예제(禮制)를 극진히 지켰으며 형제들과 우애하였다.
심익원(沈翼遠)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극현(克賢)의 손자이다. 어버이 병환 때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고, 상을 당하여는 매일 산소에 가서 살폈으므로, 여러 차례 고을 의 천거와 감영(監營)의 보고에 들었다.
진상록(晉相祿)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관청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진승록(晉承祿)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들과의 우애가 뛰어나서 암행어사로부터 상을 받았다.
엄승조(嚴承祚)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효행(孝行)으로 전라도로부터 천거를 받아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정영조(鄭英祖)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아버지가 병들어서 조개젓을 먹고 싶어하자 먼 지방으 로부터 구해다 드려서 효험이 있었다.
최재호(崔在昊)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행으로 전라도의 천거를 받아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이현의(李賢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도정(都正) 태영(泰榮)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병들자 변을 맛보아 약을 시험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므 로, 고을의 천거와 감영에서 정부에 올리는 보고서에 들어서, 특별히 능참봉(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김양근(金瀁根)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지평(持平)을 지낸 영학(永學)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병들매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곤궁(困窮)한 사람들을 구휼(救恤)하고 베풀기를 힘쓰며, 착 한 일을 행하는 것을 가장 중히 여겼다. 불망비(不忘碑)가 여러 곳에 많이 세워져 있다.
황정민(黃廷敏)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제사를 받들되 예제(禮制)를 준수하여, 누차 고을에서 천거하여 감영(監營)에 보고하였다.
이건호(李建鎬)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문정공(文正公) 승길(承吉)의 후손으 로, 호(號)는 초사(焦史)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전주로부터 동행정리 (東杏亭里)에 와서 우거(寓居)하였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으며, 가산(家産)을 기울여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救恤)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의 고상하고 정 의로운 행위에 감격하여 비(碑)를 세워주었다. 그의 아들 진사(進士) 정한(廷漢) 도 또한 효자로 알려졌다.
이세한(李世漢)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문정공(文正公) 승길(承吉)의 후손으로 혜릉참봉(惠陵參奉)을 지냈다. 전주로부터 행정리(杏亭里)에 와서 우거(寓居)하였는데, 겨우 6 세 때 밤에 부모에게 이부자리를 깔아 드리고 아침에 문안을 드렸으며, 몸이 아파 서도 이를 거르지 아니하였다. 성장하여서는 부모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였 으며, 약 시중을 들면서 약을 맛보아 시험하였고, 상을 당하여서는 여묘살이를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유생들이 임실군에 천거하고, 전라도 순영(巡營)에서 장례원(掌禮院)에 보고하여, 뛰어나다[卓異]는 제사(題辭)를 받았다. 그의 아들 진사(進士) 원상(元相)도 효자로 칭찬되었다.
윤병철(尹秉喆)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충간공(忠簡公) 황(璜)의 후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 질고 효성스러워 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으며, 형제간에 우애하고 화목하였다. 나이 어려서 동생 병기(秉璣)와 함께 부모를 효성으로 공양(供養)함이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을 읽어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이루었다.
염우진(廉祐鎭) 염우진 효자각
본관은 파주(坡州)이며, 매헌(梅軒) 제신 (悌臣)의 후손이다. 형제와 우애하고 일가 친족과 화목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칭 찬하였다.
임영환(任永煥) 아버지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마을과 고을에서 상급 관청에 보고한 공문이 있다. 그의 동생 흥환(興煥) 역시 손가락을 자른 효행 이 있었다.
문 찬(文 瓚)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이 매우 뛰어났으므로, 고을과 전라도에서 상급 관청에 알린 보고서가 있다.
문양범(文亮範)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병이 완전히 나았으므로, 관청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문동현(文東鉉)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서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효성이 아님이 없었다. 형제간에 우애함으로써 동포(同胞)에게 보였고, 사무에 통달하여 풍속과 교화(敎化)를 붙들어 세웠으므로, 누차 정부로부 터 상을 받았다.
진필승(晉必承)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어버이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누차 정부로부터 상을 받았다.
문태현(文台鉉) 동현(東鉉)의 재종 동생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여, 누차 정부로부터 상을 받았다.
문한엽(文漢曄)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늙은 나이에 어머니를 모시면서 그 뜻을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으며, 추운 날씨에도 몸소 불을 때어 밥을 짓고 땔나무 를 하였다. 또 그의 어머니가 귀먹고 말을 더듬어 매양 불편한 일이 많았으나, 여러 가지로 더욱 공경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끊이지 아니하였다.
이기중(李起中) 아버지가 병환 중에 물고기 먹기를 원하자, 작은 냇물에서 큰 물고기를 구하였으며, 세상을 떠날 무렵에도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김낙현(金樂顯)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號)는 수운(睡雲)이다. 그의 아버지가 연세가 많아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서, 변산(邊山)을 구경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므 로, 변산을 본떠서 그려다 드렸다. 아들 성철(星澈) 또한 착하다고 칭찬받았다.
최 락(崔 樂) 어릴 때부터 항상 전주 시장에 가서 반찬을 사다가 어버이를 봉양하였으며, 겨울에는 또한 물고기를 잡아다가 공양(供養)하였다.
문의현(文宜鉉)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동현(東鉉)의 동생으로 주사(主事)를 지냈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그 뜻을 받 들어 순종하였으며, 형제들과 우애하여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다. 집안이 본래 지극히 빈한하였으나, 형제와 숙질 4~50명의 동기(同氣)들을 모두 물자를 내어 구제하였다. 그리고 또 아들과 조카들을 교육하는 데 일정한 방향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정학열(丁學悅)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아버지의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관청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박용섭(朴容燮)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누차 관청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문재국(文在國)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아버지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명을 연장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관청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진정엽(晉鋌曄)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효성이 아주 뛰어났으므로, 관가로부터 상을 받았다.
손명주(孫明周) 본관은 양(密陽)이다.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형을 우애로 섬기며, 일가 친족들과 화목을 돈독히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여 감탄하였다.
노 씨(魯 氏) 찰방(察訪)을 지낸 조평(趙平)의 아내다. 남편의 상을 당하여, 초상을 치르고 제사지내는 일들을 지극히 정성스럽게 하였으며, 2년 동안 복(服)을 입었다.
황 씨(黃 氏) 인효(仁孝)의 딸이다. 그의 부모가 일찍이 돌아가신 것을 한탄하다가 목을 매어 죽었다.
전 씨(全 氏) 송이징(宋以徵)의 아내다. 도적이 방안에 들어와 칼로 남편을 친 며칠 뒤에 부부가 함께 죽었다.
박소사(朴召史) 102) 김주일(金朱日)의 아내로서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노인학(奴仁鶴) 상운면(上雲面)에 살며, 손가락을 잘랐다.
최명이(崔明伊) 상운면(上雲面)에 살며,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사비옥매(私婢玉梅) 강진(江津)에 사는데 그의 나이 20세에 남편을 잃고, 부모와 동생이 개가(改嫁)를 권했으나 죽기를 맹세코 절개를 지켰다.
장 백(張 白) 고치리(羔峙里)에 사는데, 어머니 병환 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소생(蘇生)하였다.
춘 이(春 伊) 고치리(羔峙里)에 살았다. 그의 남편이 떠돌아다니다가 굶어죽자, 땅을 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시체를 찾아다가 장사지냈다. 그의 무덤에는 지금도 슬피 원망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문소사(文召史) 일도리(一道里) 사람으로 17세에 신안(新安)에 사는 오찬(吳瓚)의 첩이 되었는데, 남편이 죽자 머리를 삭발하여 신의(信義)로써 맹세하고,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아니하였다.
이 성(李 姓) 일구지(日九之)에 사는 한대홍(韓大弘)의 아내다. 시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시어머니가 기운이 쇠약하여 추위를 두려워하였으므로, 겨울이면 시어머니를 껴안고 잤다.
이소사(李召史) 사곡(沙谷)에 사는 김자형(金自亨)의 아내다. 시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으므로, 누차 관청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사비애금(私婢愛金) 고덕치(高德峙)에 사는데, 17세에 남편의 버림을 받아 부모가 개가(改嫁)를 시키고자 했으나 죽음을 맹세코 혼자 살았다.
엄자장(嚴自長) 신평면(新平面) 천리(泉里) 사람인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하였으므로, 관청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엄 성(嚴 姓) 자장(自長)의 작은누이다. 부모를 봉양하는 데 효성이 지극하여 의복을 팔아 음식을 마련해 올렸으며, 병이 위급하자 매일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직접 보고하였으므로, 관청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명 길(命 吉) 한흥필(韓興必)의 사노(私奴)이다. 그의 상전(上典)에게 한 살 된 사내아이만 있었는데, 상전 내외가 다 죽은 뒤 지극한 정성으로 보호·양육하여 성장하여 자 립하게 하였으므로, 상전 집안 사람들이 마음에 감동하여 명길(命吉)을 양인(良人)으로 풀어주었으나, 그는 도리어 늙을 때까지 부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구소사(具召史) 오원(烏院)에 사는 최귀생(崔貴生)의 아내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면 서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현감 조진석(趙晉錫)이 그의 절개를 아름답게 여겨 감 영(監營)에 보고하고, 감영에서는 정부에 보고하여 호역(戶役)103)이 면제되었다.
곽원일(郭元逸) 방동(芳洞)에 사는 사람으로 소급하여 아버지 상복을 입었다.
이응표(李應標) 삼봉(三峰) 사람으로 어버이를 잘 섬겼으므로, 관청에 보고되었다.
박막실(朴莫悉) 운암(雲巖)에 사는 사람으로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강득홍(康得洪) 이인(里人)에 사는 사람으로, 아버지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를 준수하였으므로, 면에서 관청에 보고하였다.
변 씨(邊 氏) 설세광(薛世光)의 아내로서, 효행(孝行)으로 고을에서 천거하여 감영(監營)에 보고하였다.
사노득이(私奴得伊)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관청으로부터 상품을 받았다.
송득명(宋得明)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정부에서 호역(戶役)을 면제하였다.
김진달(金晉達) 교생(校生)으로 아버지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수명을 몇 달 동안 연장하였다.
노순복(奴順福) 구고리(九臯里)에 사는데,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박유삼(朴有三) 이인리(里仁里) 사람으로, 어버이 섬김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한준영(韓俊永) 이인리(里仁里) 사람으로, 부모상을 뒤에 소급하여 상복을 입었다.
김시동(金時同) 하동면(下東面) 사람으로, 어머니가 병들어서 잉어 먹기를 원하였으므로, 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구하여 요리해 드렸다.
백석진(白石辰)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한대휴(韓大休) 상동면(上洞面) 사람으로, 뒤에 소급하여 아버지 상복을 입었다.
변시동(卞時童) 상운리(上雲里)에 사는데, 아버지의 병환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하였으므로, 관청으로부터 상이 있었다.
이세방(李世芳) 아버지의 병이 위급했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김구중(金九中) 아버지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채 씨(蔡 氏) 어머니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찢어 그 피를 마시게 했다.
이 성(李 姓) 김자형(金子亨)의 아내로, 시어머니가 병들자 젖으로 공양(供養)했다.
유 씨(柳 氏) 응삼(應三)의 아내로, 아버지가 병들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곽 씨(郭 氏) 김도익(金道益)의 아내로, 남편이 죽으면 같이 죽을 것을 맹세하였는데, 가족들이 구하였다.
설 씨(薛 氏) 민구(敏龜)의 딸이다. 8세 때 집에 불이나자 사당의 문에서 울면서 고(告)하고 신주(神主)를 받들고 밖으로 피하였다. 또 출가(出家)한 후에 도적 떼가 집 안으 로 들어왔는데, 그의 남편이 쓰러지자 자기 몸으로 가로막고서 자신이 여러 군데 상처를 입고, 5개월 동안이나 신음(呻吟)하였다. 관가(官家)에서는 그의 의열(義烈)을 가상히 여겨 자주 약물(藥物)을 보냈으며, 마을에서는 그의 의열을 칭찬하 였다.
박소사(朴召史) 그의 남편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황 성(黃 性) 하신덕면(下新德面)에 사는 여자다. 남편이 죽으매 지성으로 묫자리를 구하였 으며, 그의 시아버지가 개가(改嫁)시키고자 하였으나 한사코 듣지 않았다.
사비 온개(私婢 溫介) 효자 이지남(李智男)의 어머니이며, 병사(兵使) 안위(安衛)의 여종으로 이군경 (李君慶)의 첩이 되었다. 19세에 남편을 잃고 3년 동안 애통하기를 마치 초상(初喪) 때처럼 하였으며, 3년상을 마친 뒤에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상전이 그의 미색(美色)을 사랑하여 절개를 뺏고자 하였으나, 머리를 잘라서 곧은 절개 (信節)를 보이자 상전도 그의 절개에 감탄하여, 그들 모자(母子)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다.
은 생(銀 生) 한창익(韓昌益)의 노(奴)로 상전을 섬기면서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속이는 일이 없었다. 예전에 마침 시장에서 7꿰미의 동전을 주웠는데, 돈꿰미의 주인을 알아보 았지만 찾을 수 없자, 돈을 시장에 전부 흩어 놓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착하다고 칭찬하였다.
양소사(梁召史) 오원(烏院)에 사는 최후철(崔厚澈)의 어머니이다. 며느리 김소사(金召史)와 함께 일찍이 남편을 잃고 서로 의지하여 살면서 끝내 그 절개를 지켰으므로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였다.
양소사(梁召史) 김사룡(金士龍)의 아내다. 일찍이 남편을 잃었으므로 시아버지가 개가(改嫁)시키려는 생각이 있었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켰다.
두 강(斗 江) 사비(私婢)로서, 그의 남편이 중병을 앓자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그의 남편을 섬겼으며, 상전이 개가(改嫁)시키고자 하였으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변당쇠(卞塘金) 구고(九臯)리에 사는데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연 진(連 辰) 부모의 병환에 산 뱀을 잡아 치료하였다.
이경환(李敬煥) 이경환 정려비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효행이 매우 뛰 어나서 고을에서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에 서 정부에 보고하였다. 성담(性潭)의 문인 (門人)이다.
순창설씨(淳昌薛氏) 송진두(宋鎭斗)의 아내로 상동면(上東面) 사람이다. 시부모와 병든 남편을 봉양하였으므로, 감영(監營)과 고을(縣)로부 터 상을 받았다.
연안김씨(延安金氏) 노일치(盧一致)의 아내로, 남편의 제삿날에 죽어서 누차 고을의 천거에 들었다.
평산신씨(平山申氏) 문경보(文景輔)의 아내로, 시할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누차 관가(官家)로부터 상을 받았다.
박두응(朴斗應) 임실현의 관노(官奴)로서 부모의 병환에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게 하였으므로, 누차 관가로부터 상을 받았다.
정장득(鄭長得)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여, 누차 관가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천서성(利川徐姓) 문홍규(文洪圭)의 아내로서, 남편이 죽자 함께 죽었다. 고을에서 천거하여 감영에 보고하였다.
김인식(金仁植)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므로, 마을에서 고을에 보고하였다.
영천이성(潁川李姓) 엄종섭(嚴宗燮)의 아내로 시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게 하여 병이 완전히 나았다.
조 씨(趙 氏) 하낙현(河洛玄)의 아내로 남편을 장사지내고 목매어 함께 죽었다.
김 성(金 姓) 오문환(吳文煥)의 아내로 그의 남편이 남에게 피살되자 즉시 원수를 갚았다.
신현숙(申鉉淑)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그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을 앓았는데 들두꺼비와 산비둘기를 구하여 병에 차도(差度)가 있었다.
허수한(許秀漢) 이인리(里仁里) 사람인데 나이 겨우 10여 세에 어머니가 병들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진주하씨(晉州河氏) 서긍래(徐兢來)의 아내로 시아버지를 극진한 정성으로 섬겼으며,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이 성(李 姓) 정인철(鄭仁澈)의 아내로 남편이 병들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노병구(魯柄九) 본관은 강화(江華)이다. 그의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잘 섬겼는데, 어머니가 병들자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들게 하여 차도(差度)가 있었다.
* 원문 387쪽 참조
이 위는 『구지(舊誌)』에서 베낀 것이며, 이 아래는 『삼강록(三綱錄)』에서 뽑아낸 것이다.
남양홍씨(南陽洪氏) 호은(湖隱) 연(演)의 후손으로 전주유씨(全州柳氏) 각(珏)의 아내다. 그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남몰래 시신(屍身)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 약을 마시고 남편의 뒤를 따라죽었다. 집에 개가 한 마리 있었고 홍씨가 매우 귀여워하였는데, 홍씨가 죽자 개도 스스로 따라 죽었으므로, 홍씨의 묘 앞에 묻어주고 그 무덤 이름을 의구 총(義狗塚)이라고 하였다.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정부에 보고되어 고종조(高宗朝)에서 정려(旌閭)가 허락되었다.
함안조씨(咸安趙氏) 진주(晉州)에 사는 강주영(姜周永)의 아내이다. 시아버지가 병들매 변을 맛보 아 증세를 시험하였으며, 남편이 병들자 하늘에 자신의 남편을 대신하기를 기원하 였다. 시부모의 사망을 확인한 뒤에 이별을 고하고 침실로 돌아가서 허리띠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고종조(高宗朝)에서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여산송씨(礪山宋氏) 정열공(貞烈公) 송례(宋禮:?~1289)의 후손이며 감찰(監察)에 증직(贈職)된 상 산이씨(商山李氏) 종삼(宗三)의 아내이다. 남편의 상(喪)을 당하여 염(殮)하고 시 체를 빈소(殯所)에 안치하며 제사 드리는 일들을 모두 예제(禮制)를 준수하고, 3년 상을 마치는 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가족들 이 급히 구하여 중지하였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효열 (孝烈)로 칭찬하였으며, 고종조(高宗朝)에서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며, 경주김씨(慶州金氏) 인명(仁明)의 아 내이다. 나이 아직 15세가 못 되어서 사람들이 그가 정숙한 숙녀의 덕을 갖추었다 고 칭찬하였다. 남편의 집에 시집가서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일가 친족과 화목하였 으며, 남편의 병이 위급해지자 넓적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복용케 하여 일시 회복되었으나, 남편이 죽게 되자 그도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고종조(高宗朝) 에서 정려(旌閭)를 허락하였는데, 그의 아들 김계룡(金啓龍)도 효자로서 정려를 받았다.
흥덕장씨(興德張氏) 통정대부 현풍곽씨(玄風郭氏) 해(海)의 아내이다. 정유년의 왜란 때 산골짜기 로 피난을 하였는데 왜적이 갑자기 어닥쳐서 한 여종을 죽였다. 이때 장씨(張氏)가 그의 늙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가로막았으나, 죽음에 이르러도 구할 수 없게 되자 차고 있던 칼로 스스로 대처하니, 적들이 놀라서 달아났으므로 시아버지와 남편이 화를 면하였다. 고종조(高宗朝)에서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김해김씨(金海金氏) 평산신씨(平山申氏) 재희(在凞)의 아내이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고 남편을 공경하여 받들었다. 남편이 죽었으나 시부모가 살아있던 까닭에 차마 남편을 따라 죽을 수가 없었으므로 이전보다 더욱 잘 봉양하였으며, 시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여 서는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마시게 하였다.
남원윤씨(南原尹氏) 전주이씨 문의(文儀)의 아내이며, 참판 태일(泰一)의 누이이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그의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시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여 손가락 에서 피를 내어 마시게 함으로써 소생하였고, 또 오래도록 학질(瘧疾)을 앓으매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게 하여 효험을 얻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전주이씨 흥수(興秀)의 아내이다. 일찍이 남편이 죽었는데, 시어머니가 중풍(中風)으로 손발을 움직이기가 거북하여 쓸쓸하기가 마치 흙으로 만든 인형(土偶) 같았으므로, 그의 시어머니를 위하여 차마 남편을 따라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 여 곁에서 모시면서 가려웁다고 하면 등을 긁어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입혀드렸으 며, 오줌과 대변을 받아내고 일으키고 눕히는 일을 주선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 니, 이처럼 하기를 16년이었다.
현풍곽씨(玄風郭氏) 오암(鰲巖)의 후손이며 남원양씨(南原梁氏) 재규(在奎)의 아내이다. 시부모에 게 효도하고 남편을 공경하였는데, 시어머니의 나이가 많고 병이 위독해져서 기력 이 쇠약하여 식사를 할 수가 없게 되자 때때로 자기 젖을 먹였으며, 시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자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렸다.
전주유씨(全州柳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원섭(源燮)의 아내이다. 시어머니가 병들자 매일 밤 하늘에 빌면서 자신이 병을 대신하기를 원하였고, 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며칠 동안 소생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픔으로 인하여 몸이 야윔이 정도를 넘었다. 말이 시부모에 미치면 말하기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
공주이씨(公州李氏) 송은(松隱) 명성(明誠)의 후손이며 나주임씨(羅州林氏) 병희(炳禧)의 아내이다. 그의 시아버지에게 미친 증세가 있어서 약마다 모두 효험이 없었다. 이씨가 하루는 그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는데, 시아버지의 병 때문에 집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당일로 다녀오기를 간구(懇求)하여 시아버지가 비로소 허락하였다. 또 그의 어린 아들이 죽었는데 시아버지의 병이 더욱 위급해질 것을 염려하여 숨기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의인 김해김씨(宜人金海金氏)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전주이씨 세한(世漢)의 아내이다. 시집갔을 때 집안이 빈한하였으나, 시부모의 반찬과 의복을 준비하는 데 몸소 정성을 다하였으며, 시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마시게 하고, 하늘에 빌며 자신이 병을 대신 할 것을 원하여 차도(差度)가 있었다. 한편 부덕(夫德)에 내조(內助)하였으므로, 전라도 유생들이 군(郡)과 감영(監營)에 이를 보고하여 장례원(掌禮院)으로부터 효열(孝烈)이 뛰어나다는 제사(題辭)를 받았다.
장수황씨(長水黃氏) 방촌(厖村) 희(憙)의 후손으로 청주한씨 광석(光錫)의 아내이다. 시아버지가 병 들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였고, 제단을 쌓고 수명(壽命)을 빌었으며, 시아 버지의 대소변을 몸소 닦고 받아내어 평상(平常)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병든 뒤에 물고기를 원하였으므로 냇가에 가서 울부짖으니 자라 한 마리가 뛰어나와서 이를 요리하여 드렸다.
도강김씨(道康金氏) 충민공(忠敏公) 회련(懷鍊)의 후손으로 유일(遺逸)로 지평(持平) 벼슬을 한 김 해김씨 영학(永學)의 아내이며, 승지(承旨)를 지낸 양근(瀁根)의 어머니이다. 시 어머니의 병이 위급했을 때 변을 맛보아 약을 시험하였고, 지성으로 약 시중을 들었다. 성품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남이 굶주리고 헐벗은 것을 보면, 옷을 주고 먹을 것을 양보하였으므로, 사람마다 그를 좋아하였으며, 그의 적선(積善)한 덕을 기리며 살아있는 부처(活佛)라고 일컬었다.
교하노씨(交河盧氏) 공숙공(恭肅公) 한(閈)의 후손이며, 통정대부에 오른 전주이씨 윤신(允新)의 아내이다. 시어머니가 병을 앓는 3년 동안 하늘에 장수하기를 빌으니, 시어머니가 노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외아들이 있는데 네가 만일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내 병이 즉시 나을 것이다.” 하였다. 뒤에 과연 사내아이를 낳았고 시어머니의 병 또한 완전히 나았다.
진주강씨(晉州姜氏) 이병현(李炳鉉)의 아내이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시부모를 봉양하면서 정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시아버지가 홀아비로 살아온 지 30여 년 동안 그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였으며, 또 병이 위급하여서는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수명을 2달 동안 연장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였다.
순흥안씨(順興安氏) 대사간을 역임한 극효(克孝)의 손녀이며, 윤행섭(尹行燮)의 아내이다. 그의 남편의 병이 위급해지자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먹게 하여 효험이 있었다. 그 뒤로 과부(寡婦)로 20여 년을 살면서 가정의 법도를 삼가 지키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 일정한 방향이 있었다.
풍천노씨(豊川盧氏) 풍산심씨(豊山沈氏) 기홍(基弘)의 아내이다. 남편이 피부병을 앓았는데 밤에는 하늘에 기도하고 낮에는 약을 지어 치료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는 남편이 죽을 때의 부탁을 생각하고, 꾹 참고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면서 어린 자식을 정성들여 길렀는데, 겨우 나이 10세에 병을 만나 죽자, 노씨는 남몰래 남편 의 무덤 곁으로 가서 스스로 목을 매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며, 함양박씨(咸陽朴氏) 필두(必斗)의 아내 이다. 남편의 병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고, 다시 5개의 손가 락을 잘라서 수명을 며칠 동안 연장시켰다. 남편이 죽자 7일 동안 단식을 하였으나, 늙은 시어머니가 울면서 타이르고 어린아이가 젖을 먹고 있기에, 차마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생을 마칠 때까지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아들을 양육하였다.
함양오씨(咸陽吳氏) 함양박씨(咸陽朴氏) 상수(翔洙)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들매 자신이 남편의 병 을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고, 상(喪)을 당하여 슬픔으로 몸을 야윔이 정도를 넘 었다. 매일 산소에 찾아가 통곡할 때면 호랑이가 와서 보호하여 주었다.
청주한씨(淸州韓氏) 함양박씨 민헌(民憲)의 아내이다. 남편의 병이 매우 위급해지자 3차례나 손가락 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슬퍼함으로 몸을 야윔이 정도 를 넘었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진사(進士)인 경주김씨 교성(敎誠)의 아내이다. 그의 남편이 먼 길을 떠났다가 도적을 만나 죽었는데, 한씨가 이 말을 듣고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오래지 않아 소생하여 말하기를, 혼미한 가운데 김 진사(金進士)가 와서 위로하며 “뱃속 에 아이가 잉태하여 있으니 조심하여 생명을 상하지 않게 하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기일이 차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유모를 정하고 자매에게 말하기를, 이 미 부모를 여읜 아이가 있으니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다 하고 단식(斷食)을 한 지 10여 일쯤에 남편을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
밀양최씨(密陽崔氏) 경주김씨 성운(星運)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들매 자신이 남편을 대신하기를 하 늘에 빌었으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식음을 끊었으나 시부모가 울면서 타이르므 로 그만두었다. 시어머니가 병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고, 상(喪)을 당하자 시신(屍身)을 안고 통곡하다가 따라 죽었다.
죽산안씨(竹山安氏) 양박씨(密陽朴氏) 대근(大根)의 아내이다. 시부모에게 효도하였으며, 남편이 병들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남편이 죽자 그도 따라 죽었다.
신천강씨(信川康氏) 전주이씨 해직(海直)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들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병이 위급해지자 남편이 유언하기를 “내가 죽으면 늙은 어머니를 잘 섬기고 어린 아이들을 잘 양육하며 선조들의 제사를 잘 받들라.”하였던 까닭에, 강씨는 차마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였다.
고령이씨(高靈李氏) 세마(洗馬)를 지낸 조평(趙平)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때 조평과 함안(咸安)군수가 힘을 합쳐 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부모를 등에 업고 부인의 손을 이끌고 정암진(鼎巖津)에 이르렀는데, 배는 없고 뒤쫓는 왜적들은 점차 가까워졌 으므로, 이씨가 눈물을 머금고 건너기를 재촉하여 말하기를 “이 나루가 비록 넓다 고 하나 그대(君子)의 용기로서 능히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빨리 건 너서 우리들의 죽음을 면하게 하오.”하고, 이씨가 즉시 몸을 강물에 던져 죽었으므 로, 시체를 찾을 수 없어 초혼(招魂)하여 장사지냈다.
광산정씨(光山鄭氏) 목사(牧使)를 지낸 정설(鄭渫)의 6세손이며, 남원윤씨(南原尹氏) 동승(東昇)의 아내다. 출가한 지 얼마 안 되어 시부모가 병에 감염되어 아픈 중에, 그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시부모의 병이 심해질까 두려워하여 남편의 죽음을 숨기고, 장사지내 는 모든 일들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였다. 시부모의 병환을 힘써 구호 (救護)하다가, 시부모가 천명(天命)을 마치자 남편이 죽은 날에 이르러서 태연히 남편의 뒤를 따랐다. 그 유적(遺蹟)이 유장(儒狀)에 남아있다.
원주원씨(原州元氏) 남양홍씨(南陽洪氏) 재오(載五)의 아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달려가서 3년 동안 곡(哭)을 하며 제물(祭物)을 올렸고, 제사를 받드 는 일에 능히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그리고는 대상(大祥)을 마치는 날 새벽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궤연(几筵) 앞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남원윤씨(南原尹氏) 진사(進士) 행기(行騏)의 딸이며, 가선(嘉善) 대부에 증직(贈職)된 이풍(李渢) 의 아내다. 남편의 병이 위급하여지자 손가락을 잘라 7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으 며, 시부모를 효도로 봉양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공경하였으므로, 갑진년에 정려(旌閭)의 포상을 입었다. 그의 아들 경우(璟宇)는 가정을 계승하여 역시 효자로 칭송되었다.
정부인(貞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 윤참판(尹參判) 태일(泰一)의 아내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정숙하며, 베짜고 길쌈하고 바느질하는 데 능통하여, 집안이 비록 청빈하였으나 세때 맛있는 음식을 힘써 마련하여 올렸으며, 생선이나 고기반찬이 있으면 가족과 어린아이들 은 주지 아니하였다. 의복을 새로 만들면 시부모에게 드리고, 이전에 입던 의복을 여러 달 지난 뒤에야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입게 하였으니, 시부모가 입는 의복은 항상 새로 지은 것이고, 집안사람들의 의복은 오래된 것들이었다. 평생을 이같이 지냈으므로 교관(敎官)이었던 시아버지가 매양 말하기를, “우리 며느리의 효성은 세상에 그와 필적할 사람이 드물다.” 하였다. 시아버지 병환이 위독하여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양절공(襄節公) 확(確)의 후손이며, 경주이씨 규화(圭華)의 아내다. 매양 물을 긷고 물고기를 잡아서 시부모에게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고, 상을 당하여 5일 동안 금식하였으며, 3년 동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鷄林君) 균(稛)의 후손이고, 경주이씨 종현(鍾賢)의 아내다. 남편이 병 들매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씹어서 그 피를 마시게 하였다. 남편이 죽을 때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였으나, 시부모의 나이가 바야흐로 칠순이고 또한 한 살 된 젖먹 는 아들이 있었으므로, 차마 죽지 못하였다.
순흥안씨(順興安氏) 현풍곽씨(玄風郭氏) 시징(時徵)의 아내다. 남편이 죽으매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계시고 어린아이가 품에 있었으므로 차마 하지 못하였다. 3년 복을 마치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부모의 묘소에 이별을 고하고, 시가로 돌아와서 절식(絶食)을 하여 세상을 마치니,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까지 뻗쳤다.
도강김씨(道康金氏) 풍산심씨(豊山沈氏) 기형(基亨)의 아내다. 남편이 죽자 즉시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부모들이 온갖 방법으로 타이르고 밤낮으로 지켰으므로, 장삿날에 남몰래 깊은 안방으로 들어가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연안김씨(延安金氏) 교하노씨(交河盧氏) 치훈(致勳)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매 하늘에 빌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먹였다. 상을 당하여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젖을 먹는 아이가 품에 있었으므로 차마 하지 못하였다. 아들을 가르쳐 결혼을 시킨 뒤, 남편의 기일(忌日)을 당하여 태연히 자결하였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정려(旌閭)효자로서 교관(敎官)에 증직된 치태(致泰)의 증손녀이며, 강화노씨 (江華魯氏) 동규(東奎)의 아내다. 남편이 죽자 즉시 목숨을 버리고자 하였으나, 늙은 시어머니가 눈이 멀었고, 젖을 먹는 아이가 품에 있었으므로, 실현하지 못하 였다. 그러다가 아들이 목적한 바를 이룸에 이르러, 남편이 죽은 날을 당하여 음식 을 끊고 스스로 생을 마쳤다.
함양박씨(咸陽朴氏) 전주유씨(全州柳氏) 병순(炳舜)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매 하늘에 병 낫기를 빌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눈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 음식으로 제공하였다. 상을 당하여는 머리를 빗지 아니하고 죽을 먹었으며, 고기 없는 반찬 으로 식사하였다.
연안김씨(延安金氏)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의 후손이며, 상산이씨(商山李氏) 종석(宗碩)의 아 내이다. 남편이 병들매 하늘과 산에 병을 낫게 해주기를 빌었고, 죽음에 이르러서 는 음식을 끊고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였으나, 홀로된 시어머니가 울면서 타이르 므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교하노씨(交河盧氏) 공숙공(恭肅公) 한(閈)의 후손이며, 상산이씨(商山李氏) 태현(泰鉉)의 아내다. 남편의 병이 위급하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하늘에 빌었으며, 상을 당하 여 따라 죽고자 하여 즉시 몸을 뜰 아래로 던졌으나, 집안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풍곽씨(玄風郭氏) 도사(都事)를 지낸 청주한씨(淸州韓氏) 정교(廷敎)의 아내다. 남편의 병이 위급 하매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으로 인하여 몸이 여위도록 예제(禮制)를 모두 준수하 였다. 스승을 택하여 아들을 교육하여 마침내 가도(家道)를 이루었다.
현풍곽씨(玄風郭氏) 청주한씨(淸州韓氏) 규열(圭烈)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으매 따라 죽을 것을 맹세했으나 늙은 시아버지가 붙잡고 타일렀으므로 차마 죽지 못하였다. 묽은 죽을 마시고 머리를 빗지 아니하였으며, 홀로된 시아버지를 효성으로 봉양하는 데 정성 과 공경을 모두 다하였다.
광산김씨(光山金氏) 좌의정을 지낸 국광(國光)의 후손이며, 청해이씨(淸海李氏) 동석(東錫)의 아내다. 나이 23세에 남편이 병들매, 자기가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고, 살을 베어 삶아 주었다. 남편이 죽자 음식을 끊었는데, 꿈에 남편이 와서 말하기를 “아이가 뱃속에 있으니 조심하여 몸을 상하지 말라.”고 하더니, 과연 사내아이를 낳았다. 시아버지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낫게 하였으며, 시어머 니가 팔다리를 움직이기가 거북하였으므로, 좌우에서 부축하였는데 10년을 한결 같이 하였다.
함양박씨(咸陽朴氏) 청주한씨(淸州韓氏) 용조(用朝)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매 동이에 물을 떠놓고 하늘에 빌었으며, 변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 다.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으로 인하여 몸이 야위도록 예제를 준수하였으며, 시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광주반씨(光州潘氏) 이조판서를 지낸 사제(思濟)의 후손이며, 감역(監役)이었던 천안전씨(天安全氏) 완풍(完豊)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으매 머리를 빗지 아니하고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예제(禮制)에 정성을 쏟으며 3년을 마쳤다.
순창설씨(淳昌薛氏) 홍유후(弘儒侯) 총(聰)의 후손이며, 평강채씨(平康蔡氏) 정룡(挺龍)의 아내이 다. 그의 나이 8세에 집에 불이 나서, 사당(祠堂) 안에 신주를 모셔두는 감실(龕室)에 미치자, 불을 무릅쓰고 신주를 안고 나왔다. 출가(出家)하여 화적(火賊)이 집에 들어와서 그의 남편이 위급하자, 몸으로 가로막아 남편의 목숨을 살렸으므 로, 현감이 그의 의열(義烈)을 가상하게 여겨 약을 보내주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절효(節孝) 극일(克一)의 후손이며, 이천서씨(利川徐氏) 유신(有信)의 아내다. 남편이 죽은 뒤, 몸에 붙이는 물건들을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랐으며, 상을 마 치고 음식을 끊고 약을 마시고 자결하였으므로, 남편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합 장(合葬)하였다고 전한다.
남양홍씨(南陽洪氏) 문정공(文正公) 언박(彦博)의 후손이며, 함양오씨(咸陽吳氏) 치수(致壽)의 아내다. 남편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죽음에 이르러 제사를 부탁할 곳이 없었으므로,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였다. 아들과 조카들을 양자하여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언양김씨(彦陽金氏) 시중(侍中)을 지낸 취려(就礪)의 후손이며, 참의(參議)에 증직된 상산이씨(商山李氏) 종달(宗達)의 아내다. 갑자기 남편을 잃고 자기 아들이 의탁할 곳이 없음을 생각하며 고통을 참으면서 지탱하였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였다.
신천강씨(信川康氏) 무명재(無名齋) 백진(伯珎)의 후손이며, 여산송씨(礪山宋氏) 진백(鎭伯)의 아내다. 남편이 병들매 자신이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죽음에 이르러 시부모가 힘써 깨우쳤으므로, 고통을 참으며 예 제(禮制)를 준수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 남원윤씨 병훈(秉壎)의 아내다. 남편의 병이 위급하매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으며, 상을 당하여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며 잠시도 슬픈 얼굴을 하지 아니하였다. 시아버지가 병들매 물고기를 구하여 음식을 만들어 드렸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정성이 극진하였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이조참의에 증직된 영학(永學)의 딸이며, 협계태씨(陜溪太氏) 형풍(亨豊)의 아내다.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겼으며, 남편의 병이 위급하자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남편이 죽자 머리를 빗지 아니하고 세수를 아니하였 으며, 남겨진 아이를 양육하여 가문(家門)을 보전하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상산(商山)이씨 종엽(宗燁)의 아내이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양자를 삼아 집안을 일으켰다.
진주하씨(晉州河氏) 문효공(文孝公) 연(演)의 후손이며, 김해김씨 경근(璟根)의 아내다. 남편이 병 으로 죽어 장사지낸 뒤로 음식을 끊었는데, 막내 시아버지가 먹기를 권하였으므 로, 억지로 묽은 죽을 마시고는 나가기를 기다려 곧 토하기를 15일 동안이나 하다 가 죽었으니, 그때 나이 22세였다.
현풍곽씨(玄風郭氏) 전창석(全昌錫)의 아내이다. 남편의 병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고, 넓적다리 살을 베어 삶아 먹였으며, 사촌형제의 아들(堂姪)을 양육하며 수절(守節)하였다.
경주김씨(慶州金氏) 남원진씨(南原晉氏) 우엽(宇曄)의 아내다. 본디 하늘이 낸 자질(天姿)로, 출가한 다음 해에 그의 남편이 병으로 죽었는데, 갑작스런 죽음에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 경계하기를, 남편이 죽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데, 만일 나마저 죽는다면 매년 제삿날에 누가 제사를 드릴 것인가 하고, 통곡하며 장사지내는 데 예절을 지극히 갖추었다. 또한 갑오년 동학란 때, 왕위를 찬탈하려는 무리들의 간악하고 위협적인 말들이, 비록 노구(老軀)에게는 들어도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곧바 로 남편의 산소로 가서 울며 절하고, 날이 어두워진 틈을 타서 집으로 돌아와 비소 (砒素)를 삼키고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였으며, 누차 임실군과 전라도 유생들의 진정서가 있었다.
순흥안씨(順興安氏) 남원윤씨(南原尹氏) 이현(頤鉉)의 아내다. 일찍이 남편을 잃었는데, 남편의 병 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2일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으 며, 죽음에 이르러 그를 따라 죽기를 맹세하였으나, 친척들이 간신히 구하여 살렸 는데, 가도(家道)를 완전히 이루어 놓았다.
여양진씨(驪陽陳氏) 남원윤씨(南原尹氏) 주현(周鉉)의 아내다. 나이 15세에 결혼하였는데, 신행(新行) 전(前)에 남편을 잃고 그의 절개를 엄히 지켰으며, 가업(家業)을 완전히 이루 어 놓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유복녀(遺腹女)가 있다.
신천강씨(信川康氏) 한규현(韓圭玄)의 아내다. 시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회생케 하였다.
강화노씨(江華魯氏) 전인택(全麟宅)의 아내다. 남편이 죽으매 평소와 같이 태연하였으나, 3년 상을 마치는 날에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숙부인(淑夫人) 천안전씨(天安全氏) 도정(都正) 청주한씨(淸州韓氏) 규성(圭成)의 아내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으며 남편을 예(禮)로써 섬겼다. 남편이 병으로 고생할 때, 밤낮으로 하늘에 빌며 남편의 병을 대신하기를 원하였으며, 음식을 끊어 거의 죽게 되었으나 위태로운 경지를 지내고 곧 회복되었으니, 천지의 신령이 감응한 것이었다. 모두들 그의 선행을 칭찬하였다.
도강김씨(道康金氏) 전주이씨 치정(稚楨)의 아내다. 결혼한 지 4~5년 후에 남편의 병이 위급하매,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하였으며, 남편이 죽음에 이르러 죽을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으나, 일가 친족들이 여러 가지로 타일렀으므로, 차마 따라 죽지 못하고 유복자(遺腹子)를 길러 결혼을 시켰다. 그의 아들 또한 일찍 죽었으므로 고부(姑婦)가 서로 의지하며 사니 누군들 통탄하지 않으리오. 손자를 잘 길러서 그의 가 업을 선양(宣揚)하였다.
우주황씨(紆州黃氏) 진사(進士) 응정(應鼎)의 딸이며, 주부(主簿) 경주이씨 영문(榮文)의 아내다. 그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로 문밖 출입을 아니하였다. 기축년(1589) 옥사(獄事) 때 의금부도사가 도착하여, 두 아들 경(經)과 위(緯)가 절하고 작별하고자 중문(中門)에 들어오니, 황씨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어진 스승 및 벗들과 교유한다 생각하였거늘, 오늘날 이와 같으니 나의 희망을 크게 그르쳤다. 너희들이 진실로 만약 죄가 있다면 내 몹시 한탄스러워서, 이로부터 너희를 보지 않아도 내가 섭섭할 것이 없고, 너희들이 진실로 만약 죄가 없다면 오래지 않아 마땅히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니, 역시 만나지 않고 가는 것이 옳으니 라.” 하였다. 의금부도사가 이 말을 듣고 존경하고 심복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어 머니의 선(善)하심이 저와 같은데, 착하지 않은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청주한씨 동수(東洙)의 아내다. 시할아버지 진사공(進士公)이 중풍으로 오랫동안 치료 중에 있었는데, 죽을 쑤어 드리는 일이 매일 5~6차에 이르렀으나 피곤한 것을 꺼리지 아니하였다. 또 입이 삐뚤어지는 병으로 음식물을 입에 넣는 것이 안온하지 못하여, 절반은 흘러내려 다시 그릇에 담기면 안씨가 이를 다 먹어서 다 른 사람들에게 허물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걸을 수 없는 시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방에 드나들어서 힘써 부도(婦道)를 지켰으므로, 모두들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경주김씨(慶州金氏) 계림군(鷄林君) 균(稛)의 후손이며, 청주한씨 양수(良洙)의 아내다. 결혼한 지 한 해도 안 되어, 그의 남편이 눈병으로 고생하게 된 것이 3년에 이르렀으나, 부모 를 곁에서 봉양하는 데 그의 정성을 다하였으며, 매일 약을 달이면서 조금도 게을 리하지 아니하였다. 남편이 죽음에 이르러 애통하다가 생명을 잃을 뻔하였으며, 즉시 따라서 죽고자 하였으나 그의 시아버지가 타이름으로 인하여, 머리를 빗지 아니하고 얼굴을 씻지 않고 절개를 지키다가 생을 마쳤다.
영천이씨(寧川李氏) 엄종훈(嚴鍾勳)의 아내이다. 그의 남편이 일찍 죽자 죽을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 으나, 시부모님들이 위로하고 타이르는지라 차마 따라 죽지 못하였다. 그의 시아 버지가 학질을 앓는데 모든 약이 효험이 없어서,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게 함으로 써 병이 나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공경하고 탄복하였다.
남원양씨(南原梁氏) 함양박씨(咸陽朴氏) 용윤(容允)의 아내이다. 나이 16세에 결혼하고 아직 시가 (媤家)에 들어가기도 전에, 갑자기 남편의 상을 당하여 친가로부터 부고를 받고 와서, 장사지내는 일을 예제(禮制)에 맞게 하였고, 생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아니 하였다. 3년상으로부터 20년이 되어서도, 남편의 제삿날을 당하면 시부모의 마음 이 상할까 염려하여 시종 울지를 아니하였다. 그의 조카 임수(林洙)를 양자로 삼 아, 절개를 지킨 지 20년이 되니 어버이를 섬기고 남편 따르기를 이보다 잘할 수는 없다. 박통정(朴通政) 양직의(陽直) 큰며느리다.
경주김씨(慶州金氏) 진사(進士) 경후(敬厚)의 딸이며, 청주한씨 규필(圭弼)의 아내이다. 3번의 오랜 병환에 3차례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쾌히 물리쳤으므로, 세상 사람 들이 모두 효열부(孝烈婦)라고 칭찬하였다.
현풍곽씨(玄風郭氏) 통정대부 전석한(全錫漢)의 아내로서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그의 시아버지 나이 80세가 되어 중풍병으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웠으므로 소변과 대변을 받아내는 일을 몸소 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밥을 떠먹이는 일을 몸소 하였다. 목욕시키고 수건으로 닦아주고 머리를 빗어주며 항상 받들고 곁을 떠나지 아니하 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전치순(全致順)의 아내이다. 일찍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차마 남편을 따라 죽을 수가 없었다.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며, 생업(生業)에 힘써 제전(祭田)을 마련하고 비석을 세워서, 대대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남평문씨(南平文氏) 서상태(徐相台)의 아내이다. 남편의 병이 위급하자 정성과 힘을 다하여 치료하 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수명을 연장하였으니, 하늘이 감응(感應) 하였음을 진실로 알 만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병호(秉鎬)의 아내이다. 그가 모시는 홀로된 시아버지가 늙으면서 오랫동안 자리에 드러누웠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병이 위급 하여 잉어 먹기를 원하자 추운 겨울에 잉어 한 마리가 뛰어나왔으므로, 이로써 대접해드렸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옥천조씨(玉川趙氏) 재술(在戌)의 아내이다. 남편의 병이 심각하여지자, 목욕하고 하늘에 빌면서 자신이 남편의 병을 대신하기를 원하였으며, 빈소와 무덤을 3년 동안 받들면서 몸이 야위어 뼈만 앙상하였다. 시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고루 갖추어 드렸으며, 근면하고 검소하게 재산을 관리・운용하였다.
밀양박씨(密陽朴氏) 전장택(全璋宅)의 아내이다. 남편이 병들매 매일 밤 하늘에 빌었으며, 목숨이 끊어질 무렵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3일 동안 회생(回生)하였으므 로, 그를 칭찬하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진주하씨(晉州河氏) 서극래(徐克來)의 아내다. 남편의 병이 깊어지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며칠 동안 수명을 연장하였다. 남편이 일찍 죽음으로 인하여 따라 죽고자 하여 죽을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으나, 마음을 돌리고 고집을 바꿔 3년상을 지키고 수절(守節)하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동래정씨(東萊鄭氏) 입조(立朝)의 아내이다. 나이 19세에 결혼하여 오래지 않 아 남편의 상(喪)을 당하고 그 후로 슬픔으로 몸이 야위어 뼈만 앙상하였다. 하나 의 혈족(血族)도 없었으므로 정절(貞節)을 굳게 지키며, 늙도록 전실(前室)의 자 식들을 양육하여 가문(家門)을 일으켜 세우게 하였다. 아들 주귀(宙龜) 또한 어질 고 효성스러워서, 권씨가 만일 기쁘지 않은 안색을 하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더욱 공경하고 기쁘게 간(諫)하여 마침내 감동하여 기뻐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 두 놀라고 감탄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 박필두(朴必斗)의 아내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다. 16세에 박씨 집안에 출가하여 17세에 남편을 잃었다. 그는 남편의 병이 위급할 때 다섯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며칠 동안 회생(回生)케 하였다. 갑자기 천수(天壽)를 다하자 이씨가 즉시 시체실로 들어가서 남편을 따라서 죽고자 하였으나, 곁에 있 는 사람들의 제지를 받아 죽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7일 동안 단식을 하니 6순의 늙은 시어머니가 여러 가지로 타이르기를, 전실(前室)의 어린 자식들은 어떻게 거두어 기르느냐고 하였으므로, 시어머니의 가르침에 좇아 수절(守節)하였다.
언양김씨(彦陽金氏) 안락도(安樂燾)의 아내이다. 그의 시아버지가 이질(痢疾)을 앓을 때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연명(延命)케 하였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송현옥(宋顯玉)의 아내다. 남편의 병이 위급할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였고, 한 유복자(遺腹子)를 양육하여 가도(家道)를 세웠다.
순흥안씨(順興安氏) 남원윤씨(南原尹氏) 병찬(秉燦)의 아내다. 그의 남편이 오랜 병으로 인하여 몸 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몸을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안씨가 스스로 그를 대신하였 다. 밤낮으로 문 밖으로 드나들고 먹고 마시는 일상생활을 모두 안씨가 맡아 하였다.
청송심씨(靑松沈氏) 곽수의(郭守懿)의 아내이다. 시부모에게 효도하며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 데에 힘과 마음을 다하였다. 남편을 일찍 잃고 유복자(遺腹子)를 양육하면서 집안의 법도를 엄히 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효열(孝烈)이라고 칭찬하였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전석년(全錫年)의 아내이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그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슬피 통곡하다가 생명을 잃을 뻔하였다. 남편을 따라 죽기를 맹세하였으나, 그의 시어머니가 여러 가지로 타일렀으므로 차마 죽지 못하고 살아서 효성으로 부도 (婦道)를 지켰다.
전주이씨(全州李氏) 효자 최광구(崔光久)의 종가(宗家) 며느리다. 그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였으나, 그의 시부모가 여러 가지로 타일렀으므로 따라 죽 지 못하다가, 대상(大祥)을 마친 다음 날 자기 침실로 가서 자기의 신혼 때 입었던 의복을 정돈하고 온화하고 의젓한 몸가짐으로 뒤따라 죽었다.
문화유씨(文化柳氏) 남원윤씨(南原尹氏) 동현(東鉉)의 아내이다. 그의 남편이 고치기 어려운 병을 여러 달 동안 앓다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변을 맛보아 약을 시험하고 살을 베어 병을 치료하여 쾌히 나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열부(烈婦)라고 칭찬하였다.
인동장씨(仁同張氏) 남원윤씨(南原尹氏) 행권(行權)의 아내이다. 일찍 남편을 잃고 의탁할 곳이 전 혀 없었으나, 자기의 절조를 엄히 지키며 부족한 식량으로 구차하게 살아가니 세 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가련히 여겼다.
남원윤씨(南原尹氏) 박필승(朴必昇)의 아내이다. 남편의 병이 위태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약을 썼으 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효험이 있었다. 남편의 상(喪)을 당하여서 는 모든 예제(禮制)를 엄히 지켰다.
此善行三綱錄外忠孝學行兼備之人一従有司李廷儀收單入錄
趙 平 咸安人忠孝名於世學行拔於類士林景仰有俎豆之禮後又刋集行于世
郭興懋 玄風人壬亂扈 聖于龍灣入於錄勳士林慕其忠義而立祠孝友學行至今誦傳
朴 昶 咸陽人號梅軒收心齋玄孫性質嚴毅孝友篤實平生言行遵先訓與兄旭廬墓三年人稱孝蔭通德郞109)
朴承洛 咸陽人號養浩亭收心齋五世孫性至和平以承先訓世稱世孝
李命根 慶州人號拙愚齋學問孝行冠於一世居喪一從家禮入于道啓除110)奉常寺參奉 贈監察公嘗修立綱正俗之約如藍田鹿洞之規
韓興業 淸州人安襄公六世孫官宣傳當光海朝固守不仕隱居自寓山水之樂搆亭曰避暗後徵古阜郡守不就以終考槃之樂
沈纘西 豊山人豊山君靖襄公龜齡后孝養父母友愛兄弟實行入於道啓贈通政大夫左承旨兼經筵參贊
沈世紀 豊山人贈丞旨纘西子以孝友之行登聞于朝贈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總管
尹克昇 南原人號愚齋天性有異學識孝行聞于一世摳衣於任鹿門111)之門經學禮說112)終老不廢丁憂一遵家禮有集藏于家蔭通德郞113)
李靖鎭 全州人號拙窩孝寧大君補后深衣大帶講禮篤學克明人倫宗黨咸服鄕隣欽嘆
朴致雲 咸陽人號晴菴堂收心齋六世孫性質恭儉誠孝至篤作訓蒙集二卷
朴慶設 咸陽人收心齋七代孫孝友至篤世襲家庭源于百行爲世推重
李根萬 全義人召募使廷鸞後學識高明操修謹勅以孝友之行爲當世推重入鄕薦
朴匡鍵 咸陽人號芝峯性質溫純敬受從祖白茅亭之訓敎諸子以仁義
尹述煥 南原人忠簡公璜後以文學爲業從事於聖學之門恒着儒巾工於禮經 䒭說世皆稱之
韓弘奎 淸州人贈戶曹佐郞114)弘直弟學問高明臨事安詳操身矜式鄕隣稱慕蔭通政副護軍
李圭祥 慶州人靜履堂八世孫恭儉正毅而第四弟圭淵亦有文華相與友愛敎子侄以道接賓客以禮案上常有庸學當時卿宰往復尙載於黙隱集
洪遠燮 南陽人天性仁厚器宇端正操身謹愼惟有古家餘風屢入鄕薦
李鳳基 全義人根萬子孝學純篤言論正直扶綱化俗常有溫和之像望重一鄕屢入鄕薦有行家之風
李會沇 全州人孝寧大君補後天稟醇仁以修身爲事敎子姪爲業赤手致産供位土篤宗誼爲世推重
李 潗 全州人孝寧大君補之後家本淸貧赤手成家以供位土具盡石物世皆稱誦
尹頥鉉 南原人忠簡公璜后學問孝行聞于一世從事於聖學有集數券
韓致淳 淸州人號梧齋避暗公七世孫深衣大帶至老講學禮經遊梅山門明於禮學入于道啓有文集
韓亨錄 淸州人府院君確後天禀率眞以孝友爲心敎子爲業訓導文學敦睦宗族鄕隣欽歎
韓 乘 115) 淸州人號靑鳳服襲庭訓就正師門行誼彌篤望重一鄕屢入剡薦
沈鳳遠 豊山人豊山君龜齡后天性醇厚其於族親喜悅情話切偲相孚持操仁慈壽職嘉善護軍
沈鎭龍 豊山人鳳遠子繼承孝心侍奉兩堂終始不懈人莫及壽陞通政
吳榮錫 寶城人號鶴汀以孝友文學著於都鄙蔭監役參奉歷列郡守宰至通政陞從二品官內藏 院卿所經郡有不忘碑退休鶴山日與京鄕士友論文詠詩以淸閒爲業人謂平地仙官晩年誠孝彌篤血心求山
李東儀 全州人孝寧大君後進士升榮子官通政大夫性本至孝奉養竭誠且以文學名於世屢屈會闈116)其親科事奔走京鄕誠孝到底卒顯其名言論剛直扶綱化俗爲心其子起相亦孝養其親鄕隣稱譽
尹泰根 南原人忠簡公璜後天性仁厚以孝友爲心早年丁外艱執禮如老成奉養偏母血誠供旨雖難得之物期於求進常恨其弟之夭家本淸貧農業資生出入無常而出告反面喜悅親心敦睦宗族接對親友恒有和氣敎子侄以善行其子秉漢亦以孝稱
朴翔洙 咸陽人收心齋十世孫性直剛毅孝順齊家能通經禮扶植鄕綱其妻吳氏亦以烈行載三綱錄
崔鳳紀 全州人進士鎭紀六世孫官通政大夫孝友純篤言論正直鄕黨稱譽
崔鳳朝 全州人進士應淑十二代孫稟性慈仁世襲家訓以文學著世
崔憲翼 全州人進士應淑后性本仁慈事親有節友愛兄弟家門雍睦官通政大夫
尹行斗 南原人號松菴忠簡公璜后孝行卓異學問有餘養親之節非但養體兼以養志操修之行非徒修巳及於敎人南中士友景仰從遊
李璟宇 全州人孝寧大君補后官都正陞從二品嘉義大夫自在髫齡天性仁慈恨其早孤奉偏母承順其心志隻手成家敎訓諸子登科而各守家業足爲安享且以祖與父墓碣位土旌閭以遂本志鄕隣稱嘆
李賢儀 全州人孝寧大君補后都正泰榮子道薦參奉陞三品議官至秘丞天禀仁孝兩親侍下養志養體而友於其弟無物我之分且僅守些小遺來之業行善爲主凶年飢歲施惠不少鄕隣稱誦
李炳儀 全州人號石愚孝寧大君補後賢儀弟中司馬孝友行於家庭文學著於京鄕手不釋古史之文口不絶四律之韻獎進後學世皆慕效早年遊京與鄕宰文字相從性本魁傑言論宏博接應親友以爲消日且與尹參判泰一從遊春秋間行鄕飮禮又以講會爲一鄕之式講會有司東面參奉沈鎭杓進士梁基衡齋儒李光儀尹秉濟西面議官朴琮憲齋儒朴弘根李起相韓光錫崔鳳吉
李鳳淑 全州人天性仁厚以孝友爲心奉養父母靡不用極且老親侍下至於白首無恙承順其志以文雅操修爲一鄕推重
趙柄鏞 咸安人洗馬平後官參奉性稟寬厚孝友彌篤恨其早孤友於其弟家門雍睦刋雲壑集布行於世彰先之心克壯也敎訓有序使其子熙濟來往於丈席學問日就家本淸貧迎送士友爲事鄕隣欽仰
沈志遠 豊山人靖襄公龜齡后天性仁孝早年丁憂不得長侍常爲恨歎自少至老固窮讀書不違素節言論正直扶植綱紀爲主接對親朋一無外餙每當會席實心做去無不感服有古家之風世皆欽慕
沈鎭憲 豊山人靖襄公龜齡后孝友之心與他有異奉養偏親而以本病長在枕褥暫不離側甘旨之供藥餌之物恒求進之靡不用極友愛兄弟和樂且湛實心做去鄕黨之慕效宗事之主幹皆欽仰焉
李英宇 全州人孝寧大君補後官慶基殿參奉自在髫齡承襲家庭天性仁孝操修之行溫和接人長侍兩親承順其志丁憂執禮一遵古制又講究禮經律巳之方源於此尙傳古家之風世皆慕效
盧光夏 交河人文匡公思愼後稟性淳厚親病祝天養軆養志以悅盡誠咸稱一世以壽資通政陞從二品嘉善
盧秉麟 交河人文匡公思愼後性素仁孝以農供旨以篤爲志睦親戚信朋友以學文爲世推重以壽資通政至嘉善
郭守懿 玄風人文憲公元振後伴松堂興懋九世孫孝心卓異奉其養父母怡愉養志親病嘗糞家雖貧祭需至誠供備世皆稱孝
朴弘根 咸陽人 白茅亭慶泰玄孫素性慈仁世襲庭訓家貧勤讀以文學禮說著名
沈鎭杓 豊山人靖襄公龜齡後 號桐谷以孝友承襲家庭文學著世屢參陞覆試鄕解連屈會闈117)參內府別薦除118)莊陵參奉有赴任之敎以身憂辭免閔參判亨植朴氶旨始淳致賀文曰以若宿儒抱負惜其空老參于別薦湖南士友景仰
郭守翼 玄風人文憲公元振後伴松堂九世孫天性純厚誠孝事親終身不懈敦族明義鄕隣感服
郭正奎 玄風人文憲公元振后稟性仁孝事親養志養體友於兄弟家門和順鄕隣欽服
韓學敎 淸州人府院君確后敎官基弼子誠孝與他有異其親連屈會闈119)常爲恨歎褒彰其孝行先山碑碣傾家竪立友愛其弟家門和湛敎訓諸子粗知孝悌鄕黨宗族無不悅服子東錫鼎錫稱孝
尹泰允 南原人號晩悔忠簡公璜後天禀純至孝友持心親病孔劇自遠方求藥中夜鬼火導前供進得效且其親山與兄墓三四移葬期得吉地孝友所致接人和氣睦族敦厚雅意所存鄕里欽服
吳錫宇 咸陽人官都正陞嘉義誠孝操修遺孤成立創開門戶班衣悅親立碣掃塋艮齋錫號齒德爵尊聲聞永世
柳濟根 全州人大司諫駱峯軒后孝烈傳家操修爲行屢代贈職旌閭爲平生事業家雖淸貧耕織生涯酬接賓客京鄕士友許多從遊有大家餘風
韓炯履 淸州人府院君確后自在兒時孝友根於心志奉養偏母承順其志丁憂初終一遵古制友愛兄弟守成家道敦睦宗族悅親情話人皆欽嘆
吳在斗 寶城人參判榮錫子中司馬蔭參奉天性仁善事親養志怡愉無違友愛兄弟和氣滿室守成家規行善施惠爲大家風度而京鄕稱道且講究經旨爲律巳之方雖一言一行安於素履世皆慕效實行載鄕儒狀
洪在祺 南陽人天性勤厚以孝持心生養庭奉養之道少無懈弛供旨不絶丁艱血心求山買得吉地安葬子孫満庭敎訓有方與其弟在爰同居和樂泰平敦睦至親有傳家之行鄕黨稱譽
韓喆敎 淸州人府院君確后孝心純至長侍老親家本貧寒勤力治産以供甘旨固窮讀書以著聲名遭艱執喪遵禮不離苫次敎導子姪有方鄕隣欽服
李起相 全州人孝寧大君補后通政東儀子自在孩提誠孝彌篤奉養兩親至矣盡矣丁內憂血心求山期得吉地奉偏父三時適口內外周旋遠方難得之物期於求進孝之所感孰不欽服
金秉秀 延安人文靖公自知后壽通政性素淳儉事親誠孝睦於宗族一門和雍隣里感歎
金思杓 延安人文靖公自知后天性謹儉純孝養志養體竭誠無違訓子有方親族以和法部120)除委員
金仁秀 延安人文靖公自知後不求名聲隱居求志以壽覃恩陞通政
金思光 延安人文靖公後以孝行薦 除果川副敎員實行在三綱錄
韓東一 淸州人安襄公終孫後孝親篤學文行著世
韓宗赫 淸州人安襄公終孫後襲庭訓敦行義有望
洪鍾晟 南陽人壬辰功臣碩舫後誠孝淳至常恨早孤重侍奉養家素貧淸勤力耕田以供甘旨暇日讀書以爲律身之方持心公平素履篤敬至於鄕席言論正直不拘些小有古家風
韓鳳休 淸州人安襄公終孫後天性極孝親病危劇斫指注血延121)六日命人稱孝感
崔宗河 全州人性素詳明與弟同居有湛和之氣無憤厲之色共資衣食世稱友愛
李漢榮 全州人事親能孝而與弟同居一室友愛湛樂焉
韓圭弼 淸州人文華精明性本忠厚與兄同居和樂每憂衣食常供不絶
韓宇錫 淸州人安襄公終孫后晨昏甘旨養志養體極盡其誠隣里稱歎
全愼宅 天安人天性仁厚孝於其親暇日深究經旨能解朞三百註才行具備敦和宗族酬接親友鄕黨稱歎
李鴻儀 全州人孝寧大君補后服襲家庭事親誠孝雖一言一行不違親訓其仲兄承旨恒遊京洛而與長兄鼎儀弟尙儀同居一室怡怡且樂無物我之分且奉親之節兄弟克盡誠力世所稱頌
郭道永 玄風人文憲公元振后以孝事親有事必告有味必獻友於兄弟無物我之心睦於宗族有急人之風家門和順名著鄕隣
郭東鎬 玄風人鰲巖維藩六世孫有孝學壽通政
郭萬顯 玄風人號松菴伴松興懋六世孫聽溪後泰曾孫天性純謹事親至孝丁憂廬墓初終一遵禮制不事科業明於經理屢入鄕薦
李炳益 全義人鳳基子孝友律己操修傳家而奉養兩親務以爲悅承順其志無愧於古人丁憂一遵古制潛心讀書講究經旨與弟炳和友愛彌篤和湛一室敎訓子侄遂成巨儒眞行家之風
韓達休 淸州人事親極孝母病危劇嘗糞禱天伯氏鳳休裂指得效三日後又至屬纊公又斷指有頃乃甦以延三日人稱兄弟之孝得感天人
韓圭燦 淸州人安襄公終孫後賦性渾厚篤守先訓孝事兩親敦和宗族爲世推重
韓圭映 淸州人安襄公終孫后奉先思孝接人以仁臨事謹愼人皆稱善
吳錫濤 咸陽人郡守變夏十一代孫性素慈仁事親以孝愛族以睦勤修其身人稱善行
李春榮 慶州人益齋后平生濶達有急人之風
李圭一 慶州人益齋后性本節儉謹守世業敎親孝子可見有德之氣像矣
朴鼎斗 咸陽人收心齋後以孝行文學名於世晩侍其親奉養至誠丁憂血誠求山屢次移葬求得吉地誠孝所感暇日讀書潛究經義122)爲修齊之方至於鄕黨之會剛直爲主世皆慕效稱嘆
朴洙根 咸陽人收心齋後稟性仁孝事其生養兩庭極至純一睦宗族友兄弟與他卓異人皆稱之
李光儀 全州人孝寧大君補後參奉英宇子承襲先世孝友而家本淸貧勤力致産安養其父母以褒先之心至誠經紀閱歷京鄕以顯其名孝之至而然也友愛兄弟敦睦諸族和氣滿室文學名於當世
趙柄燮 玉川人世襲孝友居喪三年極盡禮制雖風寒暑雨不廢省掃且初年從遊文華之塲言多剛直每參鄕黨會席人皆稱云
柳琯煥 高興人以誠孝謹修爲心和睦至親敎訓子姪一門雍和鄕黨士友多有尋訪人皆稱譽
崔 增 全州人 文簡公哲之後孝子 贈奉事憲之八世孫進士相翊孫官內部主事世襲家庭孝友彌篤奉養偏母極盡子職且與其弟同居一室敦睦至親隣里稱歎
崔鳳宇 全州人進士應淑後世襲家庭以誠孝操修爲事內外艱居喪執禮不違古制血心求山期得吉地豈非感孝之孚耶敦睦大小家子姪多有進就之望鄕黨稱歎
崔鳳吉 全州人號石汀以文學抱負名於世屢屈會闈123)誠孝爲心奉養偏母極盡子職丁憂居喪一遵禮制且獎進學徒鄕隣稱歎
沈鎭夏 豊山人靖襄公龜齡後參奉弼遠子世襲家庭以誠孝操修爲心家貧親老極供爲子之職且工於禮說人多問難宗族鄕黨皆稱嘆
沈英淳 豊山人靖襄公龜齡后參奉鎭祐子承服靑氊奉親承順其志友愛兄弟和湛且樂人皆慕服
沈東奎 豊山人靖襄公龜齡後家本淸貧事親之節勤幹力農以供爲子之職友愛兄弟容儀端正從遊於文學之塲則有進就之望矣
趙升濟 咸安人洗馬平後服襲家庭誠孝彌篤雍睦家門敦和宗族而言論剛正每當鄕黨之會先數其人耳
鄭基仁 東萊人性本誠孝晩侍兩親克盡子職丁憂初終一遵禮制和睦宗黨友愛兄弟無物我之分出入京鄕信義行於世無不悅服可歎其未壽
鄭寅龜 東萊人翼惠公蘭宗后天禀仁孝操修卓異入孝出悌每恨其早孤奉養偏母尤極殫誠承順其志暫不少弛世皆稱孝而居於逢門澡身浴德以故宗族咸服鄕隣慕倣人皆健賀
魯學奎 江華人府使輿后孝行根天奉養之節與他有異慈親眼盲不辨咫尺三時飮食之節不分水陸之味而以手進之以言告之枕席起居常時扶護蹔不離側如是者十有餘年
薛炳庸 淳昌人文學著於世孝友行於家屢屈會闈124)人皆憐嘆敎訓子弟有承家之望
尹泰柱 南原人忠簡公璜后天性純厚事親至誠敬兄尤篤奉祀之節自盡其誠敎訓子姪有進取之方
宋在浩 礪山人遯壑慶元后天性至孝丁內艱送終之節克遵禮制奉養偏父承順其志無違其訓三時之供水陸求進雖寒暑之極少不間撤偏愛其弟人無間言鄕黨欽歎
崔弘錫 全州人文簡公哲之后孝子贈奉事憲之九世孫進士相翊曾孫進士榮煥孫中司馬孝學傳家重侍奉養晝宵侍側大小便躬自受出不使家人奴婢代之丁憂執禮行素不離苫次探索經義慱古通今知識裕如125)一門和睦庭無間言施惠行善隣里咸服可歎其夭
崔命錫 進士弘錫弟承襲家庭奉其偏母終始承順其志遭長兄之喪執禮之節不脫絰帶一遵古制來往於學門126)深工於禮經有操修之行
崔 綎 和順人文憲公溥后天性仁厚孝友敦篤奉養偏母養志養體至矣盡矣丁憂送終極盡子職友於其弟無物我之分性本仁善憂人之憂樂人之樂有汲引之風其子台永亦以孝稱
洪在鎬 南陽人進士漢燮子孝友彌篤奉養父母供爲子職一言一行不違其訓以其親科事多年閱歷京鄕血心喫苦127)以顯其名敎子致有方人皆慕仰
太鍾顯 陜磎人壬辰功臣參奉竬後性本至孝奉養偏母承順其志深工經學愽士式經疑問對參選於學部有文華之雅望
吳錫龍 咸陽人郡守燮夏後孝於父母友於兄弟且以文華名世屢屈會闈128)人皆嗟嘆而敎訓子侄有進就之望
李龜鉉 商山人淸風堂聖任後天性勤孝奉養父母無違其志且以先事多年喫苦深工文學來往學家有操修之行
孔世亮 曲阜人號東陽己卯名賢文憲公瑞麟後以節儉爲心以文華著世屢中陞補連屈會闈129)好獎進後學弟子秒益進人咸譽稱
金基鎭 金海人天性誠孝早歲失怙零丁孤子奉養偏慈昏晨溫凊親所適口雖遠必供世皆稱篤孝
朴啓春 密陽人駱村忠元后誠孝純至奉養極盡其父病時思食鯉魚剖氷得進祝山得蔘以進豈非感天之孝耶蔭陞通政
朴鎭豊 密陽人江叟先生后性本極孝奉養其親實如古人之行且祭祀靡不用誠世稱其難
朴鎭奎 密陽人江叟先生后親病嘗糞蹔不離側待賓客和平人咸欽歎
朴龍來 密陽人 訥齋先生后友愛兄弟與弟聖來衣服居處相爲常讓世皆稱歎
全令珎 天安人忠建公翊之后其父老妄以酒忿怒益順其志父病嘗糞驗疾
尹泰浩 南原人文孝公孝孫後親病思鴈肉設壇祝天忽有一鴈落壇獻親得效其感孝如是累有邑狀
尹秉禧 南原人忠簡公璜後自幼性本至孝雖半絲半縷不欺其親承順其志不違父訓雖遠方之物適口求進只知有父不知其身且以敦睦宗族自本面約所受賞
尹鏞燮 南原人忠簡公璜後孝友爲心養偏母極盡子職友愛兄弟同居一室和樂且湛無分門割戶之意爲先之心卓異勤檢宗事工於文學潛心講究操修之行人皆稱譽受面約所賞弟光燮亦稱孝友
全東祚 天安人天性剛直事親極孝養志養體靡不竭誠父病危急斷指注血仍爲享年九十三年之喪哀毁有節一如古制世皆欽嘆
李鳳炫 全義人孝心純至親病斷指注血丁憂居廬行素一遵禮制人稱孝之至矣
崔光烈 完山人文簡公哲之後天性純孝十六丁外艱居廬130)執禮迎待弔客一如老成奉其偏慈晨昏不愆事亡事存兼得其宜世皆稱道
李愚澈 全州人文華名於世誠孝行於家奉其親承順其志以供子職勸學弟子多有獎進世皆欽歎
全厚宅 天安人官嘉善以孝友爲行家貧親老耕田力穡以供子職友愛兄弟無物我之分好接親友鄕中多士尋訪從遊有勤儉之行焉
崔錫龍 全州人進士應淑後天性至孝父病嘗糞養志養軆竭盡誠力其子婦金海金氏亦孝舅以 順婦道累受面賞
李錫儀 全州人以孝友之行著於世
李景儀 全州人以孝友之行著於世
尹泰順 南原人 家至貧養八十老母至誠宗族稱云
李 淟 全州人孝寧大君補后以孝友文行名於世
韓圭燮 淸州人淸城君終孫後孝友醇至奉養偏母養志養體靡不用極友於兄弟無物我之分敎子姪有方隣里慕效
魯炳宇 江華人府使輿后天性純孝奉養偏母勤農供旨性本堅實親知間多有汲引之風
朴熙鎭 密陽人號玉川松隱公後事親有節奉祀循禮居束草山山麓築一亭曰復性窩與十餘學徒春秋講會焉
黃鎭坤 紆州人文肅公四代131)孫號新圃有孝行文學有文集云
吳載灝 咸陽人海南郡守變夏后天性仁孝奉養父母怡愉無違供旨適口友愛兄弟無物我之分鄕隣皆稱善行其子柱燮亦以孝稱
韓圭烈 淸州人淸城君后性本柔和睦於宗族力勤稼穡克誠奉先陞通政
韓東洙 淸州人進士圭成孫一言一行不違親訓克力供旨家門和順
韓鏞洙 淸州人東洙弟養志其親克友兄弟專尙雍睦之和氣
崔封求 全州人晩六瀁後天性堅實以誠孝爲心常恨其早孤無依敬兄如父愛護其姪無異己子信義著於人世咸稱歎
李敎潤 星山人以誠孝爲心家素貧寒受人侮者多先山偷葬連疊血心以訟掘去者十四塚也艱鳩財物先山碑碣與祭閣一新而獻誠名師期得吉地爲先而遺後之計孰不欽歎中年寓接孝村今居項洞
李圭錫 慶州人靖履堂斗然八代孫事親以孝友愛尤篤世襲家風日事學業有高士之行
金永玉 光山人滄洲益熙九世孫性本柔和樹立門戶孝事父母誠奉先祀
姜胤烋 晉州人號三隱齋寶文閣大提學淮仲后至孝純一讀書之暇兼於漁樵以供親膳氷鯉 雪筍罔獨專美文學名於湖南晩僻132)湖山東闢靑蓮臺南列望仙亭休暇登臨頗有逸居樂古村五柳眞處士幽致孫敦馨亦詣文學肯搆世業
韓弼錫 淸州人淸城君終孫後性本醇至其父被苦風祟忽爲坐躄不出戶十餘年溺糞受出旨供不乏且秋熟時與其弟擔轎侍親橫行阡陌詳指某家農之善不善如此誠孝人難效則
韓圭澤 淸州人龜窩后副護軍弘奎孫親病恒念川魚隆冬氷雪擧網設扈得進且思狗羹每月一次煮獻丁憂哀毁滅性
晉俊曄 南原人南原133)君錫134)後官監察議官自在孩提誠孝彌篤雖一言一行不違親訓奉養甘旨至矣盡矣敎訓諸子篤工文學勤儉成家節用規模貧族窮交莫不悅服凶年飢歲賴活者不知幾許人世皆稱善行有永世不忘碑
金基聖 光山人六行堂處謙後性本和柔樹立門戶孝奉先祀
韓鎭洙 淸州人襄節公後號棗西勤學崇禮名於世
尹泰旭 南原人旌閭隱潭處士斗杓六世孫天稟以誠孝爲心常恨早孤家本至貧晝耕夜讀庸學二秩每夜一周誦讀自少尙今不廢世皆稱善行
金在英 光山人六行堂處謙后克孝事親備供甘旨雖一事之微先禀後行睦和家門
金在浩 光山人六行堂處謙後天性至孝晩侍其親愉色養志極友兄弟常有湛樂之氣
朴容燮 咸陽人收心齋薰后自幼至老惟務孝恭式遵禮法鄕閭稱善有儒狀又有褒賞之饋饌
朴鳳來 密陽人孝子琪鎭孫善事父母寓樂詩書隱居聖壽山掲齋霽梧與數十學徒講討經旨
姜遠馨 晉州人大提學淮仲後孝友之行敦篤且固窮讀書摳135)衣於宋淵齋之門操修心工人皆稱譽
金俊洙 光山人滄洲益熙十世孫天性至孝親病欲食生鮮號泣川邊氷上出鰲歸進及亟割股煮進以延三朔屢有面賞又有儒狀
鄭東泫 慶州人世宗朝兵判弘德後繕工監役通政大夫祺浩子官參奉天性異凡自有成人之望孝友彌篤有周求136)方略輕稅田庄施惠面里人皆善之有不忘碑
朴琪鎭 密陽人文度公熏之后性本醇孝善養父母敎養五子以文學鳴于世鄕里稱之
申鉉泰 平山人武純公漑後孝友爲心善養父母和睦宗族鄕里稱善
申鉉大 平山人武純公漑后誠孝操修卓異孝父母睦宗族創書齋敎子姪酬賓客士友多尋訪皆稱歎
此則有孝善行人或鄕薦受營邑賞給復 贈職依續誌抄出
李 經 慶州人十一歲遭父喪執禮無異老成冬月臨祭沐浴製紙巾親祭年八十猶不懈號飯牛堂
李 緯 飯牛堂經弟以小學爲律身遂絶科業每當忌辰十日齋戒門不接賓致齋三日涕泣悲哀粢盛或不備廢食屢日若獲137)罪先世而無所容贈禮判
郭 昶 玄風人天性恭順誠孝彌篤鄕隣稱歎
崔元福 敎官應漢孫孝友至極鄕隣稱之
郭榮邦 縣監得亨孫早喪父母恨未服喪遂廬于墓終老死于墓下
尹 琇 南原人號永慕齋忠簡公璜十一世孫參奉殷柱六世孫親喪廬墓三年恨早失恃追喪屢入道啓
朴思默 咸陽人收心齋薰曾孫奉養偏母至誠居喪盡禮友於兄弟
朴思益 思默弟執喪以禮居廬墓下鄕人薦官官遺食物固辭不受
郭希謙 得亨玄孫遭父喪哀毁竟至滅性
蔡夢華 平康人生員元祥孫丁憂哀毁踰節葬祭以禮自儒會所報官
尹賓擧 南原人忠簡公璜十代孫都承旨禮生九代孫參奉殷柱五代孫母病斷指弟有重病傾家財求藥又父病破指以延三日屢八鄕薦道啓
李世馨 全州人孝寧大君補后母病擣指以延一日遭喪克盡禮制人皆稱之
李繼貞 母病斷指回甦幾日一鄕論薦
梁 堜 奉養偏母友愛兄弟洞人言其孝友必稱其人
崔興立 母病氣絶遑遑中斷指注母口俄而得蘇
沈克賢 豊山人豊山君龜齡后親癠斷指延138)三日嘗糞驗症屢入鄕薦道啓
郭祿顯 玄風人事親至孝有鄕狀營邑繡題禮曹文蹟積成卷軸尙未褒旌
郭壽垕 玄風人誠孝非常拜廟省墓日日不避風雨
朴致龍 咸陽人收心齋六世孫父病斷指生事死葬一遵家禮
金鳴健 開城人誠孝卓異生事死祭一遵家禮受業於李萬流堂
柳應三 全州人父病斷指得穌
周慶八 慈疾斷指
趙永禧 父病斫指
朴必良 咸陽人收心齋薰后親喪居廬
宋廷富 察訪遇龍子父喪居廬歠粥三年
黃厚載 早有文學孝睦人皆稱善黃雲溪信龜獎許
郭天斗 十四丁外艱哀毁過度慈病血旨延數日
金柱八 父疾破旨
李觀輝 九歲遭艱食素母疾斫指
韓萬榮 母疾破旨
黃尙讚 母疾思雉日夜號泣適有雉飛入捕以供之
朴承慶 咸陽人慈疾嘗糞祭祀盡禮友愛同氣
沈翼遠 豊山人克賢孫親病嘗糞丁憂日日省墓屢入鄕薦道啓
晉相祿 南原人父疾139)斷指延140)三日累受官賞
晉昇祿 南原人孝友卓異受繡衣道賞
嚴承祚 寧越人以孝行道薦 贈監察
鄭英朝 東萊人父病思食蛤醢遠方求進得效
崔在昊 全州人孝行入道啓 贈左丞旨
李賢儀 全州人都正泰榮子母病嘗糞試藥丁憂遵禮入鄕薦道啓特除 陵參奉
金瀁根 金海人逸持平永學子父病嘗糞斷指周窮恤貧務在好施行善爲主多不忘碑
黃廷敏 昌原人父喪居廬奉奠遵禮屢入鄕薦報營
李建鎬 全州人吏判文正公承吉后號焦史中司馬自完僑上東杏亭孝事兩親傾財周窮洞人感其高義而立碑其子進士廷漢亦以孝聞
李世漢 全州人文正公承吉後官惠陵參奉自全州寓杏亭甫六歲省定不以疾廢及長養志侍湯嘗試丁艱居廬世皆欽嘆而道儒薦本郡巡營達於掌禮院得卓異之題其子進士元相亦稱以孝
尹秉喆 南原人忠簡公璜後天性仁孝事父母至誠友愛敦睦年幼與弟秉璣供孝如一而且晝耕夜讀以成儒者之業
廉祐鎭 坡州人梅軒悌臣後友兄弟睦宗族鄕隣稱譽
任永煥 父病斷指有洞報鄕狀其弟興煥又爲斷指
文 瓚 南平人誠孝異常有鄕道狀
文亮範 南平人母病危重血指快差受官賞
文東鉉 南平人天稟異凡141)孝於其親無非格誠友於兄弟眞視同胞明於事務扶植風化累受官賞
晉必承 南原人親病破指累受官賞
文台鉉 東鉉再從弟孝於父母友於兄弟屢受官賞
文漢曄 南平人晩侍慈親極勤養志突冷躬自㸑樵且其母耳聾口訥每多不便百般起敬供旨不乏
李起中 父病思食川魚因得大魚於小澗臨終斫指
金樂顯 慶州人 號睡雲其父年老未步未觀邊山爲恨模畵以進子星澈亦以善稱
崔 樂 自兒時每往完市貿饌養親冬猶獵魚供之
文宜鉉 南平人東鉉弟宦主事孝友彌篤奉養其親承順其志友於兄弟無物我之分家本至貧弟 兄叔侄四五十口同胞接濟且敎訓子姪有方皆譽之
丁學悅 羅州人父病142)搗指屢受官賞
朴容燮 咸陽人祖病母病143)斷指累受官賞
文在國 南平人父病144)斷指延命時日累受官賞
晉鋌曄 南原人誠孝異常受官賞
孫明周 密陽人事親孝事兄友敦族睦人皆稱歎
魯 氏 察訪趙平妻遭夫喪治喪祭祀至誠加服二年
黃 氏 仁孝女也恨其父母之早喪結項而死
全 氏 宋以徵妻盜入房中以劒打夫數日夫婦同死
朴召史 金朱日妻養舅姑至誠
奴仁鶴 上雲人裂指
崔明伊 上雲人父病斷指
私婢玉梅145) 江津人年二十喪夫其父母同生勸改嫁誓死守節
張 白 羔峙人母疾血指得甦
春 伊 羔峙人其夫流離餓死叩地號天得尸歸葬其墳至今哀寃之聲不絶
文召史 一道人十七爲新安吳瓚妾其夫死斷髮爲信矢死不變
李 姓 日九之韓大弘妻養姑盡誠以姑氣弱畏寒冬則抱睡
李召史 沙谷金自亨妻事姑極孝累受官賞
私婢愛金 高德峙人十七爲夫所棄父母欲改嫁誓死獨居
嚴自長 新平泉里人母疾破指回蘇受官賞
嚴 姓 自長小妹養父母至孝至於賣衣服進供病危日日嘗糞有面稟受官賞
命 吉 韓興必私奴其上典只有一歲男相繼而死極誠護養以致成立上典一門感心許贖其身而至於白首仰役
具召史 烏院人崔貴生妻喪夫養姑至孝趙候晉錫嘉其節轉報賜復
郭元逸 方洞人追父喪
李應標 三峯人善事親面報官
朴莫悉 雲巖人母疾破旨回穌
康得洪 里仁人父喪盡禮有面報
邊 氏 薛世光妻 以孝行鄕薦報營
私奴得伊146) 養母至孝自官賞賜
宋得明 母病斷指給復
金晉達 校生父病斷指延數朔
奴順福 九臯人母疾斫指
朴有三 里仁人事親誠孝
韓俊永 里仁人父母喪追喪
金時同 下東人母病思鯉冬寒得氷鯉供進
白石辰 母疾斷指
韓大休 上東人父喪追服
卞時童 下雲147)人父病斷指回蘇弟世童亦爲 破指有官賞
李世芳 父疾斫指
金九中 父病斷指
蔡 氏 母病裂指
李 姓 金子亨妻姑病乳養
柳 氏 應三女父疾斷指
郭 氏 金道益妻夫喪誓死家人救之
薛 氏 敏龜女八歲家失火哭告廟門奉主出避出嫁後火賊入家其夫被仆以身翼蔽而自被數創呻吟五朔官嘉其烈頻賜藥物鄕隣稱烈
朴召史 其夫疾劇斷指回甦
黃 姓 下新德女其夫死至誠求山其舅欲爲改節矢死
私婢溫介 孝子李智男母兵使安衛婢爲李君慶妾十九喪夫三年哀慟如初喪闋服後絶酒肉上典艶其色欲奪節斷髮示信上典感其節贖其母子
銀 生 韓昌益奴事上典一毫不欺嘗適市得七貫錢搜問錢主終不得散投市中人皆稱善
梁召史 烏院崔厚澈母與子婦金召史俱早喪夫相依資生終守其節給復
梁召史 金士龍妻早喪夫舅有改節之意終老守節
斗 江 私婢其夫重病盡心竭力善事其夫上典欲爲改嫁以死自守
卞塘金 九皐人事父母至孝
連 辰 父母病得生蛇救療
李敬煥 慶州人孝行特異報營道啓性潭門人
淳昌薛氏 宋鎭斗妻上東人養舅姑病夫受營邑賞
延安金氏 盧一致妻夫祭日死累入鄕薦
平山申氏 文景輔妻祖姑病斷指屢受官賞
朴斗應 本邑官奴父母病割股屢受官賞
鄭長得 孝養其母累受官賞
利川徐姓 文洪圭妻夫死同死入鄕薦報營
金仁植 父病148)斷指洞報
嚴宗燮妻頴川李姓 侍父長疾刲股快效
河洛玄妻趙氏 夫葬結項同死
吳文煥妻金姓 其夫爲人被殺卽地報讎
申鉉淑 平山人其父長疾求野蟾山鳩得差
許秀漢 里仁人年才十餘母病斷指
徐克克 來妻晉州河氏 事侍父至誠夫病斷指
鄭仁澈妻李姓 夫病裂指
魯柄九 江華人善事其母金海金氏母疾割股得差
此以上舊誌謄出以下三綱錄抄出
南陽洪氏 湖隱演后全州柳珏妻其夫病死潛入屍房飮藥下從家有一狗甚愛洪氏歿也亦自死埋於洪氏墓前名其義狗塚入繡啓今上朝旌閭
咸安趙氏 晉州周永妻侍父病嘗糞夫病祝天願代屬纊拜訣舅姑歸寢室以衣帶自絞死今上朝旌閭
礪山宋氏 貞烈公松禮後贈監察商山李宗三妻遭夫喪歛殯祭奠克盡禮制終祥之日自決149)矢下從家人急救而止孝養舅姑人稱孝烈今上朝旌閭
全州李氏 孝寧大君補后慶州金仁明妻年未及笄人稱淑德適夫家孝舅姑睦宗族夫病割股和藥得甦及喪因爲下從今上朝旌閭子啓龍以孝旌閭
興德張氏 通政玄風郭海妻丁酉避亂山谷賊兵猝至殱一婢子張氏翼蔽其老舅與夫至死難救拔佩刀自處賊徒駭㪚舅與夫得免今上朝旌閭
金海金氏 平山申在凞妻孝事舅姑敬奉君子夫死以舅姑在堂未忍下從奉養倍於他日姑病斷指
南原尹氏 全州李文儀妻參判泰一妹早喪夫孝奉其姑姑病血指得蘇又病長瘧割股得效
金海金氏 全州李興秀妻早喪夫姑以風症手足不仁塊然若土偶爲其姑未忍下從侍側癢乎爪其背寒乎被其衣溲糞起卧莫不周旋如是十有六年
玄風郭氏 鰲巖后南原梁在奎妻 孝舅姑敬君子姑年老病亟氣力衰盡不能食食郭氏 時時乳養舅病割股
全州柳氏 密陽朴源燮妻姑癠每夜祝天願代又斷指甦數日及喪哀毁逾節語及舅姑淚先言
公州李氏 松隱明誠後羅州林炳禧妻其舅有狂邪症藥皆無效李氏一日承其母訃以舅病未得奔哭懇之當日往還舅始許之且其稚子夭逝慮其舅病添亟諱不言
冝人金海金氏 宣務郞全州李世漢妻嫁時家貧舅姑膳服親自盡誠姑疾血指祝天願代得差且內助夫德道儒呈郡營掌禮院得卓異之題
長水黃氏 厖村喜后淸州韓光錫妻舅疾嘗糞設壇祈命其舅尿便躬自拭除以至復常疾餘思魚號泣川邊一鰲躍出取以供進
道康金氏 忠敏公懷錬后逸侍平金海金永學妻丞旨瀁根母姑疾嘗糞試藥至誠侍湯性又好施見人飢寒授衣推食每人悅之以積善頌德稱活佛
交河盧氏 恭肅公閈后通政全州李允新妻姑病三年祝天乞齡姑謂盧氏曰吾有獨子汝若生男吾病卽差後果生男病亦快差
晉州姜氏 李炳鉉妻早喪夫養舅姑至誠其舅鰥居三十餘年承順其志且疾亟裂指注血以延二月世皆稱孝婦
順興安氏 大司諫克孝孫女尹行燮妻其夫病劇刲股有效其後寡居二十餘年謹守家道敎子有方
豊川盧氏 豊山沈基弘妻夫瘡夜禱天晝調藥竟不幸回念其夫遺托隱忍苟延撫養孤兒年十歲遘病夭折盧氏潛往其夫塚傍自結下從
全州李氏 孝寧大君補后咸陽朴必斗妻夫病斷指復斫五指延數日及終七日絶粒因老姑泣諭稚兒在乳不忍下從奉育終身
咸陽吳氏 咸陽朴翔洙妻夫病祝天願代及喪哀毁逾節逐日哭墓有虎來護
淸州韓氏 咸陽朴民憲妻其夫病革三次斷指及歿哀瘠踰制
淸州韓氏 進士慶州金敎誠妻其夫遠行逢賊遇害韓氏聞而昏仆有頃回甦曰昏迷中進士來慰曰腹有孕愼勿傷命及期生男定乳母謂娣妹曰旣有遺孤死無餘恨因絶粒積十許日而下從
密陽崔氏 慶州金星運妻夫病祝天願代夫死因以絶食舅姑諭泣未遂姑病斷指丁憂抱屍痛哭就死
竹山安氏 密陽朴大根妻孝舅姑夫疾斫指及喪下從
信川康氏 全州李海直妻夫疾斷指及革遺言曰我死善事老母善育幼稚以奉先祀康氏不忍下從
高靈李氏 洗馬咸安趙平妻壬亂洗馬與咸安倅幷力守城及陷負兩親携夫人至鼎巖津無舟追兵漸近李氏飮泣趣度曰此津雖濶以君子之勇可以超矣願急渡以免吾當死李氏卽投江死招魂葬
光山鄭氏 牧使渫六世孫南原尹東昇妻出嫁未幾舅姑以染疾委痛中其夫病死諱其喪變恐舅姑添病送終凡節一遵家禮力護舅姑之癠舅姑以終天命則鄭氏及夫亡日從容就義有遺蹟儒狀
原州元氏 南陽洪載五妻成婚未幾其夫病死卽奔哭三年奉奠克盡及終祥之曉結項於靈座前
南原尹氏 進士行騏女贈嘉善李渢之妻夫病裂指延七日命孝養舅姑極盡誠敬甲辰蒙褒旌閭 其子璟宇承襲家庭亦以孝稱
貞夫人全義李氏 尹參判泰一妻容儀端淑能通織紝組紃家雖淸貧三時饌羞期於力辦供進而有魚肉之羞則家人與兒子之口不入矣衣服新製進之於舅姑前服過幾月後使家人服之其舅衣服常時新製也家人恒時餘件也如是過平生其舅敎官公每言曰吾子婦之孝世罕其儔舅疾斷指
淸州韓氏 襄節公確后慶州李圭華妻每汲水得魚供進舅姑夫病割股及喪五日絶粒三年泣血
慶州金氏 雞林君稛后慶州李鍾賢妻夫疾祝天嚼指及喪矢從舅姑年方七旬且有一歲乳子忍不死
順興安氏 玄風郭時徵妻夫歿卽欲下殉以舅姑在堂幼兒在懷未忍服闋往本家拜訣父母之墓還夫家絶粒而終瑞氣亘天
道康金氏 豊山沈基亨妻夫死卽欲下殉舅姑百端開喩晝宵持守及葬潛八深閨吞藥自歿
延安金氏 交河盧致勳妻夫病禱天血指及喪欲下殉以乳孤在懷未忍敎子成娶當其忌日從容就義
慶州金氏 旌閭孝子贈敎官致泰曾孫女江華魯東奎妻喪所天卽欲判命以老姑眼盲乳孤在懷未果及子成就當其亡日絶穀自終
咸陽朴氏 全州柳炳舜妻夫疾祝天斫指又雪中得魚及喪不梳歠粥行素
延安金氏 文靖公自知后商山李宗碩妻夫疾祝天祈山及喪絶穀矢心同死偏姑泣諭因以孝養
交河盧氏 恭肅公閈后商山李泰鉉妻夫病嘗糞祈天及喪欲下從卽投階下被家人救而未遂
玄風郭氏 都事淸州韓廷敎妻夫病嘗糞斷指及喪哀毁盡禮擇師敎子遂成家道
玄風郭氏 淸州韓圭烈妻夫歿矢心下從因老舅挽諭未忍啜粥不㧧孝養偏舅備盡誠敬
光山金氏 左相國光后靑海李東錫妻年二十三夫病祝天願代割肉煮進夫死絶粒夜夢君子來謂曰兒在復中愼勿傷體果生男舅病斷指快差其姑四肢不仁左右扶將十年如一
咸陽朴氏 淸州韓用朝妻夫病盆水祝天嘗糞斷指及喪哀毁盡禮事姑至孝
光州潘氏 吏判思濟后監役天安全完豊妻夫歿不梳不肉克盡禮制以終三年
淳昌薛氏 弘孺侯后平康蔡挺龍妻年八歲其家失火延龕室冒火抱主而出于歸火賊入家其夫危急以身翼蔽以活夫命邑宰嘉其烈饋藥物
金海金氏 節孝克一后利川徐有信妻夫死附身之物一從禮制終喪後絶粒飮藥夫塚竪石而合窆云
南陽洪氏 文正公彦慱后咸陽吳致壽妻夫病斫指及喪以奉奠無托未得下從率養子侄以奉先祀
彦陽金氏 侍中就礪公150)后贈參議商山李宗達妻奄哭其夫顧其孤無托忍痛支保不食珎味
信川康氏 無名齋伯珎後礪山宋鎭伯妻夫疾祝天願代斷指注血及喪以舅姑亻免喩忍痛盡禮
全州李氏 南原尹秉壎妻夫疾裂指及喪孝奉舅姑略無慽容舅病得魚供旨逾往逾篤
金海金氏 贈吏議永學女陜溪太亨豊妻 孝事舅姑夫病祝天斷指及喪不梳不洗養遺孤保門戶
安東權氏 商山李宗燁妻早喪夫率養成家
晉州河氏 文孝公演后金海金璟根妻所天病死葬後因絶粒季舅勸之食則强飮糜粥待出旋吐積十五日而死時年二十二
玄風郭氏 全昌錫妻夫病斫指刲股養堂姪以守節
慶州金氏 南原晉宇曄妻素以天出之姿出嫁明年其夫病死溘然回心自戒151)曰夫故無嗣又若身死年年祭日其誰奠焉痛哭喪殯極盡禮節且甲午東亂竊攘之徒奸脅之說縱嫗入152)耳直向夫墓拜哭乘暮歸家呑砒仆地而歿鄕隣感歎累有營邑儒狀
順興安氏 南原尹頥鉉妻早喪夫夫病斷指以延二日及喪誓其同歸親戚僅救生之修成家道
驪陽陳氏 南原尹周鉉妻十五成婚新行前喪夫而謹守其節修成家業人皆稱嘆有遺腹女
信川康氏 韓圭玄妻其姑病亟割指回甦三日
江華魯氏 全麟宅妻夫死晏如平時終祥日因下從
淑夫人天安全氏 都正淸州韓圭成妻事舅姑以孝事君子以禮都正嘗若染疾晝宵祝天願代穀水不入口幾滅性幾過危境而稍復神明亦感咸稱善行
道康金氏 全州李稚楨妻成婚四五年後其夫疾血指及沒以死自誓宗族萬端開喩不忍從逝以養遺腹成娶矣其子又早逝姑婦相依孰不痛歎率養其孫以彰其業
紆州黃氏 進士應鼎女主簿慶州李榮文妻其夫捐世後不見天日己丑禍禁郞 153)來到二子經緯以拜辭次入中門夫人拒不納曰吾以汝䒭従賢師友游也今至如此大失吾望汝䒭果若有罪吾甚痛恨從此不見吾無憾焉不見而去可也汝䒭果若無罪不久當相見亦不見而去可也禁郞聞之敬服曰焉有母善如彼而子有不善者乎
順興安氏 淸州韓東洙妻祖舅進士公以風症長在調聶饘粥之供日至五六次而不憚煩勞且口喎食不穩八而半流在噐夫人盡食不見累於人行步不仁負背而入內勤執婦道咸稱其 孝
慶州金氏 雞林君稛后淸州韓良洙妻成婚未朞其夫以眼疾委苦延至三年左右就養克勤其誠日煎藥餌少無怠倦及歿哀痛滅性卽欲下從而因其舅開喩不梳不盥守節以終
寧川李氏 嚴鍾勳妻其夫早歿以死自誓舅姑寬喩不忍下從其舅之瘧疾百藥無效刲股得瘳皆欽嘆
南原梁氏 咸陽朴容允妻年十六成婚未及于歸遽當其夫之喪自親家聞訃以來喪葬如禮魚肉一不入口自三喪至今二十年當其夫祭日恐傷舅姑之心初不哭泣以其侄林洙繼后守節爲二十年而事親從夫無過於此 朴通政陽直長子婦
慶州金氏 進士敬厚女淸州韓圭弼妻 三次長疾三次裂指病能快去世皆稱孝烈婦
玄風郭氏 通政全錫漢妻孝事舅姑其舅年當八耊若風病動靜難便而溲糞之棄身以自任朝夕飯匙身以自代沐浴巾梳恒供不離隣里感歎
安東權氏 全致順妻早寡無育不忍下從孝養舅姑克力産業祭土石物以奉累世香火
南平文氏 徐相台妻其夫病危誠力救藥割指以延其命其感天誠亦哿知矣
金海金氏 安東權秉鎬妻其侍父鰥居老來長在枕褥至誠奉養病亟思鯉時冬寒一鯉躍出供進
全州李氏 玉川趙在戌妻其夫病甚沐浴祝天願代侍殯三年毁瘠骨立孝養舅姑備供甘旨勤儉治産
密陽朴氏 全璋宅妻夫疾每夜祝天壽盡時斷指回甦三日無不稱歎
晉州河氏 徐克來妻其夫病浸血指幾日延命因早逝欲下從以死自誓回心更諒以從三年喪守節
安東權氏 東萊鄭立朝妻年十九成婚旋遭崩城哀毁骨立無一血屬而固守貞節終老收養其前室子使樹家門子宙龜亦仁孝如有不和之色百般起敬怡愉執諫終至感悅人無不聳歎
全州李氏 朴必斗妻孝寧大君后十六歲嫁朴門十七歲喪夫其夫病危破五指幾日得生奄終天年卽入尸房欲爲從逝亦被傍人所禁不忍七日絶粒六旬老姑寬諭曰前室稚子何以收養聽姑訓守節
彦陽金氏 宋樂燾妻其舅病痢斷指以延命
全州崔氏 宋顯玉妻夫病斷指養一遺腹守家道
順興安氏 南原尹秉燦妻其夫長病殘弱無致身之方躬自代之晝宵出入飮食居處一任其室耳
靑松沈氏 郭守懿妻孝於舅姑極盡甘旨之供其夫早喪以養遺腹謹修家道人稱孝烈
淸州韓氏 全錫年妻成婚未朞其夫病死哀痛滅性以誓下逝其姑寬喩不忍成節孝執婦道
全州李氏 孝子崔光久宗婦其夫早逝誓欲同歸其舅姑寬喩未得從歸大祥翼日卽其寢房整其新婚時衣服雍容就死
文化柳氏 南原尹東鉉妻 其夫累月沈病至危境嘗糞試藥割肉救病快去世皆稱烈婦
仁同張氏 南原尹行權妻 早喪其夫一無倚托謹守其節艱食偸生世皆憐之
南原尹氏 朴必昇妻 其夫病劇至誠用藥且裂指得效丁憂謹守禮則
101) 중국 송나라 때의 서원으로 주희(朱熹)가 남강지군사(南康知郡事)로 재직 중에 학규(學規)를 만들 어 강학(講學)한 곳이다. 102) 소사(召史)는 ‘조이’라고 하며, 양민(良民)의 아내를 일컫는다. [258] 103) 집집마다 부과되는 부세(賦稅:전세)와 요역(徭役).
109) ‘卽’자를 역자가 ‘郞’으로 바로잡았다. 110) ‘際’자를 역자가 ‘除’자로 바로잡았다. 111) ‘洞’자를 역자가 ‘門’으로 바로잡았다. 112) ‘設’자를 역자가 ‘說’자로 바로잡았다. 113) ‘卽’자를 역자가 ‘郞’자로 바로잡았다. 114) ‘卽’자를 역자가 ‘郞’자로 바로잡았다. 115) ‘㮚’자를 역자가 ‘乘’으로 바로잡았다. 116) ‘圍’자를 역자가 ‘闈’로 바로잡았다. 會闈는 文科의 2차 시험인 會試를 말한다. 117) ‘圍’자를 역자가 ‘闈’자로 바로잡았다. 118) ‘際’자를 역자가 ‘除’자로 바로잡았다. 119) ‘圍’자를 역자가 ‘闈’자로 바로잡았다. 120) ‘陪’자를 역자가 ‘部자로 바로잡았다. 121) ‘連’자를 역자가 ‘延’으로 바로잡았다. 122) ‘羲’자를 역자가 ‘義’자로 바로잡았다. 123) ‘圍’자를 역자가 ‘闈’자로 바로잡았다. 124) ‘圍’자를 역자가 ‘闈’자로 바로잡았다. 125) ‘餘’자를 역자가 ‘如’자로 바로잡았다. 126) ‘問’자를 역자가 ‘門’자로 바로잡았다. 127) ‘若’자를 역자가 ‘苦’자로 바로잡았다. 128) ‘圍’자를 역자가 ‘闈’자로 바로잡았다. 129) ‘圍’자를 역자가 ‘闈’자로 바로잡았다. 130) ‘慮’자를 역자가 ‘廬’자로 바로잡았다. 131) ‘伐’자를 역자가 ‘代’자로 바로잡았다. 132) ‘憵’자를 역자가 ‘僻’자로 바로잡았다. 133) ‘龍川’자를 역자가 ‘南原’자로 바로잡았다. 134) ‘錫之’자를 역자가 ‘錫’자로 바로잡았다. 135) ‘樞’자를 역자가 ‘摳’자로 바로잡았다. 136) ‘救’자를 역자가 ‘求’자로 바로잡았다. 137) ‘穫’자를 역자가 ‘獲’자로 바로잡았다. 138) ‘連’자를 역자가 ‘延’자로 바로잡았다. 139) ‘喪’자를 역자가 ‘疾’자로 바로잡았다. 140) ‘連’자를 역자가 ‘延’자로 바로잡았다. 141) ‘丸’자를 역자가 ‘凡’자로 바로잡았다. 142) ‘喪’자를 역자가 ‘病’자로 바로잡았다. 143) ‘喪’자를 역자가 ‘病’자로 바로잡았다. 144) ‘喪’자를 역자가 ‘病’자로 바로잡았다. 145) ‘玉梅私婢’를 역자가 ‘私婢玉梅’로 바로잡았다. 146) ‘得伊私奴’를 역자가 ‘私奴得伊’로 바로잡았다. 147) ‘云’자를 역자가 ‘雲’자로 바로잡았다. 148) ‘喪’자를 역자가 ‘病’으로 바로잡았다. 149) ‘結’자를 역자가 ‘決’자로 바로잡았다. 150) ‘山’자를 역자가 ‘公’으로 바로잡았다. 151) ‘戎’자를 역자가 ‘戒’로 바로잡았다. 152) ‘八’자를 역자가 ‘入’으로 바로잡았다. 153) ‘卽’자를 역자가 ‘郞’으로 바로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