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誌)라는 것은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여지도(輿地圖)는 다만 한 고을(邑)만을 한결같이 중요하게 여겨 기록하지 않고, 나라 안[國內]을 한데 모아 모든 지방을 총괄(總括)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산천(山川)과 인간과 사물(事物)의 성쇠(盛衰)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 고장 임실은 완산(完山)과 남원(南原) 사이에 끼어 있어서, 산천의 뛰어난 경치와 좋은 풍토(風土)가 낸 훌륭한 인물들이 아주 많았는데, 쉽게 없어지고 전하 여지지 않으니 어찌 그것이 우리들 후생(後生)들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현감(縣監) 신계징(申啓澄)이 처음으로 훼손되어 완전하지 못한 운수지(雲水誌) 에 발문(跋文)을 쓰고 기록하여 이것 만으로도 족히 전체를 알 수 있게 하였다. 나 또한 개연(慨然)히 여기에 뜻을 둔 지 이미 여러 해인데, 대감(大監) 윤태일(尹泰一)은 본래 문장에 능하고, 재주와 학문을 간직하여 옛날과 오늘의 것을 널리 배우고 익히었으나, 애석하게도 그의 선(善)한 행실들이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시골 유생들과 더불어 깊이 논의하고 함께 도모하여 여러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들의 실제 행적(行蹟)을 두루 채집(採集)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판목(板木)에 새겨 널리 알리고,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는 것만 못한 까닭으로, 문장을 수정(修訂)하고 대조하여 바로잡아서, 한데 모아 편집하여 이미 간행(刊行)을 시 작하였으니, 그 선인(善人)・군자(君子)들이 남긴 성덕(盛德)을 이어받게 됨에 대 하여 흠모(欽慕)와 감탄을 저절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문장이 서툴고 졸렬한 것을 잊고, 책의 마지막에 간략하게 펼쳐서 후생(後生)들에게 징빙(徵憑)하는 데에 지극히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하였다.
고종(高宗) 41년 갑진년(1904) 12월 하순 풍산인(豊山人) 재랑(齋郞) 심진표(沈鎭杓) 삼가 씀
운수지(雲水誌)는 우리 고을(임실)의 지지(地誌)이다. 내가 일찍이 현감(縣監) 신계징(申啓澄)이 수찬(修撰)한 운수지를 살펴보니, 한강(寒岡) 정구(鄭逑 : 1543 ~1620) 선생이 함안(咸安)군수로 있을 때에 찬술(撰述)한 격식(格式)과 구조(構造)에 의거하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는 이미 300년이나 되었다. 그 사이 인간과 사물에 성쇠(盛衰)가 있고, 세도(世道)에 오르고 내림(昇降)이 있어서 효자(孝子)・열부(烈婦)와 충성스럽고 신실(忠信)한 사람들의 유익하고 본받을 만한 말 (嘉言)과 선(善)한 행실이 묘연(邈然)하여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대감 어른 윤태일(尹泰一)로 말하면, 명망(名望)의 높음이 태산북두(泰山北斗)로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는데, 옛것을 좋아하고 남의 선행(善行)을 드러내어 찬양하려는 마음으로 분연(奮然)히 일어나서, 이정의(李廷儀) 어 른과 함께 한마음으로 협의(協議)하였으니, 역시 몸가짐이 고상하고 고결(高潔) 한 선비였다. 이들 선인(善人)들의 남긴 발자국(遺蹟)과 과거와 관직, 명예와 절조 (節操)를 마을에서 두루 채집하여 거의 1년이 되어서야 책 1권을 집대성(集大成) 하였으니, 진실로 공경하고 사랑할 만하다. 여기서 선진(先進) 장로(長老)들의 본 받을 만한 온전한 성덕(盛德)을 볼 수 있으니, 우리 고을의 후진(後進)들이 어찌 이를 거울삼지 않을 것인가!
아! 강산(江山)의 지령(地靈)이 뛰어난 인재와 어진 인재들을 내어, 예절을 지키 고 사양하는 모든 절차(凡節)와 강상(綱常)과 윤리에 관한 풍교(風敎)가 이로 말 미암아 진작(振作)되고 밝히 드러나니, 이 고을에 사는 이들이 그 처음의 고인(古人)의 발자취를 잊지 못하는 것은, 실은 천리(天理)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며, 인정 (人情)이 능히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비록 학문에 어두우나 좋은 풍속 을 준행(遵行)하기를 즐거워하여, 어리석고 분수에 넘침을 헤아리지 않고 우선 감격한 바를 기록하여 후대의 군자(君子)들을 기다린다.
고종(高宗) 41년 갑자년(1904) 12월 하순 청주인(淸州人) 한광석(韓光錫) 삼가 씀
수지도유사(修誌都有司) 진사(進士) 이병의(李炳儀), 재유(齋儒) 심진헌(沈鎭憲), 윤태윤(尹泰允), 한규엽(韓圭燁)
수단(收單) 이정의(李廷儀)
교정(校正) 한학교(韓學敎), 이종택(李鍾澤), 이병화(李炳和), 이홍의(李鴻儀), 최봉길(崔鳳吉)
장의(掌議) 홍종화(洪鍾龢), 박홍근(朴泓根), 이기상(李起相)
감인(監印) 박혁근(朴爀根), 곽만규(郭萬奎), 정인구(鄭仁龜), 오석렴(吳錫濂)
감동(監董) 진사(進士) 양기형(梁基衡), 주사(主事)최증(崔增), 재유(齋儒) 이광의(李光儀), 송재호(宋在浩), 변규호(邊奎浩), 이귀현(李龜鉉), 조민제(趙民濟), 윤병희 (尹秉禧), 김성기(金聲基),
향장(鄕長) 송용호(宋瑢浩)
정서(正書) 윤용섭(尹鏞燮), 송창호(宋昌浩), 전상학(全相學),
운수지(雲水誌) 종(終)
을사(乙巳) 이춘호(李春浩) 인(印)
誌者識其實也國朝輿地圖非獨專主一邑言之統會國內兼摠諸方果是山川人物盛衰之攸關而夫吾鄕介在完南之間山川之勝覽人物之鍾靈歷歷有之易歸於泯沒無傳抑其非後生之羞澁乎申候啓澄氏跋首斷編一臠之嘗亦足以知全鼎之味余亦慨然有意己有年所而尹台泰一氏素抱文章才學慱習今古惜其善行之無聞與鄕儒爛議詢同曲採諸君子實蹟然猶不若剞劂之廣布壽傳故茟而削之校而正之聚集編錄業巳經始刊行欽嘆其善人君子遺芬之襲自然不能己也忘拙而略舒篇末以爲憑後萬一之助焉
上之四十一年甲辰臘月下浣豊山人齋郞沈鎭杓謹識
夫吾一邑之誌也竊嘗考於申候啓澄修誌依寒岡鄭先生宰咸安時所述規模而迄今三百載人物有盛衰世道有升降孝烈忠信嘉言善行邈然無聞今於尹台丈泰一氏望重山斗世皆景仰以好古彰善之心奮然而起與李丈廷儀同心恊議亦操身高潔之士也其善人遺蹟科宦名節曲採閭里殆及朞歲集成一冊誠可欽艷斯可見先丈老儀刑成德吾鄕後進盍監于茲噫江山之靈鍾毓人傑賢才而禮讓之節綱倫之風由是振明則居是鄕者不忘其初之古蹟實天理之自然人情之所不能己也余雖不文樂趨善俗不揆愚僣姑書所感以俟後之君子焉
上之四十一年甲辰十二月下澣淸州韓光錫 謹識
修誌都有司 進士 李炳儀 齋儒 沈鎭憲 尹泰允 韓圭燁 收單 李廷儀 校正 韓學敎 李鍾澤 李炳和 李鴻儀 崔鳳吉 掌議 洪鍾和 朴泓根 李起相 監印 朴爀根 郭萬奎 鄭寅龜 吳錫濂 監董 進士 梁基衡 主事 崔 增 齋儒 李光儀 宋在浩 邊奎浩李龜鉉 趙民濟 尹秉禧 金聲基 鄕長 宋瑢浩 正書 尹鏞燮 宋昌浩 全相學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