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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서라벌
◈ 민족국가
김동인의 역사소설. (1947년작) 주몽이 고구려 나라를 세울 때까지의 천하의 형세는 어떠하였는가.
민족국가
 
 
주몽이 고구려 나라를 세울 때까지의 천하의 형세는 어떠하였는가.
 
지나땅에는 지금 ‘지나’라 일컫는 종족이 벌써 삼천여 년 전부터 국가 형태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일천 년 뒤에, 동방에는 단군 왕검이 동방 종족을 모아서 ‘조선’이란 나라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지나인의 나라나 조선나라나 모두가 튼튼한 왕권(王權)을 가지고, 백성을 통제하고 다스린 바가 아니요, 덕으로써 자기 세력범위 안의 백성을 화하는 뿐이었다.
 
그런데 지나인의 영토 주변에는 여러가지의 오랑캐가 있어서, 부단히 지나를 침노하였다. 따라서 지나인은 자연히 전쟁이라는 수법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조선에는 단군의 세상이 그냥 계속될 동안, 지나에는, 몇 개의 왕조(王朝)가 생겼다가는 없어지고 생겼다가는 망하고 하여, 그때는 은(殷)이라는 왕조가 생겼다가 또한 주(周) 왕조에게 망하였다.
 
지나의 은(殷)의 왕족인 기자(자서여)라는 사람이, 어지러운 지나땅을 도망하여 조선땅 서편 끝 요(遼) 지방에 피난하여 왔다. 그러매 지나 땅에 새로 생긴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기자를 조선후(朝鮮侯)로 봉하였다.
 
태고적 인심 후한 시절이라 조선의 주인인 단군 후손은 서편 한 모롱이에 지나인 기자가 부하 오천여 명을 데리고 온 것을 그냥 방임해 두었다.
 
기자 일행은 처음 요서(遼西)땅으로 들어와서, 차차 살기 좋은 곳으로 이동했다. 전쟁을 모르고 남과의 시비를 싫어하는 단군 후손과, 단군 백성인 조선 사람은 차차 뒤로 쫓기고, 나라 이름 ‘조선’까지도 기자 후손에게 빼앗겼다.
 
이리하여 단군 백성은, 차차 압축되어 동쪽으로 쫓기고 남쪽으로 쫓기는 동안, 기자 후손들은 ‘조선’이라는 칭호를 자기네가 쓰고, 단군민족을 쫓으며 차차 자기네의 식민지를 넓혀, 조선반도로 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반도의 북부와 중부는 기자 후손에게 강탈당하고, 단군민족은 허리를 끊겨, 두 토막이 되었다.
 
그동안 지나는 전국(戰國)시대라 춘추(春秋)시대라, 숱한 파란을 지나서 진(秦) 나라에 생기면서야 온 지나땅을 한 덩어리로 한 임금의 아래 뭉치었다.
 
따로이 동쪽으로 갈려온 기자 후손은 순진한 백성(조선 토민)을 손 안에 넣고, 태평 무사히 본국의 풍파를 대안(對岸)의 불로 방관하며 지냈다.
 
지나에서는 진(秦) 나라도 몇 해 못 가서 망하고 한(漢)나라이 섰다. 그 한(漢) 왕조 때에 위만(衛滿)이라는 지나인이, 조선 땅에 와서, 기자 후손을 내쫓고 위만 자신이 왕이 되었다.
 
지나의 주(周) 왕조며 진(秦) 왕조는, 어느 하가에, 조선까지 참견할 겨를이 없었지만, 한(漢)이 서서 한동안 지나서, 좀 기초가 잡히자, 멀리 단군 옛터에도 용훼하고자, 또는 단군 백성의 세력 범위를 교란하고자 공작하였다.
 
반심(叛心) 있음직한 사람을 골라서, 혹은 예(濊)라, 맥(貊)이라, 옥저(沃沮)라, 지나의 분봉국(分封國)을 세우며, 기자 이후 내내 간섭을 못하였던 위(衛)씨의 나라는 없이하고, 그 땅에다 간섭을 시작했다. 낙랑(樂浪) 등 네 군(郡)을 두었다.
 
지나인에게 허리 끊겨 남쪽에 갈린 단군 백성은, 한(韓)이라 일컫고 있었는데, 위만에게 쫓긴 기자 후손이 이곳에 밀려와서 두 번째 단군 백성을 괴롭혔다. 즉 지나인 끼리끼리 다툰 것이었다. 이 한(韓) 땅의 일부인 마한(馬韓)에 위만에게 쫓긴 기자 후손이 뛰쳐와서, 스스로 마한왕이 되었다.
 
단군의 후손과 단군 백성의 대부분은, 지나인(기자 후손)에게 뜯기고 남은 겨우 수천 리의 땅에 ‘부여(扶餘)’라 일컬으며, 겨우 잔명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나, 아주 참담한 형태로서, 여러 작은 나라가 갈려 나가고, 또한 문화(文化)에 좀 덜 멱감은 종족(숙신, 읍루 등)도 있어서, 이러다가는 단군 백성이라는 것은 아주 없어지지나 않을까 의심될 지경이었다.
 
이런 때에, 단군 후손 고주몽이 단군나라 재건을 외치며 일어선 것이었다.
 

 
처음 단군 왕검이 나라를 세우실 때와 달라, 이때는, 종족과 종족의 대립 관계로, 민족 의식도 생기고, 민도도 발달되고, 학술과 온갖 기술도 꽤 높아진 때였다.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못한 시절이라, 글이 널리 민간에까지 퍼지지는 못하였지만, 상류사회에 이 나라 독자의 글이며, 한문도 간간 사용되는 형편이었고, 농구(農具)를 만들기 위하여 철광(鐵鑛)이 개발되고, 금은보석을 몸에 장식하고, 비단을 짜 입고, 꽤 고등한 문화 생활을 경영하는 때였다.
 
더우기 또한 단군 백성보다 먼저 문화 세상에 들어선 지나인들이, 전국시대며 춘추시대 등의 제 나라의 어지러운 판국에 살기가 힘들어, 동방에는 낙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육속부절 동방으로 피난해서 오기 때문에, 그들이 지니고 온 문화 재산에 단군 백성도 적지 않게 배운 바 있어, 그들(지나인)의 문화를 참고하여 발전된, 불함(不咸) 문화의 꽃은, 어지러운 지나 판국보다 훨씬 더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고구려 나라는 이러한 판국에 이러한 때에 생겨난 것이다.
 
우수한 문화를 가진 우수한 민족이면서도, 무력(武力)적으로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차아 쇠미해 들어가는 현상을 개탄하는 충분한 자각과 포부를 가지고, 용감하게 동방 천지에 고함치며 일어섰다.
 
이 젊고 용감하고 현명한 임금을 사모하여, 백성은 나날이 모여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서울은 커다란 도시를 이루었다.
【역사소설】 서라벌
• 장도(壯途)
• 민족국가
• 비류국(沸流國) - 1
(2021.07.30. 10:00)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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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