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례성은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의 동남부 지역과 천안군 북면 일대를 가리키며 현존하는 위례산 성지(城址)는 입장과 북면에 길게 걸쳐있다. 성채(城砦)나 토성의 앞면이 입장과 직산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답사하기에도 북면쪽보다는 입장방면에서 오르는 편이 편리하여 일반적으로 입장위례성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현재의 입장면 일대는 예부터 직산현(稷山縣)에 속해 있던 영지(領地)로 옛 문헌에는 모두 직산위례성으로 기재되어 있다.
직산은 동국여지승람에도 ‘온조’의 ‘백제건국지’로 기록이 되었고 ‘삼국유사’에도 ‘하남위례성’은 직산이라고 못박아 실었다. 옛 직산의 영역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성환읍’의 전 지역과 ‘성거읍’의 전 지역 그리고 ‘입장면’과 ‘직산면’일대다.
임진왜란의 직산전투에 소사전투(素沙戰鬪)의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의 소사(素沙)라는 지명은 지금의 직산 관할을 넘어 선 경기도 평택의 일부다. 이것으로 보아 직산의 범위가 멀리는 안성천(安城川) 밖의 경기도의 일부까지로 볼 때 옛 직산현은 오늘날의 그 읍, 그 면과 경기도 지방의 일부까지를 포함하였다.
직산이라는 지방은 고려 초에 명명되었던 것이며 삼국이 힘겨루기를 하던 정립의 시기에는 사산성(蛇山城)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 : 413~491)이 당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취하고 한강 이남을 차지하면서 사산이라고 하였다.
사산 또는 사천(蛇川)을 순수 우리말로 하면 ‘뱀산’, ‘뱀내’라고 부른다. 뱀산이란 천안군 성거읍 천흥리의 진산(鎭山)인 뱀산(현재 천안시 출신 전몰군경 위령탑이 세워졌음)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본다. 성거읍사무소에서 천흥리 부락을 향하는 도로의 오른편에 솟은 산으로 비록 낮으나 산의 근원은 성거산(570m)인지라 산 모습이 수려하고 오묘한 맛이 풍기는 산이다. 성거산의 한 갈래가 서북으로 뻗어 달리다가 뱀산 머리를 만들고 이곳에서 끝을 맺었다.
고려 초에 세워진 천흥사 대웅전의 뒷산이 된다. 뱀산 너머에는 대웅전이 불타 없어지고 5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촌로(村老)들의 말을 빌리면 먼 옛날부터 뱀산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장수왕은 사산지방(직산)을 공취하고 더욱 남하하여 백제와의 경계를 오늘날의 연기군 북쪽에 두었음을 이곳의 지명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직산을 사산이라 한 장수왕 이전에는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동국여지승람’의 ‘직산조’에 ‘본시(本是) 위례성’이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사산성’ 이전에는 ‘위례성’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城)이라고 함은 돌이나 기타의 물질로 책(柵)을 쌓아 올려 외적으로부터 방어와 보호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城)은 도시(都市)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시군읍면(市郡邑面)을 뜻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안성(安城), 개성(開城), 홍성(洪城)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위례성을 하나의 시읍으로 본다면 이는 ‘직산현’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현재 위례산의 정상 부분에 쌓여 있는 성은 바로 이 위례성이 가지고 있었던 산성(山城)으로 생각된다.
직산현의 진산(鎭山)은 성산(城山)이다. 오늘날의 구직산 지방과 ‘당고개’와 성산을 돌아 쌓여진 성을 사성(蛇城)이라고 하며 이것은 옛날 위례부락의 외곽을 둘러쌓았던 읍성(邑城)이다. 전쟁이나 내란으로 인하여 읍성이 위험에 닥치면 산성으로 그 주민(住民)을 옮겨 백성을 보호하고 방어의 수단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쟁의 방법이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임진왜란의 삼대첩지인 진주(晋州)는 하나의 읍성이 있고 진주산성(晋州山城)은 따로 있다. 더 구체적인 예는 한성(漢城)의 산성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이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이런 논로 볼 때 현존하는 ‘위례산성’은 ‘위례성’에 속해있던 산성이며 축성연대도 위례성과 같거나 조금 늦은 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이것을 복원하여 보면 ‘위례성’은 오늘날의 구직산 천안군의 북부지방이고 그 곳을 둘러쌓았던 성이 읍성인 위례읍성이다. 장수왕이 공취하고 ‘사산성’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 위례읍성의 주민을 보호하고 외적으로부터 방어의 목적으로 쌓았던 것이 위례산성이다. 그것이 오랫동안 위례성이 없어지고 산성만이 남아서 산성이란 낱말은 떨어져 없어지고 옛 읍성인 위례성이라 불리운다.
역사지리학자 우락기씨는 그 저서 ‘역사지리’의 한국역사 지리편에 위례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위례성’이 한수(漢水)남방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 위치는 명백하지 않다.
(2) 온조왕 13년의 기록에 한수 남쪽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위례성이 여기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3) 그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아무런 역사적 사료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그는 덧붙여서 말하기를 ‘직산위례성’설을 구설이라하고 경기도 ‘광주’지방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작은 반론(反論)을 제기하면서 ‘직산위례성’설을 고집하여 본다.(물론 다음의 문헌연구편에 구체적으로 다시 밝힌다)
우락기(禹樂基)의 주장인 (1)은 위례성이 한수(漢水) 이남이라고 하면서 그곳이 어딘지 분명치 않다고 하였다. 그 분명치 않다는 말은 조사나 고증이 부족하였다는 말과 같으며 그것으로 매듭짓고 더 이상 조사 발굴을 해보겠다는 말은 없었다. 필자는 그가 분명치 않다고 말한 그곳이 직산 위례성이라고 본다.
‘위례’라는 말의 뜻은 즉 어원을 여러 가지로 풀이하고 있으나 풀이할 필요 없이 위례라는 지명 그대로 쓰이고 있는 곳이 직산지방이다. 한반도 내의 어느 곳에서도 위례라는 지명을 가진 곳은 이곳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본다. 산 이름이 위례산이고 성의 이름이 위례성이다. 욱리(郁李)의 변성이니 어라(於羅)의 변음이 위례 이전의 말이라고들 하나 삼국사기 편찬 이전에도 위례는 오늘날도 위례다. 울타리니 위리니 책(柵)이니 하는 말도 있으나 한자가 전래된 이후에 약간의 변음은 있었겠지만 아득한 옛날부터 위례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한자가 전래된 후에 위례인지 한자 전래 이전부터 위례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한자전래 이전의 위례가 그대로 한자로 표기만 한 것으로 본다.
(2) 온조왕 13년에 천도한 것으로 보아 위례성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온조왕 13년은 BC 5년으로 건국한지 13년만에 도읍을 옮기는 일이며 위례성을 경기도 광주로 비정하였는데 한산(漢山)으로 천도하였다면 광주도 한산인지라 광주에서 광주로 옮겼다는 말이다. 더구나 온조왕은 BC 5년의 천도를 그 전해인 BC 6년에 마한(馬韓)왕에게 백제의 강역을 통고하면서까지 같은 지역으로 옮겨갔을까 한다. 예를 들면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 이성산선에서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까지 옮기는 일인데....
BC 6년 온조왕이 마한왕에게 통고한 내용을 삼국사기에서 옮겨보면
遺使馬韓(유사마한) 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告遷都(고천도) 도읍지를 옮길 것을 알리고 遂劃定疆域(수획정강역) 강역을 정했는데 北至狽河(북지패하) 북쪽은 패하(예성강)에 이르고 南限熊川(남한웅천) 남쪽은 웅천(안성천)에 한정하고 西窮大海(서궁대해) 서쪽은 대해에 접했으며 東極走壤(동극주양) 동쪽은 주양(춘천)에 이르렀다.
위와 같이 넓은 국토를 소유하였으면서 천도의 사실을 마한왕에게 통고한 것은 직산으로부터 한산으로의 천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위례성을 광주로 본다면 동일지역 내의궁성을 옮기는 작업인데 굳이 사신까지 파견하면서 경계를 확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구월(九月) 입성궐(入城闕)이라는 대목을 보면 구월에 이미 도성을 세운 것으로 보아 그로부터 천도까지 5개월의 긴 기간이 필요하였다면 이도 분명히 직산으로부터 한산으로의 천도라고 보아야겠다.
(3) 위례성의 위치를 구명할 아무런 역사적 자료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아주 잘못된 지적이다. BC 18년부터 BC 5년까지 불과 13년 그것도 만주에서 직산까지의 남천과정을 몇 년 빼면 약 10년간의 도읍지에서 지표상의 자료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다. 직산을 둘러쌓은 토성이 사산성이다. 사산성의 명칭 이전에는 위례성이다. 또 위례산성의 성채가 사료다. 분명히 백제 초기의 석성이며 토성과 더불어 길게 뻗어 있는 둘레는 엄청나게 크고 길다. 적석총의 군락지며 사각으로 된 층단식 돌무덤 등이 소중한 자료이고 성문석이 사료이다. (자료에 대하여는 다음 유적 ․ 유물 편에 다시 논술하겠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