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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 23】광해군에 여진 진영 상세 보고 후 후금과 우호관계 고언 및 침입 대비, 국방 경계 강화 건의
또 한 명의 충무공, 정충신
2019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국립 제주대학교에서 개최된 제10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2분과 ‘고려의 해양문화’에 참가하여 〈운주사(運舟寺) 석불·석탑 군에 숨겨진 역사〉를 발표하였다. 6일 답사 날에는 제주 화북 환해장성를 구경하고 연북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열하일기 23】광해군에 여진 진영 상세 보고 후 후금과 우호관계 고언 및 침입 대비, 국방 경계 강화 건의
또 한 명의 충무공, 정충신
 
 
2019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국립 제주대학교에서 개최된 제10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2분과 ‘고려의 해양문화’에 참가하여 〈운주사(運舟寺) 석불·석탑 군에 숨겨진 역사〉를 발표하였다. 6일 답사 날에는 제주 화북 환해장성를 구경하고 연북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제주도에 유배 온 200여 명의 선비와 동계 정온, 추사 김정희, 우암 송시열, 광해군,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 노씨부인이 생각났다. 그들은 연북정에 올라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 제10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사진:궁인창)
 
 
제주도를 다녀오고 나서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신문에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이 개관 35주년을 맞아 2019년 8월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제주에 유배된 광해군을 재조명하는 기획전 ‘광해(光海), 제주에 유배오다’를 개최한다고 기사를 보았다. 며칠 망설이다가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10월 30일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아침이라 특별하게 들릴 곳도 마땅치 않아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자연사박물관으로 갔다. 특별관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데 입장이 되지 않아 물어보니 별관은 본관과 다르게 늦게 개관한다고 알려주어 본관 전시회를 먼저 보았다. 별관에 준비된 특별전시회는 광해군의 제주 유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고문서, 의복, 일러스트, 사진 자료 등을 상세하게 보여 주었다.
 
 
▲ 〈光海 제주에 유배오다〉 특별전(사진:궁인창)
 
 
특별전시회에서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과 광해우(光海雨)를 처음 알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광해군은 제주읍 서성(西城) 안에 위리안치하여 4년을 살다 예순일곱에 생을 마감했는데, 제주에서는 광해군이 죽은 시기를 전후해 내리는 비를 ‘광해우’로 불렀다.
 
 
▲ 〈光海 제주에 유배오다〉 특별전(사진:궁인창)
 
 
“칠월 초하루 날이여 칠월 초하루 날이여 대왕 붕어하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 오람서라(가물다가도 비가 오고 있더라)” 광해군은 귀양살이 유배를 19년이나 하였다.
 
1621년 광해군은 만포첨사 정충신을 불러 후금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정충신은 후금을 살피고 세밀한 보고서를 왕에게 제출하며 후금과 우호적으로 잘 지내야 한다고 보고하고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서 항상 국방 경계 강화를 건의했다.
 
 
▲ 팔기군 재현(사진:바이두백과)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621년 9월 10일 기사를 보면 “만포 첨사 정충신이 여진의 진영에 다녀와 보고하다.”라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
 
“심하(深河)에서 패전한 이후로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올 것이라 늘 걱정하면서도 능히 스스로 강하게 하는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오직 당장 오랑캐의 군사가 출동하는 것을 늦추도록 하기에 급급하여 충신을 오랑캐의 진영에 보내면서도 모장(毛將/모문룡)이 알까 두려워 몰래 왕래하도록 하였다. (중략) 병사는 8부(部)가 있는데, 25초(哨)가 1부이며, 4백 인이 1초입니다. 1초 중에는 별초(別抄)가 1백 인, 장갑(長甲)이 1백 인, 단갑(短甲)이 1백 인, 양중갑(兩重甲)이 1백 인입니다. 별초는 수은갑(水銀甲)을 입었기 때문에 수많은 군사 중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알아보기 쉬웠으며, 행군할 때에는 뒤에 있고 진(陣)에 머물 때에는 안에 있는데 오직 승부를 결판내는 데에만 쓰입니다. 양중갑은 성을 공격하고 호(壕)를 메우는 데에 쓰입니다. 1부의 군사 수효는 1만 2천 명이니, 8부면 대략 9만 6천 기(騎)입니다.
 
노추가 직접 거느리는 2부 중, 1부는 아두가 맡고 있는데 누런 깃발에 그림이 없으며, 1부는 대사(大舍)가 맡고 있는데 누런 깃발에 황룡을 그렸습니다. 귀영개가 거느리는 2부도 그중 1부는 보을지사(甫乙之舍)가 맡고 있는데 붉은 깃발에 그림이 없으며, 1부는 탕고대(湯古台)가 맡고 있는데 붉은 깃발에 청룡을 그렸습니다. 홍태주가 거느리는 1부는 동구어부(洞口魚夫: 동오 어푸(donggo efu), 즉 호호리(hohori), 후금 5대 공신 중 1인)가 맡고 있는데 흰 깃발에 그림이 없고, 망가퇴가 거느리는 1부는 모한나리(毛漢那里)가 맡고 있는데 푸른 깃발에 그림이 없었습니다. 추장의 조카 아민태주(阿民太主: 아민(阿敏)으로 만주어는 아민(amin), 슈르하치의 차남)가 거느리는 1부는 그의 동생 자송합(者送哈: 슈르하치의 5남이고, 아민의 이복동생인 자이상워.jaisanggv)이 맡고 있는데 푸른 깃발에 흑룡을 그렸다.
 
추장의 손자 두두아고(斗斗阿古: 두도(杜度), 만주어는 두두(Dudu), 누르하치의 장남 추옝,cuyeng, 褚英)가 한 편을 이끌고 양공에는 장수를 두며 백기는 황룡을 그렸다. 통사(統司)와 초대(哨隊)에도 각기 깃발이 있는데, 크고 작은 구분이 있으며, 군졸에게는 투구 외에 작은 깃발을 꽂아 구분토록 하였다. 부대마다 각기 황갑 2통(統), 청갑 2통, 홍갑 2통, 백갑 2통이 있으며, 싸움할 때 부대마다 압대(押隊) 1인이 있어 붉은 화살을 갖고 있다가 떠들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자가 있으면 곧 붉은 화살로 쏩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뒤 조사해 등에 붉은 흔적이 있는 자는 경중을 막론하고 베어 버립니다. 싸움에 이기면 재물을 거둬들여 여러 부대에 두루 나눠주고, 공적이 많은 자에게는 1분을 더 줍니다.
 
【원문】
 
其兵有八部, 二十五哨爲一部, 四百人爲一哨。 一哨之中, 別抄百、長甲百、短甲百、兩重甲百。 別抄者, 着水銀甲, 萬軍之中, 表表易認, 行則在後, 陣則居內, 專用於決勝。 兩重甲, 用於攻城、塡壕。 一部兵凡一萬二千人, 八部大約九萬六千騎也。 老酋自領二部, 一部阿斗嘗將之, 黃旗無劃; 一部大舍將之, 黃旗畫黃龍。 貴盈哥領二部, 一部甫乙之舍將之, 赤旗無劃; 一部湯古台將之, 赤旗畫靑龍。 洪太主領一部, 洞口魚夫將之, 白旗無畫; 亡可退領一部, 毛漢那里將之, 靑旗無畫。 酋姪阿民太主領一部, 其弟者送哈將之, 靑旗畫黑龍; 酋孫斗斗阿古領一部, 羊古有將之, 白旗畫黃龍。 統司、哨隊, 亦各有旗, 而有大小之分, 軍卒則盔上, 有小旗以爲認。 每部各有黃甲二統、靑甲二統、紅甲二統、白甲二統, 臨戰則每隊有押隊一人佩朱箭, 如有喧呼亂次, 獨進獨退者, 卽以朱箭射之。 戰畢査驗, 背有朱痕者, 不問輕重而斬之。 戰勝則收拾財畜, 遍分諸部, 功多者倍一分。
 
팔기군은 총 96,000여 명, 8부(궈사, gvsa)가 구성되며, 1부는 25초(12,000 명), 1초는 1니루(niru)로 400명이고, 1초에는 장갑군(기병) 100명, 단갑군(보병) 100명, 별초군은 수은갑으로 불리는 은색 갑옷을 입은 중무장 군인 100명, 양중갑은 중무장한 공성전문 부대원 100명으로 구성된다고 세밀하게 보고했다. 장갑군과 별초군은 기병부대로 4.5만~5만 명, 보병 2~3만 명, 공성부대 2~3만 명으로 구성되었다.
 
 
▲ 만주 팔기군 출정식 재현(사진:경기도박물관)
 
 
《만주실록》에는 1621년 당시 8대 패륵(버이러) 및 패자(貝子/beise버이서)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패자는 패륵보다는 낮고 대신(amba)보다는 높다.
 
 
1. 다이샨(daixan, 貴盈哥) → 누르하치의 2남
2. 아민(amin) → 슈르하치의 2남
3. 망월타이(mangvltai, 亡可退) → 누르하치의 5남
4. 홍 타이지(hong taiji) → 누르하치의 8남
5. 더거러이(degelei) → 누르하치의 10남
6. 지르가랑(jirgalang) → 슈르하치의 6남
7. 아지거(ajige) → 누르하치의 12남
8. 요토(yoto) → 다이샨의 장자
 
 
조선왕조실록에서 무신 ‘정충신’을 검색하면 239건의 기사가 등장한다. 정충신은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예장(禮葬)되었고 서거한 지, 49년이 지나 조선왕조 숙종 11년(1685)에 시호가 내려졌다. 숙종실록 16권, 숙종 11년 8월 11일 기해 1번째 기사를 인용한다.
 
【원문】
 
○ 己亥/以洪受漸爲正言, 申曄爲司諫, 李頣命爲副校理, 金壽恒爲領議政, 遞壽恒, 非上本意也, 故虛其位而還拜之。 賜故相鄭澈謚文淸, 故相李浣謚貞翼, 判書趙啓遠謚忠靖, 錦南君 鄭忠信謚忠武, 靑興君 李重老謚忠壯, 參判李愼儀謚文貞, 主簿宋時榮謚忠顯。
 
 
▲ 정충신 장군 유퓸(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충신 장군 유품(鄭忠信 將軍 遺品)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산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복식 유물 5점으로 1978년 6월 21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갑옷은 1630년 5월 가도에서 일어난 병란을 토벌할 때에 인조가 활과 화살, 검과 함께 하사한 것으로 그가 생전에 입었던 군복이다. 길이 116cm이며, 면 3겹을 2cm 간격으로 꼬아서 누빈 위에 황색 단을 입히고 그 위에 징을 박은 것으로 어깨 부분은 철로 만들었고 가슴 부분에만 가죽의 흔적이 남아있다.
 
 
▲ 인조가 하사한 갑옷(사진:충청남도)
 
 
서군사명기(西軍司命旗)는 정묘호란 때 사용한 부원수의 사명기로 길이 138cm, 너비 55.5cm 깃발이다. 향로는 좌우에 손잡이가 있으며, 향로 주위에 산과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다리는 굽다리가 3개이며, 반구형의 뚜껑 맨 위에는 뿔 달린 용의 장식이 달려 꼭지 역할을 하고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2024년 10월 25일 충남역사박물관에서 ‘또 한 명의 충무공, 정충신’ 특별전을 개최하여 금성정씨 문중에서 소장한 영정과 갑옷 등 유물 35점을 선보이며 그의 공적을 재조명했다. 또한 《진무공신, 충무공 정충신》 도록을 발간하였다.
 
 
▲ ‘또 한 명의 충무공, 정충신’특별전(사진;충남역사문화연구원)
 
 
‘충무’라는 시호는 국가와 임금에게 충성과 헌신을 상징하며, 백성에 대한 애정, 유교적 도덕성, 불굴의 의지를 지닌 무장에게 내려주는 가장 존귀한 시호로 특히 무(武)는 외적(外敵)을 물리치고 전란(戰亂)을 平定하며 나라를 安定시키는 무공(武功)을 포함하는 뜻이다.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서 여러 명의 충무공(忠武公)이 탄생했다.
 
-최필달(崔必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왕조를 건국한 개국 공신으로 문무를 겸비하여 해동부자(海東夫子)로 불리며 강릉 최씨 시조이다.
- 박병묵(朴炳默): 고려 평장사로서 국가의 안정에 기여했고 나주 박씨 시조이다.
- 지용수(池龍壽): 공민왕 때 외적의 침입을 방어한 명장이다.
- 조영무(趙英茂, 1338~1414): 조선 개국 공신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세종이 시호를 내림.
- 이 준(李 浚, 1441~1479): 조선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로 27세에 병조판서, 29세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세조 때 이시애 난을 토벌. 숙종 때 복권되고, 고종 때 시호 받음.
- 남 이(南 怡, 1441~1468): 개국 공신 남재의 손자로 세조 때 병조판서에 올라 이시애 난과 여진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350년이 지나 순조 때 복권되었다.
-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임진왜란 당시 명량대첩에서 큰 공을 세워 인조 때 충무공 시호 받음. 사후 200년이 지나 영조 때에 와서 영의정으로 추증됨.
- 이수일(李守一, 1554~1632): 임진왜란, 이괄의 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사후 좌의정으로 추증.
-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하여 숙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시호를 받았다.
- 정충신(鄭忠信, 1579~1636): 광해군 때 무신으로 활약했으며,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 구인후(具仁垕, 1578~1658): 정묘호란과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고 병자호란 당시 3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수호하였다.
- 김응하(金應河, 1580~1619): 광해군 때 만주 부차령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한 이후 3천 병사로 후금군과 전투하다 38세로 전사하였음. 그 공로가 막중하여 명나라 신종이 요동백에 봉하고, 조선에서도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무공 시호를 내림.
 
 
▲ 쓰촨 청두(成都)시 무후사(武侯祠)(사진:위키백과)
 
 
중국은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과 남송의 명장 악비(岳飛, 1103~1142)는 시호가 충무공이다. 촉의 2대 군주 유선(劉禪, 207~271)이 제갈량의 사후에 시호로 忠武, 무후(武侯)를 주었다. 무후는 충무후(忠武候)의 줄임말로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우허우(武侯)구에 장엄한 사당 무후사(武侯祠)가 있다. 악비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았다가 뒤에 忠武로 개정되었다가 1204년 왕으로 추존되어 王號는 악왕(鄂王)이 되었다.
 
랴오닝성 신민 시 벌판을 지나가면서 역사를 회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랜 기간 전쟁을 치러 군사력이 막강해진 대청(大淸)과 친교를 더 강화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은 너무 안이하게 한족 편에 서서 만주족과의 화친을 끝까지 반대하며 단교를 주장하다 전쟁에까지 이르렀다.
 
 
▲ 신민시 만주 벌판(사진:궁인창)
 
 
싸움터를 누빈 충무공 정충신의 고언(苦言)을 경청하고, 조선이 연례적으로 조공하는 세폐(歲幣)와 방물(方物)을 자율적으로 조정하며 명나라와의 교역이 단절되어 국가 경제가 마비된 후금의 사정을 감안(勘案)하여 조선 국경 호시(互市)를 더 늘리자고 제안을 하였으면 병자호란의 참혹한 환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사대부들은 청의 횡포에 대해 외교 단절만 고집하다 조선 백성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고, 천추(千秋)에 원망으로 남을 역사를 만들었다. 버스는 서쪽 북진 시로 향하고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있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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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1. 12:41)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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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