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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황산대첩 진군로
◈ 3. 민초(民草)들의 충혼(忠魂)이 고려사직 지탱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침략은 왕조의 흥망을 가르는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 중 아지발도의 대거침략은 사직을 흔드는 일대사건이었다. 왜냐하면 함양 사근역에서 아지발도군과 대치했던 우리군사가 대패하고 헐레벌떡 남원까지 쫒긴 가운데 의기양양한 왜구들이 파죽지세로 운봉까지 쳐들어와 분탕질 치다 슬그머니 인월로 물러나 장차 호남침공을 위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3)
민초(民草)들의 충혼(忠魂)이 고려사직 지탱
 
호남수부 전주(全州) 점령위해 왜구 호시탐탐
함양전(咸陽戰)서 아군 대패... 명장 이성계(李成桂) 급파
 
 
함양(咸陽)에서의 혈전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침략은 왕조의 흥망을 가르는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 중 아지발도의 대거침략은 사직을 흔드는 일대사건이었다. 왜냐하면 함양 사근역에서 아지발도군과 대치했던 우리군사가 대패하고 헐레벌떡 남원까지 쫒긴 가운데 의기양양한 왜구들이 파죽지세로 운봉까지 쳐들어와 분탕질 치다 슬그머니 인월로 물러나 장차 호남침공을 위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호남을 저들에게 빼앗긴다면 고려의 노른자위를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영남 일대를 노략질을 할대로 다하고 이제는 호남의 목까지 조르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 처한 허약한 고려 조정은 실로 바람 앞의 등불 바로 그것이었다. 고려조정은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그동안 아껴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계해 오던 명장 이성계를 급파하는 극약처방을 내리게 된다. 떠오르던 별이었던 이성계의 출정은 말하자면 명재경각에 달린 환자를 위해 명의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조정이 이에 거는 기대는 큰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이성계가 급파되기 전에 함양사근산성에서 벌어졌던 피아간의 피나는 전투, 그 부끄러운 패전의 역사를 반드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혈계(血溪) 이룬 사근역(沙斤驛)전투
 
예부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서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군사요지는 인월 팔랑재였다. 남원은 고래로부터 5소경의 하나여서 남쪽지방의 대도시였고 지리산은 남녘의 동서를 한 몸에 어우르는 큰 산이었기 때문에 이의 중요성은 더욱 컸던 것이 다. 또한 이 지역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우리 조정을 항상 귀찮게 해 오고 있었다. 이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입은 말 할 것도 없이 곡창 호남을 약탈하려는 목적이었고 그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호남의 수부인 전주를 점령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목표였을 것이었다. 사실 전쟁은 곧 속임수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함양에서 팔랑재를 넘어 일단 운봉고원을 점거한 왜구들이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를 치리라고 호언장담하였다는 말은 믿을 수 없고 실은 그 앙큼한 시선의 속셈은 전주를 향해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다. 어찌됐든 이때 당시 삼도원수 배극렴 등 아홉 장수는 함양 사근역(경남 함양군 수동면 소재)에 머물고 있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이미 사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고 또 한 부대는 냇물 건너 작은 산에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는 독안에 든 쥐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이와 같은 우리 측 작전을 미리 간파해 좌우협공을 피할 방도를 이미 세운 후 그들 대부분의 병력을 숨긴 채 일부병력만을 노출시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며 높은 산성에 자리한 우리 군사를 이리저리 유인하는 꾀를 썼다. 자만에 차 있던 우리 측 군사들은 그러한 왜구들의 유인작전에 속아 무공만을 내세운 채 교만하고 성급하게 군사를 내어 적이 있는 사근역 동쪽 3km쯤까지 바짝 다가가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아무리 힘센 사자도 작은 생쥐 한 마리를 잡기위해 온 힘을 들이는 법인데 숫자만 믿고 저들을 얕잡아 본채 ‘때는 이때다’ 하며 “우” 하며 몰려든 우리 측의 군사 행동은 그러한 기본적인 원리마저 망각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에서 승자가 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전투의 명분이야 천만번 옳다고 하더라도 전술과 전략에서 지면 그 전쟁의 결과는 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사근역의 전투는 바로 그러한 전투의 기본적인 성격을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협공을 당한 우리 군사는 피아간의 공방에 살상도 컸으나 당시 출전했던 아홉 명 중 원수 박승경과 백업이 전사하고 군사도 오백 명이나 희생되는 대패大敗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함양 사근역 앞 냇물을 혈계血溪라 불러오고 있다.
 
 
늙기 전에 씻을 부끄러움
 
역사는 흥망의 점철이며 그 흥망의 뒤에는 성패를 판가름하는 전쟁이 있기 때문에 결국 인류의 역사는 한편 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창이 찌르면 방패가 막고 피아간 서로 쫒고 쫒기는 중에 성패는 가늠되며 이로 인해 흥망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되는 모진 바람 속에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가냘픈 등불과 같은 고려의 사직은 어찌 그리 모질게도 꺼지지 않고 나름대로 흥망의 수를 고스란히 지켜 내었던가. 옛말에 ‘한 장수에게 빛나는 공은 곧 수많은 목숨의 희생일 뿐이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는 말이 있다. 수 백 년이 지난 지금 사근역 앞 피 냇물을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게 하는 구절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무자비한 섬 도둑떼들의 침략에 맞서 힘껏 싸우다가 죽어 간 이름 모를 우리의 충혼들이야말로 고려의 사직을 건져낸 원천적인 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민초들의 투쟁은 역사가 계속 되는 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귀중한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흔히 역사는 승자에게는 자랑거리이거나 패자에게는 부끄러움이 되기 때문에 되도록 부끄러운 역사를 들춰 말하는 일을 꺼리는 것이 인지상정 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패망의 역사를 굳이 숨기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로 접어든 오늘의 이 시점에서 기필코 일본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것이 지상의 명제로 되어 잇는 한 오히려 그때의 부끄러웠던 역사를 되짚어 봄으로써 우리를 일깨우는 하나의 좋은 거울로 여기는 지혜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귀중한 역사의 현장인 사근역 앞의 혈계를 잘 가꾸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이자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항상 우리일 수밖에 없다’는 변할 수 없는 이치를 생각하면서 그날 그런 일이 있었던 그 무렵에 이미 기록으로 남겼던 이첨의 사근역 시(동국여지승람제31권)를 보며 역사를 되돌아보는 우리의 정서를 세삼 가다듬을 자세를 찾아야 할 때이다.
 
 
雲峰山下秋風草 (운봉산하추풍초)
운봉산 밑에는 가을바람이 이르고
日淡天寒木葉枯 (일담천한목엽고)
햇살 엷고 추우니 나뭇잎도 마른다
是時島夷敗我軍 (시시도이패아군)
이때에 우리군사 섬 오랑케에 패하여
血戰咸陽原上草 (혈전함양원상초)
피를 함양 언덕 풀에 뿌렸네
兩府元師陣前亡 (양부원사방전망)
두 원수가 진 앞에서 죽었으니
士卒儆軀難自保 (토졸경구난자보)
하찮은 군졸이야 말 할 수 없었겠지
悲歌數聲大夫溟 (비애수성대부명)
슬픈 피리 두어 곡에 눈물지으며
誓雪國恥及未老 (서설국치이내노)
늙기 전에 부끄러움 씻기를 맹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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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